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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나는 아직 괜찮아 지면기사
우연히 마주친 '구남친' 환한 웃음옛 추억 떠올리며 웃은 이유 골몰문득 낡은 유선 이어폰 보며 확신시간 지날수록 민망함만 앞서다가'MZ 트렌드' 말 듣고 당당함 찾아구남친도 여러 종류다. 어떤 구남친은 우연히 마주쳤을 때 웃으면서 묵은 안부를 나눌 수 있고, 어떤 구남친은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쉬워 맥주 한잔 할 수도 있다. 또 어떤 구남친은 남편이 되었고, 어떤 구남친은 마주치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수도 있겠지.얼마 전 우연히 길에서 구남친과 마주쳤다. 안부를 나눌 사이는 아니고, 차 한잔할 사이는 더욱 아니고, 그렇다고 못 볼 것 본 사람처럼 홱 야멸치게 돌아설 사이도 아니어서 나는 잠깐 망설였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아, 뭘 이렇게 마주쳐… 못 알아본 척할까, 하는 사이에 그가 먼저 환하게 웃어주었다. 얼결에 따라 웃었다. 인사까지 나누지는 않았다. 길을 건너던 중이었으므로 우리는 서로 가던 길을 갔다.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우리가 이렇게 환하게 웃어줄 사이였나? 우리의 마지막이 어땠더라? 도대체 몇 년 만에 만난 거지? 돌이켜 보니 우리는 그냥 모르는 척, 못 본 척 정도가 어울렸을 것 같았다. 격하게 연애했던 사이도 아니고, 피 터지게 싸우며 헤어진 것도 아닌, 어쩌다 만나고 어쩌다 헤어진, 조금은 흐리멍덩한 사이. 굳이 이렇게 햇살도 눈부신 오후, 뿌리 염색 시기를 놓쳐 희끗해진 머리카락을 하고, 대충 차려 입은 모양새로 강의를 가다가 만날 것까진 아니었는데. 그냥 젊었던 시절로 기억에 남는 편이 나았을 텐데. 하지만 그쪽이 먼저 웃어줬잖아. 그것도 아주 환하게. 그러니까 나도 웃는 게 맞았어. 그렇게 어색하고 민망한 재회는 아니었던 거야. 그딴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나는 계속 걸었다.그런데 강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것 때문이었을 수도 있어. 내 이어폰. 치렁치렁 줄을 늘어뜨린 내 낡은 유선 이어폰! 촌스러운 것이라면 질색하던 그쪽이 그 이어폰을 본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 쟤는 저런 구식 이어폰을 여태 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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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상황의 반전 지면기사
육아·집안일·과외교사 힘든 시절하루라도 딸들없이 자유 원했지만이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현재 연로한 친정엄마 보살피는중내게도 언젠가는… 겸손을 배운다내가 결혼한 해인 1988년에 시어머니는 55세였다. 그해 시어머니의 생일날이 되었을 때, 나는 백화점에서 미리 사 놓은 옷을 생일 선물로 드렸다. 할머니가 입을 법한 디자인의 흰 스웨터였다. 시어머니는 그 옷을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시누이가 옆에서, 이건 할머니들이 입는 옷이라고 조심스레 말했다. 시어머니는 할머니가 아니니 옷을 잘못 샀다는 뜻이었다.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없어 나도 모르게 "어머님이 할머니시잖아요"라고 말해 버렸다. 해선 안 될 말이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어린 외손자가 있어서인지 내 눈엔 영락없이 노인이었다. 아니 20대 며느리였던 나의 눈에는 50대들이 다 늙어 보였으리라. 시어머니는 노인 옷이라며 흰 스웨터를 장롱 깊숙이 넣어 두셨다.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죄송할 따름이다. 50대라도 마음은 젊다는 것을 몰랐다. 노인 취급을 받는 게 기분 나쁘다는 것도 몰랐다. 난 철부지 새색시였다.그로부터 35년이 흘렀다. 35년 전의 시어머니보다 나이가 더 많은 나는 나를 노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최근 평균 수명이 길어지고 외모가 젊어진 것도 이유이지만, 그것보다 예전의 시어머니처럼 마음이 젊은 것이 더 큰 이유겠다. 난 청바지를 즐겨 입고 운동화를 즐겨 신고 발레를 배우러 다니며 젊게 산다.몇 년째 발레 학원에서 발레를 즐겁게 배우고 있다. 발레를 하면 몸을 유연하게 만들어 건강에 이롭고 몸매 관리에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발레를 하는 동안 내 나이를 잊고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나이가 더 들면 몸이 따라 주지 않아 발레를 하지 못할 것 같아서 발레를 하는 시간이 소중하게 여겨진다. 발레 선생이 나에게 스트레칭 자세가 많이 좋아졌다며 칭찬해 준 날이 있었다. 집에 와서 20대 작은딸에게 발레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하니 "그건 엄마가 발레 학원을 오래 다니게 하기 위한 립서비스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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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기도의 주어 지면기사
가을 나들이를 다녀왔다. 충북 음성에 있는 매괴고등학교에서 특강 요청이 들어왔을 때부터 내 머릿속에는 이 일대의 성당과 저수지를 돌아다닐 여행 일정이 펼쳐졌다. 강연을 마친 후 학교 옆에 있는 매괴성당으로 향했다. '매괴'는 장미꽃다발을 한자식으로 풀이한 것으로, 성모에게 바치는 묵주기도를 뜻한다. 내가 로사리오(묵주기도)를 처음 한 것이 언제였을까? 아마도 첫 영성체를 받은 초등학교 4학년 때일 것이다. 당시 우리 본당은 건물도 없어서 오랫동안 컨테이너 박스로 된 임시 건물에서 미사를 드렸다. 나는 '양력'과 다르게 흘러가는 두 시간대를 좋아했다. 하나는 농부인 큰아버지에게 유의미한 24절기가 인쇄되어 있는 달력이다. 농협에서 주는 달력에는 월력과 더불어 중요 절기가 따로 표기되어 있다. 또 하나는 성당에서 쓰는 그레고리력이다. 사순절, 부활절, 성모성월, 대림절과 대축일들로 흘러가는 그레고리력에 따라 신부님이 제대 위에서 입는 의복이 달라진다. 강력하게 흘러가는 일상의 시간, 학교에 가고 의무를 배우고 성적이 매겨지는 시간과는 또 다른 시간들을 나는 사랑했다. 