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인일보 '기지촌 할머니들 고단한 삶' 보도후...

    경인일보 '기지촌 할머니들 고단한 삶' 보도후... 지면기사

    '양공주' '양색시'라는 멸시 속에서도 가족을 부양하고, 한때는 정부의 관리까지 받았던 미군 기지촌 할머니들의 슬픈 인생이야기를 담은 시리즈 보도 이후 기지촌 할머니들에 대한 온정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경인일보 '한많은 음지인생 기지촌할머니들의 고난한 삶' 시리즈 참조).의정부시 청년 포럼 봉사회와 경기북부 참사랑 장애인 후원회, 의정부시 청소년 지도 협의회, 경기북부 노인공경회 등 30여 민간 단체와 종교단체, 각종 요식업, 의료기관, 의류회사, 개인 독지가들이 의정부 빼벌마을 등 북부지역 기지촌을 찾아 이 할머니들을 위로하고 있다.지난 19일 의정부시 의정부2동에서 일식집을 운영하는 정경성(49)씨는 부인 유영미(40)씨와 아들 종현(경민중 2년) 종구(경민중 1년)군과 김진경(39)씨 등 전 직원과 함께 기지촌인 빼벌마을을 찾아 할머니들에게 준비해 간 다과와 음식을 대접했다.정씨는 "의정부시에서 10년 넘게 일식집을 운영하면서도 가릉동 노랑다리와 고산동 빼벌 기지촌 할머니들이 이렇게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지 몰랐다"며 "할머니들의 한 많은 삶을 이해하고 보듬어 줄 가족이 돼 여생이라도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찾게 됐다"고 말했다.양주시 덕정동의 한 목사는 이달 초 기지촌 할머니들에게 전달해 달라며 경인일보 북부권 취재본부에 금일봉을 전달해 왔다.이 목사는 "몇 해 전 의정부·파주·동두천시 등 경기북부지역 기지촌 할머니들을 보고 이들의 딱한 삶을 주변에 알리고 도움의 손길을 주고 싶었지만 여건이 따라주지 않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며 "그때 못 다 한 죄송한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기사를 보고 이렇게 금일봉을 내게 됐다"고 했다.또 어려웠던 시절 기지촌에서 생활하며 학비와 생계비를 부쳐왔던 누나를 어느 순간부터 잊고 살았다는 한 독지가는 "내 잘못으로 누나를 잃어버렸지만 이제는 누님을 찾고 싶어 이렇게 기지촌을 찾아 전전하고 있다"며 "누님을 버린 죄책감에 그동안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빼벌마을 윤순자(83·가명) 할머니는 "보도 이후 매주 많은 사람이 가족처럼 우리들을 찾아와 즐거운 시

  • [기지촌할머니들 고단한삶]정부지원 사각지대

    [기지촌할머니들 고단한삶]정부지원 사각지대 지면기사

    헐벗고 굶주렸던 60~70년대 지긋지긋한 가난에 내몰리고, 미군 철수를 막으려는 정부의 은밀한 지원속에 기지촌 생활을 시작한 꽃다운 나이의 여성들.이제는 70세를 훌쩍 넘긴 할머니들이 됐지만 관계기관에서는 이들의 실태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자신들이 선택한 삶이니 스스로 알아서 해라'는 싸늘한 시각만을 드러 낼 뿐이다.전란 후 어려웠던 시기에 외화벌이의 애국자라며 한때 기지촌여성들과 기지촌 주변의 유흥업소등에 면세혜택까지 줬던 정부였지만 이제는 늙고 병든 이들을 외면하고 있다.경인일보 취재팀이 확인한 결과 경기북부지역에는 53명의 기지촌 출신 할머니들이 의정부와 동두천, 파주 등 미군 기지촌 주변을 떠나지 못한채 여전히 힘겨운 삶을 살고 있다.그러나 이같은 숫자는 입소문을 통해 확인한 것으로 경기도는 물론 해당 지방자치단체들도 이들 기지촌 할머니들에 대한 정확한 실태나 현황을 파악하고 있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다.실제 지난 2005년 경기도 제2청이 수억원의 예산을 들여 '성매매특별법과 기지촌 여성들', '기지촌주변 성매매피해여성 상담지원 사례집'등을 발간하고 2003년 '경기북부 기지촌지역 성매매근절을 위한 피해여성지원사업보고회'등을 갖는등 기지촌에 관심을 가졌지만 대부분 기지촌내 외국인 여성들에 대한 것일 뿐 이들 할머니들에 대한 자료는 전혀 없었다.한때 기지촌 출신 할머니들에 대해 실태조사를 하려 했던 정성호(무소속· 동두천·양주)국회의원은 "지난 2005년에 기지촌출신 할머니들이 힘겨운 삶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들에 대한 실태를 조사해 그 결과를 가지고 정책제안의 자료로 삼으려 했었다"며 "그러나 조사를 의뢰받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이들 할머니들이 개인 노출을 피해 실태조사를 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정 의원은 "60~70년대 기지촌 생활을 한 기지촌 할머니들은 당시의 시대상황을 보면 지금의 기지촌 여성들과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며 "이들 할머니들에 대한 정확한 실태 파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김환철 경기북부정책개발 연구원장도 "정부차원의 관심과 지원

