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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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얘들아, 밥먹자 지면기사
점심시간, 학교 곳곳이 시끌시끌하다. 종소리를 듣자마자 내달린 호흡이 아직도 아이들 입에선 가쁘다. 한쪽에선 밥상에 대한 토론이 열린다. 시험 시간 못지않은 진지함으로 국에 담긴 것이 무인지, 감자인지를 가늠한다. 이곳은 급식실, 식기가 부딪힐 때마다 아이들이 커간다.2019년 경기도 모든 유·초·중·고에 무상급식이 도입됐다. 정책이 시행되고 자리잡는 10여 년간 급식비는 '당연히 안 내는 비용'이 됐고 어느새 예산은 경기도교육청·경기도·도내 각 지자체가 자연스레 분담하게 됐다.무상급식 예산은 도교육청이 이듬해 필요한 금액을 각 시·군에 요청하는 방식으로 마련됐다. 그러나 국가적 차원의 정책 결정 없이 현장에서부터 도입된 무상급식은 빈약한 법적 근거 등 그 약점을 드러냈다. 14년간 이같은 방식으로 마련되던 예산은 지자체들의 재정난과 분담비율에 대한 문제의식까지 겹치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결국 지난 6월 일부 지자체들의 문제 제기는 반 이상의 '분담률 하향'과 '시스템 개선' 요구로 커졌고, 이 같은 상황이 보도되자 학부모단체와 경기도의회는 '급식예산 안정화'를 촉구하기 시작했다.그러던 지난 21일, 도교육청이 내년부터 인건비를 단계적으로 전액 부담하겠다고 밝혔다. 올해에만 3천349억원의 인건비 중 시·군이 1천153억원을 분담했는데, 내년엔 그 부담이 절반 수준으로 줄고 내후년 인건비는 모두 도교육청이 내기로 하면서 지자체들은 내년부터 500억원 규모 이상의 예산을 아낄 수 있게 됐다. 또 도교육청은 나머지 예산에 대해서도 시·군과 협의해 분담비율을 재산정, 정산의 편의를 도모키로 했다.도교육청의 이런 결정이 반갑기 그지없다. 14년간 관행처럼 이어져온 분담비율과 시스템에 변화가 생긴 건 포커스가 '애들 밥값'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일 터다. 아직 예산에 대한 법적 근거 마련 등 해결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러나 식탁 보수공사에 첫 나사가 끼워진 지금, '탄탄한 밥상'이 머지않았음을 느낀다. /장태복 지역사회부(양평) 기자 jkb@kyeongin.com장태복 지역사회부(양평)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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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감사합니다 지면기사
"우리 감사실은 전체 흐름을 보는 거다."최근 케이블 방송에서 화제가 된 드라마 대사 중 한 구절이다. '감사합니다'라는 이름의 드라마는 비리가 만연한 건설회사 감사실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냉철한 감사팀장과 정 많은 감사실 직원들과의 묘한 조합과 감춰진 부정을 들춰내는 이야기로 인기를 끌었다.건설회사 감사실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여서 타워크레인 납품 비리, 재건축 조합 비리같이 묵직한 사안부터 구내식당 품질 문제 등 흥미진진한 사례로 전개된 뒤 흑막에 가려졌던 비리의 온상을 밝히고 드라마는 막을 내렸다.사기업의 감사실 이야기도 물론 재밌지만, 10월부터 열리고 있는 정치권의 감사에도 관심이 쏠린다. 경기도도 마찬가지다. 경기도는 지난 14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국정감사를 치렀다. 국정감사를 받기 전, 경기북부특별자치도 추진, 공영개발로 전환된 K-컬처밸리 사업, 김동연 지사의 기회소득 등 경기도 주요 현안이 들여다볼 지 주목됐다.경기도 국정감사가 막이 오르자 경기도 현안은 뒷전으로 밀린 채 이재명 전 지사 시절에 선정된 지역화폐 운영 대행사 코나아이가 화두에 올랐다. 또한 이재명 전 지사가 발표했던 일산대교 무료화 공익처분도 질의의 중심이 됐다.김동연 지사는 연일 "제가 결정했던 일이 아니지만…. 추정해본다면"이라는 말로 답변을 이어갔다. 국회가 지방정부인 경기도정에 대한 감사가 이뤄질 것이라는 취지와 기대에 무색하게 정쟁에 머무른 국정감사였다. 기자가 된 뒤, 처음 치러본 국정감사였기에 기대가 컸지만 아쉬움도 남았다.하지만 아직 경기도정에 대해 본격적으로 들여다볼 감사가 남아있다. 행정사무감사다. 경기도의회는 다음달 5일부터 열릴 제379회 정례회에서 행정사무감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도정에 대한 견제기구인 도의회의 역할이 빛을 발할 순간이다.지난해 행감에서는 시내버스 준공영제 등 민선 8기 공약 추진이 점검됐으며, 도 산하기관 북부 이전 문제, 서울-김포 편입 논란, 경기도 1회용품 제로 정책 등 주요 현안들에 대한 의원들의 검증이 이뤄졌다. 아쉬움도 있었다. 도의회 국민의힘의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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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첫발을 내딛는다는 것 지면기사