그것은 물처럼 잡을 수 없는 시간 위에 띄우는 또 다른 부표로서, 일상이 다른 빛깔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난 내킬때만 성당 찾는 불량 신자지구 한쪽선 이해할 수 없는 전쟁감곡 매괴성당은 지은 지 100년이 넘은 유서 깊은 성당으로, 가을 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벽돌건물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산책길에는 사제서품을 받은 이듬해 한국에 와서 이 성당을 지은 '임 가밀로'라는 초대신부님의 가묘가 나온다. 안내문에는 문맹퇴치를 위해 학당을 세운 신부님의 공을 치하하여 고종황제가 태극기를 하사한 일,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자 태극기를 제대 속에 숨겨 놓고 지내다가 광복 후 음성에서 가장 먼저 태극기를 내걸었던 일화도 소개되어 있다.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긴 수염을 기른 푸른 눈의 사제이자 한 인간의 삶을 상상하니 아득해진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자라면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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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배론 성지의 가을 햇빛 지면기사
처음부터 배론 성지를 찾아가려는 것은 아니었다. 가을 햇빛이 너무 찬란하니, 어디든 떠나자 한 곳이 배론 성지였다. 제천의 의림지를 한 바퀴 돌면서 배론 성지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지라면 더욱 그 땅을 밟아보고 싶었다. 천천히 차를 몰아 배론 성지를 찾아 나섰다. 아직 산하는 푸르러 가을 정취가 깊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차창으로 보이는 산줄기에서 가을의 분위기가 번져왔다.송골매의 CD를 걸었다. '모두 다 사랑 하리'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를 시작으로 삼십여 곡을 다 들었다. 담백한 목소리가 좋았다. 기교 없이 흐느끼지 않고 흐르는 선율이 매력 있다. 차는 미끄러지듯 성지로 들어서고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경내를 둘러봤다. 고즈넉하다.1801년 순교한 황사영 토굴 초가집성직자 양성 천주교 첫 신학교 교사그는 교황 있는 서양 연결 꾀하기도우선 황사영의 토굴을 찾아갔다. 토굴은 깊지 않았다. 한 사람이 겨우 은거할 수 있는 크기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8개월 동안 토굴에 머물며 중국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간곡한 편지를 썼다. 편지는 명주 천으로 세필로 쓴 글자 수가 122행에 무려 11만3천여 자나 되었다. 그것이 황사영 백서다. 이 백서는 인사말, 신유박해의 진행과정, 순교자 열전,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안, 맺음말로 되어 있다. 백서는 주교에게 전달되기 전에 압수되었고 백서의 전달을 맡았던 토마스가 그 해 9월 배론에서 체포되어 1801년 11월5일 서소문 밖에서 대역부도의 죄로 능지처참 되었고 6일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아내 정난주(마리아)는 제주도로, 두 살 된 아들 황경환은 추자도로 귀양갔다. 황사영은 체포되어 그해 11월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백서는 현재 교황청선교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황사영 토굴이 있는 곳의 초가집은 우리나라 천주교 성직자 양성을 위한 첫 신학교인 성요셉 신학교의 교사였다. 1855년 초 성인 장주기(요셉)의 집에 설립된 요셉신학교에는 프랑스인 프레티에, 프티니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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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원 플러스 원 새송이버섯 지면기사
아홉 살 딸의 친구들은 놀이터에서 놀다 말고 군것질거리를 사러 편의점에 가는 모양이지만 우리 아이는 아직 그런 적이 없다. 편의점은 놀이터에서 아주 가깝지만 폭 좁은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엄마나 아빠 없이 길을 건너는 건 절대 금지라고 누누이 말한 터라 아이는 그래 본 적이 없는 거다. "그럼 친구들이 편의점 갈 때 너는 그냥 기다려?" 내가 물었을 때 아이가 대답했다. "진정한 친구들은 안 가. 내가 못 간다고 하면 나를 위해서 자기도 안 가는 거지. 하지만 나 보고 그냥 기다리라고 하면서 갔다 오는 친구들도 가끔 있어. 그래서 나도 요즘은 편의점에 가보고 싶기도 해. 진짜 재밌을 것 같거든." 아이의 표정은 아쉬워 보였다.나는 소심한 사람이라 아이들끼리 길 건너는 걸 두려워하고, 소심하지는 않지만 아이 아빠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제쯤 아이도 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닐까 고민하고는 있었다. "그럼 마트에 가면 안 돼? 마트도 놀이터랑 가깝고 길도 안 건너잖아." 놀이터 옆에는 편의점 말고 작은 마트도 한 곳 있다. "하지만 친구들이 마트는 별로 재미가 없대. 편의점이 재밌대. 그리고 친구들한테 마트 가자고 할 것까진 아닌 것 같아. 아빠가 아홉 살 어린이가 벌써 돈 쓰고 그러는 거 좋은 일은 아니라고 했어." 하긴, 편의점에는 동네 꼬마들이 좋아할 아이템들이 꽤 있다. 캐릭터 인형이 달린 사탕 반지나 젤리, 초콜릿 같은 것들 말이다. 부모없이 횡단보도 건너기 금지 당부친구들과 편의점 못 가본 아홉살 딸대신 마트 가기로 큰 결심했다는데 아이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침 메뉴는 아보카도를 얹은 토스트다. 버터 넣고 프라이팬에 지진 토스트에 아보카도 반 개를 잘라 얹고, 달걀 프라이와 오렌지 반 개, 그리고 새송이버섯 한 개를 얇게 썰어 구우면 그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 아보카도는 소금과 후추만 살짝 뿌려도 고소하고, 새송이버섯에다 오렌지 썬 걸 한 번에 입에 넣으면 식감이 아주 그만이다. 그런데 아침에 새송이버섯이 똑 떨어진 걸 모르고 있었다. 별수 없이 버섯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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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시기심과 쌤통 심리 지면기사