  • [기지촌할머니들 고단한삶]'빼벌'서 내몰릴판

    [기지촌할머니들 고단한삶]'빼벌'서 내몰릴판 지면기사

    가족과 정부로부터 버림받은 의정부 미군기지촌 '빼벌'마을 할머니들이 유일하게 남은 보금자리에서 마저 내쫓길 위기에 처했다.가릉동 '노랑다리'와 함께 의정부지역 양대 미군기지촌 중 하나인 '빼벌'에는 현재 23명의 할머니들이 13채의 허름한 판잣집에서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다.판잣집 13채서 23명 모진 삶가난에 내몰려 기지촌으로 들어왔고 한때는 정부의 관리를 받기도 한 이들 60~70대 기지촌 할머니들은 오갈데 없이 지금은 동사무소에서 주는 한달 10만~30만원의 생활지원금으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그러나 빼벌마을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모 종중측이 최근 평당 4천원씩 받던 토지세를 2만원으로 인상하고 이 돈을 내지 못 할 경우 집을 비워줄 것을 요구하면서 할머니들은 큰 시름에 빠졌다.별안간 토지세 인상 "집 비워라"먹고 살기위해 기지촌으로 흘러들어와 아무렇게나 판잣집을 짓고, 종중에 약간의 토지세만 내고 걱정없이 살던 시절도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주변의 택지개발 등으로 거세진 개발압력은 이처럼 빼벌 할머니들의 시름을 깊게했다.종중과의 땅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99년.종중 땅을 관리하던 산지기 최모씨가 숨진 이후 할머니들은 이씨 종중과 처음으로 정식 임대계약서를 작성했다.계약서엔 '대지사용료를 주변 대지의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연 10% 범위 내에서 부과함'이라고 명시되어 있고 '건물이 있는 한 이 계약서 내용이 유용함'이라는 단서조항도 붙어 있었지만 힘없는 할머니들에게 계약서는 종이쪽지에 불과했다.병든몸 이끌고 어디로 갈지…80년대 초까지도 평당 1천~2천500원 정도의 토지세를 받던 종중측이 토지세를 인상하고 할머니들을 상대로 토지명도소송을 진행중이다.김지순(78·가명)할머니는 "쪽방 11개가 있는,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53평)에서 4명의 할머니들이 함께 살고 있는데 그동안 토지세로 21만3천원을 내왔다"며 "할머니들이 받는 생활지원금을 모두 줘도 토지세를 못 낼 형편"이라고 하소연했다.이자연 (73·가명)할머니는 "우리가 무슨 돈이 있다고 병든 몸 이끌고 어디로 가라는

