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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하얀 담장에 난 초록색 문 지면기사
허버트 조지 웰스는 '타임머신', '투명인간' 등으로 알려진 초기 SF의 대표적인 작가다. 그의 단편 '담장에 난 문'을 읽다가 '나, 이 이야기 알아, 이건 내 이야기야'라는 강력한 느낌을 받았다. 책 속 장면에 기시감을 느끼며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 이건 정말 생각지도 않은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을 빨아먹는 몰아의 순간이다. 나는 읽던 페이지에 손가락을 끼운채 지금 막 떠오른 기억에 사로잡힌다. 어쩌면 책 읽기란 나에 대한 새로운 데이터를 캐는 행위인 것 같다.'담장에 난 문'의 주인공은 다섯 살 때 거리를 걷다가 '하얀 담장에 난 초록색 문'을 발견한다. 어린 윌리스는 망설이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에는 아름다운 정원에 많은 사람들이 경쾌한 분위기를 만들고, 왠지 모르게 퓨마 두 마리도 있다. 윌리스는 친구들을 만나 재밌게 놀다가 한 여자의 손에 이끌려 책 한 권을 보게 되는데, 거기에는 지금까지의 삶이 기록되어 있다. 책 속에서 문 앞에 서 있는 조금 전의 자신을 발견하자 어느덧 정원 밖으로 나오고 문은 사라져 버린다. 그 후 윌리스는 평생에 걸쳐 '담장에 난 문'을 보게 되는데, 그때마다 정원과 퓨마에게 끌리면서도 번번이 그 문을 지나쳐 버린다. 보다 중요한 문제와 사회적인 책임과 급박한 일이 생긴 탓도 있지만 이상한 거부감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야기의 주인공이 늘 그렇듯이…. 결말은 각자 읽어보시라. 이 작품은 한번 보면 잊혀지지 않을 독특한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매우 보편적인 일을 다루고 있다. 소설의 은유를 풀어버리면 '우리는 혼자서 간직하던 몽상을 평생에 걸쳐 주기적으로 마주치게 되지 않은가?' 라는 질문을 자문하게 되는 것이다. 흔히 기시감이라고 불리는 감정의 덩어리. 몹시 끌리면서도 번번이 외면하게 되는 초록색 문과 같은 나만의 세계. 소설을 다 읽고 나자 잊고 있던 꿈들이 떠올랐다. 웰스의 소설로 잊고있던 꿈 떠올라혼자 간직하던 몽상을 주기적으로마주치게 되지않나 라고 자문한다 사십대에 막 들어섰을 때 이런 꿈을 꾼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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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나는 왕이로소이다 지면기사
노작 홍사용은 1900년 5월17일(음력)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용수골에서 아버지 홍철유와 어머니 능성 구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현재의 본적지는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 492번지다. 석우리는 속칭 돌모루라고 불리는 곳으로 남양 홍씨의 집성촌이며 현재 노작홍사용문학관이 위치해 있는 곳이다. 그는 1919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3·1운동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검거되기도 했다. 1920년 박종화, 정백 등과 문예동인지 '문우'를 창간했다. 1922년에는 신문학운동을 주도하던 동인지 '백조'를 발간하기도 했다.홍사용 1923년 '백조'에 발표된 詩일제강점기 청년들 슬픔·분노 담겨 노작은 1923년부터 토월회에 깊이 관여하면서 연극운동에 열정을 보이기 시작했다. 토월회의 문예부장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신극운동에 참여한다. 1927년 박진, 이소연 등과 극단 산유화를 결성해 창작희곡 '향토심'을 무대에 올렸으며 1930년 최승일, 홍해성 등과 극단 신흥극장을 조직해 연극운동을 펼쳐나갔다.그의 대표작은 1923년 9월에 문학잡지 '백조'에 발표된 새로운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일 것이다. 소설로는 '저승길', '봉화가 켜질 때' 등이 있다. 그의 대표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지금 읽어도 가슴이 뭉클하다.'