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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소신 지면기사
김선일씨의 불행한 참사가 1라운드를 끝내고 2라운드로 접어들었다. 1라운드는 머나먼 이국땅에 학비를 벌어보겠다고 떠났던 우리의 너무도 평범하고 가난한 이웃이 참혹한 주검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김씨에겐 이라크라는 곳이 약간의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지 결코 명분도 없이 목숨을 걸고 죽어갈 곳은 아니었을 게다. 그러나 그는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대한민국 공동체의 대표자가 되어 무장테러범의 목표가 됐고 결국 유명을 달리했다. 이 시점에서 분명하게 지적해야 할 것은 김씨는 정치적으로 아무런 영향이나 힘이 없는 소시민으로서 우리 사회의 일원일 뿐이었다는 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라크 무장단체의 빗나간 행위는 당초부터 목적 달성이 불가능한 막연한 테러에 불과했다. 더욱이 항거 불능한 개인을 참수한 테러집단의 반인류적 행동에 강한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세계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는, 특히 무고한 일반인을 향한 무차별적 모든 테러를 그 이유와 명분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격분하며 증오한다. 최근 이라크 전쟁의 도화선이 된 국제무역센터의 공격과 처참한 붕괴는 왜 테러와의 전쟁을 치러야만 하는지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지만 이선상에서 빚어진 이라크 전쟁은 대의명분을 상실한채 정당성이 표류, 또다른 테러에 얼룩져 갈수록 참담한 결과를 만들고 있다. 세계 각국의 여론은 이라크 전쟁의 당위성을 의심하는 추세로 돌아섰으며 각국 정부는 첨예한 정보망에 촉각을 세우며 자국민 보호를 위한 예방책에 골몰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와중에 일어난 이번 이라크에서의 민간인 김씨 피살은 우리에겐 가장 우려했던 최악의 한사례가 되고 말았다. 이사건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한순간 온국민은 무기력에 빠져들어 경악과 함께 정부의 대처능력을 의심하며 끓어오르는 분노로 떨어야 했다. 수도없이 지적돼 온 위기대처 능력이 또다시 도마에 오른 것이다. 거기에다 이번에는 무엇이 부족했는지 국제적 망신까지 초래했다. 사건 초동 단계에서 특정 개인의 말만을 믿고 시시각각 우왕좌왕하더니 급기야 장관까지 나선 AP와의 공방이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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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가진 사람 모두가 떠드는 사회 지면기사
많은 국민들이 지금 나라를 걱정한다. 걱정의 요체는 방향감의 상실이다. 우리 사회가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가는 것인지, 그리고 리더는 누구인지 모르는데서 오는 혼란이다. 나침반을 상실한 집단의 위기감이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입 가진 사람 모두가 손가락을 들어 가야 할 방향을 놓고 격론을 벌이는 형국이다. 나아갈 방향을 찾기 위한 잠시의 정적이 절실한 순간에 입 가진 사람 모두가 떠들어 대는 엄청난 소음. 바로 이 소음이 발등에 떨어진 우리의 위기다. 지금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김선일의 비극'도 그렇다. 우리는 진상규명의 여유도 없이, 그의 죽음에 이라크 추가파병 문제 부터 국립묘지 안장문제에 이르기 까지 너무 많은 것을 결부시키고 있다. 이라크 추가파병을 놓고 정부·여당과 시민단체·민주노총이 제각각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물론 대통령과 여당내 소장파의 의견이 엇갈린다. 국립묘지 안장문제도 그렇다. 국방부는 난색을 표하지만 여당의 당의장은 긍정적인 검토 의사를 밝혔고, 이에 질세라 한나라당의 원내대표도 동의를 표시했다. 이들에겐 김선일의 비극이 그저 정치일 뿐이고, 비극이 빨리 잊혀지기를 바라는 집단과 두고두고 지속시키려는 집단사이의 이해충돌이 있을 뿐이다. 