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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트북] 첫발을 내딛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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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첫발을 내딛는다는 것 지면기사

    최근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하 메트)에서 이불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5천년을 아우르는 소장품을 가진 미국 최대 미술관이자 한 해 500만명이 찾는 곳. 과거와 현재가 길고도 깊게 연결된 이 공간의 파사드(건물 정면)는 결코 그 의미가 가볍지 않다. 메트의 제안을 받아 작가가 선보인 작품은 '롱 테일 헤일로' 연작 4점, 보자마자 마음 한편에 뭉클함과 자랑스러움 같은 감정들이 오갔다.작품은 언뜻 보기에 오래된 조각 같기도, 미래의 모습을 그린 무언가 같기도 했다. 미술관이 담고 있는 거대한 문화와 예술,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수많은 사람이 모이는 특징들을 녹여내며 '최대한 다양한 연결고리를 만들고자 했다'는 작가의 의도를 떠올리게 했다. 이는 뉴욕 여행에서 메트를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이기도 했다.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 터바인홀에서는 이미래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이곳에서 개인전을 여는 첫 한국 작가이자 역대 최연소 작가이다. 내로라하는 현대미술 거장들이 거쳐 간 이 공간을 자신의 작품세계로 오롯이 채워낸 작가의 전시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노벨문학상 수상 소식 이후 대한민국에는 '한강 신드롬'이 일고 있다. 지난주 종합 베스트셀러의 1위부터 10위까지 모두 한강 작가의 책이 올랐으며, 이러한 훈풍을 타고 문학판매량이 50% 가까이 늘었다는 집계도 나왔다. 문학계에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한국 작가들이 가진 힘, 한국의 문화가 발하는 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와 닿는 요즘이다. K-팝·드라마·영화를 넘어 K-아트, K-문학까지 문화계 전반이 세계적으로 높은 위상을 갖게 됐다. 감히 단정컨대 이는 앞으로 우리가 문화에 가질 관심과 긴밀히 연결될 것이다. 그간 책을 잘 읽지 않았더라도, 공연이나 전시에 관심이 없었다고 해도 괜찮다. 어떠한 계기든 첫발을 내딛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우리 문화가 더 견고한 뿌리와 가지를 뻗어낼 수 있는 자양분임을 확신하기에. /구민주 문화체육부 기자 kumj@kyeongin.com구민주 문화체육부 기자

  • [노트북] 인간이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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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인간이 미안해 지면기사

    "인간이 미안해."주로 인류로 인해 자연이나 다른 생물이 큰 피해를 입었을 때 쓰이는 '밈'(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널리 쓰이는 유행어)이다. '문제의 원인은 인간'이라는 자조적인 의미로 자연환경을 파괴한 인류의 무책임함을 풍자한다. 이 같은 밈은 지금도 지구온난화, 환경 파괴 때문에 동·식물이 멸종했다는 내용의 기사 댓글에서 쉽게 볼 수 있다.잘못된 일이 생기면 그 책임을 인간에게 돌리는 유쾌한 유행어지만, 인천 서구의 들개 문제를 떠올리면 마냥 웃을 일만은 아니다. 10㎏이 넘는 중·대형견들로 이뤄진 들개 무리가 주택가 인근 공원과 대로변에 자주 출몰해 지역의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이 들개들은 처음부터 야생동물이 아니었다. 대다수는 검단신도시 등 도시개발사업지역 내 공장지대와 주택가에서 버려진 유기견이다. 결국 인간의 잘못이 낳은 문제로 그 피해는 부메랑이 돼 우리에게 돌아오고 있다.지난 여름엔 대형 들개 한 마리가 서구 백석동 한 중학교 정문 앞에 나타나 소동이 벌어졌다. 반려견과 함께 저녁 산책을 하던 주민은 들개 무리를 만나 위협을 느끼고 황급히 도망치기도 했다. 들개를 마주칠까봐 외출할 때 호신용으로 등산스틱을 챙긴다는 주민도 있다. 서구가 나서서 들개 포획에 힘쓰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지난해 115마리, 올해는 지난 8월까지 92마리를 포획했지만 개체수가 좀처럼 줄지 않았다. 서구 주민들은 여전히 들개를 마주칠까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올해 서구에 접수된 들개 관련 민원만 총 219건이다.이제 '인간이 미안해'라는 말을 곱씹을 때다. 들개가 우리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근본적인 이유를 따져봐야 한다. 들개 문제는 단지 동물 관리의 실패가 아닌, 우리 인간이 만든 문제다. 포획이 능사가 아니다. 유기 동물이 발생하지 않도록 동물보호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관련 법과 제도를 정비하는 등 다각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들개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라도 이번 문제에 대한 책임 있는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상우 인천본사 사회부 기자 beewoo@kyeongin.com이상우 인천본사

