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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꿈의 작업장 지면기사
점심을 먹고 산책하는 길에 도자기 매장이 있다.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한 매장은 닫혀있을 때가 많다. 가끔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면 둥근 항아리와 손자국으로 이지러진 찻잔과 화병이 전시되어 있고 한쪽에는 물레가 놓여있다. 벽에는 ‘과천요’라는 글씨가 붙어있다. 손님이 없으니 매장이 곧 사라질 것만 같아 나는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가정의 달’이라며 작약꽃 한 다발을 보내준 지인 덕에 나는 그 매장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꽃을 꽂으려면 화병이 큼직해야 하는데 이참에 번듯한 달항아리를 가져야겠다는 욕심을 낸 것이다. 거기에서 도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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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김장철이 왔다 지면기사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때아닌 김장 얘기를 한번 해야겠다. 해마다 김장철이 되면 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이 있다. “김장할 때는 무덤 속의 시체도 일어나서 돕는단다.” 이번 김장에는 좀 빠질까 해서 이것저것 핑계를 대기 시작하면 어머니는 꼭 이렇게 말씀하셨다. 남 일할 때 TV나 보고 수육 먹을 생각이나 하며 뺀질대지 말고 예외 없이 모두 나와서 도우라는 당연하고도 지당한 말씀이다. 대단한 종가집도 아닌 평범한 가정집이었지만 예전에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살 때는 일곱식구가 일년을 먹으려면 배추를 50포기에서 70포기는 담갔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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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원고를 넘기는 방법 지면기사
소설가 후배가 작품을 좀 읽어달라 청해왔다. 바쁜데…. 거절하고 싶었지만 실은 거절 같은 것 잘 못하는 사람이라 알겠다고 끄덕였다. 후배는 곧 이메일로 파일을 보내왔다. 열어보고선 화들짝 놀랐다. 워드 문서 따위 아닌 PDF 파일이었는데 얌전히, 보기 좋게 조판을 끝낸 편집디자인 완료물이었던 거다. 나는 읽기도 전에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야? 편집까지 할 줄 아는 거였어?” 후배가 쑥스러운 듯 대답했다. “읽어봐달라고 부탁드리는데, 아무렇게나 드릴 수도 없고요… 편집이야 금방 배울 수 있는 거니까 배워두면 좋잖아요.” 후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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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나의 병실 친구, 강명자씨 지면기사
전신마취 할 일이 생겼다. 수술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병원이나 수술에 관한 것이 아니다. 나의 병실친구, 강명자(가명)씨의 이야기다. 느닷없이 큰 수술을 받게 되어 뒤숭숭한 마음으로 나는 4인실 간호병동에 입원했다. 운 좋게 첫날은 아무도 없었기에 창가 쪽 명당자리에 당첨이 되어 짐을 풀었다. 짐이 좀 많았다. 열두 권의 책을 비롯해 독서대와 가습기, 허리쿠션과 작은 스탠드, 안대, 텀블러와 빨대컵, 아무튼 병원에 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편의를 도모해줄 온갖 사물들을 챙겨와 제자리를 잡아주니 커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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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무명(無名)을 위하여 지면기사
19세기 파리에서 주로 활동한 르누아르에게는 같은 도시에서 화상(畫商)으로 일하던 볼라르(Ambroise Vollard, 1866~1939)라는 친구가 있었다. 르누아르가 볼라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고전주의 회화에 반기를 들고 빛의 오묘함을 따뜻한 색채로 표현하는 새로운 화풍을 시도하고 있었지만, 평론가들의 냉대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평소 인상파 회화를 이해하고 르누아르의 가능성을 믿었던 볼라르는 그의 전기를 펴내고 작품을 사들이는 한편, 전시회를 열어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사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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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절에서의 하룻밤 지면기사