만약 당신이 직장 동료의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그것을 다른 동료들에게 말할 것인가? 당신이 배려심이 깊다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타인을 배려하는 자세는 사람으로서 꼭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그런데 남의 비밀을 오히려 들추는 데 혈안이 된 인물이 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빅튀르니앵 부인이다. 그녀는 공장에서 일하는 팡틴이라는 여성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는다. 빅튀르니앵 부인은 쉰여섯 살로 추녀이고, 팡틴은 젊고 아름다워서 주위에 시기하는 여자가 많다. 사람들은 팡틴이 다달이 몽페르메유의 여인숙으로 편지를 써 보내는 것을 알았고, 팡틴에게 어린애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를 수상히 여긴 빅튀르니앵 부인은 팡틴에게 어떤 비밀이 있는지를 밝히기 위해 자기 돈을 들여 멀리 있는 몽페르메유에 다녀오기까지 한다. 그 결과 빅튀르니앵 부인은 팡틴이 그곳의 여인숙 주인 부부에게 딸아이를 맡기고 양육비를 부치고 있는 미혼모라는 것을 알아냈고, 이 사실을 발설하며 즐거워한다. "35프랑이나 들여서 다 알아냈지요. 어린애도 봤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팡틴은 유일한 피붙이인 딸아이와 함께 살고 싶지만 양육비를 벌어야 했으므로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여운 인생을 사는 팡틴에게 연민을 느끼기는커녕 '타인의 불행은 나의 기쁨'이라도 되는 듯 그녀는 신바람이 난다. 우리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중자기보다 앞서 있는 사람 부러워 해 인간에게는 타인의 불행에 대해 동정하는 마음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남의 불행은 꿀맛이다'라는 일본 속담과 같이 남의 불행에 쾌재를 부르는 심보가 있기도 하다.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를 느끼는 것이다. 샤덴프로이데는 남의 불행을 고소해한다는 뜻을 가진 독일어다. 리처드 H. 스미스가 쓴 '쌤통의 심리학'(이영아 옮김)에서는 샤덴프로이데를 '쌤통 심리'로 번역했다. '쌤통의 심리학'은 부제가 말해 주듯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은밀한 본성에 관하여' 쓴 책이다. 이 책에서 읽은, 아리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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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유령작가의 기쁨 지면기사
연휴기간에 속초에 갔다가 마음에 드는 카페를 발견했다. 그 카페는 내가 머무는 집과 해변의 중간에 있어서 긴 문장의 한가운데 박힌 쉼표 같았다. 사거리 모퉁이의 가게는 크지 않지만 노란색과 주황색의 실내장식을 하고 있어 밝은 느낌을 주었다. 무엇보다 스피커가 훌륭하여 음악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커피가 맛있다. 나는 즉각 이 카페에 눌러앉기로, 그러니까 이곳에 머무는 동안 아침마다 들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아침 산책 이후 카페에서 책을 읽는 시간은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이 되었다. 두 면이 통창으로 된 이 카페는 어항 같았다. 12차선 도로가 정면에 있어 길 건너의 사람이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걸어와 건널목을 다 건너고 가게 옆으로 빙 돌아서 해변으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 나는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 사람들이 내 쪽으로 다가와 길가로 돌아가는 모습을 감상했다. 사람들은 해변으로 향하는 중이거나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중이라 그런지 독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치고 행복한, 설렘이 살짝 들어있는 표정. 유리 너머 보는 풍경이기 때문에 모두 스크린 속 배우들 같았다. 내마음의 쉼표 같은 속초의 카페여행중인 사람들 표정 보는 재미책속 문장까지 추출 살뜰한 독서 그러다 노란 테이블로 돌아와 - 이 카페의 단 하나뿐인 넓은 탁자- 내 노트와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마침 들고 온 책의 표지와 탁자가 똑같이 노란 색인 것이, 이 우연한 일치가 마음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줄 친 문장을 노트에 옮겨 적다가 문득 생각한다. 나는 필기 자체를 참 좋아한다고. 작업을 시작할 때 나는 우선 책을 읽고, 책 속에서 나의 마음을 건드렸던 문장을 펜으로 옮겨 적는다. 그러다가 떠오른 생각이 있으면 연필을 꺼내 구분하여 적는다. 노트에 필기하는 순간은 글을 쓰기 위한 예열 단계에 해당한다. 다이빙 선수가 수영복을 입고 실내로 들어와 준비운동을 한 다음에 다이빙대에 올라가 하나 둘 셋, 바를 튕기고 마침내 입수! 하기 전까지 거치는 단계라고 할까. 줄 친 문장을 옮겨 적으면 원석 가운데 빛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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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안동 병산서원의 배롱꽃 지면기사
