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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트북] 당연할 것이라는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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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당연할 것이라는 편견 지면기사

    '편견 :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경기도가 올해부터 노인 돌봄사업에 전면적으로 AI(인공지능)를 도입했다. AI 상담원이 1주일에 한 번씩 독거노인에게 전화하는 AI 말벗서비스 사업을 알게 된 것은 지난 1월이었다. 당시 취재는 편견으로 시작됐다. '독거노인에게 일주일에 한 번 전화하는 게 어떤 효과가 있을까, 아마도 실효성이 떨어질 것'이라는 편견으로 취재에 착수했지만 상황은 예상과 달랐다.일주일에 한 번 오는 안부 전화가 적정하다는 어르신들의 의견도 있었고, 사업의 기반이 되는 네이버 클로버 측에서도 주 1회가 적절하다는 의견이었다. 결국 AI 말벗서비스는 실효성이 떨어질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올해 운영 두 달만에 사업 목표량인 5천만명을 달성했다. AI 상담원이 위기 징후를 감지해 복지서비스를 연계한 사례도 다수다.지난 6월 다시 AI 말벗서비스를 취재할 때도 편견이 작용했다. 독거노인이면 홀로 지내기 때문에 적적할 것이라는 편견, 이로 인해 말동무가 필요할 것이라는 편견이었다. 편견은 또 뒤집혔다. 말벗서비스를 활발히 이용하는 공모(78)씨는 "혼자 지내는 삶이 즐겁다. 나름대로 드라마도 보고, 책을 읽기도 하고 USB에 좋아하는 영상들을 담아서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며 "적적해서 AI 안부 전화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공공서비스에 대한 책임감으로 전화를 받는다"고 말했다.취재를 하면서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하면 막막함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런 질문의 대부분은 확신이 아닌 의심에서 시작된 편견이었다. 기자를 준비하며 종종 읽었던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을 펼쳐봤다. '기자는 자신이 갖고 있는 편견의 관리자가 되어야 한다'. 편견은 특정 계층에 대한 선입견을 만들기도 하고 정책의 확장에도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기자를 준비하며 편견을 경계해야 한다고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때의 다짐을 돌이켜 본다. /이영선 정치부 기자 zero@kyeongin.com이영선 정치부 기자

  • [노트북] '유적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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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유적부심' 지면기사

    문화유산이 사람들과 공존하며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은 김포 신안리 신석기유적 취재에서도 여전했다. 경기도는 특히 개발 이슈가 많은 곳이기에 문화유산이 발굴됐을 때 재산권 등 분쟁의 여지가 적잖이 발생한다. 취재 현장에서도 여러 갈등과 문제로 인해 땅에 묻혀야만 했던, 또는 훼손될 수밖에 없었던 문화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그런 지점에서 김포시가 해당 유적의 땅을 상당 부분 매입해 놓은 것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적어도 이 유적이 이대로 사라지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주변에 덕포진이라는 유적이 있었던 것도 호재로 작용했다. 이번 발굴 자체가 덕포진 유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는데, 주변에서 유적의 존재를 인식하고 무분별한 개발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신안리 신석기 유적을 세상에 알리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온전한 신석기유적, 그것도 무더기로 발견된 집터와 유물은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를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은 물론 기원전 3천700~3천400년에 존재했던 땅의 모습을 오늘날에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단 10㎡의 땅도 유적지로 지정하기 쉽지 않은 오늘날에 자연이 그대로 보존되는 땅이 현상적으로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사회적 자산"이라는 이야기는 더 와닿은 이유다. 언젠가 이러한 곳들을 둘러싼 아파트 단지가 생긴다 해도 오롯이 남아있는 이 땅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질 것이다.사실 눈에 보이는 어떠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땅 아래를 깊이 들여다봐야 찾을 수 있는 유적은 활용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유적에 대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며 그 가치와 의미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는 여전한 숙제이다. 유적의 활용을 두고 김포시의 담당 학예연구사는 '유적부심'에 대해 말했다. 내가 사는 곳에 문화유산이 있어 자부심을 느낄 수 있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문화유산과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의 전환', 그 바람이 하나의 단단한 디딤돌이 되길 바란다. /구민주 문화체육부 기자 k

  • [노트북] 책임을 묻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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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책임을 묻는 일 지면기사

