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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명랑만화는 왜 '명랑'일까? 지면기사
생각만해도 웃음나와서 '명랑'일까부담없이 물장구 칠수 있는 웅덩이그곳에서는 꺼벙이·둘리가 주인공 늘 소동 일으키지만 작은 승리 거둬정답 모르지만 질문만으로도 아득내가 만화를 처음 본 것은 글자를 익히기도 전인 여섯살 무렵이다. 고모네 집에 놀러갔는데 식사때가 되어도 만화방에 가서 오지 않은 사촌오빠를 찾아 나섰다. 오빠는 "마저 읽겠다"며 다 읽은 책 한권을 내밀었는데, 글자를 모르던 나로서는 그림이 빽빽이 들어있는 칸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세 장도 채 넘기지 못했는데 오빠가 "그만 가자"며 책 더미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 많은 글과 그림을 단번에 독파해나간 오빠가 얼마나 존경스러웠는지 모른다.시간이 흘러 내가 만화에 빠질 차례가 되었다. 나는 '보물섬'과 '소년중앙'에 나오는 만화를 빼놓지 않고 보기 시작했다. '아기공룡 둘리' '꺼벙이' '맹꽁이 서당'과 같은 '명랑만화'의 주인공들이 첫번째 친구가 되어주었다. 월간지의 연재만화는 따라 보는 즐거움이 있다. 스마트폰이나 게임은 고사하고, TV를 틀어도 어린이 프로그램이 한 시간 남짓인 세상에서 오롯이 아이들에게만 초점을 맞춰 만들어지는 창작의 세계는 당시에 만화밖에 없던 것 같다.잡지를 받으면 가장 먼저 펼쳐보는 만화는 그때그때 바뀌었지만 윤승운의 '맹꽁이 서당'이 1위였던 적은 별로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기억에 오래 남는데, 도입부는 한결같다. 학동들이 한바탕 싸우고 깨고 부수고 말썽을 부린다. 훈장님이 기다란 담뱃대로 학동들의 머리통을 내리쳐서 커다란 선인장 같은 혹을 만든 후 "이제 공부하자"며 책을 펼친다. 그러면 아이들이 이야기를 조르고, 훈장님은 우리나라 역사나 한자 고사성어 같은 것을 풀어서 술술 들려준다. 심지어 마당쇠도 같이 듣는다. 마당쇠는 아이와 어른, 무책임과 책임의 중간자적 존재다. 거의 어른이지만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할 때도 있고, 훈장님이 없을 때 엉터리로 가르치기도 한다. 만화를 읽다보면 조선시대 서당의 맨 뒷자리에 앉아 '오월동주(吳越同舟)' '와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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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장동일지'와 이철·민향숙 부부 지면기사
잔혹한 옥중 비망록 '장동일지' 재일동포 이철, 간첩 누명 옥살이무죄선고·정부사과 후 발간 결심조국 원망스럽지 않냐는 질문에"간첩 엮은건 정권이지 민족 아냐"'1967년 일본 주호대학에 입학했는데 4·19 때 이승만의 동상을 끌어내리는 한국영화를 보여줬다. 나는 '7년이나 지난 영상을 보여줘서 뭘 어쩌자는 거지?'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50년 전 이야기라도 그 기간 동안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고 고문당해 연못에서 의문사하거나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사형 집행된 사람도 많고…. 대한민국이 민주사회로 이행되고 있구나 했는데 지금 대통령이 되면 안 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하니, 우리가 마음을 놓으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 고통과 아픔은 현재적 의미라는 걸 깨닫게 된다'.지난 4월 출간된 '장동일지'(서해문집)는 우리가 얼마나 엄혹하고 야만적인 현대사를 통과했는지 경각심을 던져주는 옥중 비망록이다. 지은이 이철(李哲·76)은 재일한국인으로 조국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1973년 고려대학교로 유학 온 청년이었다.그러나 시절이 너무 안 좋았다. 박정희의 독재가 극악해지면서 벌인 일련의 간첩조작 사건에 그도 걸려들고 말았다. 1975년 11월25일 유신정권의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 발표 후 그는 남산으로 끌려갔다. 약혼자와 장모를 데려와 그의 앞에서 '그짓'을 하겠다는 협박까지 당하며 정신이 무너졌고 혀를 깨물어 자살을 시도했다. 39일만에 사형이 언도되었다. 사형수로 3년6개월을 포함해 13년간 옥살이를 했고, 출소 후 13년간 한국에 입국금지가 되었다. 결국 한국에서 살겠다는 꿈은 좌절되었고 오사카에서 낮에는 전기기술자로, 밤에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강사로 살아왔다. 책 출간을 계기로 올해 잇달아 한국을 찾고 있는 그는 9월3일,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에서 책 내용을 주제로 강연회를 열었다. 그는 지금도 '기억하는 것 자체가 고통'인 사형수 생활을 가볍게(?) 증언하려 애를 썼다. 얼굴의 깊은 주름은 지난날의 형극(荊棘)을 보여주고 있었다. 남편의 구명운동에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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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이상과 김해경 지면기사
김해경 대신 필명 '이상' 사용경성고등공업학교 수석 졸업'12월12일' 연재 후 폐결핵 증세'날개' 발표하며 평단의 관심한국 현대시 문 최초로 열어이상은 1910년 9월23일 경성부 북부 순화방 반정동4통 6호에서 아버지 김연창과 어머니 박세창의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해경이다. 이상의 본적은 경성부 통동, 지금의 통인동 154번지로 대부분의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선대로부터 줄곧 살아온 거처로 이상이 태어날 당시에는 할아버지 김병복이 가장으로 집안을 이끌었다. 부친 김연창은 일본 강점 이전 구한말 궁내부 활판소서 일하다가 사고로 손가락이 절단된 뒤 일을 중단하고 집 근처에 이발관을 개업하여 가계를 꾸려갔다. 이상의 형제는 누이동생 김옥희와 남동생 김운경이 있다.1913년 백부 김연필의 집으로 옮겨 그곳에서 성장했다. 이상의 백부 김연필과 김연숙 사이에는 소생이 없어서 조카인 이상을 친자식처럼 키우고 학업을 도왔다. 1917년 이상은 여덟 살 되던 해 누상동에 있던 신명학교에 입학했다. 1921년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서 경영하는 동광학교에 입학했다. 1922년 동광학교가 보성고등보통학교와 합병되어 보성고보에 재학했다. 1928년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기념 사진첩에 본명인 김해경 대신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을 썼다.