웃기는 건 그들 중 '김선일 비극'의 진실을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저 정치적 프로파간다만 양산할 뿐이다. 진실은 알지 못한 채 주장만 난무하는 우리 내부의 모습은 정말 비극적이다. 김씨 피살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급락했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말을 많이 한 대통령의 자업자득이다. 대통령은 국익 실현을 위해 이라크 추가파병의 당위성을 강조하지만, 국민은 미국에 대해 유난히 주체성을 강조했던 후보 시절의 대통령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반미면 어떠냐'는 발언에 열광해 표를 던진 사람들이 현 정부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당·정의 완벽한 분리를 기회있을 때 마다 강조한 대통령이지만 여당 관리용 개각에 골몰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취임 이후 검찰과의 한판, 재신임 파문, 탄핵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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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 정치, 만찬 政治 지면기사
'아침에 이를 닦고 밥을 먹었다. 학교에 갔다. 애들과 점심을 먹었다. 참 맛있었다'―이렇게 일기를 썼다간 아무리 초등학교 1학년 짜리라고 해도 담임 선생님의 꿀밤을 맞기 십상이다. 밥 먹고 배설하고 잠자는 일, 자고 나면 으레 하는 일을 일기라고 쓴다면 마당가의 멍첨지(개)가 다 웃을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고도 희한한 일이 이 나라에선 거의 매일같이 벌어져온 지 오래다. 청와대 오찬과 만찬이 그것이다. 오늘 오찬엔 아무개와 아무개, 만찬엔 무슨 단체, 어느 집단을 초대했다는 게 매일처럼 일기로 적히는 청와대 일지(日誌), 청와대 일기가 아닌가. 물론 점심, 저녁도 제목과 내용이 중요하다. 더구나 고급 와인으로 축배까지 치켜들며 격식 갖춰 잘 차려 먹는 청와대 오찬, 만찬인데다가 뭐 좀 알맹이 있는 테마의 토론을 끄집어 내가며 가타부타 구색 갖춰 우국충정이라도 토로(吐露)한다면야 값어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거의가 그렇지 못하다. YS가 1995년 8월 23일 각계 원로를 초대했다. 그러나 “칼국수 참 맛있습니다” “문민정부가 아니면 중앙박물관 철거는 어렵습니다” 따위 얘기가 고작이었다. 그런데도 그날 '점심'이 신문 1면 머리와 TV 뉴스 헤드라인으로 올랐다. 1단 감도 안되는 내용을 그렇게 보도한 뉴스 매체의 자질 또한 가히 미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 날 DJ는 “별 대화는 없었지만 표정은 밝았다”고 했다. 그럼 그 자리에 누가 감히 벌레 씹는 얼굴을 하고 앉아 있겠는가. 또 후루룩 후루룩 집단적인 화음을 맞춰가며 “칼국수가 맛있다”고 찬탄하는 그런 모임이라면 설혹 주머니에 송곳 같은 의견이 있어도 용기있게 꺼내기는 어렵고 언중유골(言中有骨)도 퉁겨지기 어렵다. 상식적이다 못해 진부하기까지 한 대화에 걸맞게 그저 적당한 표정 관리로 웃어주고 장적(場的) 동작에 신경 좀 써 주면 그만인 것이다. '무엇을 먹고 있는가보다는 누구와 식사를 하고 있는가를 봐야 한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아니더라도 누구와 식사를 하느냐가 그리도 중요한 것인가. YS의 칼국수와 DJ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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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모자(母子)의 대화 지면기사