    "그곳은 책임운영기관이어서 그쪽에 물어보셔야 해요."최근 고용노동부 고객상담센터에서 전화상담원이 저성과자로 분류되면 센터장과 개별상담을 해야 하는 제도가 생겼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 기관인 노동부에서 역으로 감정노동을 하는 상담원들의 압박감을 가중시킨다는 지적이었다.취재를 마친 뒤 반론만 들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노동부에 전화했을 때 '책임운영기관'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됐다. 짐짓 당황하지 않은 척 노동부 소속 기관이니 노동부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되물으면서도 다급하게 책임운영기관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담당자를 연결해 준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고, 센터 홈페이지를 다시 보니 고용노동부 고객상담센터라는 이름 앞에 '책임운영기관'이라는 명칭이 작게 붙어있었다.책임운영기관은 조직·인사·예산 등의 기관운영에 보다 많은 자율성을 부여해 책임운영이 가능하도록 한다는 취지로 1999년 생겨났다. 당시 외환위기로 획일적 정부조직의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도입됐다고 한다. 현재 행정안전부가 지정한 책임운영기관은 53곳에 달한다. 기관에 운영과 자율성을 준다는 말은 책임 역시도 온전히 옮겨간다는 의미기도 하다."활동을 보고받는 정도라 정확한 운영방식은 모른다", "예산도 노동부를 통하지 않고 정부로부터 직접 받는다" 등 담당자와 몇 차례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센터 측의 연락처를 넘겨받고 전화를 끊었다. 이후 센터를 통해 정확한 상황과 반론을 들을 수 있었지만 찜찜함은 가시지 않았다. 노동부는 이 문제에 관해 얼마나 자유롭고, 기자인 나는 노동부에 얼마만큼의 책임을 물어야 했을까.이는 단순히 '노동부의 얼굴'이라고 스스로를 칭하던 상담원들의 자부심 서린 목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위탁업체 소속 직원으로 출발한 상담원들이 정부정책의 일환으로 직접고용으로 전환돼 공무직 신분이었던 데다, 상담원을 관리하는 팀장 등도 노동부 소속 공무원으로 순환직이었기 때문이다. 어려운 줄다리기만 계속된다. /목은수 사회부 기자 wood@kyeongin.com목은수 사회부 기자

  • [노트북] '사도광산'과 인천 부평 '일본육군조병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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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사도광산'과 인천 부평 '일본육군조병창' 지면기사

    일본은 니가타현 사도광산을 에도시대부터 1900년대까지 금·은 등 주요 자원을 채굴하는 재정원으로 활용했다. 이 광산이 최근 한국, 일본 정부 간 외교관계는 물론 시민사회 의제에서 화두를 차지하게 된 것은 일본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작업이 시작되면서다. 일본 정부가 사도광산의 유산 등재 대상 기간을 16~19세기 중반으로 한정한 게 발단이 됐다. 일본은 사도광산 운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39년부터 수년간 조선인 노동자 1천여명을 강제 동원했는데, 이 기간을 제외하면서 의도적으로 징용 역사를 배제했다는 비판을 받는다.사도광산 노동자로 조선인을 징용한 근거는 니가타현 역사서와 일본 시민단체 조사 자료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니가타현은 1988년 펴낸 역사서에서 '(조선인) 노무동원 계획은 명칭이 변하지만, 조선인을 강제 연행했다는 사실은 동일하다'고 기록했고, 교도통신은 지난 6일 이 내용을 인용 보도했다. 지난달 유네스코 자문기구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범위를 사실상 일제강점기 강제노동이 이뤄진 시기를 포함한 전체 역사를 포괄적으로 다뤄야 한다는 심사 결과를 내놓았다. 한국은 물론 일본 내에서도 조선인 강제동원 역사를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지만, 일본 정부가 지금껏 고수해온 입장을 선회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일본 정부가 외면하고, 지우려는 침략과 수탈의 역사를 우리가 기억하고 공유할 수 있어야 하는 이유다.일본 사도광산과 같이 인천 부평에는 조선인 강제동원이라는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관통하는 근대건축물이 곳곳에 남아있다. 일본육군조병창(일본군 군수공장) 시설물, 미쓰비시 줄사택 등이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 실체로서 그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부평에 남은 근대건축물들은 역사·사회적 가치에 앞서 환경 정화, 편의시설 조성을 위한 존치·철거의 대상으로만 재단되고 있다. 이같은 관점으로만 공간의 활용 방안을 정하기에는 너무 큰 가치를 간과하고 있다. 남아있는 근대건축물을 통해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할 아픔을 기억할 수 있도록 우리가 얻을 수 있는