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내무국건축과 기술직으로 발령을 받았다. 1930년 '조선' 국문판에 9회에 걸쳐 장편소설 '12월12일'을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연재했다. 이해부터 폐결핵 증세가 나타나 객혈을 했다.1931년 '조선과 건축'에 일본어로 쓴 '이상한 가역반응' 등 20여 편을 세 차례에 걸쳐 발표했다. 폐결핵의 증세가 악화되었다. 1932년 이상의 성장과정을 돌봐주던 백부 김연필이 뇌일혈로 사망했다. 이상은 폐결핵의 발병과 백부의 죽음으로 커다란 정신적인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1933년 폐결핵으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게 되자 조선총독부 기술직을 사임하고 황해도 배천에서 요양했다. 그곳에서 알게 된 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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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돌봄 받는 맛 지면기사
저마다 나름의 '어른론' 있겠지만독립성·경제력 두개 조건 갖춰야돈 버는 일의 보조처럼 여긴 살림당연하게 노동 받아들이지 않고이해의 폭 넓어져야 어른의 기본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사람마다 다른 기준들을 적용할 테고 나름의 '어른론'이 있을 것이다. 가장 흔하게 들어본 말은 "아이는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어른은 해야 하는 것을 한다"라는 말이다. 아이일 때는 욕망에 충실하지만 어른이 될수록 철이 들어서 싫어도 해야 하는 것을 먼저 하게 된다는 말일 것이다. 아이들을 책임감 있게 키우고 싶은 어른들이 만들어낸 말일 테다. 사회에서 각종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면 애, 어른을 가리지 않지만 대체로 어른들이므로 어른들이 욕망에 충실하지 않은지는 잘 모르겠다.조금 웃음을 보탠 말로 "요거트의 뚜껑을 핥지 않는 것이 어른이다"라는 말도 있다. 체면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그런 뜻이라기보다는 어릴 적엔 한 입을 아쉬워하던 맛있는 음식, 혹은 좋아하는 음식을 간섭 없이 마음껏 사 먹을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춘 것이 어른이라는 이야기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조건이 같이 걸려있는데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는 독립성, 그리고 마음껏 사 먹을 수 있다는 경제력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결부되어 있다. 결국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독립성을 가지려면 기본적으로 경제력을 확보해야 한다.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자녀에게 부모가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 드는 "정치적 독립은 경제적 독립에서 나온다"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된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버는 돈으로 밥을 먹고 내 집에서 잠을 자면서 내 말은 안 듣겠다니 그러려면 네가 돈을 벌고 네가 집을 사서 독립하거라, 이런 말이다. 자식 입장에서야 계산적으로 들리겠지마는 자식이 부모의 그늘서 벗어나 어엿한 어른으로 독립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애틋한 마음으로 선해할 수도 있다.(사실은 좀 괘씸해서 하는 말일 테지만)그럼 결론적으로 돈을 버는 것이 어른이라는 말일까? 돈을 번다고 모두 독립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혹은 바꿔 말해서 독립을 한다고 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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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꼬마 뱀을 조심해' 지면기사
동시 즐기지 않는 초등학생 딸'완성되지 않은 일기'란 시 흥미자기 사연과 똑 닮은 시집 빠져공감의 포인트 제대로 배운 셈"동시는 쇼츠" 벙찌는 독후감딸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이지만 여태 동시는 별로 즐기지 않았다. 베스트셀러로 널리 알려진 동시집을 여러 권 사주었지만 그중 두어 권만 좋아했을 뿐 오래오래 아껴 읽거나 하지는 않았던 거다. 꽤 책벌레인 아이인데도 그랬다.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어." 아이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이건 아이의 성향과도 상관이 있는 일일 것이었다. 스토리의 앞뒤가 명확하고, 주인공의 행적이 뚜렷해야만 공감할 수 있는 독서의 수준이다 보니 동시란 장르 자체가 영 미심쩍고 헛갈렸겠지. 하지만 동시의 세계가 얼마나 재미난데. 아이를 동시의 세계로 데려가기 위해 나는 이것저것 수를 써보았으나 큰 효과는 없었다.요즘은 일기 숙제를 내지 않는 초등학교도 많은 모양이다. 딸아이가 다니는 학교도 일기 숙제는 없다. 1, 2학년 때는 숙제가 아니어도 곧잘 쓰더니 요즘은 그래서 통 쓰지 않는다. 어쩌다 기분이 좋은 날에만 선심 쓰듯 한 장씩 쓰는데, 그날 아이는 일기를 썼다. 대가족 모두 베트남 여행을 가기로 결정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신난 아이는 도대체 이걸 어디다 자랑하나 고민하더니 일기장을 폈다. 컴퓨터 모니터로 몇 번이나 전자항공권을 들여다보며 설렜던 아이는 "드디어 사촌언니와 함께 여행을 가게 되었다"로 시작하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웬걸, 일기를 미처 다 쓰기도 전에 여행 계획은 어그러지고 말았다. 운동선수인 중학생 사촌 언니의 훈련 일정과 여행이 겹친 것이었다. 항공권은 곧바로 취소했고 딸아이는 으앙,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쓰다 만 일기 끝에 아이는 "너무 슬프다, 여행이 취소되었다"라고 썼다. 나는 옆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아이를 달랬다. "걱정 마. 날짜를 다시 잡으면 돼. 다 잘될 거야." 아이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럼 이 일기는 어떡해? 어떻게 써?" 나는 전화로 가족들과 일정을 다시 조율했지만, 원체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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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꾸이년의 단골가게들 지면기사
