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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추칼럼] 양심불량한 비서

    [춘추칼럼] 양심불량한 비서

    챗gpt라는 것이 처음으로 나타나 세계를 강타했을 때 나는 마침 새 소설을 쓰고 있던 중이었다. 챗gpt가 훌륭한 시나 소설, 에세이를 쉽게 써낸다는 경험담들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내심 심란했던 것을 부인하지 않겠다. 인공지능에 의해 제일 먼저 사라질 직역이 예술이라니, 이럴줄이야! 지금이라도 다른 직업을 알아봐야 하는 것인가? AI의 학습기능이란 것이 워낙 놀랍다보니 1년 뒤도 장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초기 기술이니까 아직은 내가 낫겠지 생각하고 일단 하던 일을 계속 하기로 했다.AI를 경쟁자가 아닌 비서로 여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창작은 내 몫으로 하고, 소설에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한 자료 조사 작업을 AI에게 맡기면 괜찮은 협업이 될 것 같았다. AI에게 몇 가지 질문들을 던져보았다. '럭셔리 요트에 대해 알려줘. 고급 요트 브랜드는 뭐가 있지? 그 내부 인테리어는 어떻게 생겼어? 듣기좋게 묘사해 봐'.묻자마자 AI 비서는 거침없는 답변을 술술 쏟아냈지만 럭셔리 요트 브랜드에 대한 긴 보고서의 약 80%는 동어반복이었다. 'Azimut Yachts - 이탈리아에서 만든 럭셔리 요트 브랜드로, 1969년에 창립되었습니다. 다양한 크기와 스타일의 요트를 제공하며, 최신 기술과 디자인을 적용합니다'라는 대답에서 브랜드와 연도만 바뀐 것이 열 개쯤 생성되었다. 인테리어에 대해서도, 수준 높은 구매자의 취향에 부합하는 수준높은 공예와 기술력, 이태리 대리석과 고급 목재 등 고급 자재를 사용했고 침실, 주방, 영화관, 수영장, 휴식공간 등을 갖추었으며 안전에도 신경썼다는 식이었는데,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는 답변이었다. 그런 대답을 듣고있자니 성실한 조사따위는 전혀 하지 않고 이것저것 갖다붙여 아는척만 하는 양아치 비서의 '썰풀기'를 듣는 것 같은 격렬한 열받음을 느꼈다.내 친구는 AI에게 의학 전문 지식을 물었는데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놀랍도록 화려한 새로운 학설과 논문 리스트를 얻어 들고 횡재한 기분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AI가 제공한 논문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그는 의

  • [춘추칼럼] 새로운 정치세력의 성공조건

    [춘추칼럼] 새로운 정치세력의 성공조건 지면기사

    분위기는 절정을 향해 가는 중이다. 무당파의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4월에 실시된 12개 여론조사를 보면 무당파의 비중은 면접조사(4개) 기준으로 최대 31%, 최소 29%다. 지난주 5개 조사의 무당층은 최저 20%, 최대 31%로 양당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작년 12월부터 지난주까지 내년 총선의 성격을 묻는 조사는 모두 21개였는데 여당 심판론이 19승1무1패로 압도적이다. 4월로 범위를 좁혀보면 정권 심판론이 50%를 넘긴 게 7번 중 5번이다. 하지만 중도무당층은 정권 심판론에 힘을 실으면서도 더불어민주당 지지로 바로 이동하진 않는다. '돈 봉투' 파동 때문이다.최근에는 국민의힘 지지층의 대통령 지지철회가 늘어나는 양상도 보인다. 지난주 갤럽조사에서 대통령을 지지하는 국민의힘 지지층은 68%인데 그 전주는 74%였다. 반면 국민의힘 지지층의 대통령 반대는 19%에서 25%로 늘었다. 한마디로 중도무당층의 실망이다. 그들은 한쪽의 '친윤' 득세와 다른 한쪽이 '개딸' 강성 지지층에 휘둘리는 모습을 외면한다. 이상민 의원은 "지금이 제일 좋은 때다. 양대정당이 이렇게 국민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는 때"라 하고 김종인 위원장은 "국민들 스스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본다.이유는 분명하다. "보수 10년 진보 10년을 얘기하는데 그 20년 동안 문제 해결된 게 하나도 없다. 젊은 청년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얘기한다"며 "이런 정당에서 과연 새로운 미래를 향한 방안이 나올 수 있겠나? 현재 상태로 봐서 불가능하다"는 게 김종인의 판단이다. 그래서 그는 "국민들 스스로 20년 동안 속아왔다고 생각하고 정치에 대한 불신이 극도에 달했기 때문에 (국민들은) 새로운 구상을 가지고 있다"고 기대한다. 이른바 '제3 지대론 또는 제3 정당론'으로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틀을 만들 수 있는 세력"이라며 금태섭 전 의원이 가장 먼저 물꼬를 텄다.보수·진보 10년씩 20년간 해결된 문제없어인물 아닌 시스템 중심 업그레이드 '제3당