  • [노트북] 러브버그와도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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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러브버그와도 살아가기 지면기사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하기 전, 때 이른 무더위를 피하고자 공원을 찾은 할머니들을 취재한 적이 있다. 함께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반소매를 입어 맨살이 드러난 팔뚝에서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새까만 몸, 기다란 다리 여섯 개. 징그럽기로 소문난 러브버그가 팔에 붙어있던 것. 취재 중인 것도 잊고 눈물을 글썽이는 나를 달래며 할머니들은 "당장 이 벌레를 박멸해달라고 보건소에 이야기하자"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가운데 한 분이 스치듯 중얼거렸다. "징그럽다고 다 죽일 수 있나." 사실 러브버그는 인간이 보기에 혐오스럽게 생겼다는 죄 아닌 죄가 있을뿐, 애벌레 때는 낙엽을 분해해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성충이 되면 꽃의 수분을 돕는 '익충'이다. 게다가 길어야 일주일을 살지만 여름철이 되면 인간들은 러브버그를 박멸할 생각만 한다.최근 인천 계양구의 도로공사 현장에선 멸종위기종 금개구리를 만났다. 논 습지 주변 웅덩이나 수로 주변 수풀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도로공사 전 이미 환경영향평가에서 이곳에 금개구리가 확인됐다. 공사를 시행하는 인천도시공사는 금개구리 실태조사를 한 뒤에 첫 삽을 떠야했다. 이에 인천도시공사는 빠르게 공사를 시작하기 위해 겨울철에 조사를 나섰다. 당연히 금개구리들은 겨울잠을 자느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인천도시공사는 이곳엔 양서류가 없다고 간주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우리는 쉽게 다른 생물을 생태계에서 퇴출시키고 지구를 독점하려 한다. 돌이켜보면 일상 속에서 인간이 아닌 다른 생물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기껏해야 길고양이나 비둘기, 가로수 정도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우리는 다른 생물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물론 러브버그는 여전히 두렵지만 말이다. /정선아 인천본사 사회부 기자 sun@kyeongin.com정선아 인천본사 사회부 기자

  • [노트북] 이성과 감정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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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이성과 감정 사이 지면기사

    기자는 취재원이 느끼는 아픔과 고통에 어디까지 공감해야 할까. 사회부 기자로서 현장에 나가 말기암 판정을 받은 환자, 불볕더위에도 온갖 보호장비를 착용하고 배달에 나서는 라이더, 자기의 삶을 치매 남편에게 전부 쏟아부은 할머니처럼 혹독한 현실을 사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고민하곤 한다.이 고민 중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이성이었다. 객관적인 사실만을 다루는 공정한 언론이 돼야 한다는 생각에 올라오는 눈물을 삼켰고, 나에게 주어진 취재와 기사 작성이라는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취재원이 토로하는 아픔을 듣고 공감하는 것은 후순위로 밀렸다. 울렁이는 마음을 이성으로 덮었고 기사에 쓰기 좋은 멘트를 받는 데에만 혈안이 됐다.감정을 배제한 채 취재하고 작성한 기사를 읽을 때면 죄책감이 한편에 자리 잡는다. 내 일을 위해서 누군가의 아픔과 슬픔을 이용한 것은 아닌가란 생각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듣고 전달하고 싶다는 기자 준비생 시절의 다짐과 다른 모습에 찜찜한 기분이 들곤 한다.기자란 목표를 가지고 취업을 준비하던 때 읽은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새뮤얼 프리드먼이 쓴 '미래의 저널리스트에게'란 책을 상기해본다. 책은 저널리스트가 갖추어야 할 여러 자질을 설명하며 '인간으로서 따뜻한 가슴'을 유지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저널리스트는 객관성과 공정함을 견지해야 하는 존재이지만 인간이 느끼는 연민과 동정 등을 부정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프리드먼은 아픔과 슬픔을 겪는 이들의 마음을 기자가 느끼지 못하고, 그 마음을 기사로 제대로 옮길 수 없다면 비인간적인 기자의 모습이며, 기자로서 실패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기자가 된 지 만으로 1년을 바라보는 지금, 따뜻한 가슴을 가지고 취재에 나섰는지 돌아본다. 인간의 감성과 감정을 전달하는 것 또한 저널리즘의 역할이라고 프리드먼은 말한다. 바쁘다는 핑계와 냉정해야만 한다는 착각으로 실패한 기자가 되지 않길 다짐해본다. /한규준 사회부 기자 kkyu@kyeongin.com한규준 사회부 기자

  • [노트북] 수도권매립지 종료, 환경부를 믿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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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수도권매립지 종료, 환경부를 믿으십니까 지면기사