  • [기지촌할머니들 고단한삶]지긋지긋한 병마

    [기지촌할머니들 고단한삶]지긋지긋한 병마 지면기사

    의정부시 가릉동 미군 캠프 스탠리 주변 빼벌 마을의 쪽방촌.부대 정문으로 향하는 언덕 옆 골목길에는 낡은 판잣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보통 6~7개의 쪽방이 있는 판잣집들은 기지촌 여성들이 집단으로 생활해왔지만 지금은 미군이 빠져 나가 대부분 비어 있었다.언덕을 따라 한참을 오른 뒤 부대 담장 바로 밑에 있는 한 판잣집에 들어섰다. 꽃다운 나이에 이 집 11개의 쪽방에 들어왔던 방주인들은 돌봐주는 이 없이 늙고 병들어 쓸쓸히 세상을 떠났고 이제는 4명의 할머니만이 남아 서로를 의지하며 살고 있었다.빼벌 최초의 기지촌 여성으로 알려진 윤순자(83·가명) 할머니.한국전 당시 고향인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남편과 시댁식구를 모두 잃고 혼자 서울로 내려와 거리를 전전하던 윤 할머니는 23살 때 먹고살기 위해 빼벌로 들어왔다. 이후 흑인 병사와 사랑에 빠져 아들(53)을 낳았지만 남편은 얼마 뒤 귀국해버렸고 혼자 힘겹게 아들을 키웠다.하지만 주위의 손가락질과 놀림에 고통스러워하는 아들을 보는 것이 힘들었던 윤 할머니는 결국 초등학교 때 하나뿐인 혈육을 미국으로 입양보냈다."정말 키워보고 싶었어. 하지만 나와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미국이 낫다고 생각했지." 아들 이야기만 나오면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는 윤 할머니는 위궤양 때문에 일주일에 서너번씩 의료원을 다니고 있다. 기지촌 여성 대부분이 앓고 있는 질병이다. 주위에서는 윤 할머니의 병이 암이며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바로 옆 쪽방에 살고 있는 고현성(76·가명) 할머니. 수년 전 연탄가스 중독으로 생긴 기억상실증 때문에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했다. 고향인 개성에서 19살 때 피란 온 고 할머니도 서울 거리를 떠돌다 먹고살기 위해 이곳 빼벌까지 오게 됐다."혼자여선지 늘 아이를 갖고 싶어 했어요. 미군하고 살 때 수술까지 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죠. 아마도 우리 일 때문일겁니다."고 할머니를 옆에서 돌봐주고 있는 전춘자(68·가명) 할머니는 최근 기관지염까지 생겨 고생하는 고 할머니를 위해서라도 자신이 더 오래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1970년 빼벌에

  • [기지촌할머니들 고단한삶]나, 그리고 아무도 없다

    [기지촌할머니들 고단한삶]나, 그리고 아무도 없다 지면기사

    의정부, 동두천 등 경기북부에 50여명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진 '양공주' 출신 기지촌 할머니들에게 '가족'은 없다. 있었지만 과거를 숨기고픈 할머니들 스스로가 외면했고 가족도 얼굴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여기에 세월이 가면서 '가족'은 이들의 머릿속에서 영영 사라져버리고 말았다.미2사단 캠프 레드클라우드 주변에 위치한 의정부시 가릉동 기지촌(일명 노랑다리). 고산동 빼벌마을과 함께 의정부지역 양대 기지촌 중 하나인 이곳에서 이정은(73·가명), 김진숙(76·가명)할머니를 만났다.3평 남짓한 쪽방에는 파킨슨병으로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이 할머니가 두터운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고 김 할머니는 5년이 다되도록 불평 한마디 없이 이런 이 할머니의 병수발을 들고 있다. "북한이 고향인 저 이는 한국전쟁 때 혼자 내려와 대구와 부산을 떠돌아 다녔어. 지지리 복도 없지. 만나는 남자마다 저 이를 기지촌으로 끌고 가려 했으니까 말야." 김 할머니는 이 할머니의 뒤엉켜버린 인생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 결국 서른살 후반쯤 돼서 여기 노랑다리까지 흘러들어오게 됐어. 그리고 나를 만났지. 쪽방에서만 40여년을 함께 살았어."김 할머니는 끝까지 자신의 얘기는 하지 않았다.다만, "저 이랑 한날 한시에 같이 죽었으면 좋겠어… 누가 돌봐 줄 사람도 없는데…지금까지 박복했지만 마지막으로 함께 죽는 복이 있었으면 좋겠어"라는 말만 되뇌였다.고산동 빼벌마을에서 만난 최복순(56·가명)씨. 경상도가 고향인 최씨도 30년전 이곳에 들어왔다. 2남4녀중 맏딸인 최씨는 초등학교만 간신히 나온 뒤 의정부 작은 아버지 집에서 식모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사촌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그 충격으로 가출한 최씨는 기지촌 여성이 됐다."한때는 돈을 제법 벌어 여동생 둘을 중학교까지 졸업시켰어요. 하지만 동생들이 내가 양공주란 걸 알고는 연락을 끊었죠. 가족도 마찬가지고… 10년 전 나머지 동생들이 대구 어디에 산다는 소식을 들은 게 전부예요. 이제와서 가족을 찾으면 뭐 하겠습니까."최씨는 더이상 가족이야기를 하는 것을 바라