  • [춘추칼럼] 괴력난신(怪力亂神) vs 상덕치인(常德治人)

    [춘추칼럼] 괴력난신(怪力亂神) vs 상덕치인(常德治人) 지면기사

    "튀어야 시청률이 올라갑니다." 방송국 PD가 인문고전 강의를 하던 필자에게 자주 하던 말이다. 처음 들어본, 상식으로 설명이 안 되는, 괴상하고 기이한 강의라야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켜 시청률을 높일 수 있다는 마케팅 논리다. 삭발을 하든, 기발한 복장을 하든, 기괴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든, 신비적이고 충동적인 논리로 말하든, 이 어느 한 가지라도 있어야 시청률이 올라갈 수 있다는 나름 대중을 분석하고 있다는 그 분야 전문가의 조언이다. 한마디로 평범하고 정상적인 언변으로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없으니 이상하고 특별함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충고였다. 그러고 보니 세상이 온통 괴상하고 이상하고 특별한 것으로 가득하다. 먹는 즉시 효력이 발생하는 건강식품,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상품, 신비하고 오묘한 효능은 그런대로 들어줄 만하다. '마귀와 사탄이 들려서 그렇다(怪)', '내 능력은 사람의 생사와 국가의 운명을 주관한다(力)', '혼란의 세상이 다가왔다(亂)', '하늘에서 벌을 내릴 것이다(神)'. 이 정도 되면 괴력난신(怪力亂神) 마케팅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고, 권력을 만들고, 왕국을 만드는 선동가이며 사기꾼이다. 예수님, 부처님 입장에서 보면 신을 모욕하고 능멸한 자로서 벌 받아야 할 대상이며 신성(神性)을 가장한 혹세무민(惑世誣民)의 목회자이다. 물은 맛없지만 안 질리고, 달콤한건 그때뿐神 빌려 권력·욕망 채우려는 목회자들 활개 공자는 괴력난신을 경계하고 멀리하였다. 공자가 살던 춘추전국시대도 튀어야 팔리던 시대였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정상적이고 평범한 논리는 수요자인 귀족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없었다. 당시 왕들과 귀족들은 신들의 이야기와 비약의 논리를 선호하였다. 당대의 백가(百家)들은 온갖 특별하고 신비한 이야기로 유세하여 자신의 이익을 채우려 하였다. 공자 역시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정치에 참여하여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고 싶었지만, 괴력난신으로 접근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세상을 속여서(欺世) 이름을 도둑질하지 않겠다