나는 왕이로소이다./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그러나 십왕전에서도 쫓기어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맨 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신다면은/"맨 처음 어머니께 받은 것은 사랑이었지요마는 그것은 눈물이더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것도 많겠지요만은…./"맨처음 네가 나에게 한 말이 무엇이냐" 이렇게 물으신다면은/맨처음 어머니께 드린 말씀은 '젖주셔요'하는 그 소리였지요만은 그것은 "으아"하는 울음이었나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말씀도 많지요만은…//이것은 노상 왕에게 들리어주신 어머니의 말씀인데요./왕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올 때에는 어머니의 흘리신 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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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먹 가는 밤 지면기사
벼루와 먹을 꺼냈다. 그전에 새 붓과 화선지도 준비해두었다. 사실 주문한 상자 안에는 먹물도 들어있었다. 그러니까 굳이 벼루에 먹을 갈지 않아도 되었다는 말이다. 어느 날 문득 나는 흰 화선지에 천천히 글씨를 쓰고 싶었고 인터넷 쇼핑몰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을 주문했다. 그중에 500밀리 플라스틱 통에 든 먹물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먹물 통을 보니 내가 원한 것이 그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글씨를 쓰고 싶었다기보다는 사각사각, 하는 소리가 듣고 싶었던 것이다. 벼루에 천천히 먹 가는 소리. 뒤늦게 나는 다시 벼루와 먹을 주문했다. 나는 문예창작학과 졸업생이다.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하기 전 다른 학교 사범대학을 3년이나 다녔다. 애초 내 꿈은 소설가였으나 철들 리가 없는 스무 살에 소설을 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서 그저 무난하게 사범대학에 진학했던 것이다. 나는 충분히 철이 든 후에 소설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첫 소설을 쓰고 싶었다. 3년 동안 어울리지도 않게 교육학 책을 들고 다니며 나는 마냥 지루했다. 이왕 3년이나 다닌 것, 그냥 한 해 더 다녀서 졸업을 하고 교사 자격증이라도 딸까,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내가 기어이 사범대학을 그만두고 만 건 우습지만 먹을 갈기 싫어서였다. 먹 갈기 싫어서 사범대학 그만두고유학도 포기… 문예창작학과 졸업 당시 내가 다녔던 학교의 학과장 교수님은 명망 있는 서예가였는데 걸핏하면 학생들을 불러 연구실에서 먹을 갈게 했다. 조교가 까딱까딱 손짓을 하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면 그게 먹을 갈라는 소리인 줄 알아 모두가 어깨를 푸들푸들 떨며 진저리를 쳤다. 스무 살, 스물한 살 청춘들을 짧으면 네 시간, 어떤 날에는 일곱 시간까지도 잡아두고 먹을 갈게 하니 그걸 누가 좋아했을까. 이유를 알 도리는 없지만 내가 제일 자주 불려갔다. 사브작 사브작 교수님이 화선지 넘기는 소리를 들으며 먹을 갈았다. 그러면 사각사각 벼루 위에서 먹이 움직이는 소리가 섞였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연구실 창밖으로 노을이 졌고 잣나무가 흔들렸다. 처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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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대퇴사시대를 건너가기 위하여 지면기사
지난 연말, 아르바이트 직원이 마지막 근무 날에 팀원 모두가 소속된 단톡방에 '퇴사 레터'를 보내고 떠났다. '퇴사 뉴스레터 vol.1'이라는 제목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뉴스레터 1번이라는 건 앞으로 2번, 3번이 계속 있다는 뜻인가 싶기도 했고, 짧다면 짧은 기간의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이런 소회를 공개적으로 밝히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요즘 유튜브에 퇴사 소회를 올리는 MZ세대가 많다는 기사를 보고 다른 세상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아주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던 셈이다.