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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여름의 맛 지면기사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다. 딸은 물속에 들어가 있고, 나는 글 속에 들어가 있으나 둘 다 절반 정도 몸을 밖으로 내놓고 머리만 익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깊이가 일 미터 남짓한 간이 수영장에서 사방으로 물을 튕기며 즐겁게 첨벙거리는 딸을 보고 있으려니 내 글쓰기도 저렇게 즐거우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나 역시 10매 가량의 글을 붙들고 있으면서 온 사방에 단어란 단어는 죄다 흩뿌려놓은 채 허우적거리다가, 멍하니 임윤찬의 라흐마니노프 연주 동영상을 재생하는 것이다. 17세 소년의 무서운 몰두를 보면서 오래가지 않는 반성의 채찍질을 한번 휘두르며, 억지로 종이 속에 뛰어든다. 아아, 수박이나 먹고 싶다….시고모님이 펴낸 요리 산문집 도착시어머니·둘째 고모의 엄청난 손맛 문득 한 권의 책이 도착한다. 시고모님이 내신 요리 산문집이다. 시를 쓰는 둘째 고모는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오고 목소리는 성악가같은 분으로 결혼 전에 시부모님보다도 먼저 만나 뵙던 분이다.속초가 고향인 남편을 만나면서 서울토박이인 내게는 바닷길이 열린 셈이 됐는데, 그 길에 가장 먼저 떠내려온 것은 다름 아닌 음식이었다. 우선 홍게가 있다. 시아버지가 현역 선장님이던 시절, 나는 이 비싸고 귀한 홍게를 물릴 때까지 실컷 먹을 수 있었다. 백골뱅이와 소라는 덤이다. 그 외에 도치 알탕이며 도루묵조림, 총알 오징어와 가자미 식혜를 비롯해 난생 처음 먹어보는 물고기들, 온갖 나물과 해초무침, 이 모든 것을 제압하는 여왕같은 김치를 맛볼 수 있었다. 산과 바다에서 나는 싱싱하고 다채로운 식재료를 엄청난 손맛으로 요리하는 시어머니와 둘째 고모의 음식솜씨 때문에 제사 때마다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고 가야겠다는 다짐 아닌 다짐을 하게 된다. 남편에게 반한 것도 사실은 남편이 해준 요리 탓이 크다. 그런데 책을 넘기니 그 요리의 근원이라고 할까, 맛있는 음식이 뚝딱 만들어지는 손들이 어떻게 이어졌는지 길이 보이고, 그 끝에 돌아가신 시할머니의 모습이 나온다.'작가가 나온 집은 망한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작가가 자기 집안사를 낱낱이 글에 써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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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새로운 공간의 시대 지면기사
최근 '프롭테크(proptech, 부동산 자산과 기술이 합쳐진 단어로 첨단 정보기술과 부동산 서비스가 결합한 것)' 컴퍼니가 부쩍 늘었다. 직접 돌아다니는 '발품' 대신 휴대전화를 이용한 '손품'이 대세가 되고 있는 것이다. 공간을 중개하는 플랫폼들도 다양해졌다. 이 지면에서 소개한 바 있는, 취향이 담긴 개인 공간으로 낯선 사람들을 초대하는 '남의 집' 서비스도 대규모 투자를 받는 등 몸집을 키우며 영역을 확대 중이다. 코로나19 시기를 지나면서 사무실과 상가 등 기존 공간들의 공실률이 올라가고, 임차인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공간 플랫폼뿐만 아니라 관심사나 취미가 같은 사람끼리 모여졌다 흩어지는 '스팟 살롱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플랫폼도 늘어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공간을 소유하기보다는 한 시간 동안 쓰더라도 내가 원하는 공간을 찾아 이용하고, 부모님과 함께 살거나 원룸에 거주하고 있어 자신들의 취향과 수요에 맞춰 공간을 사용하기 어려운 MZ세대의 특성을 정확히 파악한 결과라고 분석한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터조차 뮤직비디오 촬영장으로 인기가 많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N잡러로서의 활동을 하는 새로운 세대의 출현인 것이다.첨단 정보기술·부동산 서비스 결합최근 '프롭테크' 컴퍼니 부쩍 늘어소유보다 취향 중요한 MZ세대 특성 코리빙(Cooperative+Living, 공용 공간과 문화 시설을 공유하며 여러 입주민이 생활하는 주거 공간) 하우스, 코워킹 스페이스(공유업무공간), 커뮤니티 스페이스처럼 기존의 공간 구분과 다른 공간들도 속속 등장 중이다. 