매년 안동 병산서원을 찾는다. 병산서원은 사적 제 260호로 지정된 문화재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비포장도로다. 부분적으로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스팔트길이 아닌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높지 않은 산줄기들과 낙동강 상류의 휘돌아나가는 모습이 여유롭고 정겹다.병산서원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0번지에 자리 잡고 있다. 병산서원은 고려시대부터 존재했던 교육기관이었다. 얼마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병산서원은 서애 유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서원이다. 1978년 3월31일 사적 제260호에 지정되고, 2010년 7월31일과 2019년 7월10일 각각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문화재청은 2010년 6월 안동 병산서원을 포함한 하회마을 일대와 양동마을 일대를 한국의 역사마을로 지정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를 신청했다. 그 결과 2010년 7월 31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성룡의 학문·업적 기리는 서원정문 복례문 넘으면 고고한 모습웅장함에 저절로 옷 매무새 고쳐연못에 그늘 드리우는 배롱나무낙화된 꽃잎들 아름다움에 황홀"유성룡을 파직시키라." 조선 14대 임금 선조에게서 이런 말이 나온 것은 1598년 11월19일의 일이었다. 임진왜란을 겪고 있는 중 영의정으로서 국난 수습에 앞장섰던 이름 난 재상 유성룡은, 전란이 끝나갈 무렵 북인들의 정치적 음해와 공격에 한 달 넘게 고초를 겪으며 수세에 몰려 있었다. 계속되는 상소를 견디다 못한 선조는 유성룡 축출을 명했던 것이다. 유성룡은 일본군이 철수했다는 기쁜 소식을 듣기도 전에 재상이라는 관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같은 날인 1598년 11월19일, 남해 해전에서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 백성들이 가슴을 치는 일이 벌어졌다. 임진왜란 최후의 해전으로 퇴각하는 일본군에게 엄청난 타격을 줘 노량해전을 대승으로 이끈 이순신 장군이 전투 중 전사한 것이다. 파직당해 낙향할 처지에 있던 유성룡은 절친한 사이로 함께 국난 극복을 위해 온 몸을 던진 이순신의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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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다음 중 김치의 재료가 아닌 것은? 지면기사
엄마가 택배로 김치를 보냈다. 한 통은 배추김치, 나머지 한 통은 열무김치. 내가 불러주는 맞춤법 퀴즈를 풀던 아홉 살 딸아이는 김치 때문에 퀴즈가 멈춰 골이 났다. '해도지'가 아닌 '해돋이', '낭떨어지'가 아닌 '낭떠러지', 그런 퀴즈가 요즘 세상에서 제일 재미나단다. 나는 쉬운 문제만 골라낸다. 행여 한 문제라도 틀리면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고 입술을 삐죽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날 내는 문제만 내주어서 수십 번 퀴즈를 풀어도 아이의 맞춤법 실력은 별 발전이 없다. 이걸 왜 저녁마다 하고 있는지 나도 모를 지경이니 말이다. "엄마가 웃긴 얘기 하나 해줄까?" 김치통을 보고 떠오른 이야기가 있었다. 아이가 눈을 반짝였다.요즈음 학교 분위기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어릴 적엔 한 학교에 한두 명쯤 유별난 우등생이 있었다. 좋게 말해 우등생이지, 시험 때만 되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선 한 문제라도 틀릴라치면 악을 빽빽 쓰고 시험지를 찢어발기고 온 반 아이들을 정신 사납게 하는 그런 아이 말이다. 도대체 시험이 뭐라고, 시험 문제지 걷어가자마자 서랍 속 참고서 우다다다 뒤져서 정답 찾아보고, 틀렸다 싶으면 세상 떠나가라 울어젖히는 못 말리는 진상.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내가 바로 그런 애였다. 진심이다. 중학교 시절, 나는 평소에는 멀쩡했다. 잘 놀고 잘 웃고 친구들과 잘 지냈다. 친구들의 연애편지도 대필해주고, 그 공으로 바나나우유도 얻어먹었다. 쉬는시간엔 함께 도시락을 까먹고 점심시간엔 친구들과 매점으로 달려가 보름달 빵을 사먹던 평범한 열다섯 살, 중학교 1학년. 그런 내가 시험 때만 되면 돌변했다. 전교 1등을 놓치면 죽는 줄 알았던 나는 한 문제라도 틀리면 문제집을 다 찢어버리고 쓰레기통에 처박은 후 눈물콧물 다 쏟으며 법석을 떨었다. 친구들이고 선생님들이고 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중간고사 가정 시험이었다. '다음 중 김치의 재료가 아닌 것은?'이라는 문제였고, 나에게는 답이 보이지 않았다. 네 개 모두 김치에 들어가는 재료였다. 아마도 마늘, 생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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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재물과 행불행 지면기사
부유하지만 근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안톤 체호프의 단편소설 '검은 수사'에 나오는 예고르 세묘니치다. 그는 크고 아름다운 정원을 갖고 있다. 나이 든 그는 집에 놀러온 젊은 코브린에게 정원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지금 자네가 보고 있는 이런 모습은 나 없이는 단 한 달도 유지되지 못할 걸세. 이 정원이 성공을 거둔 까닭은 엄청나게 크고 일꾼이 많아서가 아니라네. 성공의 진짜 비밀은 내가 이 일을 사랑한다는 데 있단 말일세"라고. 그리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접붙이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하고 묘목도 심고 모든 걸 자기가 한다면서, "내가 죽으면 누가 그걸 다 돌볼까? 누가 일을 할까?"하고 걱정을 한다.미셸 드 몽테뉴의 책 '에세'에는 돈을 갖게 된 때 근심을 가졌던 이야기가 나온다. 여행을 갈 때면 돈 가방 때문에 짐꾼들이 믿을 만한지 걱정되고, 돈 가방이 눈앞에 없으면 안심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돈궤를 집에 두고 오면 항상 그쪽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며, 돈을 버는 것보다 돈을 지키는 것이 더 힘들다고 몽테뉴는 썼다. 우리 주위에도 부유하나 행복해 보이지 않는 이가 얼마든지 있다. 내가 지인한테서 들은 70대 할머니는 여러 가구가 세 들어 살고 있는 다세대 주택을 갖고 있었다. 계약보증금은 싸지만 월세가 비쌌기에 짭짤하게 재미를 보았다. 그런데 경기가 침체되면서 월세를 몇 달 내지 못하는 세입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세입자들과 다툼이 일어나 속을 끓이는 일이 잦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돌연사했다. 소문에 따르면 노인은 젊은 시절부터 악착같이 돈을 모아 몇 년 전 건물을 샀다. 건물을 산 뒤에도 구두쇠였던 노인은 비싼 음식을 사 먹지 않았고, 비싼 옷을 사 입지 않았다. 그는 어쩌면 돈의 노예로 살다가 생을 마감한 불행한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위의 세 가지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재물은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고 마음에 그늘이 지게 만들기도 한다. 부자일수록 근심은 더 많다는 속담이 있다. 부자는 아무 근심도 없는 것 같지만 그 생활 속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가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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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나라는 박물관의 관람객 지면기사