  • [노트북] 인천 갯벌의 세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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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인천 갯벌의 세계화 지면기사

    인천 갯벌은 멸종위기종 서식지이자 지구촌 물새 기착지로서 세계 최고 수준의 생물다양성을 보유하고 있다.인천 갯벌에는 전 세계에 6천여 마리 남은 멸종위기종 1급 저어새(천연기념물 205호) 개체 중 90% 이상이 찾아온다. 두루미와 검은머리물떼새, 검은머리갈매기, 개꿩, 알락꼬리마도요, 노랑부리백로 등 수만 마리의 새가 인천 갯벌을 휴식처와 먹이터로 찾는다.인천 갯벌 중에서도 송도갯벌은 수도권 최대 규모 람사르 습지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강화갯벌은 한강, 임진강 등에서 유입된 토사가 하구에 쌓여 형성됐는데, 접경지에 있어서 다른 갯벌과 비교해 보존 가치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국가유산청이 이들 갯벌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갯벌' 2단계 확대 구역에 포함하려고 하는 주된 이유기도 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2021년 서천 갯벌(충남), 고창 갯벌(전북), 신안 갯벌과 보성·순천 갯벌(전남)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면서 한국 내 주요 갯벌을 추가로 포함하라는 조건부 결정을 내렸다. 국가유산청은 인천 갯벌이 등재돼야 한다고 판단해 지역 기초자치단체들과 협의 중이지만, 대부분 개발 제한을 우려해 반대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의 갯벌 구역 확대에 대한 세계유산위원회 판단이 임박한 시점에서 관련 절차가 좀처럼 진전되지 않고 있다.하지만 최근 송도갯벌과 강화갯벌이 있는 연수구, 강화군 지역사회에서는 갯벌을 세계유산으로 보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속해서 나오면서 반대 입장이 거셌던 이전과 기류가 달라지고 있다.갯벌 보전이 단순히 지역 개발 동력을 저해한다는 고정관념보다는 탄소중립 등 미래 세대의 지속가능성에 초점을 둔 여론이 커졌기 때문이다.그동안 주민 입장을 앞세워 반대했던 지역 기초단체들도 달라진 지역사회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바뀐 여론을 수렴해 주민 간 의견 차이를 좁혀나가고 인천 갯벌이 가진 가치를 지속해서 보전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다. /박현주 인천본사 정치부 기자 phj@kyeongin.com박현주 인천본사 정치부 기자

  • [노트북] 또 한번의 골든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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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또 한번의 골든타임 지면기사