실제 공간 중개 플랫폼들을 살펴보면 공연장, 회의실, 세미나실, 콘퍼런스, 갤러리, 녹음실, 독립오피스, 강의실, 운동시설처럼 대관을 할 법한 공간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파티룸, 연습실, 촬영스튜디오, 스터디룸, 공유주방, 레슨연습실, 렌털스튜디오, 라이브방송, 보컬연습실, 호리존, 스몰웨딩, 악기연습실, 실외촬영, 비상주서비스, 기숙사·연수원, 글램핑, 팝업스토어… 마치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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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관노 어무적(魚無跡)의 시편들 지면기사
어무적은 관노였다. 관청에서 부리는 노비였던 그는 가난한 백성들의 탄식을 귀담아듣던 시인이다. 할아버지는 생원 어변문이며 아버지는 사직(司直) 어효량이다. 사직은 무반직으로 정도전의 주도로 군제를 개편하면서 훈련관의 종5품을 이르는 벼슬이다. 관직에 있던 어세겸과 어세공과는 육촌형제다.어머니가 관비임에도 불구하고 학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어효랑의 배려로 보인다. 어무적은 어려서부터 시재가 뛰어났다. 어느 날, 아버지를 따라 새벽에 절간을 지나면서 시 한 수를 읊었다. '청산도 손님 오자 예절을 차려, 머리에 흰 구름의 갓을 썼도다(靑山敬客至 頭戴白雲冠)'라는 시였다. 그러나 그는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시의 재능은 뛰어났으나 서얼이어서 과거시험과 같은 신분 상승의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할아버지 때 김해로 내려갔으나 아버지는 사대부였지만 어머니가 관노비여서 법의 규정에 따라 어무적은 관노가 될 수밖에 없었다. 관노였던 그가 어떻게 노비의 신세를 면하게 되었는지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서얼이었던 그에게 신분에 맞게 주어진 미관말직이 율려습독관(律呂習讀官)이었다.가난한 백성 탄식 귀담아 듣던 시인상소문에 힘겨운 삶 잘 드러나 각별 어무적은 1501년(연산군 7년), 김해에서 백성이 겪고 있는 어려운 생활고를 낱낱이 밝힌 상소문을 임금에게 올렸으나 무시되고 말았다. 상소문에는 지배계급의 향락 근절과 민생의 보호와 임금의 군주다운 자세의 확립과 선비의 각성, 그리고 언로의 창달을 위한 간절한 뜻을 담았었다. 이를 신유상소(辛酉上疏)라 하여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7년 신유 7월 을해조(乙亥條)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선조 임금은 지방수령들의 폐습과 악행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올라오는 상소문을 빼놓지 않고 읽었다. 특히 어무적의 상소에 백성들이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어 각별하게 다루었다. '어무적의 시에 궁궐에선 백성 걱정해 조서를 늘 내리는데, 주현(州縣)에서 한낱 그저 종이로만 전해 받는다고 노래하고 있으니 옳은 지적이로다. 나라의 폐습이 그러하니 드러나는 대로 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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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총각 아저씨 지면기사
여섯 살 때 우리 집 사랑방에는 '총각 아저씨'가 살았다. 부엌이 딸리지 않은 방이라 사람들은 총각 아저씨들이 사는 문간방을 '잠자는 방'이라 불렀다. 그래서 제철소 앞 사택단지 우리 동네에는 전봇대마다, 대문마다 '잠자는 방 있음'이라는 벽보가 자주 붙었다. 그들은 결혼을 하고서야 잠자는 방을 떠났고 그러면 다른 총각 아저씨가 그 자리를 채웠다. 여섯 살 봄, 우리 집에 왔던 총각 아저씨는 조금 특별했다. 다정하지도 살갑지도 않았고 제철소에서 돌아오면 내내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럴 만도 했던 게 그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좁은 문간방에선 유화물감 냄새가 풍겨나왔고 가끔 열리는 문틈으로 보이는 캔버스들. 그래, 나는 그 캔버스들이 참 궁금했다. 하지만 아저씨는 다정하지도 살갑지도 않아서 나는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다. 