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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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문해력과 교육격차, 그리고 책상머리 공약 지면기사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문해력이 일선 교육현장의 고민거리로 떠올랐다. 문해력은 단순히 글을 읽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이해하는 능력까지 포함한다. 문해력이 있어야 타인과 제대로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문해력은 인간을 세상과 연결하는 가장 기초적인 능력인 셈이다.스마트폰 대중화로 유튜브, 숏폼 등 영상을 시청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문해력은 매년 떨어지고 있다. 국제학업성취도(PISA) 지표에 따르면 2022년 한국 학생들의 '읽기' 분야 평균 점수는 515점으로 2009년(539점)보다 크게 떨어졌다. 문해력 저하는 교육격차도 불러온다. 같은 지표에서 읽기분야 기초학력 미달 학생 비율은 2009년 5.8%에서 2022년 14.7%로 3배 가까이 증가했다.이에 일선 교육 현장에선 문해력 교육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대개 책을 읽고 서로 의견을 나눠야 문해력을 늘릴 수 있는데, 이미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책 대신 스마트폰이 익숙하다 보니 교육에 어려움이 생긴다는 것이다. '읽기 따라잡기' 프로그램 등 전문성이 있는 교사가 학생과 1대 1로 만나 지도하는 교육이 방안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인력, 예산문제로 확대되지 못하고 있다.이 같은 문제는 다문화 가정에서 더욱 심하다. 다문화 가정 자녀들의 한국어·한국문화 적응은 느린 편인데,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또래들과 한국어로 의사소통할 기회가 줄면서 언어 발달도 뒤처졌다. 다문화 가정 자녀들이 한국 가정의 자녀보다 언어 발달이 1~2년은 더 느리다는 게 다문화가정 센터 관계자들의 설명이다.이처럼 현장에서 느끼는 교육 문제는 구체적이지만 이번 22대 총선에 출마한 후보들의 교육 공약들은 대개 인프라 확충에만 머물러 있다. 교육특구지정, 미래교육도시 선포 등이 대표적이다. 과밀학급이 심한 지역은 학교 설립, 교육열이 심한 지역은 사교육비 경감 등도 단골 공약이다.교육 현장과 유권자들은 이런 책상머리 공약이 아닌 맞춤형·현장형 공약을 필요로 한다. 총선을 17일 남긴 지금, 후보들의 정성스러운 벼락치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김동한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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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선거철에 하는 뻔한 요구 지면기사
"빨간당을 뽑아야 해, 파란당을 뽑아야 해?"며칠 전 한 지인이 내게 물었다. 지금 정치부에 있지 않냐며, 어느 당이 더 괜찮은지 알려달라는 말도 함께였다. 진지한 물음은 아니었다. 선거를 앞두고 가볍게 던져진 대화 요소 중 하나였지만, 나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자연스러운 흐름으로는 "후보자의 면면과 공약을 보고 결정하라"고 대답하는 게 맞다. 국민을 대표해 나랏일, 지역의 일을 할 사람을 뽑는 게 선거가 아닌가. 의아하게도 선뜻 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선거구 획정은 선거일을 불과 40일가량 앞두고 끝났다. 선거가 20일 밖에 남지 않은 현재 시점에 후보자들은 공약을 내세우기보다는 단일화와 입당·창당, '친윤·친명' 등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다. 일부 지역은 출마선언도 채 다 이뤄지지 않았다.