일주일간 대대적인 '집 안 이사'가 있었다. 원래는 딸의 방을 새로 만들어주려는 이유였는데, 그러다보니 함께 쓰던 공부방을 분리하고 남편의 취미 방을 처분하고 내 서재를 독립해나가는 식으로 일이 커졌다. 끝나고 보니 방 세 개의 모든 가구가 재배치되는, 방들끼리 이사를 다니는 고된 작업이었다. 이참에 오래된 물건도 솎아내고 묵은 먼지도 털어 내다보니 모든 것이 정리되는데 일주일이나 걸렸다. 서재에 앉아 있으니 감회가 새롭다. 딸이 태어난 후 십 년만에 온전한 서재를 되돌려 받게 된 셈이었으니까. 책장을 정리하면서 나만의 버릇대로 '심장' 칸을 하나 만들었다. 책장 한 가운데를 비우고, 그 안에 가장 좋아하는 '경전' 몇 권을 가져다 놓는 것이다. 거실 벽을 책장으로 채울 때 만들어본 방법인데 이렇게 한복판을 비워두고 평생 읽을 보물 같은 책들을 채우면 책장 전체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느껴진다. 자동차로 치면 엔진룸에 해당한다고 할까? 거실의 심장 칸에는 '돈키호테'와 '모비딕', '보르헤스 단편집'과 '빌러비드' 등이 있고 그 위쪽으로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이 있다. 서재의 심장에는 무엇을 넣어둘까? 나는 즐거운 고민에 빠져 일단 전집에서 '안나 카레리나' 세 권을 가져다 넣어두었다.(이 글을 쓰다말고 일어나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집'도 추가했다.) 서재 심장엔 '안나 카레리나' 세권한쪽엔 습작·편지 등 '인생 기념품' 여섯 개의 책꽂이로 둘러싸인 책상은 견고한 성채처럼 보인다. 큰 책상에 대한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 결혼하면서 6인용 탁자 두 개를 사서 하나는 책상으로, 하나는 식탁으로 쓰고 있다. 이 커다란 짐승 같은 탁자를 책상으로 길들이기 위해 두꺼운 옥스포드 천을 깔고 몇 개의 '성물'을 늘어놓았다. 자주 쓰는 파일꽂이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 필기구와 핸드크림이 꽂힌 도자기통, 나침반이 그려진 문진과 향초 등등이다. 이것들을 하나씩 내려놓고 있으려니 정찬을 준비하는 집사 같다. 달리보면 나만이 유일한 요리사요 손님이지만 이제부터 이 책상에서 쓰게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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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18세기 조선 문단의 이단아 이옥 지면기사
이옥(李鈺, 1760~1813)은 경기도 화성 출신으로 조선 후기의 시인이다. 효령대군의 후손이었으나 서얼이었다.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가선대부 호위별장 이만림이고, 할아버지는 어모장군 행용양위부사과를 지낸 이동윤이며, 아버지는 이상오이고, 어머니는 남양홍씨로, 이성현감 홍이석의 딸이다. 실학자 유득공은 이모의 아들로, 이종 사촌형이 된다.그는 18세기 조선 문단의 이단아였다. 정조는 선비들의 기풍을 바로잡겠다는 생각을 하고 문체반정을 통해 대대적인 문장개혁을 실시했다. 당대의 문장가들인 박지원이나 이덕무, 박제가도 반성문 제출을 왕으로부터 요구받았다.이옥은 문체반정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과거시험 자격이 여러 차례 제한되기도 하고 멀리 기장까지 쫓겨나 군인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그의 불경스럽고 불온한 문체가 늘 말썽이었다.정조, 선비기풍 잡으려 '문장개혁'불온한 문체로 왕의 미움받은 이옥 그는 왕의 미움을 받고 고향으로 쫓겨 내려가면서도 부지런히 글을 썼다. 예컨대 남정십편(南程十篇) 등이 그것인데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보고 들은 것들 열 편을 쓴 것으로 반성의 기색은 찾아볼 수 없고 불경스럽고 해괴한 내용들이었다.이옥의 생애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어려서의 이름이 기상이며 호는 경금자(絅錦子)라고 썼다. 별볼일 없는 무반의 후손으로 당색은 당시 몰락의 길을 가던 북인 계열이었다. 그의 문집은 제대로 수습되지 못해 필사본이 여기저기서 발견되기도 했다. 그것들을 2009년 휴머니스트 출판사에서 다섯 권의 전집으로 묶어 출판했다. 그의 복권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할 만한 분위기다.그는 시인이면서도 시는 자신이 짓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그대의 '이언'은 무엇 하고자 지은 것인가? 어째서 국풍이나 악부나 사곡을 짓지 아니하고 굳이 이언을 지었소?" 이언은 네 여성의 삶을 서로 다른 가락으로 노래한 그의 시다. "내가 한 게 아니라오. 주재자가 그렇게 시킨 것이라오."이 질문은 처음부터 '이걸 시라고 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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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조금 다정한 노후 대책 지면기사