월급날이면 웨하스나 알사탕 한 봉씩 사다 주던 다른 총각 아저씨들과 달리 말이 없던 화가 아저씨는 나한테도 별 관심을 준 적이 없었는데 어느 날, 서령아, 불렀다. 농담 같지만 그 목소리가 나는 기억난다. 서령아.나는 마루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스케치북을 펴 중간에 가로선을 길게 쭉 긋고(그건 벽과 바닥의 경계선이었다) 아이 셋과 어른 둘을 그렸다(그건 우리 가족이었다). "아저씨가 뭐 하나 가르쳐줄까?" "뭘요?" 아저씨는 내 스케치북 한 장을 넘겨 새 종이를 편 뒤 선 세 개를 그었다. 먼저 세로선을 위에서부터 3분의 2 지점까지 긋고, 그 선 마지막에서 가로선 하나를, 그리고 사선을 그었다. 이게 뭐지? "이게 뭘까?" 아저씨는 종이를 들어 올려 내가 더 잘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잠시 바라보던 내가 아! 탄성을 질렀다. 그건 놀랍게도 '방'이었다. 가로선 하나로 내가 긋던 벽과 바닥이 아니라 벽이 두 개고 바닥이 있는, 어떤 공간이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손바닥을 들어 입을 막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평평한 종이 안에 공간이 있다니!문간방서 그림 그리던 '특별한 사람'어느 날 스케치북에 가르쳐준 선 3개종이 위에 만들어진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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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코끼리만두와 목포홍탁 지면기사
최근 토속 음식을 가업으로 이어나가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물론 여러 가지 경제적인 사정과 구직난도 한 몫 하겠지만 부모님의 가업을 천직으로 아는 젊은 세대다. 이들의 특징은 2대와 3대에 걸쳐 고유한 음식 맛을 전하기 위해 조리법을 익히며 식당업을 지켜나간다는 자부심이 새겨져 있다. 거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단골손님이다. 주인과 단골손님은 서로 가족처럼 반겨주며 응원해주는데 음식에 대한 오랜 믿음과 축적된 신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같이 우리 집 부근에 자주 가는 토속 음식을 하는, 단골 식당이 두 군데 있다. 이 식당들은 공통적으로 시장에서 40여 년 이상 터를 잡고 있는 수원에 사는 사람이라면 알만한 곳이다. 바로 수원 팔달문 시장의 코끼리 만두와 권선시장의 목포홍탁 집. 이 식당의 주요 메뉴인 만두와 홍어는 전통 음식이며 잔치에 쓰였던 토속 음식이다. 2대에 걸쳐 음식점을 하고 있는 이곳은 전통 계승처럼 부모님의 손맛을 승계하고 있다. 40여년 시장서 대 잇는 단골 맛집토속음식은 계승돼 전통가치 지녀 코끼리 만두는 중학교 때부터 자주 가던 분식점으로 80년대 수원 상권의 중심지에 있었다. 외식 문화가 발달 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이곳이 만남의 장소 또는 각종 모임의 공간으로 기억된다. 얼마 전 코끼리 만두를 찾았을 때 그때 주인 아주머니는 할머니가 되어 주방을 보고 계셨고,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손님을 맞이했다. 친절하게 반기던 이 남자는 이 집의 막내아들. 들리는 말로는 공부를 곧 잘하여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유학생 출신이다. 어머니를 대신하여 식당에 오는 손님들을 가족처럼 맞이하고 배웅하며 성심껏 행동하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밀가루 피에 여러 가지 식재료가 들어간 만두는 원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유래되고 발전된 고대 음식이 원조다. 지금은 각 민족과 나라에서 이와 유사한 음식이 전해지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만두란 말이 처음 기록된 것은 1643년 영접도감 의궤에 나온다. 여기서 만두는 중국에서 온 사신을 대접하기 위하여 만들었고, 그 후 궁중 잔치에도 쓰여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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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몰인정해 보이는 또 하나의 이유 지면기사
