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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ith+] 유희경을 사랑한 매창

    [with+] 유희경을 사랑한 매창 지면기사

    유희경(劉希慶)은 16세기 조선의 유명한 시인이다. 당대의 대시인이요 풍류객인 유희경을 흠모하는 여인이 있었다. 부안 기생 매창이었다. 매창은 유희경의 문명을 이미 오래전부터 듣고 있었다. 그의 시를 찾아 읽으며 유희경을 흠모하기 시작했으나 만날 기회가 없었다. 기회가 된다면 그와 시를 겨뤄보고 싶기도 했다. 유희경의 부친은 품계로 종칠품인 동계공랑이었다는 것만 전할 뿐, 그의 자세한 가계는 알려지지 않았다. 유희경은 예학에 밝아 국상이 나거나 사대부가에서 상을 당하면 그를 부르곤 했다. 임란 때는 의병에 참여할 만큼 나라를 걱정했다. 그는 시문학을 통해 사대부들과 친교를 맺었다. 유희경은 당시 여항시인인 백대붕과 교류하면서 '풍월향도'라는 이름의 모임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매창(李梅窓)의 본명은 이향금이다. 계유년에 태어나서 계생(癸生), 계랑(桂娘)이라고도 불렀다. 매창은 1573년에 부안현리 이탕종의 서녀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관비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녀 역시 어려서부터 기적에 올랐을 것이다.매창은 한시와 시조에 능했고 가무 및 거문고에 빼어난 기량을 보였다. 시조와 한시 59수가 작품집 '매창집(梅窓集)'에 전해지고 있다. 홍만종(1643~1725)이 '근래에 송도의 황진이와 부안의 계생은 그 사조가 문사들과 비교하여 서로 견줄 만하니 참으로 기이하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 후 매창은 황진이와 함께 조선의 여류시인으로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만나기전 서로 설레기는 마찬가지매창의 거문고에 유희경 가슴 촉촉매창의 한시 '자상(自傷)'에서 '서울 꿈 삼년/호남에서 또 한 봄이 가는구나/황금에 처음 마음이 바뀌어/한밤에 홀로 마음이 상하는구나'라고 노래한 것을 보면 서울에서도 3년 정도 기녀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서(1570~1624)의 '석촌유고(石村遺稿)'에는 매창의 시 한 편이 실려 있는데 그 시 아래에 '일찍이 내 친구의 첩이 되었다가 지금은 청루에 있다'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첩실 생활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그 후 매창은 부안으로 돌아왔다.

  • [with+] 새벽 전화

    [with+] 새벽 전화 지면기사

    휴대전화 진동음에 눈을 떴다. 아직 어두웠다. 새벽의 전화가 일상적인 용무일 리는 없다. 엄마였다. "왜? 무슨 일이야?" "거긴 비 많이 안 와? 여기 비가 와서 난리도 아냐." 나는 발칵 화를 내고 말았다. "아니, 비 온다고 이 시간에 전화를 한 거야?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놀랐어?" 엄마가 하하하, 크게 웃는다. 이봐요, 엄마. 웃을 일이 아니라고. 이 새벽에 비 온다고 전화를 하다니. 나이 든 부모를 둔 딸 마음을 좀 헤아려 달라고. 행여 나쁜 소식일까봐 그 짧은 시간 동안 오그라붙은 내 마음을 좀 알아달라고.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심통이 머리끝까지 오르고 말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비 소식은 심각했다. 엄마가 카톡으로 보내온 사진을 보고 나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현관문을 살살 열고 사진을 찍었는데 마당은 이미 잠겨 있었다. 그나마 단을 높인 현관이라 현관문 바로 앞까지 물이 찰랑댔다. 비는 그쳤지만 마당에는 주전자와 빗자루와 작은 화분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이게 다 뭐야?" 내 말에 엄마가 불퉁거렸다. "넌 뉴스도 안 봐? 포항에 비 많이 와서 다 이 모양 됐어." 부랴부랴 뉴스를 켜보니 온통 포항 비 소식이었다. 비소식 전한 엄마 연락 심통났지만수해 심각한 고향집 사진보며 놀라아버지가 아끼던 차도 절반쯤 잠겨 내가 태어나 19년을 자란 포항은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서 고요한 곳이었다. 게다가 나는 사택단지에서 자랐다. 사택단지에서 자란다는 건 포항 토박이 출신이 아니라는 것이고,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어도 포항 사투리를 쓸 줄 모른다는 것이다. 강원도에서 충청도에서 경기도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사택단지에 모여 살며 똑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가장을 두었다. 처음에는 자전거를 타고 형산강 다리를 건너 포스코로 출퇴근하던 아버지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오토바이를 샀고 아침이며 저녁, 형산강 다리는 거대한 오토바이 물결로 뒤덮였다. 오토바이들은 훗날, 그 아버지들이 포니2나 엑셀 등 작은 승용차를 사며 서서히 사라졌지만."멀쩡해" 기뻐