최근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하 메트)에서 이불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5천년을 아우르는 소장품을 가진 미국 최대 미술관이자 한 해 500만명이 찾는 곳. 과거와 현재가 길고도 깊게 연결된 이 공간의 파사드(건물 정면)는 결코 그 의미가 가볍지 않다. 메트의 제안을 받아 작가가 선보인 작품은 '롱 테일 헤일로' 연작 4점, 보자마자 마음 한편에 뭉클함과 자랑스러움 같은 감정들이 오갔다.작품은 언뜻 보기에 오래된 조각 같기도, 미래의 모습을 그린 무언가 같기도 했다. 미술관이 담고 있는 거대한 문화와 예술,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수많은 사람이 모이는 특징들을 녹여내며 '최대한 다양한 연결고리를 만들고자 했다'는 작가의 의도를 떠올리게 했다. 이는 뉴욕 여행에서 메트를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이기도 했다.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 터바인홀에서는 이미래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이곳에서 개인전을 여는 첫 한국 작가이자 역대 최연소 작가이다. 내로라하는 현대미술 거장들이 거쳐 간 이 공간을 자신의 작품세계로 오롯이 채워낸 작가의 전시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노벨문학상 수상 소식 이후 대한민국에는 '한강 신드롬'이 일고 있다. 지난주 종합 베스트셀러의 1위부터 10위까지 모두 한강 작가의 책이 올랐으며, 이러한 훈풍을 타고 문학판매량이 50% 가까이 늘었다는 집계도 나왔다. 문학계에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한국 작가들이 가진 힘, 한국의 문화가 발하는 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와 닿는 요즘이다. K-팝·드라마·영화를 넘어 K-아트, K-문학까지 문화계 전반이 세계적으로 높은 위상을 갖게 됐다. 감히 단정컨대 이는 앞으로 우리가 문화에 가질 관심과 긴밀히 연결될 것이다. 그간 책을 잘 읽지 않았더라도, 공연이나 전시에 관심이 없었다고 해도 괜찮다. 어떠한 계기든 첫발을 내딛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우리 문화가 더 견고한 뿌리와 가지를 뻗어낼 수 있는 자양분임을 확신하기에. /구민주 문화체육부 기자 kumj@kyeongin.com구민주 문화체육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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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인간이 미안해 지면기사
"인간이 미안해."주로 인류로 인해 자연이나 다른 생물이 큰 피해를 입었을 때 쓰이는 '밈'(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널리 쓰이는 유행어)이다. '문제의 원인은 인간'이라는 자조적인 의미로 자연환경을 파괴한 인류의 무책임함을 풍자한다. 이 같은 밈은 지금도 지구온난화, 환경 파괴 때문에 동·식물이 멸종했다는 내용의 기사 댓글에서 쉽게 볼 수 있다.잘못된 일이 생기면 그 책임을 인간에게 돌리는 유쾌한 유행어지만, 인천 서구의 들개 문제를 떠올리면 마냥 웃을 일만은 아니다. 10㎏이 넘는 중·대형견들로 이뤄진 들개 무리가 주택가 인근 공원과 대로변에 자주 출몰해 지역의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이 들개들은 처음부터 야생동물이 아니었다. 대다수는 검단신도시 등 도시개발사업지역 내 공장지대와 주택가에서 버려진 유기견이다. 결국 인간의 잘못이 낳은 문제로 그 피해는 부메랑이 돼 우리에게 돌아오고 있다.지난 여름엔 대형 들개 한 마리가 서구 백석동 한 중학교 정문 앞에 나타나 소동이 벌어졌다. 