뭘 바라고 남에게 호의를 베푼 것은 아니나 막상 보답이 없으면 섭섭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한 지인은 보답이 없는 이를 보면 몰인정해 보인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보답이 없는 사람을 다른 시각으로 보려 한다. 몰인정한 게 아닌데 오해를 받는 사례가 있다고 믿어서다. 내가 경험한 일도 있고 지인으로부터 들은 얘기도 있어 이를 바탕으로 예를 들어 보겠다. 베푼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상대 속마음 몰라 무정함으로 판단느끼는대로 생각하는 탓 오해 생겨 첫 번째 예. A씨는 어떤 강좌를 듣는다. 쉬는 시간이 되면 한 수강생이 복도에 있는 자동판매기에서 커피를 뽑아 수강생 전원에게 돌린다. 그 수강생은 스스로 선심을 쓰며 기쁨을 누리는 것 같았다. 그때는 오후였고 A씨는 카페인이 수면에 방해를 준다고 여겨 오전에만 커피를 마시는 습관이 있어 수강생이 주는 커피를 사양했다. 그랬더니 그 수강생은 커피 대신 다른 음료를 갖다 주겠노라고 해서 미안하여 그냥 커피를 받곤 했고 마시지는 않았다. A씨는 상대에 대한 배려의 차원에서 커피를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커피를 몇 번 받았으니 그에게 보답을 해야 할까?두 번째 예. B씨는 걷는 걸 좋아한다. 지인들 모임이 끝나 집에 갈 때 지하철을 이용하는데 지하철역까지 걷는 걸 즐긴다. 그런데 걷고 싶은 B씨를 방해하는 이가 나타난다.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지인으로 모임이 있을 적마다 같은 방향이라며 차에 B씨를 태워 지하철역까지 바래다주려는 사람이다. 그가 동승을 권해 B씨는 몇 번을 사양했으나 자꾸 사양하기가 미안해서 그 차에 타서 신세를 진 게 두 번이었다. 신세를 진 B씨는 즐거운 산책을 포기하고 동승했는데도 그에게 꼭 답례를 해야 하는 것인가. 그러지 않으면 인정 없는 사람이 되는 걸까? 세 번째 예. C씨는 중학생인 딸아이에게 독선생으로부터 수학 과목을 배우게 했다. 일주일에 두 번 집에서 수업하는데 겨울 방학이 되니 하필 아이와 점심을 먹으려는데 선생이 올 때가 많았다. C씨는 선생에게 점심을 같이 먹자고 여러 번 권했고 선생은 사양하다가 함께 먹곤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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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책상에 옷을 입히다 지면기사
최근에 내 책상에서 단편소설을 써서 탈고했다. 당연한 듯 보이지만 내게는 그렇지 않다. 나는 언제나 소설의 중요 부분을 내 책상이 아닌 '바깥에서', 그러니까 도서관이나 카페에서 써 왔던 것이다. 책상은 어쩔 수 없이 시간에 쫓길 때나 인쇄를 할 때만 마지못해 앉았다. 그러니 내 방, 내 책상에 들어앉아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쓴 것이 나름대로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책상이 홀대를 받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나는 항상 큰 책상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고 결혼하면서 6인용 탁자 두 개를 사서 하나는 식탁으로, 하나는 책상으로 사용하면서 그 꿈을 이뤘다. 마침내 프린트도 올려놓을 수 있고 읽던 책들로 작은 탑을 쌓아도, 스탠드며 향초며 공기정화용 식물까지 모두 거뜬히 담아 놓고도 자리가 넉넉한 책상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문제는 거기 앉아 책을 읽고 공부할 수는 있어도 소설은 안 써진다는 것이다. 당연히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작업은 '새 소설 쓰기'이고 책상의 가장 큰 의무 또한 소설이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책상과 나, 둘 다 그 일에 실패했다. '나는 집에서는 글을 못 쓰는 사람인가 보다, 도서관이든 카페든 사람들 속에 익명으로 섞여야 글이 가장 잘 나오는 모양인가보다' 스스로를 이렇게 생각해왔다. 친구의 선물 평직으로 짠 러그 깔아차고 딱딱한 책상 포근하게 바뀌어자꾸 '인력' 느껴지며 소설쓰기 성공 그런데 아주 작은 전환점이 생겼다. 어느 날 팔뚝에 닿는 책상의 감촉이 너무 차가워서 무심코 친구가 선물한 얇은 러그를 반으로 접어 깔아보았다. 