  • [with+] 이고 선생의 정신과 수원의 얼굴

    [with+] 이고 선생의 정신과 수원의 얼굴 지면기사

    얼굴은 '얼과 꼴'의 합성어다. 인간 내부에 있는 '얼'은 정신이며 외부에 있는 '꼴'은 모양이다. 얼은 보이지 않지만 꼴은 보이는 것으로, 누구나 이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외면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늙고 병들고 죽지만 내면의 얼굴은 시간을 초월하며 죽어도 죽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인간 정신이 지향하는 것은, 자신의 안위가 아니라 타자와 세계라는 다자의 이익과 평안을 모색하는 데 있다. 이 같은 시대를 넘나들면서 역사의 선각자를 통해 우리는 인간 정신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기록에서 재현되며 공동체 문화 속에서 살아있다. '팔달산 주인' 별칭… 충·효로 거듭착한 삶 권하며 실천 '권선동' 유래 수원의 경우 역사적으로 이고(李皐, 1341~1420년)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고려 말과 조선 초기 충효의 대표 인물인 이고 선생은 공민왕(1374년) 시절에 문과에 급제해 한림원 학사를 지냈다. 그는 '팔달산 주인'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수원을 충과 효로 거듭나게 한 수원 정신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고 선생의 생전에 명명된 팔달산의 어원으로 두 가지 유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고려말 대사성 집현전 직제학으로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광교 남 탑산'(光敎南塔山)에서 기거했다. 당시 공민왕의 신화를 통해 안부를 묻는 공민왕에게 이곳 산천의 풍광을 극찬하면서 사통팔달(四通八達)로 막힌 데가 없다는 말이 전해진다.그 후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이고 선생에게 여러 번 관직에 나설 것을 권유했으나 사양했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때 잠시 관직에 오르기는 했으나 고려의 충절을 끝내 지킨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태조는 이고가 거처한 곳을 화공에게 그리게 해 이것을 보고 나서 '팔달산(八達山)'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의 행적은 지금 수원의 권선동에서도 발견된다. 권선(勸善)이라는 지명은 이고가 이 지역에 머물면서 백성들에게 착하게 살기를 권하면서 선을 몸소 실천했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의 높은 인간 정신을 이어받은 주민들은 이고 정신을 통해