반려견과 함께 저녁 산책을 하던 주민은 들개 무리를 만나 위협을 느끼고 황급히 도망치기도 했다. 들개를 마주칠까봐 외출할 때 호신용으로 등산스틱을 챙긴다는 주민도 있다. 서구가 나서서 들개 포획에 힘쓰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지난해 115마리, 올해는 지난 8월까지 92마리를 포획했지만 개체수가 좀처럼 줄지 않았다. 서구 주민들은 여전히 들개를 마주칠까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올해 서구에 접수된 들개 관련 민원만 총 219건이다.이제 '인간이 미안해'라는 말을 곱씹을 때다. 들개가 우리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근본적인 이유를 따져봐야 한다. 들개 문제는 단지 동물 관리의 실패가 아닌, 우리 인간이 만든 문제다. 포획이 능사가 아니다. 유기 동물이 발생하지 않도록 동물보호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관련 법과 제도를 정비하는 등 다각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들개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라도 이번 문제에 대한 책임 있는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상우 인천본사 사회부 기자 beewoo@kyeongin.com이상우 인천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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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인천 갯벌의 세계화 지면기사
인천 갯벌은 멸종위기종 서식지이자 지구촌 물새 기착지로서 세계 최고 수준의 생물다양성을 보유하고 있다.인천 갯벌에는 전 세계에 6천여 마리 남은 멸종위기종 1급 저어새(천연기념물 205호) 개체 중 90% 이상이 찾아온다. 두루미와 검은머리물떼새, 검은머리갈매기, 개꿩, 알락꼬리마도요, 노랑부리백로 등 수만 마리의 새가 인천 갯벌을 휴식처와 먹이터로 찾는다.인천 갯벌 중에서도 송도갯벌은 수도권 최대 규모 람사르 습지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강화갯벌은 한강, 임진강 등에서 유입된 토사가 하구에 쌓여 형성됐는데, 접경지에 있어서 다른 갯벌과 비교해 보존 가치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국가유산청이 이들 갯벌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갯벌' 2단계 확대 구역에 포함하려고 하는 주된 이유기도 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2021년 서천 갯벌(충남), 고창 갯벌(전북), 신안 갯벌과 보성·순천 갯벌(전남)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면서 한국 내 주요 갯벌을 추가로 포함하라는 조건부 결정을 내렸다. 국가유산청은 인천 갯벌이 등재돼야 한다고 판단해 지역 기초자치단체들과 협의 중이지만, 대부분 개발 제한을 우려해 반대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의 갯벌 구역 확대에 대한 세계유산위원회 판단이 임박한 시점에서 관련 절차가 좀처럼 진전되지 않고 있다.하지만 최근 송도갯벌과 강화갯벌이 있는 연수구, 강화군 지역사회에서는 갯벌을 세계유산으로 보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속해서 나오면서 반대 입장이 거셌던 이전과 기류가 달라지고 있다.갯벌 보전이 단순히 지역 개발 동력을 저해한다는 고정관념보다는 탄소중립 등 미래 세대의 지속가능성에 초점을 둔 여론이 커졌기 때문이다.그동안 주민 입장을 앞세워 반대했던 지역 기초단체들도 달라진 지역사회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바뀐 여론을 수렴해 주민 간 의견 차이를 좁혀나가고 인천 갯벌이 가진 가치를 지속해서 보전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다. /박현주 인천본사 정치부 기자 phj@kyeongin.com박현주 인천본사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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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또 한번의 골든타임 지면기사