  • [춘추칼럼] 봄날이 가도 삶은 계속되어야 해

    [춘추칼럼] 봄날이 가도 삶은 계속되어야 해 지면기사

    지뢰가 폭발하듯이 꽃은 만발하고, 대포가 터진 자리에는 꽃 사태였다. 봄은 다투어 피어나는 꽃들의 전쟁이다. 평지와 둔덕마다 흐드러진 개나리 산수유 진달래 목련 벚꽃들이 시샘하듯 불어 닥친 비바람에 덧없이 졌다. 길가 벚나무 아래에는 하얀 꽃잎들로 낭자하다. 봄은 서둘러 왔다가 철수할 기색이다. 사월의 태양 아래 꽃들은 지고 나뒹구는 꽃잎들은 철수하는 봄이 남긴 사체들이다. 봄꽃 진 뒤 느티나무 묵은 가지마다 연두색 새잎들이 돋고, 가랑잎 두텁게 쌓인 표토를 밀어 올리며 원추리 싹이 떼 지어 올라온다. 도처에서 피어나고, 돋고, 꿈틀거리고, 뻗치는 것은 봄에 대한 살아 있는 것들의 벅찬 생명 반응들이다. 봄꽃 둘레에 노오란 햇빛이 꿀벌처럼 잉잉거릴 때 우리는 벅찬 희망을 품고 낙관적인 기분에 빠졌었다. 심장은 보람으로 펄떡이고, 혈관의 피들은 온몸을 돌며 환호성을 지른다. 고양이 요람 같은 봄날에 우리의 쾌감지수는 상승하고, 우리는 가장 희망적인 호모 사피엔스로 재발명되는 것이다. 봄날 대기에는 꽃들이 어지럽게 내뿜는 방향만이 아니라 약간의 허무, 약간의 슬픔, 약간의 외로움도 함께 녹아 있다. 봄날의 바람과 태양이 우리 젊음을 약탈해가듯이 세월이 돈과 아름다움과 사랑을 열망하던 우리의 푸르고 아름다운 젊은 날을 앗아간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의 첫 키스는 뇌리에 강렬함으로 각인되지만 어느 입술이 열일곱 번째로 내 입술에 가 닿았던 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이토록 얕은 기억의 용량이라니! 화살처럼 지나가는 봄, 속수무책 바라볼 뿐우린 달콤한 고통 견디며 속절없이 늙어가 우리 오감을 문지르던 꽃이 다 지면, 보람과 기쁨을 앗아간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아름다운 것들의 유효기간은 비정상적으로 짧구나! 종달새 우짖는 이 허전한 봄날을 어떻게 맨정신으로 견딜 수 있나? 오래 전에 헤어진 당신은 잘 지내는가? 이제는 유난히 찰랑이던 당신의 검은 머릿결만 기억날 뿐 나머지 이목구비는 희미해졌다. 당신에게 미처 부치지 못한 편지들을 꿈속의 우체통에 집어넣는 꿈에서 깨어난 아침에는 가슴이 텅 빈

  • [춘추칼럼] 촉촉했던 산들의 기억

    [춘추칼럼] 촉촉했던 산들의 기억 지면기사

    내가 태어나 성장한 마을은 인왕산 아래 옥인동 47번지다. 결혼 이후 옥인동을 떠나 10여 년간 살다가 2008년 연어처럼 회귀에 성공했고 그 뒤로 계속 경복궁 서쪽 마을에 살고 있다. 2010년 인왕산 계곡 자락에 얹힌 옥인아파트를 철거하고 수성동계곡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는 뉴스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물소리가 울린다는 뜻을 가진 그 계곡의 이름에 의구심을 가졌다. 물소리가 들리는 계곡이라면 내가 살던 그 언덕이 아닌가? 옥인아파트 쪽이라면 위치가 다른데? 가까운 곳이지만 내가 태어나 자란 마을은 인왕산의 동남쪽 사면이었고 수성동계곡은 정남향 사면이라서 줄기가 좀 달랐다. 그런 작은 차이에도 예민해지는게 내 마음이었다. 우리 동네의 이름을 남에게 빼앗긴 것처럼 억울했지만 겸제 정선 선생님이 장동팔경첩에서 그 계곡의 모습을 아름다운 필치로 남기고 그 이름을 '수성동(水聲洞)'이라고 정확하게 기록해 놓으셨으니 따질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내 마음 속의 수성동은 우리 동네였다. 우리 마을은 정말이지 사철 물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환각이나 환청이 아닌 게, 정말로 인왕산 계곡 위에 한겹 얇은 시멘트를 덮고 게딱지만한 작은 집들을 세운 구조였다. 어릴 때 살았던 우리 집 화장실은 그 아슬아슬한 주거 형태의 가장 좋은 예가 되어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반듯하게 하얀 도자기로 된 신식 변기가 달려 있었지만 오로지 그 말단 부분만 문명의 흉내를 냈을 뿐 그 아래로는 거침없는 인왕산 계곡이 펼쳐져 있었다. 힘차게 치솟은 바위와 천둥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계곡물 위에 살포시 변기를 얹은 천연 수세식 화장실이었다. 친구들과 친척들은 우리 집에 놀러오면 무서워서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했다. 우리 가족들은 아무런 감흥 없이 힘차게 흐르는 계곡물을 보며 날마다 용변을 해결했다. 사철 물소리 가득찬 마음속 동네 수성동계곡세월 흐르며 '콸콸'댔던 소리 '졸졸'로 줄어 세월이 흐르며 물소리가 점점 작아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렁차게 힘차던 콸콸 소리가 졸졸 소리로 줄어들어 있었다. 수성동계곡 쪽도 형편은 마찬