보름 넘게 베트남 해변서 여름여행15년 전 왕성했던 태국여행과 대조카페에서 작업하고 망고사며 집 가가족과 일상, 단순하지만 풍요로워남은 나날 금처럼 귀하게 보내고파이 해변이 한 장의 종이이고, 게들이 동글동글 뭉쳐놓은 저 흙덩이가 글자라면 거기에 무엇이 적혀있을까? 만약 게들 가운데 외계생명체가 끼어있어 '나는 지구에 조난되었다. 구조해 달라'라고 신호를 보내는 중이라면? 과일가게의 드래곤프루트가 드래곤이 되고 싶어 하는 꿈을 꾼다면? 포멜로가 두꺼운 패딩 같은 자기의 껍질을 벗고 싶어 한다면?이런 엉뚱한 상상을 하는 곳은 베트남 중부에 있는 도시 꾸이년의 한 해변이다. 우리 가족은 바닷가 근처 아파트를 빌려 지내고 있다. 한 곳에서 일도 하고 헤엄도 치면서 여름을 날 생각으로 떠나왔기 때문에 여정에는 별 욕심 없다.보름이 넘어가니 단골가게가 생겨나고 생활에는 루틴이 잡힌다. 낯선 도시에 단골가게가 생기는 것은 식물로 치면 뿌리를 내리는 것과 비슷하다. 매일 보면서 인사를 하는 얼굴이 있으면 도시 전체에 가로등이 켜지는 것처럼 환해진다. '아는 사람'이 있는 도시는 더 이상 낯선 곳이 아니다.가장 자주 가는 단골집은 쌀국수 가게와 작업을 하러가는 카페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쌀국수에는 주인이 직접 만드는 새우볼이 들어가는데 식감이며 맛이 정점에 달했다고 할까, 먹을 때마다 감탄한다. 여기에 얼음 넣은 콩물을 곁들이면 건강하고 든든한 아침식사가 된다. 물샐틈없이 바지런하게 일하는 주인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는 것도 즐겁다. 내가 자전거에 부딪쳐 넘어졌을 때 구급상자를 가져와 치료까지 해주신 친절한 분이다.야자수를 따라 십분쯤 걸어가면 아드밧 카페가 나온다. 나무로 된 복층 내부는 통창으로 보이는 푸른 잎 때문에 눈이 시원하다. 건축도 멋있지만 무엇보다 꾸이년 최고로 맛있고 진한 커피가 여기 있다. 이곳에서 베트남 카공족이 되어 단편 소설을 한 편 쓰고, 장편 소설의 교정도 보았다. 주구장창 오다보니 카페 스태프나 사장님과도 인사를 트게 되었다. 사장님은 애니메이션이 본업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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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전두환이 평생 무사했던 이유(?) 지면기사
건축가 김원 '땅 잘본다'는 평판에5공때 추진 독립기념관 터 찾아줘현장서 전두환에 직접 '명당' 설명'천안군 목천면 흑성산 아래' 결정"全 보복 안당함… 그 덕 봤을것"얼마 전 원로 건축가 김원(81) 선생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젊은 시절 땅을 잘 본다는 평판으로 전두환이 추진하던 독립기념관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공개된 적 없던 이야기를 털어놓는 선생에게 이걸 글로 옮겨도 되겠냐고 했더니 "누군가는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면서 승낙을 해주었다.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본다.전두환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잡지 않은 것에 늘 콤플렉스가 있었다. 당시 한창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로 온 나라가 들끓었다. 그런데 어떤 간신배가 전두환한테 "우리나라에만 독립기념관이 없다. 독립기념관을 짓는다면 모든 이들이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독립기념관이 세워지면 나라의 역사를 정리할 테니까 그 정통성 시리즈에 5공을 살짝 집어넣어라. 그럼 정통성이 부여될 것 아니냐"고 한 것이다. 그러자 전두환이 "야! 진짜 괜찮구나"해서 당장 땅을 찾으라고 이진희 문화공보부 장관한테 지시를 내렸다. 서울과 대전 사이의 약 330만㎡에 대도시가 없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국민 성금을 모금했는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경쟁적으로 운동을 벌여 2달 만에 목표액 500억원을 초과 달성했다. 당초에는 모금에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땅도 못 찾고 설계도 안 된 상태에서 돈이 확보된 것이다. 청와대에서는 계속 문공부로 연락을 내려보내며 독촉하고 있었다. 당시 전두환의 명령이라면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을 만큼 벌벌 떨던 때였다.나는 그 전에 풍수를 하는 건축가로 소개되어 KBS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풍수가 미신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에 나는 풍수는 미신이 아니라 지구물리학이자 통계학이다, 땅에는 기운이 있는 것이다, 좋은 기운이면 사람이나 나라나 다 잘 된다라고 역설했다. 새파란 30대 건축가가 방송에서 구라를 푸는데 꽤 인상이 깊었던 모양이다.독립기념관의 터를 찾던 문공부 직원이 방송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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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김수영 시인과 '푸른 하늘을' 지면기사