퇴사 뉴스레터까지는 아니어도, 퇴사 소식과 함께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전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 던지고 제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짤을 올리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일본 애니메이션 '이누야사'의 가영이 캐릭터는 MZ세대를 중심으로 '퇴사짤'이자 '밈(Meme·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사진이나 영상)' 열풍의 중심에 서 있다. 해리포터 영화에 나오는 '도비는 자유예요' 짤 역시 여전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니까 언제부터인가 퇴사는 더 이상 '인생의 결단'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로 바뀐 느낌이다. 한 회사에서 오래 일하는 것은 더 이상 자랑거리가 아니다. 바야흐로 '이직이 경력관리가 된 대퇴사시대'라 할 만하다. "한 회사에서 최소한 1년 이상은 버텨야 한다"는 조언은 옛날옛적 '라떼' 이야기가 된 지 오래다. 심지어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라는 용어가 급속히 확산 중이다. 조용한 퇴사는 실제로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일만 하고 그 이상의 일은 거부하는 태도를 말한다.MZ세대, 자유·휴식·새로운 시작…'퇴사' 10명중 7명 긍정적으로 생각당장 '원하는 것 해보겠다' 사람 늘어 예전에는 퇴사를 하고 이직을 하는 것이 골치아픈 상사, 낮은 연봉 등 이유가 '남' 때문이었다면 요즘은 '나'를 위해서라는 대답이 다수다. 작년 6월에 한국리서치에서 최근 2년 이내에 자발적인 퇴사 경험을 한 MZ세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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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봉 원장과 이 원장 지면기사
살기 좋은 지역 사회는 좋은 차와 맑은 물의 만남과 다르지 않다. 지역 역시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과 투명한 지역이 좋은 사회를 만든다는 말이다.이처럼 사람과 공간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지역일수록 애향심이 강하고 고장을 떠나지 않는 지역민들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게다가 타 지역에서 유입되는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터전을 향유하고 전파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한다. 그만큼 지역에서 자라고 생산된 차와 물과 같이 지역민은 풍미를 가진 고유한 공간의 주체가 아닐 수 없다. 지역 사회에서 고향을 지키는 주체들은 이웃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같은 하늘 아래서 서로의 경조사를 같이 해 온 이웃은 공동체 이상으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반대로 우리는 그것을 철새 정치인과 기업인들을 통해 많이 답습해 왔다. 정치인의 경우 당선과 낙선 사이에서, 기업인의 경우 흥망성쇠의 갈림길에서 철새처럼 갑자기 등장해서 어느새 사라져 버리는 것. 이를 테면 철새민에게 지역은 공동체의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지만 지역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 이웃을 배려한다는 데 있다. 베푸는 것에서 비롯되는 덕은 고립되지 않고 반드시 비슷한 사람을 응대하게 되게 된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이 이웃이 되면서 경외의 대상이 된다. 바로 수원의 봉 원장과 이 원장과 같이. 지역 사회가 알아주지 않아도 명분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말에 앞서 행동을 하는 특징이 있다.수원서 활동하는 양의사·한의사의료 봉사와 지역위한 재능 기부개원후 30년 동안 남다른 애향심 봉 원장과 이 원장은 수원 사람으로 수원지역에서 활동하는 양의사와 한의사다. 이들의 주변에 환자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것도 여기에 있다.바로 피부과 전문의 봉하욱 원장과 이비인후과 전문인 이만희 원장이다. 수원의 모 중고등학교 선후배 동문인 이들은 지천명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수원을 떠난 적이 없다. 대학을 졸업 후 수원에서 개원한 봉 원장과 이 원장은 자신의 전공과 미덕을 교만과 인색으로 바치지 않고, 국내외 의료 봉사와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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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새해, 글쓰기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지면기사