    수도권쓰레기매립지의 대체매립지 세번째 공모가 무산됐다. 누구도 자기 집을 쓰레기장으로 내놓을 리 없다는 것을 모두가 예견했지만, 인천만 떠들고 있자니 허탈감이 더 크게 다가온다. '표' 때문에 눈치 보는 경기도·서울시 등 지자체의 마음은 백번 양보해 넘어간다 쳐도 비교적 이해 관계에서 자유로운 환경부마저 숨죽인 모양새다.2015년 체결한 4자 합의에 따르면 환경부는 대체매립지 확보를 위한 자문·지원·조정 등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지난 1~3차 공모도 환경부 산하의 수도권매립지관리공사가 맡아 진행했는데, 정작 공사 노조는 매립지 종료와 4자 합의 이행에 늘 적대적 입장을 보였다. 역대 공사 사장들도 수도권매립지 영구화 발언을 이어왔다. 앞서 신창현 전 공사 사장은 광역소각장을 수도권매립지 안에 만들어야 한다고 했고, 직전 전임자였던 서주원 전 공사 사장도 폐기물 전(前)처리시설을 매립지에 설치해야 한다고 했다. 소각장과 전처리시설로 수도권매립지에 묻는 쓰레기의 '양'을 줄여 매립지를 더 오래 쓰겠다는 생각이다.과거 다수의 환경부 장관도 인천의 수도권매립지 피해를 외면했다. 2011년 조춘구 환경부 장관은 수도권매립지 악취에 대한 정치권 지적에 대해 한 강연에서 "의원들이 표를 얻으려고 나선다"라고 했다. 2013년 윤성규 환경부 장관은 수도권매립지 연장을 주장했고, 조명래 환경부 장관은 2019년 국정감사에서 "대체매립지 조성은 지자체가 주도적으로 할 일"이라며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2021년 한정애 환경부 장관은 수도권매립지를 2025년 넘어서까지 쓸 수 있다고 해 인천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한화진 현 환경부 장관은 이번 3차 공모 응모 지자체가 없어도 당장 쓰레기 처리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취지의 답변을 내놓아 매립지 추가 사용을 전제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이쯤 되면 적어도 환경부는 수도권매립지 종료에 크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환경부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다음 공모의 결과도 변하지 않는다. 인천시민들이 수도권매립지 종료에 대통령이 직접

  • [노트북] 길을 잃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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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길을 잃었을 때 지면기사

    기사를 쓰다 보면 자주 길을 잃는다. 분명 A라는 주제를 다룬 기사였는데 정신차려 보면 B를 쓰고 있어 당황했던 적이 종종 있다. 그때마다 길의 방향을 다시 잡아준 게 회사 선배들이다. '선배들이 보기 전 왜 혼자 잘하지 못했을까' 하는 자책을 하긴 하지만 그들의 도움 덕분에 길을 헤맸을지언정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기사를 쓸 때뿐만 아니라 삶을 살아가면서도 종종 길을 잃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부모님이나 은사 등이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나아갈 곳을 설정할 수 있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나 삶의 길라잡이가 되어주는 인물은 저마다 한 명씩은 있을 것이다.지난달 중순 10대 소녀가 인천 어느 한 교회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폐색전증. 폐의 혈관이 혈전이나 공기에 의해 막히는 질환으로 장기간 묶여 있거나 외상을 입었을 때 발생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부검 결과를 토대로 아이는 학대에 의해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했다. 이 소녀는 아버지의 예상치 못한 죽음 이후 심적으로 많이 힘들어했다. 이로 인해 가족 간에도 지속적인 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아이를 가족 대신 맡아주겠다고 한 게 인천 C교회의 교인 D씨였다. 소녀는 지난 3월 D씨를 따라 아무 연고도 없는 인천에서 생활했다.고작 3개월 사이 아이는 학대 정황이 의심되는 상황 속에서 사망했다. D씨는 아이의 죽음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판단돼 아동학대 살인죄로 조사받고 있다. D씨 외 교인 2명도 사건에 연루돼 조사 중이다. 다만 교회는 소녀의 죽음을 두고 "학대는 없었고 다 아이를 위해 한 행동들"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소녀가 심적으로 무너져 길을 잃었을 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길라잡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비극으로 끝난 아이의 죽음 앞에 씁쓸한 여운만 남는다. 먼 타지에서 짧은 생을 마감한 소녀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빈다. /이상우 인천본사 사회부 기자 beewoo@kyeongin.com이상우 인천본사 사회부 기자

  • [노트북] 백팔번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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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백팔번뇌 지면기사