학병 징집 피해 귀국 연극 무대 서6·25 비극적 체험 '레드콤플렉스''푸른…' 자유·혁명 대한 직설적 詩어둠의 요인은 '정체성 혼란' 투사해방~1960년대말 전환기 삶 '詩作'김수영은 해방 직후부터 1960년대 말까지 한국사회의 전환기적 삶을 경험하면서 치열한 시작 활동을 펼쳤던 시인이다. 김수영의 시세계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는 시각으로 양분할 수 없는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면서 독특한 자신의 시세계를 열어갔던 인물이다.김수영은 1921년 11월27일 서울 종로구 종로 2가 18번지에서 아버지 김태욱과 어머니 안형순 사이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김희종은 정삼품통정대부중추의관의 벼슬을 지냈다. 조부 김희종은 경기도 김포평야 일대와 강원도 홍천 등지에서 500여 석의 추수를 하는 지주였다. 형제로는 아우 수성· 수강·수경·수환, 여동생 수명·수연·송자 등이 있다. 같은해 종로 6가 116번지로 이사했으며 이때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1924년 4세에 조양유치원에 들어갔다. 1926년 6세에 계명서당에 다니며 한문공부를 했다. 1928년 8세에 어의동 공립보통학교(지금의 효제초등학교)에 입학했다. 1934년 14세에 폐렴과 뇌막염으로 1년여를 요양했다. 1938년 선린상고 야간부 3년을 졸업하고 주간부 2학년으로 진학했다. 1941년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했다. 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성북고등예비학교에 들어갔으나 곧 포기하고 미지시나 하루키 연극연구소에 다녔다. 1943년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게 되자 조선학병 징집을 피해 귀국한 김수영은 연극 무대에 섰다. 1944년 봄에 만주에서 귀국한 어머니를 따라 지린성으로 가서 임헌태 등의 청년들과 번역극 '춘수와 같이'를 무대에 올렸다.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이 되자 가족들과 개천 평양을 거쳐 서울로 돌아와 충무로 4가에 집을 마련했다. 1946년 시 '묘정의 노래'를 썼다. 1948년 박인환, 임호권, 김병욱, 양병석, 김경린 등과 동인 '신시론'을 결성했다. 1949년 동인 신시론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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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집중력이 사라졌다 지면기사
무언가 창조·해석 기쁨은 사라지고오로지 도파민 자극 쾌락만 날 지배시간들여 털있는 짐승을 그려 보고서로 응원하는 마이너 운동 배우자집중력 물론 지치지 않는 체력은 덤집중력이 사라졌다. 하고자 하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 그러니까 읽던 책이 재미있어서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밥 먹는 것도 잊고 마지막 책장이 덮일 때까지 몰입하여 읽던 그런 능력이, 친구가 보낸 편지에 답장을 보내기 위해 겨울밤에 부엌 냉장고에 등을 기대고 밥상을 책상 삼아 고심하며 몇 시간이고 밤이 새도록 편지를 쓰던 능력이, 과자 사 먹으라고 할아버지께서 주신 백원짜리 동전이 제법 모이면 학교 앞 문방구로 달려가서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프라모델 조립식 장난감들을 도서관 빽빽한 책등마냥 훑다가 지구를 구할 로봇을 고르듯 고심과 갈등 끝에 하나를 골라 집으로 날듯이 달려와 머리가 아파 끙끙 소리가 나도록 하루종일 앉은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불상처럼 앉아 조립도를 보며 변신 로봇을 완성해나가던 능력이 사라져버린 것이다.그리고 그 집중력의 자리는 이제 스마트폰이 차지해버렸다. 버스에서도 전철에서도 카페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시간에도 잠이 들기 전에도 책을 읽던 습관이 사라지고 이제는 스마트폰을 열어 최신뉴스를 훑어본다. 그러다가 금방 흥미를 잃고 다시 SNS에 들어가서 새로 올라온 각종 소식들을 열람한다. 스크롤을 올리며 친구들의 이 얘기 저 얘기들을 읽다가 쇼츠, 릴스 등 각종 짧은 동영상을 보게 된다. 한번 보면 자꾸 그다음 영상을 보게 된다. 영상을 보다가 질리면 게임을 한다. 복잡한 것은 머리가 아프니까 간단하면서도 중독성 있는 게임을 한다. 벽돌을 쌓거나 부수거나 피하거나 맞춘다. 그러다가 지루해지면 다시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서 최신뉴스를 읽는다. 그렇게 돌고 도는 손안의 스마트 세상을 즐기다보면 즐거운 것이 아니라 점점 우울해진다. 불안도가 증가하고 자존감이 떨어진다. 무언가를 생산하고 창조하고 주체적으로 해석해나가던 기쁨은 사라지고 오로지 도파민을 자극하는 수동적인 쾌락만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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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수트케이스 지면기사
내내 비혼·극강의 역마살 자랑하다출산하며 꼼짝없이 집에 갇히게 돼 떠나는 방법도 잊은 듯이 살았지만작은 수트케이스 하나에 마음 동요과거여행은 "적금같은 기억" 곱씹어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에서 가방 하나를 샀다. 가죽으로 만든 작은 수트케이스다. 한참을 기다려 받은 그 가방의 포장을 풀며 나는, 아무래도 어디로든 한 번은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그동안 참아도 너무 오래 참았지.나는 한때 극강의 역마살을 자랑하는 사람이었다. 출판사나 잡지사에서는 원고 청탁을 하려다가 내게 하소연을 했다. "아니, 작가님이랑은 연락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전화할 때마다 한국에 없어요." 데이터로밍이 비쌌던 시절이라 나는 걸핏하면 전화를 끊어놓고 돌아다녔다. "나는 그냥 이렇게 인생을 탕진하려고. 어차피 한번 놀러 온 인생이잖아." 그런 말을 풀풀 웃으며, 우습게도 뱉던 시절이었다. 건방졌다. 인생이 쉬운 건 줄 알았다.그랬던 삶이 꼬인 건 아무래도 출산이었다. 사는 내내 비혼일 줄만 알았던 나는 어느 날 화들짝 아기 엄마가 되었고, 나는 꼼짝없이 집에 틀어박혔다. 매달 월급 꼬박꼬박 받아오는 워킹맘도 아니면서 베이비시터를 둘 핑계를 찾을 수 없었기에 나는 몇 년 얌전히 지냈다. "베트남 한번 뜰 건데 너도 가능?" 이렇게 묻는 친구들에게 "미안, 이번엔 안 돼." 몇 번 대답하다 보니 친구들도 더 이상 함께 떠나자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 혼자 마냥 서운해하며 여행을 떠난 친구의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 고양이의 밥을 챙겨주었다. 곧 코로나 시국이 시작되었고 모두가 떠나지 못하는 시절이 오자 차라리 다행이었다. 나만 못 가는 것이 아니니 덜 심술이 났달까.코로나 시국이 지나갔지만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는 떠나는 방법을 잊은 사람 같았다. 한 해 절반씩 집을 비워두었던 지난날이 다 농담 같았다. 기껏해야 연례행사 뛰듯 아이와 제주도를 간다거나 부산을 간다거나 할 뿐이었다. TV 여행 프로그램을 보며 "엄만 저기도 갔다 왔어. 몰타. 저 도시 너무 예쁘지?" 한다거나 "이탈리아에 가면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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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수수밭에서 책 읽기 지면기사