  • [춘추칼럼] 2024년 총선, 1년이다

    [춘추칼럼] 2024년 총선, 1년이다 지면기사

    내년 이맘 때쯤은 총선의 공식 선거운동기간이다. 2024년 3월28일부터 선거운동이 시작되는데 4월5일은 사전투표 날이고 10일은 본 투표 날이다. 2024년 4월10일 22대 총선은 어느 정당이 승리할까? 총선을 1년여 앞둔 현재 시점에서 정당 지지율과 '정권 지원론' vs '정권 심판론'의 여론흐름을 보자.우선 정당 지지율.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지난주까지 실시된 여론조사는 모두 373개. 주별평균 8.3개로 매일 1개 이상의 여론조사가 있었던 셈이다. 이중 ARS 조사가 256개, 면접조사가 107개였다.지난 45주 동안 정당 지지율 흐름을 보면 첫째, 국민의힘 지지율이 가장 높았던 때는 작년 지방선거 전후였다. 당시 국민의힘 지지율은 주별평균 50%까지 육박했다. 둘째, 지방선거 이후 국민의힘 지지율은 하락하여 주별평균 40%이하로 떨어지고,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은 주별평균 40%를 돌파하며 양당 지지율은 역전된다. 이때가 7월 중하순인데 주별평균 40% 전후의 민주당과 30% 중후반대의 국민의힘 지지율 패턴은 12월 초중순까지 이어진다.셋째, 12월부터 2월 초까지 민주당 약간 우위의 양당 지지율은 주별평균 30% 후반대에 머물면서 엎치락뒤치락 한다. 넷째, 전당대회를 전후해서 국민의힘 지지율은 민주당에 잠시 앞서는 모습을 보이지만 최근 한일정상회담과 69시간 논란의 여파로 민주당에 다시 역전 당한다.다섯째, 최근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 하락은 전통적 지지층의 이탈과 함께라서 주목된다. 보수층과 영남 그리고 고연령층의 이탈이다. 작년부터 시작되어서 전당대회를 통해 마무리된 젊은층의 이탈과 함께 복합위기의 국민의힘 지지율이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은 다시 하한선에 다가설 가능성을 보여준다. 첫번째 하한선은 35% 전후인데 35%는 바이든의 '날리면 논란'때 '날리면으로 들은 사람들'이다. 마지막 저지선은 25% 전후인데 이는 2017 대선 때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얻은 득표율이다. 3월 들어 여야 심판론 '4:1'로 민주당 우세국힘, 전대후 제외 4

  • [춘추칼럼] 청안(靑眼)과 백안(白眼)

    [춘추칼럼] 청안(靑眼)과 백안(白眼) 지면기사

    눈은 인간의 많은 정보를 저장하고 있다. 눈을 통해 신체 건강을 알 수도 있고, 마음의 상태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 '눈은 마음의 창이다' '눈은 거짓말을 못한다'는 말은 눈을 통해 상대의 마음 상태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는 의미다. 심지어 동공을 둘러싸고 있는 홍채인식을 보안에 적용하는 기술이 있는가하면, 홍채를 통해 전생을 읽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는 상대방의 눈을 통해 상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나를 호의적으로 보고 있는지 등을 파악하기도 한다. 눈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눈빛에는 꿀물이 뚝뚝 떨어진다고 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보는 눈빛에는 살기가 가득하다고도 한다. 애써 눈을 피하는 사람은 숨기는 것이 있는 것이고, 이야기를 하면서 눈은 다른 곳을 향해 있다면 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탐내는 물건을 보면 눈에서 독(毒)이 나와 눈독을 들이기도 하고, 상대방이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하며 눈에 붙은 살이 움직여 눈살이 찌푸려지거나, 더하면 눈에서 총이 발사되어 눈총을 주기도 한다. 눈은 독이 되기도 하고 총이 되기도 하여 내 감정이 상대방에게 가장 먼저 전달되는 인간의 기관이다. '눈은 거짓말 못한다'는 말은 상대 마음 파악백안시, 앞에 있는 사람 유령 취급 완전 무시청안시, 상대방에 호의 표현 존경·인정 표시하얀 눈동자 푸르게 바꿔 아름답게 대하자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사람인 완적(阮籍)은 눈빛으로 상대방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였다. 완적은 속세를 피해 산림으로 들어가 권력과 단절된 삶을 선택한 지식인이었기에 자기주장이 강하고,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일단 속물이라고 생각하거나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흰 눈동자로 상대방을 보았다. 일명 백안시(白眼視)의 시선법이다. 마주보고 이야기는 하고 있으나 동공은 다른 곳에 있고, 흰(白) 눈자위(眼)로 상대방을 보는 시선법이다. 백안시는 앞에 있는 사람을 유령 취급하고 완전 무시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 [춘추칼럼] 불효자는 웁니다