유권자들은 자연스레 공약과 후보자 개인보다는 정당을 판단기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최근 이뤄지고 있는 여러 여론조사만 하더라도 거대양당에 기울어진 현 정치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이번 총선은 정책이 실종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1~22일 총선 후보자 등록에 이어 28일부터는 공식적인 선거운동이 시작된다. 이 기간에는 후보들이 정책 현안을 내세우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정권심판론' '야당심판론'을 강조하며 정당에 기댄 목소리만이 선거판을 가득 메우지 않을까 우려된다.선거 때마다 매번 하는 요구지만 다시 한 번 부탁해본다. 지금부터라도 후보들은 지역발전을 위한 공약을 제시하고, 정책을 무기로 선거운동에 나서주길 바란다. 후보들이 케케묵은 공약이 아닌 현실적이고 참신한 공약으로 선거에 임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정책과 공약으로 유권자의 표심을 공략하는 게 국회의원 선거의 본질이다. "후보자의 면면과 공약을 보라"는 대답이 자연스러운 선거가 되길 기원한다./유진주 인천본사 정치부 기자 yoopearl@kyeongin.com유진주 인천본사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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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새로 쓰는 지역주의 지면기사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 주민공동체 '과천풀뿌리'는 선거철마다 자신들이 누구인지 먼저 설명하기 바빴다. 2014년부터 세 번의 지방선거에서 내내 '진짜 주민후보'라며 무소속 후보들을 배출해왔다. 수십명 수기투표로 어엿한 공천 절차도 매번 거쳤고, 형형색색 옷을 맞춰 입은 봉사원들은 개인 차량까지 동원해 선거운동에 나섰다. 초심자의 행운이랄까. 첫 선거에서 시의원 2명이 당선된 뒤로는 시의원이든 시장이든 낙선의 연속이었다. 눈물의 10년 분투기를 뒤로하고도 과천풀뿌리는 오는 2026년 지방선거를 목표로 다시 신발끈을 조여매고 있다.'직접행동영등포당'은 아예 주민들의 당(黨)을 차리겠다며 선거관리위원회부터 찾았다. 처음부터 당 조직을 표방했던 건 아니다. 10여년 동안 마을공동체 사업에 참여하는 마을법인으로 활동해왔으나, 2018년 새로운 구청장이 들어오면서는 더는 사업에 선정될 수 없었다. 구심을 잃은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건 직접 세력이 되는 것뿐이었다. 지방선거를 한 해 앞둔 2021년 창당 서류를 접수했다. 출마는 무산됐어도 선거법을 요리조리 피해 홍보 현수막도 걸고 골목에서 명함도 돌렸다. 오해한 주민들의 신고마저 접수돼 '적당히만 해달라'는 선관위 전화를 받기도 했다.출발점도, 걸어온 길도 다르지만 세간의 의아함에 두 단체가 내놓는 답변은 궤를 같이한다. 구자동 과천풀뿌리 공동대표는 "우리 지역 현안을 여기 살고 있는 우리가 정하겠다는 게 그렇게 의아한 일인지, 지역 일은 지역주민들이 가장 잘 알지 않을까요?"라며 반문했고, 이용희 직접행동영등포당 대표는 "정책 결정 구조에 정작 직접 영향을 받는 주민들은 빠져 있다"며 "구청장이 되어서 주민참여 비중을 대폭 늘리는 게 활동 최종 목표"라며 너스레를 떨었다.우리 동네 일은 우리가 충분히 알고 결정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 결정할 기회라도 달라는 것이 이들 주장이다. 현장에서도 터부시되던 목소리에 의외의 국가기관이 눈길 가는 의견을 냈다. 헌법재판소는 "지역정당 창당을 금지하는 정당법은 위헌"이라며 청구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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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티파니에서 아침을 지면기사