러그는 평직으로 짠 직물로, 기하학적 패턴 안에 우주인이 무중력 상태에서 떠 있는 문양이 그려져 있다. 러그를 깐 책상에 앉아보았더니 내 팔이 닿는 부분의 '차갑고 딱딱한' 감촉이 '부드럽고 포근한' 감촉으로 바뀌어 있었다. 책상은 옷을 입은 것처럼 아늑해 보였다. 러그를 책상에 깔아놓은 후부터 자꾸 책상의 '인력'을 느꼈다. 좀 더 자주 앉았고, 앉아서 무중력 상태인 우주인을 들여다보다 말도 걸기 시작했고 그러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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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당신의 별점은 몇 점인가요 지면기사
오래된 영화 잡지에 '개봉작 20자평과 별점'이라는 코너가 있다. "별이 다섯 개!"라고 강조하던 어떤 침대 광고처럼 별 5개는 최고의 칭찬이다. 별 1개부터 반 개 단위로 매겨지는 이 평은 최신 영화에 대한 정보를 한꺼번에 확인하고 싶을 때 꽤 유용하다. 별 개수와 한 줄의 평으로 그 영화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부터 관람 여부까지 생각하게 만든다. 공개적으로 글을 쓴 지 오래되었다. 출판된 책은 없지만 이름과 얼굴을 내놓고 신문과 같은 지면에 글을 쓰다 보면 댓글이 달릴 때가 종종 있다. 사실 칭찬하는 댓글보다는 비난하는 댓글이 더 많다. 처음으로 내 글을 비난하는 댓글을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간단한 한 줄이었는데 그 한 마디가 반복 재생되는 느낌이었다. 글을 쓰다가도 그 댓글이 생각나면 더 이상 글이 잘 써지지 않고 의기소침해졌다. 몇 번 비슷한 경험을 한 후에는 댓글창을 일부러 확인하지 않는다. 가끔 궁금해질 때면 찾아 들어가서 보긴 하지만, 대부분 후회로 끝난다. 이제는 포털 사이트의 뉴스 댓글 창이 숨김으로 되어 있는 것이 편안하고, 농담처럼 이야기하던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게 됐다.작가들도 창작물 평가 궁금해 한다요즘 인터넷서점 별점·한줄평 강력신인작가들 '별점 테러' 타격 더 커 작가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인터넷 서점 독자들이 매기는 별점이 화제에 올랐다. 작가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떤 사안에서 통일된 의견이 나오는 일은 흔치 않은데, 이번에는 달랐다. 이제 막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작가도, 어느 정도 인지도를 확보하고 있는 작가도 목소리가 커지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요즘 인터넷 서점은 꽤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별 개수에 따른 평점 분포와 연령과 성별로 구분된 구매자 분포까지 확인 가능하다. 흥미로운 지점은 별 5개와 별 1개의 간극이다. 대부분의 책은 1개까지 별점은 거의 없고, 별이 3개에서 5개 사이에 몰려 있다. 최근 화제가 됐던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의 경우 별 5개는 55.4%, 별 1개가 25.1%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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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천민 시인 홍세태 지면기사
홍세태(1654~1725)는 천민 시인으로 조선 후기, 효종 때 무관인 홍익하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년시절부터 양반들과 다르지 않은 수학과정을 거쳤다. 일찍부터 서당에 다녀 5세 때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8세쯤에 글을 지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전한다.기록 중에는 그의 출신을 다르게 전하는 기록도 있다. 성대중의 '청성잡기(靑城雜記)'에는 홍세태가 이씨 집안의 노비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농사일을 게을리 한다 하여 주인이 그를 죽이려는 것을 그의 시를 높이 평가하던 김석주와 이항이 돈을 주고 노비의 신분을 벗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홍세태는 두 사람을 부모처럼 받들었다고 전한다.