엄마의 강렬한 기억 남은 독서는열두어살 무렵 밭에 간다 말하고수수밭 한가운데서 읽었던 순간육남매중 다섯째가 고른 은신처책장 넘기는 장면 생각하니 애틋어렸을 때부터 책벌레였던 나는, 한참 책 속에 빠져 있는데 말을 시키는 사람을 너무 싫어했다. 그렇게 독서의 흥을 깨는 사람 중 단연코 1위는 엄마였다. "밥 먹어라." 이 말 한마디면 셜록 홈즈의 놀라운 추리도, 다리 기둥에 매달린 빨강머리 앤도 멈춰서야 했으니까. 그러면 읽던 페이지 사이에 손가락을 끼우고 불만스럽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 나는 투덜투덜 밥상에 앉으며 책을 읽을 때는 제발 아무 말도 시키지 말아달라고 누차 강조했다. 지속적인 호소 때문인지, 성장기 내내 엄마는 내가 책을 읽고 있으면 밥 먹으란 소리 말고는 아무 말도 걸지 않는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 엄마는 내가 쓴 책이 아니면 구태여 독서를 하지 않는다. 엄마가 섭취하는 활자는 주말에 성당에서 나눠주는 주보와 '매일미사' 외에는 없는 듯 보인다. 딸이 고생해서 쓴 글이니까, 하는 마음으로 내 책도 의무감으로 겨우 보시는 듯하다. 그런 엄마에게도 일평생 강렬한 기억으로 남은 독서의 순간이 있었다.엄마가 열두어 살 무렵, 어떤 이야기 책 하나가 손에 들어왔다. 읽다보니 너무 재미있어서 밭에 일하러 간다고 말하고 집을 나왔다. 그리고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수수밭 한가운데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고 한다."보영이랑 진숙이. 그 둘이 주인공이야. 하나는 부잣집 딸이고 하나는 가난하고. 그 둘이 친구인데 이야기에 너무 빠져가지고….""근데 왜 수수밭이야? 수수가 옥수수를 말하는 건가?""옥수수가 아니라 밥에 놓아먹는 노란 조 있잖아. 그거랑 비슷한 잡곡이 열리는 거지. 수수는 높게 자라니까 밭 가운데 들어가 앉아있으면 아무도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나는 엄마의 목소리에 실려 높다란 수수가 자라는 시골풍경을 떠올려보았다. 육남매 중 다섯째였던 엄마는 집에서는 조용한 곳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몸을 숨길 수 있는 은신처를 골랐던 것이다. 방해받고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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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관계, 세 사람 지면기사
매주 월요일 안부 전화 최근 끊겨A와 멀어진후 '일방통행' 깨달아내 감정 쏟아내고 괴롭혀 '자책감'C는 종교인 그에게 질문거리 많아 얼마전부터 고민 상의 '평형 유지' 나는 매주 월요일 세 사람한테 전화하는 것으로 한 주를 시작한다. 셋은 모두 나보다 연장자들이다. 그들에게 일주일간 일어났던 나의 일들을 털어놓고 상대방의 안부도 묻는다. 벌써 10년 이상 되었다.그런데 올 봄을 지나면서 세 사람한테 큰 변화가 찾아왔다. 한 사람은 50년을 해로한 남편이 암에 걸려 전이된 상태고, 다른 한 사람은 딸이 암에 걸려 가슴 철렁한 순간을 맞고 있다. 그 밖의 한 사람은 15년 동안 틀어박혀 책만 팠는데 갑자기 취직이 되어 매일 험한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어쨌든 그래서 정기적으로 하던 전화는 끊어졌다. 그중 가장 친했던 A는 자기애가 강한 사람으로 섬세하고 예민하며 직관력이 뛰어나다. 나는 가끔 그에게 "마이크로의 세계에 산다"고 이야기했다. 아주 미세한 것까지 감지하기 때문에 사람의 심리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잘 알아챘다. 그래서 대화가 잘 되었고 나는 그 점이 무엇보다 좋았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는 '찍어 먹어봐야 똥인지 된장인지' 아는 타입이고 그는 느낌이 이상하면 아예 발을 담그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매번 인간관계에 상처를 받으면서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나를 보면서 그는 무척 답답해 했고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그 지겨운 실패담을 강산이 바뀌는 시간만큼 들어주었다. 게다가 내가 나한테 매몰되지 않도록 일침을 가했다. 그것 때문에 더 그에게 의지했다.대화의 9할 이상이 내 수다였고 그는 듣고 맞장구쳐주는 역할을 했다. 나는 나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까지 들추었고 그는 해야 할 말도 아꼈다.그와 거리가 생긴 지금에서야 우리의 관계는 일방통행이었음을 깨닫고 있다. 너무 내 감정을 쏟아내 그를 괴롭혔다는 자책과 함께 한편 서운하기도 하다. 나를 진정한 대화 상대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과연 그의 입장을 한번이라도 생각해봤던가?그런가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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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윤동주 시인과 서시 지면기사
'죽는날까지… 한점 부끄럼 없기를'읽으면 서러움·고절감 파도처럼 와18세 나이 '삶과 죽음' 등 첫시 써내아직까지도 '별 헤는 밤'은 사랑받고'참회록'을 남겨 독자들 숙연하게 해'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인 윤동주의 서시를 읽노라면 순결한 청년의 서러움과 고절감이 파도처럼 밀려온다.윤동주는 1917년 12월30일 아버지 윤석영과 어머니 김룡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9세 되는 1925년 4월4일 명동소학교에 입학했다. 12세 1928년부터 14세 1930년까지 급우들과 함께 '새명동'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청소년기의 꿈이었다.15세인 1931년 3월15일 명동 소학교를 졸업하고 16세에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18세인 1934년 12월24일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 등의 시를 썼다. 