어떻게든 전세피해 예방책을 이끌어내보겠다며 기획취재에 나선지 1년이 다 돼 간다. 취재에 응대하던 여러 지자체 담당자들은 당시만 해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의심하긴 어렵다'며 예방책 마련을 꺼렸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대규모 전세사기 사례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지난해 12월 5편짜리 기획기사를 냈다. 결국 경기도가 전국 어느 지자체도 시도하지 않은 전세피해 예방책 마련에 팔을 걷어붙여 최근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 앞서 경기도는 최대한의 의견을 바탕으로 세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 올해에만 4개월 사이 3차례나 토론회를 열었다. 분야를 막론한 전문가들과 머리를 맞대 쏟아져 나온 의견과 정책 방안들을 다듬었고, 경기연구원은 이를 두고 실질적 필요성과 실현 가능성을 다시 살폈다. 이 전세피해 예방책들이 정부부처와 국회에서 공감을 얻어, 단순히 목소리에 그치지 않고 정책들이 실현되도록 하려는 목적이다. 그렇게 경기도와 경기연구원은 전세피해에 대해 29개에 달하는 예방 정책 방안과 19개의 지원 방안을 도출했고, 이중 필요성과 실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된 방안을 또다시 추려 최근 '전세피해 예방 및 지원을 위한 방안 연구' 보고서를 냈다. 조만간 국회와 정부부처에 전달돼 입법 절차로 이어질 걸로 기대된다.경기도 전세피해지원센터 자료를 보면 올해 4월 기준 도내 전세사기 피해 사례는 누적 4천612건에 달하며 피해 규모로는 6천804억여 원, 가구당 평균을 따지면 1억5천만원이 넘는다. 3차 중 2차 토론회에 참석했던 한 전문가는 "앞으로 인구는 줄지만 세대수는 분리돼 더 늘어난다고 한다. 인구 감소로 주택가격이 하락하고 이후 다시 올라 요동치는 상황이 재발할 텐데 여기서 또 커다란 전세피해자가 쏟아져 나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 한 번의 골든타임이다. 또 불어닥칠 수 있는 전세피해 대란만큼은 이번 경기도의 정책 방안 실현으로 조금이나마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김준석 사회부 기자 joonsk@kyeongin.com김준석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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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신뢰 잃은 공동체 지면기사
"서로 의심하지 않는 공동체가 되길 바란다."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게시된 '야탑역 흉기 난동' 예고글로 인한 시민들의 불안과 소란에 야탑역 인근에 사는 친구가 SNS에 올린 짧은 한 문장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스치며 평범한 일상을 보낸 장소였지만 이제는 야탑역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이 느껴졌다.이런 의심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셀 수 없이 오갔던 야탑역이지만 이곳의 누군가가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괜스레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봤고, 평소 같으면 야탑역으로 정했을 약속 장소도 다른 곳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공동체에 대한 의심이 불안과 공포를 싹틔웠고, 의사결정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공동체에 의심이 자리 잡았을 때 이를 걷어내기 위한 비용은 막대했다. 흉기 난동 예고글이 올라온 이튿날부터 경찰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매일 수십 명의 경비 인력을 야탑역 인근에 배치했다. 예고일이었던 지난달 23일에는 경찰특공대가 포함된 120여 명의 경찰력에 장갑차까지 투입됐다. 이날 야탑역에서는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를 의심해 신뢰가 깨진 공동체와 이를 회복하기 위해 투입된 사회적 비용을 보며 씁쓸함이 올라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신뢰는 사회와 공동체를 지탱하는 핵심축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안전할 수 있다는 신뢰가 일상생활을 예측 가능하고 단순하게 만든다. 