  • [기지촌할머니들 고단한삶]기지촌 변천사

    [기지촌할머니들 고단한삶]기지촌 변천사 지면기사

    60~70년대, 전란후 먹고 살 것이 없었던 상황에서 특히 빈민층의 여성들은 물질적으로 풍요한 기지촌 주변으로 몰려들었다.속칭 양공주와 양색시로 불렸던 이들 대부분은 가족을 먹여살리기위해, 또는 동생 학비를 벌기위해 상경했다 인신매매단에 잡혀 기지촌으로 유입됐거나 자발적으로 기지촌 주변 업소의 종업원으로 일을 했다.이들 모두는 좋은 미군을 만나 이민가는 것을 유일한 탈출구로 동경했다.이 때문에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빠르게 기지촌이 형성됐고 이들 기지촌에서 흘러나온 외화는 한국 경제의 기틀을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미군을 국내에 잡아두려는 정부의 속내가 맞아떨어지면서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시작된 시기이기도 했다.실제 지난 71년 미군은 한국 정부에 기지촌 정화사업을 요구했다. 미군들이 불결한 환경속에서 성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미군 철수설이 나오던 60년대말 6만2천여명에 달하던 주한미군이 4만5천여명으로 줄어 불안해하던 한국 정부는 미군의 이런 정화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전국 기지촌에 성병 진료소를 세우도록했고 기지촌 여성들을 대상으로 미군 상대 에티켓과 행동요령을 교육했다. 정부가 기지촌 매춘에 깊숙이 개입하고 집중적으로 관리, 단속을 벌여나가면서 기지촌 매춘은 공창의 성격을 갖게 됐다.이후 80년말부터 기지촌 매춘은 과거 전통적인 매춘과는 전혀 다른 산업형의 성격을 띠게 됐다.유입되는 여성들도 생계형보다는 호스티스, 마사지걸 등 서비스형 종사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이들은 철저히 '돈'에 따라 움직여 이직도 심했다.특히 90년대 접어들면서 미군이 기지촌 여성을 잔인하게 살해한 윤금이씨 사건 등이 터지자 위험하고 보수가 적은 기지촌에서 한국 여성들이 급격히 떠나는 현상이 빚어졌다. 이후 포주들은 이 공백을 현재 필리핀과 러시아 여성들을 통해 메워나가고 있다.

  • [기지촌할머니들 고단한삶·미군기지 이전과 기지촌의 변화]

    [기지촌할머니들 고단한삶·미군기지 이전과 기지촌의 변화] 지면기사

    전란 후 가난했던 60~70년대. 달랑 몸뚱이 하나만 가지고 미군기지촌으로 뛰어든 꽃다운 여성들이 있었다. '양공주' '양색시'라는 손가락질과 냉대속에서도 이들은 분명 한국경제의 밑거름이 된 '달러벌이의 주역'이었고, 이제는 교수가 된 동생에게 학비를 부쳐주던 숨겨진 누나였다. 그러나 4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남은 것이라곤 쭈글쭈글해진 몸뚱이와 지긋지긋 한 병마 뿐. 차가운 쪽방에서 죽음만 기다리는 이들 기지촌 할머니들의 질곡의 삶을 취재했다. 이라크전쟁으로 주한미군이 빠져나가기 시작한 2003년 이후 파주·동두천·의정부 등지의 경기북부 주요 미군 기지촌에는 급격한 변화의 바람이 불어 닥쳤다.가족 부양형인 60·70년대의 '전통매춘'이 사라지고 90년대 이후 서비스위주의 산업형 매춘이 주를 이루던 상황에서 미군 감소는 기지촌 주변 젊은 여성들의 대량 이직을 불러왔다. 그리고 그들이 떠난 빈 자리는 인건비가 싼 필리핀과 러시아 등 외국여성들의 차지가 됐다.하지만 환갑도 훨씬 지난 기지촌여성 출신 할머니들이 기지촌을 떠나지 못한 채 집단으로 몰려 사는 곳이 있다. 지난 20일 오후 의정부시 고산동 '빼벌'마을.택지개발지역을 지나 도착한 빼벌 마을은 영락없는 70년대의 허름한 동네,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미군 캠프 스탠리 정문으로 가는 폭 5 정도의 도로를 따라 단층의 세탁소,튀김집,양품점 등이 눈에 들어왔다. 최소 병력만 남기고 미군이 모두 빠져나간 부대 앞은 사람 구경하기조차 쉽지 않을 만큼 썰렁했다.가게 뒤편으로 2명이 가까스로 함께 걸어 갈 수 있을 정도 넓이의 뒷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 집 벽마다 컬러 스프레이로 'Amazing house','LA club'등 미군을 끌기위한 문구들이 어지럽게 적혀 있었다.그리고 잠시후 ,낯선 이를 보려는 눈이 쪽문을 빠끔히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한결같이 60대 이상의 할머니들이었다.빼벌에는 현재 23명의 기지촌여성 출신 할머니들이 모여 산다.빼벌이 좋아서가 아니다. 갈 곳도, 기댈 곳도 없는 할머니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의지하며 살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