'올드머니(Old Money)'.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이어지는 패션계 키워드다. 오래된 돈, 즉 세대를 거듭해 부를 축적해온 상류층의 패션 스타일을 지칭한다. 루이비통, 발렌시아가, 구찌 등 명품의 빅로고를 통해 대놓고 부를 과시하는 게 아닌, 로고 노출은 피하되 고급 원단으로 은은하게 부를 표현하는 것을 '올드머니 룩'이라 부른다. '조용한 럭셔리'로도 통용된다.올드머니 룩을 연상하면 문득 해외 고전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이 떠오른다. 올림머리에 선글라스와 진주 목걸이로 우아함을 더한 오드리 헵번의 멋이 돋보여서다. 해당 영화는 검은색 드레스와 검은 장갑을 착용한 홀리(오드리 헵번 분)가 보석 가게 티파니 앞에서 빵을 든 장면으로 유명하다. 영화 속 한껏 차려입은 홀리는 한 손엔 크루아상, 한 손엔 커피를 든 채 티파니 매장 쇼윈도 앞에 선다. 쇼윈도엔 값비싼 다이아몬드가 진열돼 있다. 홀리는 다이몬드를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다. 크루아상과 커피를 먹으면서.최근 경기도내 백화점이나 대형 쇼핑몰을 둘러보면 대다수가 쇼윈도 속 다이아몬드를 바라만 보는 홀리와도 비슷한 모습이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가 부담으로 다가와서다. 에르메스 등 글로벌 명품 브랜드들은 연초부터 가격 인상을 단행했고, 국내 기업 제품마저도 가격이 수차례 오른다. 글로벌 경기 침체 장기화에 '보복소비'도 옛말이 된 상황에서 소비자 물가는 끝도 없이 오르고만 있다.이 같은 상황 속 백화점에서 소비자가 갈 만한 곳은 F&B(식음료) 매장 정도다. 유명 맛집이 들어선 백화점엔 수시로 긴줄이 생긴다. 맛집으로 통용되는 빵집엔 '오픈런 현상'도 나타난다. 경제 불황 속 '한 끼라도 제대로 먹자'라는 심리가 작용한 결과로 해석된다. 그렇게 홀리처럼 한껏 멋을 낸 도내 멋쟁이들은 백화점을 간다. 고물가 속 윈도우 쇼핑을 하고 허기를 달래러. /윤혜경 경제부 기자 hyegyung@kyeongin.com윤혜경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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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수원FC의 시설 개선, 이제는 이뤄져야 지면기사
'9천557명'.지난 9일 수원종합운동장에서 열린 프로축구 K리그1 수원FC와 전북 현대의 2024시즌 2라운드 경기를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은 관중 수다.이는 수원FC 구단 최다 유료 관중 기록이다. 1만명에 가까운 축구팬들이 들어찬 수원종합운동장의 열기는 뜨거웠다. 후반 1분 이승우의 선제골이 터진 순간 경기장은 열광의 도가니가 됐다. 수원FC는 K리그 강호인 전북을 상대로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선전했다.지역 라이벌이던 수원 삼성의 K리그2 강등으로 수원FC는 2024시즌 경기도를 대표하는 유일한 K리그1 구단이 됐다.관중 수도 나날이 증가하고 어느새 1부리그에 잔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시민구단 수원FC의 위상은 창단 초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하지만 홈 경기장을 포함한 구단의 시설은 현재 구단의 위상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노후한 수원종합운동장은 중장기적으로 리모델링이나 신축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경기장 환경이 개선돼야 관중들의 지속적 유입이 가능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경기장뿐만 아니라 전용 훈련 공간을 포함한 클럽하우스 건립도 하루빨리 진행해야 한다. 명색이 프로구단이지만, 마음대로 훈련할 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구단이 수원FC다. 수원FC 구단 직원들의 간절한 소망 중 하나도 바로 구단 전용 훈련 공간의 확보다. 이웃 수원 삼성의 경우 식당과 훈련장을 갖춘 클럽하우스를 보유하고 있다.결국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주체는 수원시다. 당장 클럽하우스 건물을 짓기가 어렵다면 수원 관내에 수원FC를 위한 훈련장이라도 확보해 주는 것이 수원시가 해야 할 일이다.수원FC 구단의 시설 개선 필요성은 수년 전부터 계속 제기돼 왔던 문제다. 그러나 실질적인 변화는 없었다. 이제는 수원시가 결단을 내려야 할 때다. /김형욱 문화체육부 기자 uk@kyeongin.com김형욱 문화체육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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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활자 노동자와 '성 노동자' 지면기사