오래전이었다. 신춘문예에 단편 소설을 응모하여 일곱 번이나 낙선한 뒤 드라마 작가로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는 다음 해에 신춘문예에 당선되기 위해 7년이나 습작 기간을 가졌으리라. 그런 긴 세월을 보냈기에 드라마 작가로 성공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은 실패할 때 배울 기회를 갖게 되는데 그 이유는 실패의 원인을 찾기 위해 애쓰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낙선할 적마다 자기의 소설 작품에서 부족한 점을 보완하려 궁리함으로써 성장과 발전의 기회를 여러 번 가졌을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그가 일곱 번 낙선한 건 좋은 경험이라 볼 수 있다. 나 역시 글을 쓰느라 노트북을 끼고 살았으나 오랜 기간 동안 성과가 없었다. 내게 '글쓰기'는 불러도 대답 없는 연인 같아 때로 맥이 풀렸고 때로 소질 없음을 탄식했다. 글쓰기를 포기할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구점에 가서 공책 한 권을 사고 나면 언짢은 기분이 풀리곤 했다. 매일 글을 써서 그 공책을 글로 가득 메우고 나면 나의 글쓰기 역량이 지금보다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 새 희망의 길을 열어 주어서다. 우연히 유튜브 동영상으로 봤던 장면을 다시 보는 것도 새 희망을 갖게 했다. 높은 곳에 오른 다이빙 선수가 공중에서 세 번 회전한 후 멋지게 입수하는 장면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구나 하고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그 다이빙 선수도 수없이 실패하면서 꾸준히 연습하여 공중회전을 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자, 나도 꾸준히 습작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뭐든 꾸준히 하면 실력향상 '값진일'운때 기다리며 노력하면 결실 거둬 이번엔 밑바닥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야겠다. 언젠가 수영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도 모르게 깊은 곳에서 수영을 하게 되었다. 수영을 그만하고 싶을 땐 내 발이 밑바닥에 닿지 않아 당황했다. 물속에서 발버둥을 쳤으나 내 몸이 올라가지 않고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 발이 수영장 밑바닥에 닿았다는 걸 알았다. 그제야 몇 번의 시도 끝에 밑바닥을 발로 차고 헤엄쳐서 몸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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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트레버와 나 지면기사
작년을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오랫동안 함께한 학생들과 '올해 읽은 책 중 최고의 책'이 무엇이었나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겹치는 책은 한 권도 없었고, 처음 듣는 작가도 있어서 메모해두기도 했다. 누군가 "윌리엄 트레버를 이제 다 읽었어요"라고 말했고 '탁자'라는 단편을 읽고 일주일 동안 멍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이 아일랜드 작가에 대한 오래된 사랑이 떠올랐다. 내가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집을 사서 하루에 딱 한 편씩만 아껴서 읽던 순간은, 내 삶이 트레버의 소설처럼 변하는 시간이었다. 특별한 의지를 갖고 선택한 것도 아닌데 인생이 밀어닥치고 있었다. 늦게 결혼하여 어린 아기가 태어났고, 결국은 책으로 출간하기를 포기하게 될 장편소설을 시작한 참이었다. 냉정히 판단해보면 그 시절은 조금씩 난파하여 가라앉는 초창기에 속했다. 그때 이 작가를 알게 됐고, 책 속에는 나보다 가진 것이 없거나 선택지가 적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나는 한 무더기의 '가장자리 인간들'에게 연민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다.