이 작품들은 그의 최초의 시편이다.19세인 1935년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로 편입한다. 같은해 숭실중학교 문예지인 '숭실활천'에 시 '공상'이 처음 활자화 되었다. 20세인 1936년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여 숭실학교를 자퇴하고 광염학교 중학부에 편입한다.간도 연길에서 발행되던 '카톨릭 소년' 11월호에 동시 '병아리'를 발표하고 이어서 12월호에 '빗자루'를 발표한다. 22세인 1938년 4월9일에 서울의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문과에 입학한다. 23세인 1939년 산문 '달을 쏘다' 시 '유언'을 발표한다. 25세인 1941년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27세인 1943년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고 작품과 일기가 압수된다. 28세인 1944년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된다. 29세인 1945년 해방되기 여섯 달 전, 2월16일 큐슈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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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일하는 사람을 설득하는 법 지면기사
급하단 전화에 중단된 동료 밥시간밥 넣은 배밑으로 자존심 흐르지만숟가락 놓게 만드는건 존중의 태도어디서 일하든 직원식당에 모이니우대 아니어도 '같은 대접' 해주길예전 직장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들과 밥을 먹는데 상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른 사무실 문을 급히 열어야 하는데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K뿐이라는 것이다. 당시 우리가 쓰던 사무실은 번호키였고 잘 안 쓰던 사무실이 하나 더 있었는데 갑자기 그 사무실을 열어야 하는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K는 식당에서 막 주문한 음식을 받아서 겨우 몇 술 뜨자마자 급하다는 전화에 그대로 상을 물리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우리가 보기엔 그게 그리 급한 일이 아니고 밥 다 먹고 가서 열어도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일이었는데 상사의 판단은 달랐던 모양이다. 아니 달랐다기 보다는 우리의 식사에 큰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남은 우리는,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둥의 속담을 주워섬기며 밥도 다 못 먹고 자리를 뜬 동료를 안타까워하고 상사를 욕했다.당시 다니던 직장이 박봉이라지만 지붕이라도 가린 곳에서 일하느라 눈치를 좀 더 보게 되어서 그렇지, 지붕 없이 뙤약볕에 찬바람에 부평초처럼 휩쓸리며 오면 그만 가면 그만인 노가다판에서는 점심시간이 되었다 하면 바쁜 일에 뛰어나가기는커녕 하던 일도 다 멈추고 흙더미에 삽 던져 꽂아두고 밥 먹으러 가버리곤 했다. 육체노동을 하면 배도 쉽게 꺼지고 허기도 더 심하게 오기도 하거니와 몸 쓰는 사람들이 어디서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체득하게 되는 은은한 배짱과 자존심이 밥 넣은 배 밑으로 도도히 흐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몸 쓰는 사람들이 밥 챙기는 자존심만 있고 다른 일은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아니다. 목숨을 건 파업과 엄중한 대치 속에서도 사측이 노조를 해산시키려고 점거농성 중인 공장의 물과 전기를 끊자, 차량용 페인트가 굳지 않게 발전기로 기계를 돌렸다는 쌍용자동차의 파업 이야기는 자존심만큼이나 강했던 일하는 사람의 책임감을 떠올리게 한다.그럼 일하는 사람들이 먹던 밥숟가락 내려놓고 나서게 설득하는 방법은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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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사람이 어떻게 다 잘해? 지면기사
"엄마가 미안, 요즘 왜 이리 까먹지"초등3 딸 휴대전화 찾아 갖다주자…자잘한 위로 들으러 학교에 왔나보다"엄마, 수업 잘해! 지각하지 말고!"내가 살살 말하면 다정하게 대답해초등학교 3학년 딸아이가 휴대전화를 놓고 등교했다. 학교 끝나고 학원에 가면서 휴대전화로 늘 보고를 하는데, 그걸 두고 갔으니 하교 후에 집으로 돌아올 것이 빤했다. 나는 일찍부터 작업실에 나갈 작정이었다. 학교 강의가 있는 날이라 작업실에 일찍 나가 다른 일들을 처리해야 했던 거다. 하지만 아이가 빈집에 혼자 들어와 주섬주섬 휴대전화가 든 가방을 챙길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혼자 엄마, 아빠를 기다리는 일이 많은 아이인데. 이렇게 일하는 엄마와 아빠는 걸핏하면 혼자 죄책감 타령에 빠지곤 한다. 별수 없다.결국 작업실 나갈 시간을 미루고 하교 시간에 맞춰 학교로 갔다. 삽시간에 꼬마들이 학교 건물에서 와르르 쏟아져 나왔고 나는 행여 아이를 놓칠까봐 눈을 부릅떴다. 친구와 종알종알 떠들며 실내화를 갈아신던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엄마, 학교 안 갔어?" "응, 너 휴대전화 주고 바로 갈 거야." "지각 아니야? 안 늦어?" "괜찮아." 그러는 사이 딸아이 곁으로 친구들이 병아리 같이 모여들었다. 정말 병아리 같다. 키도 제법 크고 덩치도 작년보다 자랐지만 여태 3학년은 아기들이다. 안녕하세요, 아줌마! 방글방글 웃으며, 조금은 쑥스러운 얼굴로 다 인사를 한다. 딸아이가 한 명 한 명 소개했다. 엄마, 얘는 지율이고 얘는 서빈이, 유담이랑 민채는 알지? 엄마, 얘가 태윤이야! 그러고는 큰 소리로 덧붙였다. "다 내 절친들이야!" 절친이라니. 초등 3학년에게도 절친이 있구나. 마냥 귀여워서 하나하나 이름 불러주며 나도 인사를 건넸다. 친구 엄마 나타난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이리 몰려왔을까. 바람 한 점 불어도, 꽃잎 하나 날려도 그저 즐거운 게 그 나이라지만.아이들은 학원 시간이 조금 남았다며 놀이터에서 놀아야겠단다. 나는 놀이터까지 함께 걸었다. 날이 몹시도 더웠다. "아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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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마차 이야기 지면기사