애비야, 저 사람들 왜 저렇게 시위를 하는 거냐? 글쎄요, 세계경제포럼이라고 세계경제를 주무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세계화에 대해 의논을 하는 자리가 서울에서 열렸대요. 그걸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세계화 반대 시위를 벌이는 거래요. 세계 거물들이 다 모였어? 그건 아닌가봐요. 요번 회의는 동아시아 사람들 위주라지요, 아마. 그런데, 도대체 세계화라는 게 뭐냐? 세계화, 세계화 듣기는 많이 들었다만, 난 도통 무슨 소린지 못알아 먹겠더라. 많이 배운 니가 설명 좀 해봐라. 에이, 제가 뭘 많이 배워요. 더구나 경제분야는 깜깜인 걸요. 그래도…. 제가 아는 상식으로는요, 전 세계가 마치 하나의 체제처럼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적으로 경제를 운영할 때 모두가 잘 살 수 있으니까, 그 방향으로 가자는 게 세계화라고 알고 있어요. 그거 좋은 얘기잖니. 게다가 세계의 지도자들이 만나서 의논한다니 좀 좋으냐. 그런데 왜들 저렇게 격렬하게 반대한대니. 외국 사람들까지 몰려와서…. 헌데, 세계화가 꼭 옳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특히나, 못사는 나라 사람들 중에는 세계화라면 몸서리를 치는 사람들도 있지요. 저 멕시코의 어느 지역에서는 그것 때문에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어요. 그 부사령관이 마르코스라는 사람인데, 마르크스? 아니요, 마르코스요. 마르크스는 19세기 사람이잖아요. 하여튼, 마르코스라는 사람이 전 세계 인터넷에다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글을 퍼트리기도 했어요. 신자유주의는 또 뭔데? 세계화의 바탕이 되는 이념이에요. 정확한 개념은 간단하게 설명하기 힘들지만, 정부의 간섭 없이 기업이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하도록 하고, 전세계적으로 자유무역을 하도록 하자, 뭐 이런 주장이지요. 그게 왜 나빠? 세계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게 세계적으로 큰 기업, 큰 부자들이 제 배 불리려고 꾸며낸 얘기라고 믿어요. 세계화 아무리 해봤자, 모두 잘 살게 되지는 않는다, 봐라, 지금까지의 과정이 증명하지 않느냐는 거지요. 그게 사실이야? 그야 저도 모르지요. 하지만, 1970, 80년대부터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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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행동을 의심한다 지면기사
6·5 재·보선에서 열린 우리당이 참패를 면치 못했다. 4·15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맛본 우리당이 불과 두달이 채 안된 상황에서 직면한 결과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이런저런 분석이 분분하다. 의외의 사태이니 당연하다.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히고 일각에서는 전대를 통한 당쇄신론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반면 한나라당은 차떼기 원죄에서 홀가분해진 듯 만면에 미소다. 민주당은 회생을 반기는 입장이다. 한순간 엇갈린 명암에 정치권의 희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형국이다. 하지만 여당이 침통하든 야당이 기뻐 흥분하든, 국민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한마디로 선거는 정치권 그들만의 리그일 뿐 이미 국민들 생활에서는 멀어진 특히 서민들에게는 남의 일처럼 무관심한 일상이 된지 오래기 때문이다. 광역 단체장 4곳과 19곳의 기초단체장을 포함해 기초의원 등 전국 114개 지역에서 실시된 이번 재보궐 선거의 투표율은 28.5%에 그쳤다. 중앙선관위가 예전보다 투표율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투표 마감 시간을 2시간 연장해 오후 8시로 조정했는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재보선의 의미가 주는 교훈은 결코 간단치가 않다. 전대미문의 정치자금 차떼기와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이 맞물려 열린우리당에 1당의 힘을 몰아준 전국의 유권자가 총선 열기가 채 식지도 않은 시기에 이처럼 싸늘하게 식어버릴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탄핵판결 이후 직무에 복귀하며 국민 대통합의 상생정치를 약속했다. 또한 한동안 본의 아니게 은둔에 들어갔다가 새롭게 등장한 조심스러움으로 통치 스타일이 크게 변화됐을 것이란 기대감이 컸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일부에서의 발언이 또다시 사회의 파장을 일으켰고 조기 개각에 집착하는 바람에 통치스타일을 구기기도 했다. 야당이 반발하고 여당 일각이 문제삼은 김혁규 총리지명 고집은 대통령이 달라진 게 없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당정은 파열음을 내며 정책혼선으로 국민을 당혹스럽게 만들었고 일부정책은 정책 조율 과정이 걸러지기도 전에 마구 발표되는 바람에 일관성을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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保守를 조롱하며 相生 외치나 지면기사