    어떻게든 전세피해 예방책을 이끌어내보겠다며 기획취재에 나선지 1년이 다 돼 간다. 취재에 응대하던 여러 지자체 담당자들은 당시만 해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의심하긴 어렵다'며 예방책 마련을 꺼렸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대규모 전세사기 사례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지난해 12월 5편짜리 기획기사를 냈다. 결국 경기도가 전국 어느 지자체도 시도하지 않은 전세피해 예방책 마련에 팔을 걷어붙여 최근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 앞서 경기도는 최대한의 의견을 바탕으로 세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 올해에만 4개월 사이 3차례나 토론회를 열었다. 분야를 막론한 전문가들과 머리를 맞대 쏟아져 나온 의견과 정책 방안들을 다듬었고, 경기연구원은 이를 두고 실질적 필요성과 실현 가능성을 다시 살폈다. 이 전세피해 예방책들이 정부부처와 국회에서 공감을 얻어, 단순히 목소리에 그치지 않고 정책들이 실현되도록 하려는 목적이다. 그렇게 경기도와 경기연구원은 전세피해에 대해 29개에 달하는 예방 정책 방안과 19개의 지원 방안을 도출했고, 이중 필요성과 실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된 방안을 또다시 추려 최근 '전세피해 예방 및 지원을 위한 방안 연구' 보고서를 냈다. 조만간 국회와 정부부처에 전달돼 입법 절차로 이어질 걸로 기대된다.경기도 전세피해지원센터 자료를 보면 올해 4월 기준 도내 전세사기 피해 사례는 누적 4천612건에 달하며 피해 규모로는 6천804억여 원, 가구당 평균을 따지면 1억5천만원이 넘는다. 3차 중 2차 토론회에 참석했던 한 전문가는 "앞으로 인구는 줄지만 세대수는 분리돼 더 늘어난다고 한다. 인구 감소로 주택가격이 하락하고 이후 다시 올라 요동치는 상황이 재발할 텐데 여기서 또 커다란 전세피해자가 쏟아져 나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 한 번의 골든타임이다. 또 불어닥칠 수 있는 전세피해 대란만큼은 이번 경기도의 정책 방안 실현으로 조금이나마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김준석 사회부 기자 joonsk@kyeongin.com김준석 사회부 기자

  • [노트북] 신뢰 잃은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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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신뢰 잃은 공동체 지면기사

    "서로 의심하지 않는 공동체가 되길 바란다."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게시된 '야탑역 흉기 난동' 예고글로 인한 시민들의 불안과 소란에 야탑역 인근에 사는 친구가 SNS에 올린 짧은 한 문장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스치며 평범한 일상을 보낸 장소였지만 이제는 야탑역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이 느껴졌다.이런 의심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셀 수 없이 오갔던 야탑역이지만 이곳의 누군가가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괜스레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봤고, 평소 같으면 야탑역으로 정했을 약속 장소도 다른 곳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공동체에 대한 의심이 불안과 공포를 싹틔웠고, 의사결정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공동체에 의심이 자리 잡았을 때 이를 걷어내기 위한 비용은 막대했다. 흉기 난동 예고글이 올라온 이튿날부터 경찰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매일 수십 명의 경비 인력을 야탑역 인근에 배치했다. 예고일이었던 지난달 23일에는 경찰특공대가 포함된 120여 명의 경찰력에 장갑차까지 투입됐다. 이날 야탑역에서는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를 의심해 신뢰가 깨진 공동체와 이를 회복하기 위해 투입된 사회적 비용을 보며 씁쓸함이 올라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신뢰는 사회와 공동체를 지탱하는 핵심축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안전할 수 있다는 신뢰가 일상생활을 예측 가능하고 단순하게 만든다. 누군가를 의심하고, 자신을 방어하는 일에 시간과 비용을 쏟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신뢰를 기반으로 공동체가 존재할 때 의심에서 파생되는 막연한 불안과 공포의 공간은 줄어들 것이다.의심과 각자도생이 판을 치고 이것이 보통의 일상이 되고 있지만 신뢰를 바탕으로 보호받고, 보호할 수 있는 공동체는 모두에게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축적한 신뢰가 무너지고 있는 지금, 서로 의심하지 않는 공동체를 바라는 친구의 글이 더욱 힘 있게 다가오는 이유다. /한규준 사회부 기자 kkyu@kyeongin.com한규준 사회부 기자

  • [노트북] 인천고법 설치, 인천 여야 정치권 힘 모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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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인천고법 설치, 인천 여야 정치권 힘 모아야 지면기사