나는 증명할 수 있었다. '성 노동'은 노동이 될 수 없음을, 성매매가 합법인 일부 유럽 국가 사례는 노동자성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보통의 직업군과 결코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음을…. '성 노동'은 형용 모순이었다.그래서 그녀들의 말에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틀린 주장'에는 반박할 태세로 파주 용주골로 갔다. 고작 잘난 척하려 왕복 180㎞ 거리를 계속 오간 건 아니었다. 적당히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녀들이 '불쌍한' 사회적 약자임을 보여줄 만한 진술을 이끌어내 글로 남겨야 했다.그녀들에게 벌어지는 일을 기록하려던 건 대단한 정의감과는 거리가 멀다. 월급받는 이의 의무일 뿐이었다. 다만, 의문은 품고 있었다. 그간 '불쌍하지 않은' 사회적 약자는 언론에서 일하는 활자 노동자의 주요 취재 대상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기사의 흥행 공식은 다분히 신파적이다. 다수 대중의 관심은 '피해자다움'이 깃든 서사를 마주하고서 발화점에 달한다. 들끓는 분노는 그제야 부당함으로 튀어 연대로 승화한다. 정치권이 분주해지는 것도 이때쯤이다. 하지만 발화점이 높은 데 자리한 어느 사회적 약자의 인생, 가해자가 뚜렷하지 않은 누군가의 고통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으로 치부됐다.현장에서 말문이 막힌 건 스스럼없는 그녀들의 답변을 듣고서다. 불쌍함은 비웃고, 부당함을 욕했다. 전형적인 피해자가 아닌 이들의 목소리는 기존 언론 문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실제 삶을 눈앞에 두고서 나는 감히 고담준론을 떠벌리지 못했다. 부끄러움은 활자 노동자의 몫이었다.'나는, 우리는 성 노동자입니다'는 이렇게 쓰였다. 기획기사는 마무리됐지만, 사건에는 마침표가 찍히지 못했다. 그사이 복잡한 문제는 '어린이'와 '여성'의 파이 싸움으로 호도되기 시작했다. 강제 철거의 폭력성은 그 뒤에 숨었다. 3월5일 오전 9시30분, 파주 문화극장 앞에서는 용주골에 연대하는 시민들이 모여 맞불 집회를 벌였다. 부당함이 여전하다. 활자 노동자의 일도, '성 노동자'의 일도, 노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유혜연 문화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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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다섯 문장 뒤에 있는 이야기들 지면기사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축구선수 손흥민을 길러낸 부친 손웅정이 자서전에서 말한 내용이다. 사회부에서 사건 기사를 쓰며 늘 들던 생각이었다. 짧은 5문장 기사 속엔 혐의와 사건 개요, 조사 결과 외에 다른 내용이 들어갈 공간은 없었다. 그러나 그저 그렇게 늘 쓰던 대로 비슷한 사건이겠거니 하며 생각하지 않고 쓰다 보면 그저 그런 기사로만 써져 세상에 나온다.한 아파트의 방화 사건을 취재하러 남양주에 갔을 때였다. 저녁 늦은 시간 해는 이미 저물었지만, 아파트 내부에 매캐한 냄새는 남아있었다. 불을 지른 이는 꼭대기 층에 살던 20대 청년이었다. 그는 집에 불을 낸 채 사망했다. 경찰은 극단적 선택으로 추정했고, 피의자가 사망해 사건은 더 진행되지 않았다. 기사도 짤막하고 흔한 방화 사건으로 나간 채 마무리됐다.그러나 개운치 않은 생각이 남아 그를 아는 이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해당 아파트에서 수년을 살았던 그를 아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우여곡절 끝에 찾아낸 그의 삶은 대단히 복잡했다. 가정환경과 우울증, 생활고 등 기사로만 접했던 은둔형 외톨이 청년, 밤마다 음악 소리를 크게 틀어놓는 기행을 벌인 그였지만 아무도 관심을 주는 이는 없었다.아파트 방화 사건이 세간의 이슈를 타면서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지 고민했다. 