연민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연민은 동정처럼 마음이 비탈진 언덕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연민은 같은 고도에서 눈을 맞추며 '나, 이 감정을 알아'라는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정확히는 '당신의 불운을 나도 알 것 같아'라고 속으로만 말하는 것이다. 작지만 기적같은 순간인데 인간은 자신의 인생과 자아라는 감옥에 갇혀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감옥에서 너라는 세상으로 열리는 창문을 만드는 것. 그러므로 연민은 기적이 맞다.인생 단면 맑은 물속 비춰보듯 표현쓸쓸하고 슬픈 그의 소설 읽고나면나를 위한 작은 자리 마련된것 같아 그 속에서는 이해가 이루어진다. 불운이 얼마나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지, 행운도 불운도 거들떠보지 않는 고립 속에 인생이 낭비되어 버리는지, 이 완강한 세상을 거스를 수 없는 무력감을 지닌 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발버둥을 치는지. 트레버는 이런 인생의 단면을 맑은 물속 들여다보듯 그려낸다. 한편으로 그 풍경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과 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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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민폐여도 괜찮아 지면기사
2022년 한 해를 돌아보니 여러 일들이 있었다. 평생 처음 겪는 일도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3일 이상의 장기 입원이었다. 지난 가을, 알러지 반응이 있고 몸이 안 좋아서 응급실에 갔다. 몇 가지 처치를 받고 좀 나아진 것 같아 집에 가겠다고 했는데 최소 72시간은 상태를 봐야 한다는 의사의 단호한 말에 그대로 입원할 수밖에 없었다. 약한 알러지 반응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심각한 증상이었고, 그러다 보니 나도 내 상태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겁이 나기도 했다.요즘은 간호간병 통합서비스라고 해서 간호조무사와 간병인, 간호사들이 간호와 간병을 통합해서 제공한다. 코로나19 상황까지 겹쳐서 보호자의 상주는 물론 방문도 엄격히 제한됐다. 그나마 응급실에 갈 때 함께 간 사람이 있었지만, 입원 수속을 밟으면서부터는 혼자일 수밖에 없었다. 주말 밤에 급하게 입원하는 바람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을 갖다주고, 퇴원하는 날 챙겨주고,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해주는 가족이 고맙다가도 생각지 않게 민폐를 끼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 올해 평생 처음 알러지로 장기입원이것저것 챙겨준 가족 미안한 마음누구도 아프지않는 사회로 변해야 누워 있다 보니 아프지 않을 때 읽었던 책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내용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이 책의 저자인 조한진희 작가는 잘 아플 권리, 그러니까 질병권을 주장하면서 ''이상적인 겉모습을 갖춘' 건강한 성인 남성의 몸을 표준으로 한 사회적 구조가 아픈 몸을 억압한다'고 지적한다. 어떻게 건강하고 아프지 않은 몸으로 살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보다 '회복되지 않는 아픈 몸으로도 어떻게 온전하고 행복한 삶이 가능한가'를 더 많이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개인의 투병기이면서 질병으로 인한 여러 경험을 함께 이야기하는 이 책은 질병에 걸린 후 완치된다는 예정된(?) 서사 대신 '여전히 투병 중'이고 '병을 지내는 중'으로 마무리된다. 나 역시 호전되어 퇴원하기는 했지만, 알러지 반응은 언제 어떻게 다시 나타날지 모르니 병과 화해하며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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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유희춘의 아내 송덕봉 시인 지면기사