무늬만 애국자인 필자도 넉달 동안 거의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뉴스만 추적하고 있었다. 헌법재판소의 선고가 내려진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니 그것도 준비가 필요했다. 전북 고창에 있는 사찰 선운사의 템플스테이(templestay)를 다녀온 것은 4월16·17일이었다. 템플스테이를 끝내면 절에서는 ‘체험 후기’를 써달라고 용지를 내민다. 아래는 그때 제출한 글을 바탕으로 새롭게 쓴 것이다. 미당(未堂)의 시에서처럼 동백꽃을 보러 왔다가 아니 피어 번번이 돌아간 선운사. 문득 지금 계절이면 되겠구나 싶어 템플스테이를 신청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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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옹기종기 붙어있는 마음들 지면기사
인천 만석동 괭이부리마을 쪽방촌 고단함보단 따뜻함이 기억에 남아 구분하지 않고 다닥다닥 붙어살아 따뜻하고 정감있게 자라는 아이들 다정한 온기, 삭막한 시대의 유산 인천 만석동 괭이부리마을 쪽방촌에 다녀왔다. 다닥다닥 붙어 있어 햇볕 한 조각 들지 않고, 여전히 연탄을 때고, 집 앞에 장독대를 두고 김치를 담가 보관하는. 누군가 장독대 뚜껑을 받쳐둔 벽돌을 자주 훔쳐간 모양인지, 한 번만 더 훔쳐 가면 된통 욕먹을 각오를 단단히 하라는 경고가 적힌 종이쪽지도 보았다. 반쯤 부수어져 나간 집을 그대로 두고 있어 위험해 보이기도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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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50개월 할부와 노이즈 캔슬링 지면기사
무이자 푸시 알림 보고 산 이어폰 세계 곳곳 전쟁·학살 끊이지 않고 대통령이 쿠데타 일으킨 우리나라 갈등과 혼란속 소통하며 사는 세상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고 싶었을까 스트레스 받을 때 소소한 소비를 하는 습관이 생겼다. 결국은 더 스트레스 받을 월말정산을 불러오는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사람이 어리석은 일 하나쯤은 데리고 살아야 인간미가 있다는 억지 변명을 주워섬겨보는 것이다. 소비에는 심리 한계선이 작동한다. ‘손발이 닳도록 일을 하며 이만한 돈 못 쓰냐’의 이만한 돈이 내게는 오만원쯤 된다. 바지를 하나 사려다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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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만화방의 추억 지면기사
딸아이와 함께 찾는 추억의 장소 몰래 드나들며 만화가 꿈 키워와 우아하고 싶어 택한 소설가의 길 지금 생각해보면 참 바보같은 일 좋아했던 옛 만화들 다시 찾고파 딸아이는 이제 열한 살이다. 초등학교 4학년. 부릉부릉 사춘기 시동을 거는 중이라 여간 새초롬한 게 아니다. 일 이년 더 지난다면 아마 말 붙이기도 어렵겠지. 제 방문 쾅 닫고 처박히는 일이 일상이 될 것이다. 그나마 아직은 “엄마랑 어디 좀 갈래?” 할 때 주섬주섬 따라 나오니 다행이랄 밖에. 그래서 나는 종종 딸아이와 만화방엘 간다. 서너 시간 놀다 오는데 5·6만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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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게으른 노트 농사 지면기사
뗄수 없는 나의 수족, 종이와 필기구 감정의 기후 나타낸 보이지 않는 밭 간간히 옮겨 적는 흥미로운 문장들 물컵의 표면 장력처럼 나를 지탱해 전생에 나무늘보가 아니었을까. 더없이 빈둥거리는, 혹은 빈둥거리고 싶어하는 나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어릴 때부터 호기심은 많지만 금방 싫증내며 다른데 기웃거리기를 좋아했다. 해야 할 일들을 지속적으로 게을리 하다보니 호기심과 그것을 메모로 번역하는 일밖에 남지 않았고 어느덧 소설을 쓰게 되었다. 메모 또한 한 두 해 만에 생긴 버릇은 아니다. 기자를 하던 시기에 취재노트를 쓰다가 백수가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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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겸재 그림의 여정 지면기사