그의 마지막 행동을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적어도 그 청년에게 안전망 하나쯤 마련됐었다면 하는 씁쓸한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정부는 올해 경기도 내 6개 지자체에 지원하던 청소년 안전망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은둔·고립 청소년 지원 사업 등을 통해 안전망에 공백이 없도록 하겠다는 대책도 마련했지만, 지자체와 경찰, 청소년 단체 등이 촘촘히 구성해 가던 컨트롤 타워와 그물망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도 종종 그 청년이 있던 아파트를 생각한다. 5문장 뒤 가려진 그의 삶은 계속 조명돼야 한다. /김지원 사회부 기자 zone@kyeongin.com김지원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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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죽음을 넘겨짚는 일 지면기사
7년 전 어느 여름날, 눈앞으로 폐종이 더미가 쏟아졌다. 피할 틈이 없었다. 기계로 압착된 종이더미가 무쇠처럼 그의 두 발목 위를 덮쳤다. 뼈가 17조각이 날 정도의 대형 사고였다. 응급 수술을 받고도 통증이 날로 심해졌다. 퇴원을 하고 통원치료기간에 의료진을 만나 그는 "아파서 잠도 잘 못 잔다"고 했다.재수술을 하기로 했다. 1차 수술하고 6개월 뒤였다. 그도 사고 이전으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었다. 지금 상태로는 일터로 돌아갈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수술 경과가 나쁘지 않았을까. 재활 과정을 일부 건너뛰고 그는 다시 공장으로 향했다. 영구장해 판정을 받아 걸음이 온전치 않은 두 다리를 이끌고.그러다 지난해 4월 다른 사고가 그를 '덮쳤'다. 지게차에 실려있던 파지 원료가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진 것이다. 7년 전 사고와 비교해 부상 정도는 경미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쪼그라든 그의 입지는 스스로를 불안에 옭아맸다.70의 나이를 앞둔 그에게 우선인 건 회사와의 계약 연장이었다. 1년마다 근로계약서를 새로 쓰는 비정규직 처지를 앞세워 만신창이가 된 몸은 애써 감췄다. 그의 가족은 "회사 요구대로 산업재해가 아닌 공상으로 처리하고, 머리에 수술 실밥을 푼 지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 출근길에 나섰다"고 했다. 여기까지가 지난해 12월 영풍제지 공장에서 일하다 숨진 하청 노동자 이봉재(68)씨의 생전 의무기록과 유가족의 이야기를 종합한 것이다.죽음이 한 세계의 무너짐이라면, 설명 몇 가지로 타인의 죽음을 넘겨짚는 것만큼 우스운 건 없으리라. 그럼에도 어느 죽음은 설명을 보태야만 조금이나마 선명해지는 게 있다고, 감히 죽음을 기록하며 생각한다. 그는 두 다리가 바스라지고, 머리가 깨졌던 공장에서 다시 일하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조수현 사회부 기자 joeloach@kyeongin.com조수현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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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사할린동포들의 소박하고도 절실한 요구 지면기사
지난달 정부는 '사할린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을 공포했다. 그동안 사할린동포의 '배우자와 직계비속 1명 및 그 배우자'만 영주귀국 사업 참여가 가능했지만, '모든 자녀'로 지원대상을 확대했다.개정된 내용만 보고 사할린동포들의 '환호의 목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젠 고국 땅에서 자녀와 함께 여생을 보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차 있을 것이라고 섣불리 예단했다.언제나 그렇듯, 기자의 예상과 현장의 목소리는 달랐다. 