경우야 어떻든 글공부를 열심히 하던 그는 1675년 3년마다 실시하던 식년시 잡과, 기술직을 뽑던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한학관에 뽑혀 중국어를 양반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동갑내기인 김창흡, 이규명 등을 비롯한 사대부들과 시를 짓고 함께 감상하는 낙송시사(洛誦詩社)를 만들어 우정을 쌓았다. 글솜씨 뛰어나 사대부들과 어울려외국사신 동행 의전에 관한 글 전담지방목장 관장 종6품 감목관 지내 그는 1682년 통신사 윤지완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으며 1698년에 역과 합격 때에 제수된 이문학관에 실제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문학관이란 조선시대 승문원에 속하여 외교문서를 처리하는 벼슬로 중국으로 가는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아했던 것이다.우리나라에 온 중국사신이 조선의 시문을 보고자 했을 때 좌의정 최석정이 숙종에게 그의 시를 추천하여 홍세태는 임금의 호감을 사게 되었다. 그 일로 제술관에 임명되는 행운을 얻기도 했으나 호사다마라 할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삼년상을 치르느라 사직하였다. 다시 관계에 나간 것은 1702년이었다.그 후 홍세태는 1705년 둔전장(屯田長)이 되고 1710년에 통례원인의(通禮院引義)에 임명되어 어전의 조회와 의례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되었다. 1713년에는 서부주부 겸 찬수랑(西部主簿兼纂修郞)이 되었고 1715년에는 제술관이 되어 외국에 사신을 파견할 때 동행하는 수행원으로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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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문쾅의 시대 지면기사
"좋겠다, 너는. 아직 애가 문쾅까지는 안 할 테니."사춘기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은 종종 나에게 말했다. '문쾅'이란 엄마와 이야기하다 말고 짜증이 난 아이가 제 방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 들어가 버리는 거다. 나도 안다. 어린 시절 많이 해본 짓이다. 물론 그럴 때마다 우리 엄마는 빗자루를 들고 나보다 더 큰소리로 방문을 발로 차고 쳐들어 왔지만. 우리 집 문짝은 몇 번이나 부서질 뻔했다. 내 딸은 여덟 살,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이다. 중학교 2학년쯤 되면 우리 아이도 그러겠지, 막연히 상상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상상은 나에게 너무 이르게 찾아왔다. 단짝 친구 집 폐 끼치는 것 같아서여덟살 딸에게 출입금지 시켰더니짜증 내며 방문 '쾅' 어이없는 현실 문제는 단짝 친구였다. 단짝 친구 생기는 거야 좋지. 온종일 놀이터에서 함께 놀아도 모자란 것쯤 나도 안다. 친구 데리고 우리 집에 가면 안되냐고 조르는 것, 이해한다. 그래서 자주 그렇게 해주었다. 과일도 깎아주고 풍선껌도 주고 가끔은 저녁도 챙겨주었다. 그러다 보니 친구 엄마도 미안한 마음에 우리 아이를 초대했다. 문제는 너무 자주 그런 일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친구 엄마에게 폐를 끼치는 일 같아서 보다 못해 친구 집 출입금지를 명했더니 아이가 짜증을 버럭 냈다. "아니, 엄마 말을 거스를 참이야?" 나도 버럭, 잔소리를 쏟아냈다. 조막만 한 녀석이 도대체 이유가 뭐냐고 따지고 들기에 조리 있게, 고작 여덟 살은 반박도 못 할 수준으로 심도 있게 설명도 했다. 아이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나에게 대들었다. "이건 내가 안 가기로 결정한 거지, 엄마가 그렇게 시켰기 때문은 아니야!" 어라? 순순히 수긍하지는 않겠다는 거지? 나도 오기가 생겨 다시 한번 단단히 대답을 받아냈다. "안 가겠다는데 엄마는 왜 내 대답을 의심해?" 그러고는 그것, 아직 나에게 오리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쾅'이 일어난 것이다. 아아, 지금 내 눈앞 광경이 현실이라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거실에 앉아 잠깐 마음을 가다듬었다. 내가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