미술품 애호가로서 심환지의 혜안 정선 필력에 대한 인정과 신뢰 커 생의 마지막을 함께한 ‘인왕제색도’ 2021년 삼성가 품 떠나 국가에 기증 가치 알아보는 안목 가늠할 수 있어 ‘무릇 물건은 항상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돌아가므로 내가 진실로 그림을 좋아하여 이 그림을 얻었으나, 나를 이어서 이 그림을 사랑할 자로 후세에 또 어떤 이가 있을까’. 조선 후기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심환지(沈煥之, 1730~1802)는 노년에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화첩을 얻고 자신처럼 미래의 누군가 역시 이 그림을 아껴주기를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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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틈새에 낀 옛날집 지면기사
슬레이트 지붕 벗겨진 페인트 칙칙 이 집에 들어온후 좋은일 많이 안겨 도심서 단독주택 통째로 쓰는 자유 스페인어 강사와 나눠 썼던 경험도 책 만들고 글·인터뷰 꾸준히 이어져 주인할머니가 지난해 12월, 세상을 떠났다. 필자가 임대해 쓰고 있는 사무실 공간은 오래된 옛날집이다. 2019년, 필자가 이곳에 들어오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할머니의 권유 때문이었다. 당시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해 이 집을 떠나 바로 옆의 이동식주택으로 옮겨갔다. 옛날집은 그렇게 2~3년간 비어있었다. 할머니는 필자를 볼 때마다 “우리집에 들어올 사람 없을까?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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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우리가 A.I.에게 도둑맞은 것들 지면기사
세상 속도에 적응하자고 달래보다 이런 편리함을 원했었나… 숨가빠 노동서 해방되면 행복할까 고민도 힘듦·불편함은 매순간 사랑하는 것 자동화에 내어준 진짜 삶 되찾을 때 도서관 화장실에 갔다가 문이 자동으로 열리는 바람에 당황했다. 손가락 까닥 안하고 묵직한 문을 통과하는데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편리해서 좋은 게 아니라 그 반대였다. 화장실 문 정도는 내 손으로 충분히 열 수 있는데 싶었다. 내가 경험해야 할 소중한 무언가를 빼앗긴 기분도 들었다. 한 시절에서 다른 시절로 건너갈 때 우리는 ‘문을 연다’고 말한다. 사춘기를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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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팔리는 노동 지면기사
옷을 사는 기준은 튼튼한가·편한가 작업복 ‘워크웨어’ 검색어로 사용 해외 빈티지숍 재킷 하나에 30만원 일부러 닳고 해지고 기름때 만들어 노동에 대해 갖는 이중적 인식 민망 옷은 주로 온라인으로 사는 편이다. 아무래도 직접 입어보고 살 수 없기 때문에 실패할 위험성이 높지만 판매상들이 가게 세를 내고 좌판을 벌이지 않으니 조금이라도 싸지 않겠나 하는 경제성의 원리를 궁리하는 것이다. 온라인으로 옷을 살 때 실패할 확률을 줄이려면 의류회사에서 써 놓은 용어들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어야 직접 보지 않고도 옷감의 두께나 강도, 촉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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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우롱차를 마시며 지면기사
논문 속 일제강점기 시절 이야기 ‘현재와 유사’ 정신없이 빠져들어 1930년대 이애리수라는 가수 예시 서부지법 폭동 드라마 ‘지옥’ 데자뷔 역사 속 사실 수학공식처럼 반복돼 꽤 비싼 값을 치르고 대만 우롱차를 샀다. 비싼 차를 샀으니 다기도 고운 것으로 골라야지. 차판 위에 자사호와 공도배, 찻잔을 늘어놓았지만 나는 전기 주전자에서 펄펄 끓는 물을 연신 부어가며 품위도 없이 벌컥벌컥 차를 들이켰다.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상하고 우아한 독서 풍경을 자랑하고 싶지만 실상은 영 아니다. 나는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선 뜨거운 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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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도서관에서 사람 읽기 지면기사