노무현 대통령의 언행이 또다시 장안의 화제, 정치권의 논쟁이 되고 있다. 대통령직 복귀 직후 노 대통령은 통합과 상생의 정치를 약속했다. 탄핵 이전의 힘 없는 대통령과 덩치 큰 야당간의 끝없는 언어 전쟁에 식상한 국민들이 통합과 상생을 원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대통령에게 '힘'이 생겼기 때문에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에도 한결 여유가 깃들 것이란 기대가 컸던게 사실이다. 그런데 대통령의 통치언어는 여전히 피아(彼我) 구분형이니 답답하다. 지난번 연세대 특강의 발언은 잘못됐을 뿐 아니라 쓸데없기도 했다. 청와대가 정리한 발언록을 다시 음미해 보자. “진보, 보수가 뭐냐. 보수는 힘이 센 사람이 좀 마음대로 하자, 경쟁에서 이긴 사람에게 거의 모든 보상을 주자, 적자생존을 철저히 적용하자, 약육강식이 우주 섭리 아니냐, 그렇게 말하는 쪽에 가깝다. 진보는 더불어 살자, 인간은 어차피 사회를 이루어 살도록 만들어져 있지 않냐, 더불어 살자다.(중략) 이렇게 이해하면 간단하다. 합리적 보수, 따뜻한 보수, 별놈의 보수를 다 갖다놓아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다.” 보수와 진보에 대한 노 대통령의 정의가 옳다고 치자. 그 누가 보수를 자처하며 이 사회에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라면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라는 동물세계의 법칙을 신념으로 삼을 수 없는 것 아닌가. 사람이라면 대통령이 정의한 진보의 이념을 갖추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우습다. 대통령은 진보를 '더불어 사는 것'으로 정의했지만, 이는 진보의 개념이라기 보다 민주국가를 떠받치는 사회적, 시민적 덕목이라고 해야 옳다. 보수든 진보든 더불어 살자는 정치이념이고 삶의 가치이다. 다른 것은 이념과 가치를 실현하는 방법과 방식의 차이일 것이다. 그러니 보수, 진보에 대한 대통령의 정의는 분명히 오류인 셈이다. 대통령의 발언으로 많은 국민이, 스스로 보수를 자처하는 많은 국민이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한 사회의 구성원인 인간은 먹고 입고 잠잘데만 있다고 살아지질 않는다. 의·식·주 만큼이나 중요한 삶의 조건은 각자가 지향하는 삶의 가치와 태도이다. 삶의 가치를 갖지 않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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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귀 맞는 국가원수 지면기사
슈뢰더 독일 총리가 따귀를 맞았다. 사민당이 엊그제 주최한 집회에 참석, 신입 당원들 앞에서 사인을 해 주고 있을 때 갑자기 등뒤에서 다가온 52세의 실업자로부터 호되게 얻어맞은 것이다. 범인은 경찰 조사에서 “끝없는 경기 침체와 높은 실업률에 대한 응징”이라고 했고 슈뢰더는 기자들에게 “턱이 얼얼했다”고 따귀의 강도(强度)를 실토했다. 영국 총리 블레어도 그 이튿날 의회에서 대정부 질문 답변 중 방청석으로부터 자줏빛 분말로 채워진 콘돔 세례를 받았다. 그 역시 ‘미스터 콘돔’의 접근을 허용했더라면 한쪽 뺨이 벌겋도록 따귀를 맞았을지도 모른다.부시 정권의 부도덕성을 통렬히 비난한 반전(反戰) 다큐멘터리 ‘화씨 911’로 칸 영화제의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탄 마이클 무어 감독 일행이 부시를 만난다 해도 부시의 뺨은 온전치 못할지도 모른다. 하긴 그랑프리의 기쁨 끝이라 따귀까지는 몰라도 이렇게 다그칠 게 뻔하다. “봤지? 들었지? 이런 게 영화라는 것이고 예술로 꿰매고 포장한 진실이라고 하는 아주 희귀한 것이야! 