  • [with+] 모든 추측을 경계하라

    [with+] 모든 추측을 경계하라 지면기사

    뜻밖의 결말을 보여 주는 이야기가 있다. 오 헨리가 쓴 '마녀의 빵'이라는 소설이다. 마사 양은 미혼 여성이고 마흔 살이다. 작은 빵집을 운영하는 그녀는 중년 남자인 단골손님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 손님은 낡은 옷을 입었지만 말쑥해 보였고 예절이 깍듯했다. 그는 늘 저렴하게 파는, 오래 묵어 딱딱한 빵 두 덩어리를 샀다. 언젠가 마사 양은 그의 손가락에 적갈색 얼룩이 묻은 걸 보고 그가 무척 가난한 화가라고 믿었다. 그녀는 그를 시험하기 위해 빵집에 일부러 그림을 갖다 놓았는데, 그 그림을 본 그가 데생이 잘된 편이 아니라고 말하는 걸 보고 그가 화가인 게 확실하다고 느꼈다.어느 날 그 손님이 평소처럼 묵은 빵을 달라고 했다. 마사 양의 머리에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딱딱하게 굳은 빵 두 덩어리 안에 손님 몰래 버터를 듬뿍 넣어 손님에게 주었다. 그에 대한 호감의 표시였다. 그날 그 손님과 낯선 남자가 빵집에 왔다. 그 손님은 그녀를 향해 고래고래 악을 쓰기도 하고 "당신이 날 망쳐 놨어" 하고 소리도 질렀다. 마사 양은 낯선 남자에게서 그 손님이 성난 이유를 듣게 되었다. 그는 화가가 아니라 제도사이고 공모전 수상이 걸려 있는, 새 시청 설계 도면을 그리느라 석 달 동안 열심히 작업했다고 한다. 제도사들은 연필로 도면을 그리고 잉크 작업을 끝내고 나면 굳은 빵 부스러기를 문질러서 연필 선을 지워 버린단다. 그런데 그녀가 빵에 살짝 넣은 버터 때문에 그의 설계 도면이 쓸모없어졌다고 한다. 마사 양의 부정확한 추측이 결과적으로 그를 그토록 화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상대 본모습 어떤지 개의치 않고주관적으로 해석 판단하면 안돼 우리도 소설 속 마사 양처럼 제멋대로 추측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예를 들어 보겠다. 친구가 약속 시간에 늦게 오면 자기를 소홀히 여기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알고 보니 늦을 만한 이유가 있어서 늦었던 것. 연인이 하품을 하면 자기와 함께 있는 시간이 지루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알고 보니 전날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하품을 했던 것. 무섭게 생긴 괴물이 그려진 영화 포스

  • [with+] 시침과 분침

    [with+] 시침과 분침 지면기사

    내가 최초로 배운 지식은 '시계 보는 법'이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살았던 우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방 두 칸을 연결하는 마루가 있고, 마루 끝에는 간유리가 끼워진 유리문이 있는 집. 나는 나무마루에 앉아 반사되는 햇빛을 받으며 엄마로부터 시계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방마다 보름달 만한 시계가 걸려 있고 마루에는 추까지 달린 괘종시계가 있었지만 그 사물의 기능에 대해서 전에는 의식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계 보는 법을 배우던 오후에 그 사물에는 새로운 생명력, 모종의 신성한 임무라고 할 것이 부여되었다. 엄마는 종이에 동그라미를 그린 후 12시와 3시, 6시, 9시를 나타내는 표시를 하고 길고 짧은 막대기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이건 여섯시고, 이건 아홉시고…" 이해가 가지 않았음에도 시침과 분침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각도는 신비로운 도형이나 기호처럼 매혹적이었다. 나중에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읽으면서, 집시 멜키아데스가 들고 온 나침반에 열광하는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에게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 순진하고 열광적인 태도는 내가 시계 보는 법을 배우던 모습과 유사했다. 시간이 훌쩍 흘러, 초등학교 2학년인 내 딸은 이제야 시계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우리 엄마와 달리 나는 딸에게 시계 보는 법을 미리 가르쳐주지 않았다. 시계가 알려주는 메시지란 대체로 독촉이 아닌가? 자기 리듬으로 살아가는 게 더 편한 아홉 살 인생은 내버려 두자고. 이렇게 중얼거리다 문득 깨닫고 보니, 우리 집 벽시계들은 전부 숫자가 없고 눈금뿐이다. 엄마가 그려가며 알려준 '시계보는법'시간흘러 자명종 못읽는 딸 가르치며특정 시기의 '무지' 신비롭게 느껴져자라는 모습보며 생기는 '기억의 눈금'다가올 '앎' 기다리는 마음 경이롭다 당연히 딸은 숫자가 박히지 않는 시계는 읽지 못한다. 그래서 숫자판이 있는 자명종을 들고 온다. 이때부터 '지금이 몇 시인지'라는 퍼즐풀이가 시작된다. 딸의 추리 과정은 이럴 것이다. 1)엄마가 묻는다. "이숲아, 지금이 몇 시