    [춘추칼럼] 불효자는 웁니다 지면기사

    우리는 많은 것을 잃으며 살아간다. 상실과 몰락은 생명을 품은 모든 존재의 불가결한 실존의 조건 중 하나다. 상실 없는 삶이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삶은 많은 것을 잃는 경험 가운데 빚어진다고 할 수 있다. 애착하는 것들은 망각과 소멸, 세월의 파괴 속에서 자취 없이 사라지는데, 이 상실은 달콤하고도 씁쓸하다. 생에서 가장 큰 상실은 혈연의 사라짐일 테다. 혈연 중 누군가 죽으면 유품들은 소각되거나 증여되고, 소수의 물품만 보존되는 행운을 맞는다. 이마저도 세월이 흐르는 와중에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다. 모든 어머니는 바쁜 천사를 대신해서 이 땅에 온다고 했다. 그 천사가 지상에서의 소명을 다 하고 떠난 지 몇 해가 지나간다. 올해도 돌아온 어머니 기일을 혼자 조용히 보냈다. 모란과 작약이 피기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사는 일에 치여 차츰 얇아지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어머니와 시골집 거실에 둘이 있던 어느 쓸쓸한 저녁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심상한 어조로 죽으면 화장해 달라고 내게 부탁을 했는데, 어머니 죽음을 염두에 두지 못했던 탓에 나는 놀라고 무언가에 찔린 듯 아팠다.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슬픔이나 쓸쓸한 자락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목소리가 하도 담담해서 내 마음은 패는 듯 아팠을 것이다.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가족 부양한 어머니늙어가는 아들과 세월 더께 두터워져 안온 어머니가 젊은 시절 때 나는 사춘기를 맞았다. 자식이 고분고분하지 않았으니 다루기 까다로웠으리라. 모성의 부재 속에서 보낸 유년기 내 무의식에 가라앉은 앙금이 원인이었을 테다. 어머니는 내 어린 입술에 젖을 물리고 배부르게 먹였겠지만 내겐 도무지 그런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 열두어 살쯤 되었을 때 서울에서 온 한 소년을 만났다. 어머니의 고향 친구의 아들로 우리는 곧 친해졌는데, 그는 제 엄마의 젖이 모자라 내 어머니의 젖을 자주 얻어먹었다는 얘기를 꺼냈다. 처음 듣는 얘기에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나중에는 기분이 야릇해졌다. 슬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누구 잘못도 아니었지만 젖 떼자마자 유기