당장 배급을 허용하고 백악관 마당에서 시사회나 갖자구!” ‘워싱턴포스트’는 ‘화씨 911’의 수상을 “백악관을 겨냥한 정치적 수류탄이나 다름없다”고 했고 ‘뉴욕타임스’도 약속이나 한 듯이 “무어 감독이 그 곳에서 폭탄을 터뜨렸다”고 논평했다. 그 ‘화씨 911’ 수류탄과 폭탄은 이제 전세계의 흥행 블록버스터로 터져 나갈 것이다.일본 쪽의 고이즈미(小泉)는 어떤가. 적어도 그가 따귀 맞을 확률은 낮아 보인다. 그는 2002년 9월에 이어 두 번째 북한을 방문했다. 그 첫 번째 북·일 정상회담은 세계 정상회담사상 유례가 없는 굳은 표정의 ‘화난 악수’로 시작해 그렇게 마쳤다. 그만큼 북한은 그를 냉대했고 이번 회담 역시 엷은 미소만 거래했을 뿐 냉랭한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공항 마중도 차관급을 내보내 홀대했다. 그런데도 그는 간과 쓸개를 생략한 채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것이다. 명목이야 국교정상화지만 일본인 납치문제 해결이 전부나 다름없는 방북이었다. 어쨌든 5명의 납치 가족을 동행, 귀국하는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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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착오적 이분법 지면기사
탄핵 이후의 이슈는 파병과 경제다. 먼저, 이라크 파병문제는 주한미군 전환배치라는 돌발변수가 생기긴 했지만 그럭저럭 사회적 의견이 모아지는 듯하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내에서도 재검토 의견이 우세해졌다. 포로학대가 폭로되면서 세계의 여론이 확실히 돌아섰고, 국내 여론도 70% 이상이 반대 내지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 물론, 정부와 일부 보수층은 여전히 '국제 신의'를 내세워 파병 강행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의리? 좋은 얘기다. 한 번 한 약속은 해골 두쪽 나도 지키는 게 떳떳하다. 하지만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는 국제사회에서 달랑 '의리론' 하나만을 근거로 약속이행을 고집하는 건 순진하거나, 멍청하거나, 아니면 둘 다 이거나 라는 국제적 평가를 받기 십상이다. 평범한 우리들이 모르는 뭔가가 있기 때문에 파병해야 한다면 차라리 그럴싸하다. 예를 들어 갑자기 터져나온 주한미군 재배치 문제같은 게 그렇다. 그보다 더 심각한 뭐가 있는가? 그러나 파병을 하려면 그 뭔가가 뭔지를 정직하게 털어놓고 국민들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지금 이 마당에 못 밝힐 게 뭐 있나? 혈맹이자 미래동맹인 미국의 간곡한 부탁을 뿌리쳤을 때 우리가 당할 불이익이 다소 걱정되긴 하지만, 그럴수록 정당한 절차가 중요하다. 이와 관련해서 얼마전 제기됐던 이분법적 질문 하나가 생각난다. 총선 직후 국회의원 당선자들을 상대로 던져졌던 질문이다. 미국이냐 중국이냐. 어느 쪽과의 관계를 더 중시해야 한다고 보느냐는 것이다. 얼핏, 국가의 장래와 관련된 중요한 선택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는 이 질문은 그러나 사실 우문(愚問)에 가깝다. 사안 사안에 따라 교류하고 협력해야 할 상대가 다른 게 국제사회다. 당연히 그때그때 우리에게 더 필요한 쪽과 손을 잡아야 한다. 굳이 나는 니네보다 쟤네가 더 좋다고 미리 못박아서 특정국가의 속을 긁어놓는 짓은 어리석다. 이쪽 중시면 보수, 저쪽 선호면 진보 하는 식으로 편가르기를 할 요량이 아니라면 미국이냐 중국이냐를 왜 굳이 까발려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극단화시킨 양자택일론은 위험하다. 그런데, 최근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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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스승의 길 지면기사