"인생이 꾸꾸무리하다." 밤늦게 전화를 걸어온 선배의 말에 나는 푸푸 웃었다. "왜요?" 내가 묻자 그냥 한숨이다. 들어보니 회사 옆자리 동료가 퇴사를 했단다. 그게 뭐라고, 회사 생활 어언 25년 가까이 한 사람이 고작 동료의 퇴사에 울적해졌다니. "내 또래거든. 이제 더는 다른 회사에 들어가긴 힘들다는 말이잖아. 인생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퇴사라는 거지." 아, 나는 짧게 탄식했다. "이젠 같이 밥 먹을 사람도 없어. 아무도 나와 놀아주지 않아." 그럴 테다. 점심시간에 제일 먼저 부장님에게 무얼 드실 건지 물어보는 사람은 이제 더 없고 퇴근길, 한잔할까? 하는 부장님의 말에 알겠습니다! 하고 벌떡 일어나는 사람도 이제는 없다. 그런 자세를 가진 사람은 이제 다 부장님이 되었거나 퇴사했다. 부장님은 혼자 놀아야 한다. 그래서 외로운 부장님에게 내가 말했다. "목요일마다 그림 모임 안 할래요? 생초보들 모여서 노닥노닥 얘기 나누면서 그림 그리기로 했거든." 태풍이 온다던 날이었다. 폭염에 지쳤다가 비 오기 전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자 나는 창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림 모임 같은 것 해보면 어떨까, 생각이 난 것이었다. 늘 그랬듯 나는 즉흥적인 사람이라 꼼꼼한 계획 같은 건 세우지도 않고 페이스북에 짧은 알림 글을 올렸다. 뭐 대단히 예술 하는 거 말고, 소소하게 그림 그리다가 사는 이야기나 조잘조잘 나누고, 두어 달 그리다 보면 완성작도 모일 거고, 그러면 조그마한 동네 갤러리 같은 데 대관해서 전시회도 해보는 거 어때요? 하고 말이다. 그림이라는 게 말이 쉽지 한 번도 안 그려본 사람투성이일 텐데 사람들이 모이겠어? 생각했지만 순식간에 여덟 명이 모였다. 정말 순식간이었다.동료 퇴사에 울적해하던 직장인 선배외로운 부장님께 초보 그림모임 권유이유는 할머니 됐을때 행복하려고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색연필, 물감 등을 가득 펼쳐놓고 일을 벌이기엔 장소가 마땅찮았으므로 우리는 아이패드만 챙기기로 했다. 그림 선생님도 없고, 그러니까 무얼 배우려고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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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선행과 이로움 지면기사
'자네가 말하는 그 착한 일들을 실천하는 이유도, 알고 보면 쾌락 때문이야.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에게 이롭기 때문이지. (중략) 자네가 거지에게 동냥을 하면 그건 자네 자신의 쾌락을 위한 거야. 내가 위스키 소다를 또 한 잔 마시는 게 나 자신의 쾌락을 위한 것이나 같아'.- 서머싯 몸, '인간의 굴레에서' 중 소설 '인간의 굴레에서'를 읽다가 이 글을 만났다. 주인공 필립에게 시인 크론쇼가 한 말이다. 필립이 쾌락이라는 표현에 반감을 나타내자 크론쇼는 '행복'이라 하지 않고 '쾌락'이란 말을 사용하겠다며 그 이유는 쾌락이 사람의 목표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쾌락을 최고선으로 여겼던 철학자 에피쿠로스를 상기시킨다. 우리 인간이 착한 일들을 실천하는 이유가 쾌락 때문이고, 그것이 자신에게 이롭기 때문이라는 말에 나는 동의한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던가. 악행은 물론이고 선행조차도 쾌락이라는 이로움 때문에 한다. 쾌락을 즐거움이나 기쁨이나 또는 흐뭇함으로 바꿔 말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지인에게 생일 선물을 주었다면 그것이 즐거워서다.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서다. 구걸하는 거지에게 돈을 주었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본인의 기분이 좋아져서다. 불우이웃을 위해 기부금을 냈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본인의 기분이 좋아져서다. 착한일 실천하는 이유는 쾌락때문거지에 돈주는 건 기분 좋아져서다 이번엔 자원봉사자들이 홍수로 침수된 지역에서 피해 복구를 도우며 고생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들에겐 어떤 이로움이 있을까? 일례로 흐뭇함이라는 이로움이 있을 수 있다. 자원봉사자들을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을 듯싶다. 하나는 힘들지만 봉사 활동을 하면서 그 자체로 흐뭇함을 느끼는 부류다. 또 하나는 힘들지만 봉사 활동이 끝난 뒤에 흐뭇함을 느끼는 부류다. 마치 집안 청소를 마친 후 흐뭇함을 느끼듯이 말이다. 혹자는 자신이 하고 싶어서 봉사를 하는 것이니, 자원봉사자들에게 고마워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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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인생의 슬픔 지면기사
나는 상대적으로 명랑한 사람이다. 그건 우리 엄마의 뱃속에 입장하기 전에 내가 타고 있던 구름이 유난히 푹신푹신하고 경박한 물방울 씨앗을 품었던 탓이 아닐까. 말도 많고 호기심도 많고 뛰어다니기 좋아하던 유년시절에서 출발해 여전히 말도 많고 호기심도 많고 자전거타기를 좋아하는 중년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생각한다. 인간의 생애는 왜 이렇게 슬픔이 가득할까! 도서관 한 귀퉁이에 앉아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손녀의 짧은 여행을 그린 그래픽노블을 보다가 문득 비애감에 물들었다. 책 속의 인물들이 겪는 고통은 너무나 보편적인 일이었기에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 그러자 어젯밤 엄마와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난밤 엄마와 나눈 이야기 떠올라이른 나이 세상 떠난 새롬이 아줌마아들에 남편마저 잃은 젬마 아줌마 엄마의 친구들, 그 중에서도 세상을 떠난 세 아주머니들이 갑자기 대화의 중심이 되었다. 첫 번째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산 새롬이 아줌마. 호리호리한 몸피와 활기 넘치는 목소리. 이분은 예쁘고 세련된 외모에 위트가 넘치고 취향이 고상했다. 그때만 해도 아파트 화단을 파서 김장독을 묻던 일이 허용된 터라 엄마가 항아리에서 김장김치를 꺼내면 아줌마가 지나가다 한쪽씩 얻어가던 기억이 난다. 엄마 친구지만 내 친구이기도 해서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오 분이나 십 분씩 대화를 나누었다(엄마 친구 중 단독으로 대화가 '통하던' 분이다). 이렇게 빛나던 새롬이 아줌마는 이혼 후에 가난으로 고생하다 이른 나이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아주머니는 두꺼운 겨울옷이 없어 중학생 아들의 남자용 파카를 입고 있었다. 언젠가 엄마는 노래방 테이프에서(그때는 노래방에서 부른 노래를 테이프에 녹음해주는 서비스가 있었는데) 새롬이 아줌마의 목소리가 나와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아줌마의 평소 인상과 달리 노래 목소리는 비통했다. 이것이 사실인지 엄마의 해석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고인이 된 지 십수 년이 지난 뒤 재생되어 나오는 그 노래를 떠올려보았다. 두 번째는 젬마 아줌마. 엄마와 성당 레지오를 함께 하며 단짝으로 지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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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샛별 같았던 박제가 지면기사