    인천시민이 항소심 재판을 받기 위해서는 서울 서초동에 있는 서울고등법원으로 가야 한다. 인천에 고등법원이 없는 탓이다. 섬 지역이 많은 인천 특성상 원정 재판에 최대 이틀이 소요되기도 한다.인천시민의 재판받을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건 2016년부터다. 당시 지역 법조계를 중심으로 공론화가 이뤄졌고 선거철이 맞물려 정치권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출발점은 '서울고법 원외재판부' 설치 요구였다. 인천지방법원에 서울고법 재판부를 설치해 인천시민들이 이곳에서 항소심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2019년 3월에서야 서울고법 인천원외재판부가 설치됐지만, 민사·가사사건의 항소심을 담당하는 합의부만 운영돼 형사·행정 합의부 사건 항소심은 여전히 서울에서 진행된다. 근본적 해결책은 인천고등법원 설치였다. 지역사회에서 인천고법을 유치하기 위한 움직임이 커졌다. 제21대 국회 출범과 함께 인천고법 설치를 위한 논의가 본격화됐고 관련 법안도 발의됐지만 지난 4년간 노력의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인천지역 항소심 사건은 2019년 1천844건, 2020년 1천946건, 2021년 2천471건, 2022년 2천713건 등 꾸준히 증가 추세다. 인구 10만명당 항소심은 58.9건으로 부산(49.2건), 광주(48.6건), 수원(49.2건), 대전(44.7건), 대구(37.7건)를 뛰어넘었다. 인천에서 항소심 접수 후 재판 시작까지 평균 306일이 걸려 타지역(평균 220일)보다 3개월가량 지연되고 있다. 전국 광역시 중 인구수는 두 번째로 많지만 인천만 유일하게 고등법원이 없다.22대 국회에서 인천고법 설치 법안이 상임위원회에 다시 상정됐다. 지난 24일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세종지방법원 설치 법안이 일사천리로 통과됐지만 인천고법 법안은 논의조차 시작하지 못했다. 더 이상 인천고법 설치를 외면할 수도, 미룰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인천 정치권이 나서야 한다. 이번에야말로 여야 가릴 것 없이 힘을 모아 정쟁이 아닌 인천의 발전을 위한 해답을 도출할 때다. /조경욱 인천본사 정치부 기자 imjay@kyeon

  • [노트북] 용기에도 기한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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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용기에도 기한이 필요할까 지면기사

    재희(가명)씨가 보낸 메일에는 학대의 흔적이 차곡차곡 정리돼 있었다. 중학교 때 입소했던 도내 한 청소년쉼터의 조직도, 정당한 몫을 받지 못한 채 지속했던 노동의 사진, 함께 생활했던 친구들과 지금 시점에 나눈 자조 섞인 대화 등. 재희씨는 쉼터에서 머무르는 7년 동안 세로 40㎝, 지름 2㎝ 크기의 의자 다리로 원장에게 수시로 맞았다고 했다.재희씨가 폭력의 고리를 끊을 수 없었던 건 체념 때문이었다고 한다. 쉼터에 오고 1년 정도 지났을 무렵 자원봉사를 위해 쉼터를 방문했던 한 대학생에게 처음으로 도움을 구했으나, 역으로 원장에게 소식이 들어가 다시 맞았다고 했다. 이후로도 쉼터를 도망쳤다 붙잡혀오거나 스스로 돌아왔던 학생들을 향해 직접적인 폭력이 반복됐다. 그녀에게 쉼터는 항상 '돌아가야 하는 곳'으로 각인됐다.그러나 틈이 생기자 재희씨의 몸은 본능적으로 튀어나갔다. 원가정에 갔다가 쉼터로 복귀했던 어느 명절날이었다. 재희씨는 집에 갔다가 저녁 늦게 쉼터로 돌아왔고, 집에 가기 위해 싸놓았던 짐이 옆에 놓여 있었다. 명절이라는 사실이 주는 평온함 때문인지 함께 머무르며 서로를 감시하기도 했던 언니들은 재희씨를 둔 채 위층으로 올라간 때였다. 직전까지도 이곳을 벗어날 생각이 없었던 재희씨는 작은 틈이 생긴 순간 쉼터의 문을 열고 '이십분동안 멈추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렸다.그럼에도 재희씨의 경험이 학대에 해당하는 지 여부는 공적으로 다퉈보기 어렵게 됐다. 아동학대범죄의 공소시효는 피해자가 성년이 되는 날부터 7년이기 때문이다. 신문고에 글을 올리고, 경찰에 사건이 접수되고, 온라인 커뮤니티에도 본인의 경험을 정리해 올린 때는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후였다."지금도 어딘가에서 붙잡혀 원장실로 끌려가는 꿈을 계속 꿔요." 쉼터에서 나온 지 10년이 지난 시점에 원장을 경찰에 고소하고 커뮤니티에 글을 올릴 결심을 한 이유를 묻는 물음에 재희씨는 이렇게 답했다. /목은수 사회부 기자 wood@kyeongin.com목은수 사회부 기자