  • [with+] 추모와 애도에도 '공간'이 필요하다

    [with+] 추모와 애도에도 '공간'이 필요하다 지면기사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더니 요 며칠은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는 시 구절이 떠오르는 파란 하늘의 연속이다. 꼭 푸르른 날이 아니어도 그리운 사람이 생각날 때가 있다. 떠나간 사람을 떠올리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길 때면 사진을 찾아보기도 하고, 차 한 잔을 마셔보기도 하지만 뭔가 허전하다. 만약 납골당이나 묘지 외에 다른 곳에서도 함께 그 사람을 추억하고 그리워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어떨까? 꼭 누군가를 추모하거나 애도하지 않아도 편안하게 추억에 잠길 수 있는 그런 곳 말이다.납골당·묘지외 추억 잠길 곳 있으면英 '메모리얼 파크' 평범한 동네 공원세상 떠난 아이들 기리지만 친근해 몇 년 전, 영국에 갔을 때 인상 깊었던 장소가 있다. 아이들이 손을 뻗으면 손쉽게 만질 수 있을 만한 키 낮은 가로등에 색색의 풍선이 매달려 있었다. 영국에 공원이 워낙 많긴 하지만 이런 가로등이 있는 공원은 흔치 않다. 공원을 걷다보면 한쪽에 작은 수로가 조성되어 있다. 맑은 물속에 누군가의 이름을 새긴 돌들이 가득하다. 모두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이름이다. 수로 주변에는 오늘 아침에 꽂아두고 간 것처럼 싱싱한 꽃다발들이 이곳저곳에 놓여 있고 '내 정원에 온 걸 환영해요(Welcome to my garden)'라고 적힌 돌 옆에 활짝 웃는 아기의 사진이 함께 자리한다. 떠난 이를 그리워하며 적은 편지도 꽃다발 옆에 꽂혀 있다.이 공원은 영국 미들랜드 지역 버밍엄에 위치한 '메모리얼 파크'로, 일찍 세상을 떠난 발달 장애 아이들을 기억하고 추억하기 위한 공간이다. 발달 장애로 가족을 잃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편하게 공원에 올 수 있지만, 공원 곳곳은 먼저 떠난 아이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엄숙하거나 경직되어 있지 않고 관리와 통제를 받는 공간이 아닌, 평범한 동네 공원으로 사랑받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구석구석에 있는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번 더 들여다보고, 친근하게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아 있고 사람들이 편하게 드나드는 공간

  • [with+] 전함의 노예 백대붕 시인

    [with+] 전함의 노예 백대붕 시인 지면기사

    백대붕의 출생년도는 불분명하지만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이나 '학산초담(鶴山樵談)'의 기록에 의하면 허봉이나 심희수 등과 더불어 터놓고 사귀었다고 되어 있다. 그 기록을 참조한다면 아마도 1550년 전후에 태어났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시에서 군함의 노를 젓는 전함사의 노예라고 밝히고 있다. '술에 취해 수유꽃 꽂고/혼자 즐기다가,/산에 가득 밝은 달빛 물드니/빈 술병 베고서 누웠다네./길 가던 사람들아, 무엇하는 놈인가/묻지를 마소./티끌세상에서 세어진 머리 전함사의 종놈이라오.'라고 노래한 것을 보면 전함사의 노예인 것이 분명하다. 때는 음력 9월9일, 상서로운 날인 중양절(重陽節)이었을 것이다.자신의 시에서 천민 신분 밝혀같은 처지 시인들과 모임 주도 이날에는 붉은 산수유 열매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차거나 산수유 가지를 머리에 꽂고 산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 백대붕은 붉은 산수유 열매가 달린 가지를 꺾어 머리에 꽂고 국화주를 마셨을 것이다. 어느덧 술을 다 마시고 빈 병만 남았을 것이다. 그 병을 베고 누우니 어느새 아흐레 둥글게 차오르는 달이 떠올라 온 산에 달빛이 가득했을 것이다. 세상을 향해 고함을 질렀을 것이다. 분노와 절망의 고함이었을 것이다. '지체 높은 놈들아, 내가 누군 줄 아느냐? 전함사의 종놈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 시의 제목은 '동유주(東遺珠)', '대동시선(大東詩選)', '소대풍요(昭代風謠)' 등에는 '9일(九日)'로, '기아(箕雅)'에는 '취음(醉吟)'으로 되어 있다. '9일(九日)'이라는 제목은 중양절의 날짜를 드러낸 것이고, '취음(醉吟)'은 국화주를 마시는 중양절의 풍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취음(醉吟)'이라는 시제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백대붕은 같은 천민인 유희경과 서로 시를 주고받았는데 책 한 질이 될 만큼 많았다. 백대붕과 유희경은 같은 처지의 위항 시인들을 모아 '풍월향도'라는 모임을 이끌어나갔다. 17세기 중엽은 사대부들의 폐쇄적인 시단에 하층계급 출신의 위항 시인들이 대거