경기도내 거주 중인 사할린동포 1천561명 중 700여 명, 즉 가장 많은 사할린동포들이 모여 살고 있는 안산의 고향마을에서 만난 사할린동포들은 법 개정과 무관하게 자녀의 귀국을 기약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영주귀국 대상자를 위한 공공임대주택이 마련되지 않아 귀국은 더뎌지고 있었고, 이미 귀국한 이들은 같은 집에 살고 있어도 가족관계증명서 상 가족으로 인정되지 못한다. 부모가 사망한 경우 영주귀국 대상자로 선정되지도 못하는 이들은 아직도 사할린에서 고국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아픈 현실도 전해들었다.일제강점기 시절 사할린으로 건너가 겪게 된 수모들, 그곳에서의 차별받고 억압받던 기억들, 고국으로 오기까지 기다림의 여정들…. 부끄럽게도 이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나서야 이들이 왜 그토록 고국으로 돌아오고자 하는지 깨달았다. 기자에겐 너무 당연했던 '고국이 주는 안정감'이 그들에겐 절실했던 것이다."다들 그렇게 사는데…. 불편해도 그냥 사는거지 뭐"라는 이경분 할머니의 말은 취재 중 들었던 가장 안타까운 말이면서, 이들에 대한 '찾아가는' 지원의 필요성을 부각시켜주는 말이었다.광복 이전과 이후 태생으로 분류되는 사할린동포 1세대와 2세대의 고령화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더 늦기 전에 사할린동포를 위해 지원을 발굴해야 하는 이유다. 안정감 하나를 바라보고 귀국한 이들의 소박한 요구를 이제는 국가가 지켜줘야 하지 않겠는가./이영지 정치부 기자 bbangzi@kyeongin.com이영지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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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옆 법정에 갔더라면 지면기사
사람을 죽인 두 사람에 대한 1심 선고가 한날 한시에 나왔다. 지난해 1월19일 법원을 출입한 지 20일도 안 됐을 때다. 당시에는 수많은 재판 중 어떤 재판을 우선순위에 두고 챙겨야 할지 판단조차 못했다.나는 취재진이 많은 쪽을 택했다. 대학교 캠퍼스에서 동급생을 성폭행하려다 창밖으로 떨어트려 숨지게 한 20대 남성에 대한 판결이었다. 사회적 공분을 산 사건이었다. 재판장은 선고 직전 '성폭행 사건'이라는 점을 취재진에게 강조했다.법원은 징역 17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재판이 끝나고 차근차근 곱씹으며 기사를 썼다. 재판장의 당부, 고인과 유족, 지인들이 느꼈을 고통과 충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럭저럭 마감을 할 때쯤 옆 법정 소식이 들려왔다. 뇌병변장애인 딸을 살해한 엄마에 대한 판결이었다. 딸은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심했다. 말도 거동도 먹는 것도 홀로 하기 어려웠다. 엄마는 그런 딸을 38년간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그러다 비극이 찾아왔다. 딸이 대장암 3기 진단을 받은 것이다.엄마는 아픔에 시달리는 딸을 지켜만 볼 수 없었다. 모녀는 '힘들다'라는 상투적인 단어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결국 엄마는 딸과 함께 세상을 등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38년 전 사랑으로 받은 딸을 직접 떠나보냈다. 딸의 뒤를 따르려던 엄마는 극적으로 구출돼 살인 혐의로 법정에 섰다. 법원은 엄마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며 선처했다. 징역 12년을 구형했던 검찰도 이례적으로 항소를 포기했다. 장애인을 돌보는 가족들에게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역할을 분명히 알려준 판결이었다. 이 법정을 가지 못했던 터라 뒤늦게 법원에 판결문을 신청해 기사를 썼다.법원을 들락거리다 보니 이 두 사건이 이따금 떠오른다. 기자들에게 성폭행 사건임을 유의해달라던 재판장. 법정에서 딸에게 미안하다고 오열했던 엄마. 다양한 삶의 비극이 오가는 그날의 법원으로 돌아간다면 어느 법정에 갔어야 했을까. /변민철 인천본사 사회부 기자 bmc0502@kyeongin.com변민철 인천본사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