  • [노트북] 늦은 때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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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늦은 때는 있다 지면기사

    "한국 비정규직·이주노동자가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 청문회를 통해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화성시 아리셀 공장 화재 참사 유가족이 지난 3일 국회를 찾았다. 평소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온 우원식 국회의장이 아리셀 유가족들과 면담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한 유가족 대표는 박순관 아리셀 대표이사의 국회 청문회를 요청하며 전 국민에게 한국 비정규직·이주노동자의 현실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호소했다.'귀족 기업' 아리셀은 수익 극대화를 위해 여성·이주노동자 등 규제 사각지대에 놓인 노동자에게 위험을 전가했다. 당연한 것일지 모르지만 오래 전부터 제기돼 온 '위험의 외주화·이주화' 구조를 아리셀은 적절히 활용했다. 비슷한 기업들에서 발생한 산재사고로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률 개정도 이뤄졌지만, 2024년 현재에도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소수 노동자'에게는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모든 기업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기업들은 수익 극대화를 위해 숙련된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하청·실습생 등에게 안전 장비도 없이 업무를 떠넘기고 있다. 그러다 산재 사고가 발생하면 노동자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이렇듯 책임자 부재 현실은 가족을 떠나보낸 유가족에게 또 한번 상처가 된다.국회는 매번 약속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제도를 마련하겠다"고. 하지만 여기서 그쳐선 안 된다. 인공지능이나 기후변화로 뜨고 지는 직업이 생겨나듯, '버려질 위기의 노동자'와 함께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가 속속 등장하고 있어서다. 그 사이 규제 내 보호받지 못할 노동자도 늘어날 것이다.국회에 등장한 '기후 위기 시계' 처럼 미래의 노동 현장도 노동자를 지키겠다는 비상한 각오가 동반돼야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국회의 약속'이 뒤늦게 과거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데만 그칠 것이 아닌, 변화하는 미래 노동 현장을 위한 제도까지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오수진 정치2부(서울) 기자 nuri@kyeongin.com오수진 정치2부(서울) 기자

  • [노트북] 빛바랜 나혜석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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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빛바랜 나혜석의 도시 지면기사