    '백팔번뇌'. 17대 국회에서 제각기 다른 언행을 일삼던 열린우리당 초선의원들로 인해 18대 총선에서 참패하게 된 것을 비꼬아 말하는 '여의도 용어'다. 108가지 번뇌라는 불교 용어지만 여의도에서는 다르게 쓰인다. 그들은 중구난방 움직이다 지탄을 받고 다음 총선에서 사라졌다. 22대 국회가 시작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6월, 유독 백팔번뇌의 경고가 여의도에서 들리고 있다.먼저 국민의힘은 109석을 예상했지만, 한 석이 줄어 108석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겨우 1석' 차이지만 차기 보수 대권주자로 성장할 가능성이 농후한 이준석 대표의 개혁신당에 1석이 돌아가면서 양당의 희비는 컸다. 또 108석이라는 숫자는 오묘했다. 앞서 말한 여의도의 기억처럼 지도부의 전략 부재가 거듭되며 여당에 고뇌를 안기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남은 임기는 3년인데 우군은 당장의 상황을 타개할 리더십과 대책이 없어 번뇌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170석을 가져간 민주당에서도 백팔번뇌의 교훈은 내부에서 나온다. 총선에서 승기를 쥔 야당은 70여명의 초선의원을 국회에 입성시켰다. 하지만 국민 뜻을 받든다는 이유로 상임위원회에서 입법 독주를 이어가고, 이재명 대표의 '일극체제'를 뒷받침하기 위한 일부 의원들의 선을 넘나드는 발언은 과거의 오명을 떠올리게 한다.열린우리당의 백팔번뇌, 그 후 20년이 지났다. 당시 국회에 입성했던 초선들은 중진의 거물급 인사가 됐고, 운동권 시대가 저물고 민주주의가 자리잡은 2024년은 미래 의제를 준비해야 할 때가 됐다. 하지만 여야 모두에게서 개혁을 꿈꾸는 비장한 눈빛과 초심을 다짐하는 웅장함은 찾아보기 어렵다.국회 기자들은 개혁을 추구하는 젊은(초선)의원들을 '소장파' 또는 '소신파'라 부르고 있다. '일을 하기 위해 국회에 왔다'는 초선들에게 백팔번뇌의 기억은 여의도의 멸칭만은 아니다. 거침없고 소신있는 행보로 주목받았던 소장파들이 22대 국회에서 백팔번뇌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되길 바란다. /오수진 정치2부(서울) 기자 nuri@kyeongin.com오수진 정치2부

  • [노트북]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질 수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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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질 수 없는 것 지면기사

    3개월 전부터 새벽수영을 다니고 있다. 수영의 장점은 많다. 누구나 도구 없이 맨몸으로 할 수 있는 운동이라 부담이 없다. 더운 날씨에 상쾌하게 운동할 수 있는 점도 매력적이다.'수친'(수영 친구)도 수영이 좋은 이유다. 나에게도 수친이 생겼다. 이름도 모르지만 수영복 색깔로 그를 알아챈다. "내일 모레면 60살"이라는 말에 나이만 짐작해볼 뿐이다. 강습이 끝나면 샤워장으로 가면서 얼마나 수영이 늘었는지 서로 공유한다. 수영에 대한 열정만으로 맺어진 우정이다.즐겁기만 했던 수영강습 시간이 불편해진 건 얼마 전부터다. 연이은 아침 일정에 일주일 만에 강습을 간 날이었다. 배영을 하려고 물에 떠 있는데 자세를 고쳐주던 강사가 "살이 많이 탔다. 강습을 빠지고 놀러 갔다 왔느냐"며 웃었다. 맨살이 드러나는 수영복 차림이어서였을까. 순간 불쾌함이 온몸으로 번졌다. 그 수업시간에만 "수영을 해도 살은 안 빠지는 것 같다", "결혼은 언제 하실 생각이냐" 등등 여러 발언들이 이어졌다.순간 과거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2년 전 매일 아침 사건사고를 챙기러 경찰서로 향하는 게 수습기자의 일이었다. 안면을 튼 경찰들 몇명과 함께한 저녁 자리에서 아버지뻘인 그들은 나와 동기에게 "오빠라고 불러보라"며 농담을 했다. 더 심한 발언도 있었지만, 굳이 열거하고 싶지 않다. 당시 선배 기자가 공식적으로 해당 경찰관들의 상관에게 항의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이후에도 불쾌한 말을 듣는 일은 종종 생겼다. 이런 일에는 직업이 '기자'라는 것도 별 소용이 없는 듯했다.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들을 때마다 매번 심장이 쿵 내려앉아 저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리곤 죄책감이 밀려온다. 왜 그 자리에서 불쾌한 티를 내지 못했을까.'성희롱'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은 아직 찾지 못했다. 애초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잘못은 발언자에게 있지, 듣는 사람에겐 없다. 더는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이 글을 쓴다. /백효은 인천본사 사회부 기자 100@kyeongin.com백효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