  • [with+] 이상하고 아름다운 그랜마호텔

    [with+] 이상하고 아름다운 그랜마호텔 지면기사

    연남동 작은 카페에는 선생님 두 분이 먼저 와 있었다. 시인 한 분, 소설가 한 분.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이 나왔고 나는 포크보다 생맥주잔을 먼저 들었다. 더워도 너무 더운 날이었다. 땀을 식힌 다음에야 나는 가방에서 책 두 권을 꺼냈다. 두 분께 드릴 선물이었다. "요즘 출판사들은 진짜 책 너무 예쁘게 만드는 것 같아. 정말 공들였네." 책을 쓰다듬으며 소설가 선생님이 한 말에 시인 선생님이 투정처럼 말했다. "몰라. 미안해. 난 안 보여. 눈이 너무 나빠졌어." 이젠 책보다 노안 이야기가 더 재밌다. 다초점 안경은 어디가 잘하는지 묻고, 큰 글씨 책은 자존심 상해 못 사겠다는 이야기도, 그래서 생전 안 보던 전자책을 읽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나도 이제는 태블릿으로 전자책을 본다. 종이 넘기는 재미 없이 무슨 책을 읽느냐 생각했던 나인데도 글씨를 마음껏 키워볼 수 있는 전자책이 요즘은 종이책보다 편하다. 그래서 전자책을 처음 읽던 시기, 나는 걸핏하면 손가락에 침을 묻혀 태블릿을 넘기곤 했다. 소설가 선생님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비닐봉지엔 오이와 고추, 감자가 들어있었다. "강릉에서 보내온 거야. 가져가서 먹어." 나는 고맙다고 냉큼 받았다. 만날 때마다 선생님은 뭐든 한아름씩 안겨준다. "선생님! 우리 10년쯤 더 나이 들면 매일매일 친구들 불러다 밥도 먹고 술도 먹고 차도 마시면서 그렇게 설렁설렁 같이 늙어요. 소설이랑 시 얘기나 하면서 그렇게요." 내 말에 선생님이 대답했다. "어? 나 벌써 그렇게 사는데? 만두 백개씩 빚고 김장 80킬로씩 해. 친구들 먹이는 재미로 살거든. 서령도 우리 집 놀러와!"친구·선후배들 하루 멀다하고 초대제라늄·금잔화 핀 마당서 소맥 말고3층짜리 건물 사 식당에선 낭독회… 나는 예쁜 할머니가 되고 싶다. 잘 웃고 잘 노는 수다쟁이 할머니가 되고 싶다. 친구들과 선배들, 글 쓰는 후배들을 하루가 멀다고 집에 초대해 제라늄과 금잔화 잔뜩 핀 마당에 상 펴고 앉아 소맥을 마는, 웃기고 이상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 집에 손님들이 하도 많이