미암 유희춘(1513~1577)은 해남에서 태어났다. 가계는 증조할아버지가 유양수고 할아버지는 유공담이며 아버지는 유계린이다. 김안국과 최산두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38년(중종 3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사가독서로 집에서 학문에 전념한 다음에는 수찬·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수찬이라는 벼슬은 조선시대 홍문관에 두었던 정육품 관직이며 정언이라는 벼슬은 국정에 관한 간쟁과 왕의 정치에 대한 비평, 관원을 탄핵하는 등의 언론을 담당했던 사간원의 관원이다. 을사사화 때 김광준과 임백령이 윤임 일파를 제거하자고 요구했으나 동의하지 않았다. 사화에는 외척이 깊이 개입했다. 명종 즉위(1545년) 직후 시작된 을사사화는 2년 뒤 정미사화까지 지속된 장기적인 정치 투쟁이었다. 유희춘은 1547년 양재역의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양재역의 벽서사건이란 1547년(명종 2) 9월 부제학 정언각과 선전관 이로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주(女主), 아래에는 간신 이기(李)가 있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된 익명의 벽서를 발견해 임금에게 바치며 발생한 사건으로 당시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 세력이 반대파 인물들을 숙청한 사건으로 정미사화라고도 불린다.유희춘은 해남에서 제주도가 가깝다하여 함경도 종성으로 위리안치 되었다. 위리안치란 유배된 죄인이 거처하는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두는 형벌이다. 유희춘은 19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고 후진을 양성했다. 국경 지방에는 학문을 하는 선비들이 없었다. 유희춘은 변방의 젊은 인재들을 위해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가 유배를 와서 글을 가르친 뒤에 많은 젊은이들이 학문을 하게 되었다.19년 유배후 선조때 복직 '미암'아내에 '여자 멀리했노라' 편지 '당신의 어머니 지성으로 장례'송덕봉 질책에 할 말이 없었다 유희춘은 선조가 즉위하자 19년 만에 해배되어 다시 벼슬을 시작했다. 선조는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유희춘에게 힘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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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행복하고 건강하고 돈 많은 할머니 지면기사
"캠핑이라니! 제정신이야?" 나는 기겁을 했다. 도대체 그 번거롭고 귀찮은 일을, 일당도 주지 않는데 왜 한다는 거야. 끝끝내 반대했지만 친구들은 텐트며 아이스박스 등을 트렁크에 가득 싣고 우리 집 앞에 나타났다. 나는 잔뜩 뿌루퉁한 얼굴로 차에 올랐다. 초겨울 날씨는 다행히도 포근했다. 그래도 이런 날엔 커튼 활짝 열고 담요 한 장 몸에 돌돌 말고서 넷플릭스나 보는 것이 딱인데. 나를 제외한 세 여자는 신이 났다. 음악 볼륨을 크게 높였다가 내비게이션 안내 음성이 안 들린다고 운전하는 친구에게 욕을 먹어도, 김치찌개를 끓일 묵은지를 안 챙겼다고 욕을 먹어도, 맛집 리스트를 찾아두지 않았다고 욕을 먹어도 다들 눈도 깜박하지 않았다. 투덜거리긴 했지만 나도 금세 마음이 풀어져서 조잘조잘 별소리를 다 하며 떠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떠난 캠핑이라 우리는 초보나 다름없었다. 산속 같은 곳은 엄두도 못 냈고 널따란 공터 같은 캠핑장에 도착했다. 겨울이라 고즈넉했다. "그냥 우리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 같은데?" "운동장이면 어때? 그냥 어딜 나왔다는 게 좋은 거지." 하긴 맞는 말이었다. 친구들은 이제 슬슬 퇴사를 준비 중이다. 좋은 직장엘 다니고는 있지만 더 늦으면 독립 시기를 놓칠 거라고 했다. 나를 빼고는 모두 비혼이다. "육십까지는 빡세게 벌어야지. 그 이후로 칠십까지 10년 동안은 아르바이트 삼아 좀 살살 벌고. 그래야 백세 인생 버틸 수 있지 않겠어?" 맞는 말이다.친구들과 10년만에 온 1박2일 캠핑예전엔 남자친구 이야기 등 했는데이젠 건강·돈 관련 대화로 달라져 누군가는 목살을 굽고 누군가는 햄을 지졌다. 나는 꽁치김치찌개를 끓이겠다고 나섰다. 김치 넣고 꽁치 캔 넣으면 양념도 딱히 할 것 없는 가장 쉬운 것이니까 말이다. 휴게소 편의점에서 대충 사온 포장김치는 하나도 익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도 뭐, 나는 별 걱정하지 않고 냄비에 김치를 쏟아붓고 꽁치캔도 부었다. 한 숟갈씩 떠먹은 친구들이 와아, 외쳤다. "끝내줘. 어떻게 이런 맛이 날 수 있지?" 내가 먹어도 놀라웠다. 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