군사부일체라는 말이 있다.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를 섬겨야 할 윤리적 동일체로 여겨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충과 효를 중시했던 유교사상이 지배한 조선시대에 스승을 자신의 군주나 부모와 같이 비유한 말이다. 이 외에도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속담에서 보여지듯 과거부터 사제간의 예를 중시하였고 그만큼 스승의 위치나 권위는 감히 도전이 불가능한 성역이었음을 알수가 있다. 군림하는 임금이 사라진 현대에도 사부(師父)일체의 윤리관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요즘 우리 사회에서 사부일체의 윤리관은 무색해지고 있다. 지난달 8일 평택시 비전동 16층아파트에서 평택 H여중 양호교사 이모(여·39)씨가 50여m 아래 화단으로 떨어져 숨진 사건이 있었다. 숨진 이교사의 수첩에서 '내가 모든 십자가를 지고 가겠다'는 글이 발견되었고 남편 이모(45)씨는 경찰에서 '아내가 최근 학부모로부터 여러 차례 항의전화를 받고 괴로워했다'고 한다. 이뿐 아니다. 학부모가 교장을 감금폭행한 사건, 담임교사에게 꾸중을 들은 고교 신입생이 앙심을 품고 수업 중이던 담임교사를 폭행한 사건 등 교권붕괴의 현실은 참혹하기 그지없다. 모든 권위의 해체를 요구하는 시대적 추세를 감안한다 해도 감당키 어려울 정도이다. 이제는 이같은 현실을 두고 패륜적이고 부도덕한 행위라고 지적하는 이도 없다. 그렇다고 교권실추의 원인에서 교사들이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교사란 학교라는 사회안에서 학생들에게 제2의 부모로서 삶의 도리를 가르치고 모범이 되어 아직 완숙하지 못한 어린마음들을 올곧고 참되게 인도해야 하는, 세상의 침범이 거부된 존재인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고 추구하는 참된 교사상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수업중인 학생을 불러내 성추행을 하는 교사, 돈이 없어졌다며 남편을 사복경찰관으로 꾸며 교실에서 자기 반 어린 학생들에게 지문을 찍게 한 교사 등 교사로서의 자질조차 의심스런 교사들이 생겨남에 따라 스스로 교권을 깎아내리는 사회가 돼 버렸다. 백년대계라 불리는 교육, 무엇보다 때묻지 않고 순수해야할 그 성역의 수호자인 교사의 역할이 어찌 이리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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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저런 지옥을 초래했나 지면기사
저건 ‘용이 잠긴 시내(龍川)’…더 이상 그런 평화로운 땅이 아니다. ‘우리는 행복합니다’라는 절규의 표지판이 곳곳에 걸려 있는 지상낙원 그런 비슷한 곳은 더더욱 아니다. 어제오늘의 북녘 용천 땅 저기가 바로 2004년 4월 현재의 아비규환 지옥 1번지 주변이자 연옥(煉獄)의 실황 그것인지도 모른다. 누가 수백 명의 염마졸(閻魔卒), 두억시니―야차(夜叉) 떼를 지옥으로부터 외출 나오도록 용천 땅에 초대했길래 저토록 지독한 파괴의 심술과 해코지, 행패를 부리며 휩쓸고 지나간 것인가. 헐벗고 굶주린 차가운 땅이 온통 초토의 폐허가 돼버리고 그 뜨거운 초열(焦熱)지옥에서 살아 나온 처참한 몰골들이야말로 그냥 하기 쉬운 말로 목불인견이 아닐 수 없다. 이목구비의 형체조차 엉망일 정도로 심한 화상을 입은 채 형편없는 시설의 병원 같지도 않은 곳에 줄줄이 누워 있는 저 어린 천사들에겐 진통제 하나 없고 머리 위엔 그 흔한 링거 병 하나 매달려 있지 않다. 수술을 하려 해도 마취약이 없어 마취를 못하고 수술대도 조명등도 없어 푸줏간 평상 같은 곳에 눕힌 채 손전등을 비춰야 하는데다가 링거주사도 플라스틱 봉지 대신 사이다 병을 매달아야 한다. 저들에겐 무엇보다도 치료약이 화급(火急)하고 의료진과 치료 시설이 다급하다. 저 다급한 상황의 해소를 위해선 우선 가까운 남한 땅과 중국으로부터의 신속한 수송, 조달이 절실하다. 사태가 그런데도 남측의 의약품과 구호물자의 육로 전달을 거절하고 의료진 파견조차 사양했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를 넘어 기가 막힐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첫 구호 물품이 29일쯤 해양 수송로로 전달될 예정이라고 하지 않는가. 북측이 해양 우회로를 고집하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인가. 육상으로 떠벌리고 ‘올라오는’ 동족의 원조 물자 트럭들이 창피하기 때문인가, 보다 많은 육상 ‘인민’들의 눈에 띄는 것이 체제상의 자존심에 저촉되기 때문인가. 아니면 군사상 이유 그런 것인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번 용천 사고만은 의외로 사고 이틀 뒤에 서둘러 공식 발표했고 “피해가 대단히 크다”는 추상적 표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