  • [춘추칼럼] 그 드라마의 주인공

    [춘추칼럼] 그 드라마의 주인공 지면기사

    도합 12년이나 되는 초·중학교 시절은 대체로 지겹고 칙칙한 기억으로 남았지만 즐거운 시간이나 중요한 배움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 경우 가장 기억에 남는 행복한 학교생활은 고2때 찾아왔다. 돌이켜보면 신기한 일이었다. 고2는 보통 코앞에 닥친 입시의 압박이 극에 달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공부 이야기는 오늘의 본론이 아니지만 이때 나는 성적도 일생의 바닥을 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정황들을 보자면 일생 가장 우울하고 두려운 시간을 보내야 옳았을 시기에 나는 가장 행복했다.나만 행복했던 게 아니었다. 그때 우리 반은 전교에서 가장 사이가 좋은 반으로 소문이 났다. 입시를 앞두고 까칠해진 사춘기 소녀들 60명을 모아놓았는데 믿을 수 없이 다정하고 화목했다. 그때 우리가 행복했던 것이 대체 어떤 모습이었냐고 말하면 딱 꼬집어 말할만한 일이 없다. 그냥 우리는 학교에서 마음이 편안했고 각자의 문제들을 잊은 채 수다를 떨며 하루를 보냈다.가장 기억에 남는 남다른 풍경은 우리의 점심시간이었다. 점심시간에는 수업시간 동안 헤어져 있던 절친들이 다시 뭉치는 것이 중요했으므로 도시락을 들고 다른 반으로 뛰어가는 일도 흔했다. 인싸(인사이더)들은 커다란 그룹을 이루고 시끌벅적하게, 아싸(아웃사이더)들은 혼자 혹은 둘이서 조용히 밥을 먹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행복했던 우리 교실에서는 그런 소란스러운 재배치가 일어나지 않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우리는 그냥 앉은 자리 그대로 네다섯 명씩 짝지어 도시락을 나누어 먹었다. 몇 주에 한 번씩 자리를 바꾸었는데,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새로 만난 이웃들끼리 새로 그룹을 이루어 종알거리며 밥을 먹었다. 곧 절친을 찾아 다른 반에서 달려오는 아이들이 없어졌다. 그들은 자기 절친이 낯선 아이들과 만족스럽게 밥을 먹는 모습에 놀랐고 절친들의 배타성이 없는 그 그룹에 굳이 끼어들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그들이 불평하지 않고 조용히 각자의 교실로 돌아갔던 것은 우리가 만든 희귀한 행복에 대한 존경의 의미였을 것이다. 우리 60명은 1년 동안 절친도

  • [춘추칼럼] 김기현 레거시?!

    [춘추칼럼] 김기현 레거시?! 지면기사

    한 주 앞으로 다가온 국민의힘 전당대회의 관심사항은 두 가지, 김기현 후보가 결선 없이 당선되느냐 그리고 친윤계가 최고위원 5명 중 4명을 확보하느냐다. 최고위원 5명 중 4명이 사퇴하면 비대위 전환이 가능한 게 주류에게는 '최후의 안전장치'가 된다.지난 1월 중순부터 2월 말까지 국힘 지지층을 상대로 한 32개 조사결과를 보면 첫째, 안철수 후보는 1월25일 '나경원 불출마' 직후 김기현 후보에 앞서며 지지율 최고점을 찍지만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한다. 2월 초가 분기점인데 '윤안연대 표현은 무례, 국정운영의 방해꾼이자 적, 공산주의자 신영복 존경하는 사람 그리고 안철수 당 대표되면 윤 대통령 탈당' 여파의 영향으로 해석된다.둘째, 여론조사는 1라운드 김기현 승리 가능성을 시사한다. 2월 초 이후 김기현 지지율은 30% 중반대에서 45%까지 접근하는데 국힘 지지층의 40% 초반 지지율은 50%를 훨씬 넘는 당원투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경험론과 최근 당원구성의 변화로 알 수 없다는 주장이 엇갈린다. 그렇다면 김기현의 국힘 전당대회가 남긴 것은 무엇일까? 우선 정당의 공천이나 당직선거가 점점 개방화되는 추세의 반전이다. '당원투표 70%+여론조사 30%' 방식은 2006년 강재섭 대표선출 때 도입된 이후 2021년 이준석 대표선출 때까지 사용된다. '당원 100%' 방식은 2003년 중앙당과 지구당이 인구비례에 따라 각각 50%씩 추천한 당원 23만명의 선거인단 투표이후 처음이다. 2003년 이전 대의원 투표에서 선거인단 투표로 바뀐 것 또한 정당 구성원의 참여 확대였다.대통령 '현대판 군주'서 집권당은 취약해져'민주적 책임성 부재' 함께 극복하는게 중요 당원 아닌 시민들이 여론조사든 직접 참여든 처음으로 정당의 당직선거에 참여한 곳은 보수정당이다. 2004년 박근혜 대표 선출 때인데 더불어민주당은 2012년 한명숙 대표 선출 때에야 비로소 시민을 참여시킨다. 박 대표는 여론조사였고 한 대표는 선거인단 방식이었다. 2004년 당시 한나라당은 노무현 탄핵 후폭풍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