박제가(1750~1805)는 아버지 박평과 어머니 전주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출신이다. 어릴 때부터 글을 좋아해서 읽은 책은 세 번씩 베껴 썼고 언제나 붓을 물고 있다가 글을 쓰는 것이 습관이었다. '내가 글을 처음 배운 것은 젖을 먹을 때였지'라는 시구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아버지 박평은 서자이기는 하지만 만년에 얻은 그에게 각별한 정을 주었다. 본가에서 다른 자식들과 함께 생활하게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던 아버지가 열한 살 때 죽고 한성부의 본가에서 나오게 되면서 거처를 자주 옮겨 다니는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과부로 가난하게 살면서 십여 년 동안 좋은 옷을 입어보지 못하고 좋은 음식을 먹어보지 못하고 밤을 새워 삯바느질을 해서 아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박제가와 교류하는 사람들 중에는 세상에 많이 알려진 사람이 많았는데 어머니는 가끔 그들을 초청해서 주안상을 차려 극진하게 대접했다. 그의 집에 다녀온 사람들은 후한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집안 형편이 그처럼 빈한한지를 몰랐다. 그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그처럼 컸던 것이다.서자로 신분·사람 차별하지 않는박지원 문하에서 많은 인물 교류자기 주장 강하고 굽힘이 없었다 박제가는 청년기에 우연한 기회에 박지원의 문하에 들어 교류하게 된다. 세상에 눈뜨게 되면서 사회적 천대와 멸시, 그리고 양반제도의 모순에 회의와 불만을 갖게 된다. 이때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 여러 실학자들을 만나게 된다. 이덕무와는 절친한 벗으로 평생을 함께한다. 신분과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박지원 문하에서 여러 동료들을 만나게 되었고 이때 교류하던 인물들 중에 홍대용은 후일 박제가의 문하생이 되는 김정희의 장인 홍담용의 사촌간이 된다. 그는 늘 고민이 많았다. 장인 이관상과 사람을 가리지 않는 박지원의 배려로 전통적인 양반교육을 받았지만 서자라는 신분적인 제약으로 사회적인 차별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봉건적인 신분제도에 반대하는 사상이 뿌리 깊었다. 남인인 정약용과 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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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소풍길 지면기사
아홉 살 딸아이가 같은 반 친구에게서 생일 파티 초대장을 받았다. 그런데 거절했단다. 못 간다고 했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화들짝 놀라 왜 거절했냐 물었더니 그 시간에 태권도장과 피아노 학원을 가야 하는데 어떻게 생일 파티에 가느냐는 거였다. "아니, 그깟 학원이 뭐라고. 빠지고 다녀 와!" 그랬더니 아이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졌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인 줄 알았단다. 그러고 보니 아이는 친구 생일 파티에 가는 것이 처음이다. 제 생일에도 친구를 초대해본 적 없다. 그렇구나, 코로나 세대구나. 아이를 데리고 동네 문구점엘 갔다. 생일 선물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아이는 쇼핑 바구니를 들고 이것저것 담기 시작했다. 친구에게 귓속말로 어떤 선물을 받고 싶냐 물었을 때 슬라임이라 대답했단다. 그래서 슬라임 한 통 담고, 산리오 캐릭터가 그려진 필통도 담고, 천원짜리 작은 수첩과 지우개도 담았다. 민트색 포장지도 골랐다. 집에 와서는 서랍을 뒤져 마스킹 테이프를 꺼내고 아끼던 스티커도 꺼내 선물을 잔뜩 꾸몄다. 파티 전날 밤, 아이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너무너무 설레고 가슴이 뛰어 불을 끄고도 한참이나 종알거렸다.우리가 사는 동네는 신축 아파트 단지다. 그래서 딸아이와 딸 친구들이 아는 '집의 형태'는 총 세 가지다. 아파트와, 아파트가 지어질 때 함께 들어선 빌라, 그리고 아파트 둘레길을 따라 지어진 상가건물(아이들은 이걸 '빌딩'이라 부른다). 딸아이는 이제 처음으로 '빌딩'에 사는 친구네에 가는 거다. 빌딩 안 집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아이는 궁금해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사람 사는 덴 어디나 다 비슷비슷해." 엄마의 그런 말은 아이에게 소용이 없었다. 같은 반 친구 생일파티 초대받은 딸잔뜩 산 선물 꾸미며 '설레는 모습' 비가 오면 친구네 엄마가 차를 가져와 아이들을 데려간다 했지만, 비가 안 오면 친구 따라 손잡고 길 건너 '빌딩'으로 가기로 했다. 생일날 아침, 날씨는 맑다. 엄마와 아빠 없이 횡단보도를 처음 건너보게 된 것이다. 아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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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관리의 죽음'이 주는 교훈 지면기사