    나혜석이라는 이름을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들어봤다. 새 학기, 미술 시간이 아닌 체육 시간. 운동장에서 잡담을 나누고 있던 때였다. 친해진 지 얼마 안 돼 조금 어색한 가영이가 "우리 (중)학교는 화가 나혜석이 나온 데야"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게 누구냐고 되물으면 무식해 보일 거 같았다. 당시만 해도 수원역과 남문에서 친구들을 만나던 때라 인계동 나혜석 거리는 낯설었다.이제 나혜석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미술 작품뿐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통찰을 비롯해 역사 그 자체가 된 굴곡진 삶까지. 2000년대 초반 재조명 움직임을 거쳐, 2010년대 중반 페미니즘 리부트와 맞물려 흐름을 탔다. 그렇게 나혜석은 수원시에도, 여성들에게도 자부심 가득한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1% 아니, 99%가 부족하다. 나혜석을 끄집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딱 거기까지다. 조선 최초의 여성 유학생,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최초' 타이틀만 돌림노래처럼 반복된다. 보도 위 타일은 깨지고 비석 속 글씨는 알아보기 힘든, 유흥가 한복판에 자리한 나혜석 거리의 모습은 이런 현실을 은유한다. 다만, 거리 재정비가 시급하다는 일차원적인 소리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혈세는 더 가치 있는 데 쓰여야 하기 때문이다.눈여겨봐야 할 사연들이 프랑스에 남아 있었다. 파리에 거주하는 한경미 감독은 정부·지자체의 아무런 지원 없이 홀로 취재에 나서 나혜석의 파리 유학 시기가 담긴 사진을 발굴했다. 그런가 하면 1947년의 나혜석을 기억하는 인물이 여전히 정정한 모습으로 보 쉬르 센에 살고 있다. 이응노 선생의 아내, 박인경(98) 화백이다. 과거 나혜석이 하숙했던 르 베지네에 자리한 푸셰씨의 집은 아직 평범한 가정집이다. 이곳은 유명 예술가가 살았다는 문패를 걸 자격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기도 했다.보다 다양한 관점으로 새롭게 연구해야 할 것도, 오늘날 우리가 토론하거나 기념해야 할 것도 여전히 무궁무진하다. '나혜석의 도시'가 잊고 있는 영광스런 몫이다. /유혜연 문화체육부 기자 pi@kyeongin

  • [노트북] 텔레그램으로 뛰어든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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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텔레그램으로 뛰어든 여성들 지면기사

    26일 저녁 9시 한 온라인 화상회의의 링크가 X(엑스·구 트위터)에 공유됐다. 이어 10시, 11시에도 링크가 공유됐고, 이날 진행된 3차례의 화상회의 모두 링크가 공유된 지 1~2분도 지나지 않아 정원 100명이 곧장 찼다. 이 화상회의는 2016년 소라넷 폐쇄를 이끌어낸 단체 'DSO'에서 활동하던 한샛별(활동명)씨가 진행하는 강의였다. 각종 디지털 성범죄 현장에 잠입했을 때 지켜야 할 요령, 피해자를 보호하면서 사건을 공론화하는 방법 등에 대해 안내했다.최근 SNS '텔레그램'에서 딥페이크(Deepfake,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인간 이미지 합성기술)를 이용한 성착취물이 제작·유포된다는 의혹이 SNS에서 퍼지고 있다. 경인지역은 물론 전국 지역별, 대학과 초·중·고 학교별로 딥페이크를 이용한 성착취물을 제작하고 공유하는 이른바 '겹지인방'이 확인됐다. 이러한 내용들은 대부분 개인이 직접 텔레그램 대화방에 접속해 알아낸 것이다. 지금도 여성들은 성착취가 이뤄지고 있는 지역, 학교 기반 대화방 목록을 공유하고 피해자를 발굴하고 있다. 이들은 행여나 자신의 얼굴, 음성이 딥페이크 성착취물에 활용될까 두려워 SNS에 각종 게시물을 삭제하고 있다.한샛별씨는 무엇보다 '자신을 지키며 활동할 것'을 당부했다. 직접 성착취물을 마주하는 것은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직접 범죄 현장에 찾아가 증거를 수집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텔레그램이 해외에 서버를 두고 있어 적극적인 수사가 어렵다며 방관한 국가 탓이다. 최근 인하대 재학생도 경찰에 자신이 디지털 성범죄의 대상이 됐다고 알렸지만, 결국 본인이 직접 대화방에 잠입해 증거를 수집해야 했다.디지털 성범죄는 비약적인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부작용도, 일부 집단의 일탈 행위도 아니다. 여성의 '몸'을 성적 도구로만 바라보고 이를 착취, 모욕하려는 기득권의 어긋난 욕망과 이를 방관한 결과물이다. 신속한 수사와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딥페이크 디지털 성범죄가 미성년자들도 위협하고 있는 만큼, 피해자 보호가 급선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