옆사람 나가자 자리 채운 할아버지 책 들여다보는 시늉 않고 잠 청해 책이 없다고 미워할 일인가 생각 책 대신 할아버지 읽기 ‘상상’ 시작 ‘사물·사람’ 어항 속 열대어처럼 놓여 갈수록 집중력이 약해져서 큰일이다. 하나에 몰두해 옆길로 새지 않는 시간을 일종의 모래시계로 친다면, 나는 예전의 절반만한 크기의 모래시계밖에 없다. 그나마 집중력을 길게 유지할 수 있는 곳이 도서관인데, 책 기둥을 토템 삼아 디지털 도파민에서 달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도 창가쪽 자리에 앉아 겨울나무와 나란히 마주 보고 책장을 펼쳤다. 내 옆 자리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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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묵연(墨緣), 만나야 할 그림은 꼭 만난다 지면기사
명대 서화 특별전 作 ‘국화 감상’에 조선인 도장… ‘안기’ 선생 소장품 청나라서 활동한 조선인 후예로서 中 4대 서화감정가, 동양미술사 중요 묵연 좇아 한걸음 또다른 인연 기대 2월의 첫날, 중국 명대 서화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경기도박물관을 찾았다. 전시된 작품들을 감상하는 것도 기대됐지만, 사실 그곳에서 ‘그분’의 흔적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설레고 있었다. 작품 하나하나를 찬찬히 살펴보던 중 좌우로 긴 두루마리 그림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그 작품은 명나라의 대표적인 문인화가 심주(沈周, 1427~1509)의 ‘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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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낙락장송의 죽음과… 지면기사
첫눈의 환호성, 재난 될 줄 미처 몰라 나무 명줄 끊으려 하는 계엄군 같아 허약해져가는 숲의 모습 걱정스러워 막무가내 국헌문란 언제까지 지켜보나 과정 중요하단 말로 스스로를 달래 날이 풀리면서 슬슬 산에나 가보자는 심정으로 며칠 전 청계산에 올랐다. 해의 방향이 겨울과는 확연히 다르다. 햇볕도 양광하다. 대동강물이 풀린다는 우수 무렵 같다. 벌써 오래 전에 하천변의 버드나무는 은은한 푸른 빛을 뿜어 올리기 시작했다. 요즘 산에 가본 분들은 알 것이다. 얼마나 처참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는지. 산 초입에 절반이 뚝 꺾인 소나무가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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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꿈을 다시 데려오고 싶다 지면기사
한강 ‘채식주의자’ 등장인물 영혜 꿈은 정신병자의 말로 비하 당해 문 닫지 못한 채 달리는 택배차량 밥 먹는 작은 동물 쫓아내는 인간 현실 중요한 세상, 사랑할 틈 없어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어렵지 않은 구절들로 써져 있지만, 사실은 이해하기 어려운 소설이다. 포스트잇을 잔뜩 붙인 책과 빼곡히 써내려간 감상노트를 들고, 독자들과 묻고 대답하며 소설 속에 숨겨진 비밀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던 중, 소설 속 등장인물인 영혜를 조현병 환자로 규정하는 신문 칼럼을 읽고 깜짝 놀랐다. 작가가 영혜를 병원에 입원시킨 이유는, 그가 치료를 받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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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누가 죄인인가 -지식인의 배반 지면기사
수백 수천의 심장을 움직이는 문학 尹 블랙리스트에 이름 올리지 못해 작가로서 책무 다하지 못한 것 같아 국민이 지켜낸 민주공화국 무너뜨린 12·3 불법계엄 시대 오적 누구인가 우리에게 실존주의 사상으로 익숙한 프랑스 철학자 샤르트르는 “언어는 장전된 권총과 같다”고 말했다. 조금 유머를 보태자면 이 말은 현실에서의 무력함에 한숨짓는 INFP 내향인 작가들을 격려하는 말일 테다. 물질의 소유가 모든 것을 규정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진 것 없이 펜대 하나에 의지하고 있는 작가들은 문학의 무용함에 좌절한다. 굶주린 사람에게는 빵 한 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