여러 승객 모시느라 혹사한 '마부'피로조차 너무 피곤해 잠이 들어작가만 이따금씩 뒤척이며 중얼잠잠해지면 의식의 작은 등불만깜박거리며 밤과 꿈 가로질러 가어쩌다보니 일년 반째 마감의 연속이다. 나는 피로에 사로잡혀 있다. 피로는 아침 햇살에 닿으면 툴툴거리며 육중한 몸을 옆으로 비켜준다. 뇌가 호통을 치며 오늘 할 일들을 읊어대기 때문이다. 우선 강의가 있고, 강의에 앞서 그보다 긴 강의준비가 있다. 짧은 글이지만 서평 마감도 있고, 무엇보다 단편소설 마감이 발등에 떨어져있다.나는 사륜마차의 마부석에 올라 채찍을 휘두른다. 지붕에는 강의에 쓸 책, 학생들의 습작, 어제까지 작업한 인쇄물, 점심으로 먹을 빵과 커피 등 되는대로 꾸려놓은 짐이 실려 있고 안에는 '작가'라는 승객이 미간에 인상을 팍 쓰며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그는 마차에 오르는 다른 승객들을 민폐꾼처럼 노려본다. "내가 마감을 제때 못하면 전부 당신들 때문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강사'라는 승객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이봐요, 빨리 좀 못 가겠어요?"라고 마부에게 조바심을 드러낸다. '필자'라는 승객은 코너를 회전하느라 로데오 말처럼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급히 서평을 완성한다. 그는 항상 마감의 스릴을 즐기며 이럴 때 글이 더 잘 나온다고 너스레를 떤다. 구석에 자고 있던 '나무늘보' 승객이 하품을 쩍 하더니 무례하게도 모두의 무릎위로 길게 누워 스마트폰을 보거나 이번 달 생활비 등등을 한가로이 계산한다. 잘 달리던 마차가 급정거를 하는 통에 나무늘보는 바닥으로 고꾸라진다. '엄마'가 벌컥 문을 열고 소리를 지른다. "다들 비켜! 딸이 올 시간이야." '꼬마'가 들어온다. 꼬마는 열한 살짜리지만 마차에 탄 승객 누구보다 무겁다. 꼬마가 아기였을 때는 이보다 몇십 배로, 믿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얼마나 무거웠던지 마차의 바퀴가 바스라질뻔 했고, 승객들은 모두 이대로 죽는 게 아닌가 벌벌 떨 정도였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강사가 나서 힘겹게 진창에 빠진 바퀴를 건져냈고, 그 후 만 세 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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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땅값 떨어지게…" 지면기사
청계산 입구 도로가 위치한 장군탑문화재 살리려 인근 주민들 告祀중땅 주인이라는 남자가 나타나 행패깨끗이 치우고 가꿔온 여현섭 선생무례함에 상처받아 "사회 험악해져"지난 5월14일 석가탄신일 전야, 의왕시 청계산 입구의 도로가에 위치한 유적 '청계산 장군탑'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잊혀져가던 문화재를 살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인근 주민 몇이서 떡과 술, 포를 놓고 고사(告祀)를 지내려는 찰나, 갑자기 땅 주인이라는 남자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나타났다. 그는 어른들에게 눈을 부라리고 삿대질을 하면서 떡시루를 엎어버리겠다느니, 장군탑 비석을 넘어뜨려 땅에 묻어버리겠다느니 하면서 거칠게 대들었다. 주장인즉, "땅값 떨어지게" 남의 땅에서 지금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사람들이 마을과 집안의 안녕을 빌던 서낭당을 이렇게 철저하게 외면하는 땅 주인과는 달리 마을 노인들은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이곳에서 제사 지내는 걸 봤다고 증언하고 있다. 아마 새마을운동이 벌어지면서 미신이라는 이유로 제사 풍속이 일소되었을 것이다. 이 장군탑은 돌무지 구조가 뚜렷한 고분(삼국시대로 추정)으로 지름 5~6m, 높이 3~4m의 크기이며 봉분 위에는 오래 전에 잘려진 고목 밑둥이 박혀있다. 봉분의 하단에는 커다란 바위가 드러나 있으며 주변에는 30~40㎝ 크기의 냇돌이 많이 쌓여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돌을 던진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무덤 앞에는 비석이 서 있는데 '장군탑의 역사는 팔천만 년 전으로 추정되며, 청계노인회에서 단기 4323년(1990)에 탑을 다시 세워 헌상(獻上)한다'라고 적혀있다.'장군'이라는 명칭은 민속에서는 최영, 임경업, 강감찬, 남이 장군 같은 인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들은 굿을 할 때 무당의 몸주(혼령)가 되어 신의 원한을 풀어주고 집안의 행운을 빌어주는 선신(善神)이다. 한 마디로 '청계동 장군탑'은 만만치 않은 위인의 무덤으로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역사가 오래되었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신성하게 여겨져 제사도 지내고 소원도 빌던 마을 공동체 공간이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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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백석 시인과 여우난골족 지면기사
1912년 평북 정주군 익성동서 태어나이광수 등 걸출한 문인들 배출한 곳아버지 백시박, 장남 교육열 대단오산학교에 '기부금 10원' 기록도큰댁 '여우난골' 유명한 詩로 남아백석(1912~1996)은 1912년 7월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1013번지에서 태어났다. 갈산면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갈지면과 오갈산면으로 바뀌게 되었다. 백석이 태어날 당시에 익성동은 오산학교가 자리 잡은 오산면 관할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1952년 북한의 군·면·리 통폐합조치에 따라 갈산면은 신설한 운전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산학교가 익성동 940번지였으니 백석의 집은 오산학교 바로 앞에 있었다.정주와 오산학교는 걸출한 문인들을 많이 배출해 왔다. 백석보다 20년 앞서 춘원 이광수가 정주군 갈산면 광동동 신리에서 태어났으며 백석보다 열 살 많은 김소월이 구성군에서 출생하여 곽산군에서 성장했다. 소월의 스승 김억도 곽산군에서 출생하여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일이 있다. 