누군가를 의심하고, 자신을 방어하는 일에 시간과 비용을 쏟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신뢰를 기반으로 공동체가 존재할 때 의심에서 파생되는 막연한 불안과 공포의 공간은 줄어들 것이다.의심과 각자도생이 판을 치고 이것이 보통의 일상이 되고 있지만 신뢰를 바탕으로 보호받고, 보호할 수 있는 공동체는 모두에게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축적한 신뢰가 무너지고 있는 지금, 서로 의심하지 않는 공동체를 바라는 친구의 글이 더욱 힘 있게 다가오는 이유다. /한규준 사회부 기자 kkyu@kyeongin.com한규준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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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인천고법 설치, 인천 여야 정치권 힘 모아야 지면기사
인천시민이 항소심 재판을 받기 위해서는 서울 서초동에 있는 서울고등법원으로 가야 한다. 인천에 고등법원이 없는 탓이다. 섬 지역이 많은 인천 특성상 원정 재판에 최대 이틀이 소요되기도 한다.인천시민의 재판받을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건 2016년부터다. 당시 지역 법조계를 중심으로 공론화가 이뤄졌고 선거철이 맞물려 정치권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출발점은 '서울고법 원외재판부' 설치 요구였다. 인천지방법원에 서울고법 재판부를 설치해 인천시민들이 이곳에서 항소심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2019년 3월에서야 서울고법 인천원외재판부가 설치됐지만, 민사·가사사건의 항소심을 담당하는 합의부만 운영돼 형사·행정 합의부 사건 항소심은 여전히 서울에서 진행된다. 근본적 해결책은 인천고등법원 설치였다. 지역사회에서 인천고법을 유치하기 위한 움직임이 커졌다. 제21대 국회 출범과 함께 인천고법 설치를 위한 논의가 본격화됐고 관련 법안도 발의됐지만 지난 4년간 노력의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인천지역 항소심 사건은 2019년 1천844건, 2020년 1천946건, 2021년 2천471건, 2022년 2천713건 등 꾸준히 증가 추세다. 인구 10만명당 항소심은 58.9건으로 부산(49.2건), 광주(48.6건), 수원(49.2건), 대전(44.7건), 대구(37.7건)를 뛰어넘었다. 인천에서 항소심 접수 후 재판 시작까지 평균 306일이 걸려 타지역(평균 220일)보다 3개월가량 지연되고 있다. 전국 광역시 중 인구수는 두 번째로 많지만 인천만 유일하게 고등법원이 없다.22대 국회에서 인천고법 설치 법안이 상임위원회에 다시 상정됐다. 지난 24일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세종지방법원 설치 법안이 일사천리로 통과됐지만 인천고법 법안은 논의조차 시작하지 못했다. 더 이상 인천고법 설치를 외면할 수도, 미룰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인천 정치권이 나서야 한다. 이번에야말로 여야 가릴 것 없이 힘을 모아 정쟁이 아닌 인천의 발전을 위한 해답을 도출할 때다. /조경욱 인천본사 정치부 기자 imjay@k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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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용기에도 기한이 필요할까 지면기사
재희(가명)씨가 보낸 메일에는 학대의 흔적이 차곡차곡 정리돼 있었다. 중학교 때 입소했던 도내 한 청소년쉼터의 조직도, 정당한 몫을 받지 못한 채 지속했던 노동의 사진, 함께 생활했던 친구들과 지금 시점에 나눈 자조 섞인 대화 등. 재희씨는 쉼터에서 머무르는 7년 동안 세로 40㎝, 지름 2㎝ 크기의 의자 다리로 원장에게 수시로 맞았다고 했다.재희씨가 폭력의 고리를 끊을 수 없었던 건 체념 때문이었다고 한다. 쉼터에 오고 1년 정도 지났을 무렵 자원봉사를 위해 쉼터를 방문했던 한 대학생에게 처음으로 도움을 구했으나, 역으로 원장에게 소식이 들어가 다시 맞았다고 했다. 이후로도 쉼터를 도망쳤다 붙잡혀오거나 스스로 돌아왔던 학생들을 향해 직접적인 폭력이 반복됐다. 