회계원 체르뱌코프는 객석 두 번째 줄에 앉아 오페라 공연을 보면서 행복의 절정에 다다른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 갑자기 재채기를 하여 주위를 둘러봤다. 첫 번째 줄에 앉은 노인이 자신의 대머리와 목을 장갑으로 닦으며 투덜거리는 것을 보고 그 노인에게 침이 튀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노인은 다른 부서의 브리잘로프 장군이었다. 그는 앞으로 몸을 숙이고 장군의 귀에 "용서하세요 각하. 제가 침을 튀겼군요. 본의가 아니었습니다만…"이라고 속삭였다. 장군은 괜찮다고 했다. 휴식 시간에 그는 장군에게 용서를 해 달라고 더듬더듬 말했고 장군은 "허, 정말… 나는 벌써 잊어버렸다니까. 아직도 그 얘기요!"라고 말했다. 그는 '잊어버렸다고 하지만 눈에는 원한이 담겨 있는 걸' 하고 생각했다.집에 돌아온 그는 브리잘로프 장군이 화가 풀리지 않은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장군을 찾아가 재채기에 대해 해명했으나 장군은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결국 다음날 장군을 또 찾아가 사과의 말을 했다. 장군은 "꺼져!" 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그는 공포에 질려 속삭이듯 "뭐라고요?"라고 물었고, 장군은 "꺼지라니까!" 하고 발을 구르며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의 뱃속에서 무언가가 터져 버렸다. 그는 집에 돌아와 관복을 벗지 않은 채 소파에 누웠다. 그리고 죽었다. 여기까지가 안톤 체호프의 단편소설 '관리의 죽음'의 내용이다.소설 속 주인공 체르뱌코프는 상관의 위압적인 고함 소리에 심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숨지고 만다. 이처럼 마음의 병으로도 숨이 끊어질 만큼 우리 인간은 나약한 존재다. 재채기 같은 사소한 일로도 불행해질 만큼 우리 인간은 가련한 존재다. 그러므로 인간은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 상관 고함에 주인공이 숨지는 비극자기실수 집착… 불행으로 이어져 체르뱌코프는 왜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되었는지 살펴보자. 브리잘로프 장군은 체르뱌코프가 진심을 담아 사과를 하려는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그의 거듭되는 사과에 분노가 치밀었다. 체르뱌코프는 장군이 자기의 사과를 받아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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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인간이라는 녹음기 지면기사
오랜만에 소설가 친구와 저녁 약속이 생겼다. 산책하다 골목 안쪽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막걸리도 한 병 곁들여 사는 안부와 소설 안부를 두루 묻다보니 음식이 나왔다. 밥술을 다 뜨고 마지막 잔을 먹는데 주인 할머니가 다가와 여덟 시에 식당 문을 닫는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괜찮다, 다 먹었다고 자리를 정리하려는데 할머니는 아니다, 천천히 먹다 가도 된다면서 손사래를 치더니 "요즘에는 일하는 사람 쓰기가 너무 어렵다. 임금을 넉넉히 줘도 식당 문 닫을 시간되면 손님을 내쫓는다. 그래서 마무리는 주인인 내가 한다"고 푸념을 늘어놓으셨다. 그러시군요, 라고 대답한 것을 시작으로… 장장 삼십분 간, 할머니의 인생 이야기가 펼쳐졌다. 다시 찾은 식당서 버튼눌린것처럼또 듣게된 주인할머니 인생이야기손님마다 수십번도 더 감았을 말들반복해 퇴고한 글처럼 높은 완성도장전된 기억, 종이로 불러오고파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할머니의 인생이 쏟아져 나오는데 흥미로워서 말을 끊을 수도 없었다. 대구 사투리와 구순 노인의 어눌한 발음으로 세 아들들, 합정동에서 크게 열었던 한식당, 영특하고 발이 넓은 둘째 아들, 그리고 영화를 하는 막내 아들 이야기가 청산유수로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 식당이라면 십오 년 전쯤 나도 가 본 적이 있는 곳이다. 내가 그 식당 안다고, 나물이 환상이었다고 말하자 할머니는 쪼끌쪼글한 주름살이 다 펴질 것처럼 활짝 웃었다. 이야기의 1부는 상승, 2부는 하강이다. 이후 똑똑한 둘째 아들이 죽고, 막내의 영화가 실패하고, 그런데 식당이 너무 잘 된 나머지 카페까지 열다가 여차저차 망하고, 코로나가 오고, 이 골목에 자리 잡게 된 과정이 흘러나왔다. 소설가 둘이 만나서 소설 얘기 좀 해보려다가 진짜 소설같은 인생 이야기만 실컷 듣고 나온 밤이었다. 계산하면서 보니 이야기의 '증거'처럼 첫 식당의 나무 간판이 놓여있었다. 흥망성쇠를 다 듣고 나온 터여서 그런지 내 눈에는 난파된 배의 잔해처럼 보였다.한 달쯤 지나 다시 그 동네에서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나는 맛집을 안다고 예의 그 식당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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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혜성처럼 나타났다 유성처럼 사라진 천재 시인 '이언진' 지면기사
다산의 '여유당전서'를 최초로 독파했던 최익한은 자신의 저서인 '실학파와 정다산'에서 다산 정약용의 학문이 성호 이익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가 성호학파에 이언진(李彦璡, 1740~1766)이라는 시인의 이름을 올려놓았다는 사실이다.이언진의 자는 우상(虞裳)이며, 호는 송목관(松穆館)이다. 그는 성호의 조카이자 제자인 이용휴의 제자다. 이용휴는 18세기 조선 문단의 큰 별이었다. 정약용은 말하기를 "이용휴는 명성이 한 시대의 으뜸이어서 무릇 글을 새롭게 바꾸고자 수련하는 자들이 모두 와서 수정을 받았다. 몸은 포의의 반열에 있으면서 손으로는 문원의 권력을 30여 년 동안 쥐었으니 예전에 없던 일이다"라고 이용휴의 위상을 평했다. 성호 이익 조카인 이용휴의 제자정해진 틀 탈피 새로운 문학 시도그의 글쓰기 단약 굽듯 했다는 것 이용휴는 성호의 경세학을 학문의 바탕으로 삼았다. 그러나 당시 학자들이 외면하던 양명학을 비롯하여 불교와 도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아들 이가환은 조선 제일의 천재로 꼽혀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문사이자 정치가였다.이언진이 이런 이용휴를 스승으로 모실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으며 그의 빼어난 재주 덕분이었다. 이용휴는 이언진의 시에 대한 첫인상을 '시집을 펼치자 빛이 괴상하고 번쩍번쩍하여 무어라 형용하기가 어려웠다'고 쓰고 있다. '시는 투식을 없애고, 그림은 격식을 따르지 말자. 정해진 틀은 뒤집고, 남이 가던 길을 벗어나자. 앞의 성인이 가던 길을 가지 말아야 비로소 훗날에는 참다운 성인이 되리라'라는 게 이언진의 시에 대한 생각이었다. 이언진은 정해진 틀, 남이 가던 길을 벗어나 새로운 문학을 시도했다. 이언진을 가장 잘 이해해 준 사람은 스승 이용휴였다. 스승은 제자의 시집 '송목관집'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시문을 짓는 작가는 남의 견해를 받아 제 견해를 세운 사람과 제 스스로 견해를 만들어 견해를 세운 사람이 있다. 제 스스로 견해를 만들어 견해를 세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완고함과 편견이 개입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