그런가 하면 백석보다 10년 후에 태어나 1980년까지 조선일보 주필로 활동한 선우휘는 정주읍 남산리가 고향이다. '창작과비평'이라는 리얼리즘 계열의 유명한 계간지를 발행하고 있는 문학평론가 백낙청은 1938년 외가인 대구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친가는 정주군에 있었다.백석의 어릴 때 이름은 백기행이었다. 1933년 12월 방응모의 장학금을 받은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의 회보 제1호 표지에는 백석(白奭)으로 표기되어 있다. 백석의 연인이었던 '자야 여사'는 청진동으로 부쳐오던 편지의 겉봉에 백기영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고 기억한다. 훗날 잡지와 신문에 작품을 발표할 때는 모두 백석(白石)을 사용했다.백석은 아버지 백시박과 어머니 이봉우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백시박은 젊은 시절 백용삼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가 백석이 오산학교를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백영옥으로 개명했다. 백석의 아버지는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남인 백석에 대한 교육열은 대단했다. '오산백년사'에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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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금분세수 지면기사
주짓수제자 블랙벨트 약속 못지킨채코로나 여파 5년만에 체육관 문닫아사범 그만두고 직장 적응 핑계 삼아수련도 게을러져… 제자들 보기 민망 선생 자리에서 내려오고 도복 물려줘무협지나, 무협영화의 세계관에 '금분세수(金盆洗手)'라는 말이 있다. 강호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협객이나 무사가 무림의 모든 은원을 끊어내고 물러나기 위해 금대야에 손을 씻으며 은퇴를 선언하는 것을 이야기한다.'손에 피를 묻히다'라는 관용구가 있듯이 대야에 손을 씻으며 그 세월 동안의 죄과와 피값을 흘려보내고 그 바닥을 뜨는 것으로, 강호한정(江湖閑情)과 평화를 바라는 무림인들에게는 하나의 꿈과 같은 마무리다. 그러려면 무공은 바라는 만큼의 성취를 이뤄야 하고 그간 악당들을 물리치는 수많은 전투 속에서도 자신은 목숨을 부지하고 있어야 하며 틈틈이 가르친 제자는 어느새 청출어람(靑出於藍)하여 스승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리하여 끝끝내 더 노력하여 얻어낼 성취도 없고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는 이미 죽고 되갚아야 할 원한도 대부분 갚아주었으며 목숨 바쳐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새로운 원한을 만들 만큼의 혈기도 쇠진하게 되면 어디 방짜기술 좋은 놋점에 기별이라도 보내 손을 씻을 놋대야라도 하나 주문하여야 하는 때가 이르는 법이다.얼마전 주짓수 체육관 제자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제자들이 운동을 하는 곳을 그동안 좀 뜸하게 방문했는데, 이번 스승의 날을 앞두고 한번 와달라는 소식이었다. 입시학원 국어강사 생활을 하며 자본주의의 모순 속에서 깊어가는 번뇌를 좀 잊어볼까 하여 배운 외국무술이 어느덧 수련한 지 10년이 넘어서 체육관을 차렸고, 마침 차리고 몇년 안되어 코로나19가 창궐을 하여 몇차례 대출로 지싯지싯 버티다가 내 손으로 블랙벨트를 매어주마던 제자들과의 약속도 지키지 못한 채 5년만에 문을 닫고만 터였다. 폐업하고 첫 일년은 후배 체육관에서 사범 일을 하며 꾸준히 주짓수를 수련했지만 그후 사범 일도 그만두고 인천공항에 취직하여서는 직장 적응에 매진해야 한다는 말을 핑계 삼아 근 일년을 한달에 한두번 하는둥 마는둥 게으르게 주짓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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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죽음이 다가와도 괜찮아 지면기사
림프종 3기 기자가 쓴 투병기 읽고허술한 내인생 다시 연습하는 기분쫄지않고 사는법 등 힌트 배운느낌그저 작가의 건강·가족 평안을 기도내가 더 배울 세상은 아직도 많았다두어 달에 한 번은 구내염을 앓는다. 피곤해서 그렇겠지, 생각하지만 여기저기서 들리는 소리가 많다. 입 안이 쉬이 헐고 빈도가 잦다면 암을 의심해보는 편이 좋다고. 그러면 덜컥 겁이 난다. 무언가 정밀 검사를 받아봐야 하는 걸까? 나는 아직 젊고, 아이도 어린데.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는데.늘 가던 동네 가정의학과 의사에게 나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말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요. 저, 정밀검사 받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의사는 내 입 안에 약을 발라주며 풉 웃었다. "그럴 상황은 아니고요. 검사가 필요하다 싶으면 제가 말씀드릴 테니 과로만 하지 마세요." 얼마 전에는 가슴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져서 화들짝 놀랐다. 협심증일까? 이러다 심장마비가 오는 거 아니야? 하마터면 119에 전화를 걸 뻔했다. 통증은 금세 가라앉았고 또 동네 가정의학과 의사를 찾아갔다. "조금만 불편해도 병원에 오는 습관, 좋아요. 오래 사시겠어요." 역류성 식도염이라고 했다. 역시나 과로를 하지 말란다.겁이 많아진 거다. 조부상, 조모상에 부의금을 보내던 시기를 훌쩍 지나 부모상은 이제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종종 들려오는 본인상은 먼 인연이라도 온종일 우울하다. "우리가 벌써 그런 나이인 거야? 뭔가 좀 아찔하다고." 장례식장에서 만난 친구들은 일회용 숟가락으로 육개장을 퍼먹으며 훌쩍였다.아침마다 출판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를 들여다본다. 나에게 그건 아침 신문을 읽는 것과 비슷한 습관이다. 또 얼마나 새로운 출판 아이디어가 펀딩 사이트에 올라왔을까. 또 얼마나 새로운 작가들이 데뷔 전 숨 고르기를 하고 있을까.그곳에서 책 한 권에 펀딩했다. '죽음이 다가와도 괜찮아'. 연합뉴스 김진방 기자가 쓴 책이다. 이제 마흔. 마흔이라는 나이에 나는 벌써 슬펐다.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이 있는 작가는 림프종 3기 판정을 받았다. 그 이야기를 써 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