그녀에게 쉼터는 항상 '돌아가야 하는 곳'으로 각인됐다.그러나 틈이 생기자 재희씨의 몸은 본능적으로 튀어나갔다. 원가정에 갔다가 쉼터로 복귀했던 어느 명절날이었다. 재희씨는 집에 갔다가 저녁 늦게 쉼터로 돌아왔고, 집에 가기 위해 싸놓았던 짐이 옆에 놓여 있었다. 명절이라는 사실이 주는 평온함 때문인지 함께 머무르며 서로를 감시하기도 했던 언니들은 재희씨를 둔 채 위층으로 올라간 때였다. 직전까지도 이곳을 벗어날 생각이 없었던 재희씨는 작은 틈이 생긴 순간 쉼터의 문을 열고 '이십분동안 멈추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렸다.그럼에도 재희씨의 경험이 학대에 해당하는 지 여부는 공적으로 다퉈보기 어렵게 됐다. 아동학대범죄의 공소시효는 피해자가 성년이 되는 날부터 7년이기 때문이다. 신문고에 글을 올리고, 경찰에 사건이 접수되고, 온라인 커뮤니티에도 본인의 경험을 정리해 올린 때는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후였다."지금도 어딘가에서 붙잡혀 원장실로 끌려가는 꿈을 계속 꿔요." 쉼터에서 나온 지 10년이 지난 시점에 원장을 경찰에 고소하고 커뮤니티에 글을 올릴 결심을 한 이유를 묻는 물음에 재희씨는 이렇게 답했다. /목은수 사회부 기자 wood@kyeongin.com목은수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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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늦은 때는 있다 지면기사
"한국 비정규직·이주노동자가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 청문회를 통해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화성시 아리셀 공장 화재 참사 유가족이 지난 3일 국회를 찾았다. 평소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온 우원식 국회의장이 아리셀 유가족들과 면담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한 유가족 대표는 박순관 아리셀 대표이사의 국회 청문회를 요청하며 전 국민에게 한국 비정규직·이주노동자의 현실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호소했다.'귀족 기업' 아리셀은 수익 극대화를 위해 여성·이주노동자 등 규제 사각지대에 놓인 노동자에게 위험을 전가했다. 당연한 것일지 모르지만 오래 전부터 제기돼 온 '위험의 외주화·이주화' 구조를 아리셀은 적절히 활용했다. 비슷한 기업들에서 발생한 산재사고로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률 개정도 이뤄졌지만, 2024년 현재에도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소수 노동자'에게는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모든 기업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기업들은 수익 극대화를 위해 숙련된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하청·실습생 등에게 안전 장비도 없이 업무를 떠넘기고 있다. 그러다 산재 사고가 발생하면 노동자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이렇듯 책임자 부재 현실은 가족을 떠나보낸 유가족에게 또 한번 상처가 된다.국회는 매번 약속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제도를 마련하겠다"고. 하지만 여기서 그쳐선 안 된다. 인공지능이나 기후변화로 뜨고 지는 직업이 생겨나듯, '버려질 위기의 노동자'와 함께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가 속속 등장하고 있어서다. 그 사이 규제 내 보호받지 못할 노동자도 늘어날 것이다.국회에 등장한 '기후 위기 시계' 처럼 미래의 노동 현장도 노동자를 지키겠다는 비상한 각오가 동반돼야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국회의 약속'이 뒤늦게 과거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데만 그칠 것이 아닌, 변화하는 미래 노동 현장을 위한 제도까지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오수진 정치2부(서울) 기자 nuri@kyeongin.com오수진 정치2부(서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