  • [with+] 건축가 정약용과 김동훈

    [with+] 건축가 정약용과 김동훈 지면기사

    정약용과 김동훈은 시대를 달리하는 건축가다. 정약용(1762~1836)은 조선 후기 실학자이고, 김동훈(1955~)은 현재 대학교수 출신으로, 이 둘은 200여년이라는 역사와 시대를 넘나드는 인물이다. 수원에서 획기적인 건축물을 계획하고 설계하고 실행한 건축가로서 정약용과 김동훈은 공통점이 있다. 정약용의 수원화성 축성과 김동훈의 수원시 연화장이 그것이다. 조선시대의 성곽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화성은 방어기지로서 백성들의 안보와 치안을 위한 국가적 차원의 근대적 건축물이다. 반면 혐오시설에서 향수적인 공간으로 자리 잡은 수원시 연화장은 무연, 무취시설로서 망인과 유가족을 위한 삶과 죽음의 한가운데 있는 전위시설의 현대적 건축물이다.이러한 건축물의 배후에는 정치·문화적으로 발현하고 주관한 현자를 찾을 수 있는데 수원화성의 정조대왕과 수원시 연화장의 고 심재덕 시장이다. 수원화성은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이장하면서 왕권 강화와 함께 안전하고도 새로운 정치적 무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신도시의 축성을 설계하고 감리할 수 있는 정약용이 발탁되었고, 정약용은 10년 예상되는 공사를 2년 반 만에 완공하고 공사비용도 4만냥을 절약하는 성과를 냈다. 그리고 수 세기가 흐르는 동안 수원화성은 문화적 기능과 예술적 가치까지 추가되어 한국을 넘어서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서 미래의 인류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수원서 건축물 설계 실행한 공통점정약용은 수원화성·김동훈은 연화장백성·나라… 지역 중요시했던 철학 장사문화인 매장과 다르게 화장에 관한 인식은 2001년 수원시 연화장 개장 전후로 바뀐다. 수원시 연화장이 있기 전에 화장은 무연고자 또는 가난하고 불행하게 생을 마감한 망인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었다. 이 같은 화장 풍토를 첨단시설을 통해 장사문화의 패러다임을 있게 한 인물이 심재덕 시장이고, 김동훈은 연화장의 선진적 설계를 한 장본인이다. 다만 이것은 정치적 발탁이 아니라 공모전을 통해 민주적 채택 방식에서 이루어졌다. 그 결과 38.5% 화장률에 지나지 않던

  • [with+] 무탈함의 행복

    [with+] 무탈함의 행복 지면기사

    인간의 행복과 재산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행복하기 위해 돈 걱정이 없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재산 축적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 행운이 있으면 액운이 따르게 마련일까. 복권 당첨자가 이전보다 불행해진 사례가 여러 언론 매체를 통해 심심치 않게 소개된다. 돈이 화를 부른 경우다. '로또 복권 1등 당첨되어도 불행해지지 않는 법'이란 제목의 유튜브 동영상이 있을 정도이니, 거액이 생기면 오히려 불행에 빠지지 않게 조심해야 할 것 같다.유산이 불행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어머니로부터 들었는데 동네 사람 중에 부모의 유산이 생기는 바람에 등지게 된 형제들이 있다고 한다. 삼형제가 의좋게 지내다가 7천만원쯤 되는 유산분배문제로 멀어졌단다. 장남은 장남이라서 본인 몫이 더 많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머지 두 형제는 그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단다. 4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들 형제는 유산을 나누지 못한 채 명절에도 서로 연락하지 않는다고 하니 답답한 노릇이다. 여러가지 조건 두루 갖추기 힘드니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어려운 모양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이 편안해야 하므로 다음과 같은 전제 조건이 필요하리라. 돈 걱정이 없어야 하고, 형제간이나 친구 간에 인간관계가 원만해야 하고, 몸이 건강해야 하고, 직업 만족도가 낮지 않아야 하고, 결혼을 한다면 믿음이 가는 배우자를 만나야 하고, 속을 썩이는 자식이 없어야 하고, 지루한 시간을 보낼 취미가 있어야 하는 등등. 이런 여러 가지 조건을 두루 갖추기 힘드니 행복하게 사는 게 어려운 모양이다. 반면 우리가 불행해지기는 얼마나 쉬운가. 최근 내가 집에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은 일이 있다. 어느 날 몇 분 간격으로 쿵 하고 큰 소리가 반복적으로 나서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추측해 보건대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라 이웃집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 같았다. 아마도 창문을 열어 놓고 모두 외출하여 아무도 없는 집에서 바람 때문에 방문이 닫혔다 열리고 다시 닫히기를 계속 되풀이되는 듯했다. 우리집이 12층 아파트인데 문제는 어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