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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 환상곡과 둔주곡 지면기사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아니더라도 통일은 돼야 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소원인 통일은 언제쯤 올 것이며, 오기는 오되 '어떤 통일'로 올 것이며, 왔을 때 과연 괜찮고 온전할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시계(視界) 제로의 암담한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 점에 있어 통일 독일은 “당신들 좀 잘 봐 두라”는 듯 우리에게 다정한 선배요 엄격한 사범이며 지독한 반면교사가 되고 있다. 1989년 11월9일(현지시간).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포함한 국경을 전면 개방, 분단 독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이 활짝 열린 그 날 전 독일인은 길길이 날뛰듯 열광했고 전 유럽인이 들떴고 온 지구촌 인류가 가슴이 터질 듯 갈채를 보냈다. 유럽의 심장인 베를린이 두동강으로 잘린 채 막혔던 혈류가 터졌으니 왜 아니 그랬으랴. 1949년 동·서독 정부가 각각 수립된 이래 40년간 동·서독 간첩 교환 장소였던 글리니케르 다리, 그 통한의 다리를 넘어 서독 땅을 밟은 동독인들은 다시 한 번 흔희작약(欣喜雀躍)했고 발터 몸퍼 서베를린 시장과 크라크 동베를린 시장을 비롯한 베를리너들은 해머로, 곡괭이로 깨부순 장벽의 벽돌장에 수도 없이 키스를 해댔다. 그 부서져 내리는 브란덴부르크 문을 전세계 외신들은 '창조적 파괴'라고 타전했고 벽돌 한 장 한 장은 동·서독인 7천800만의 가보(家寶)로 모셔졌다. 배리 스터플러라는 미국의 부자는 5천만달러에 베를린 장벽 벽돌을 몽땅 사겠다고 제의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자가용 제트기로 현장에 날아간 세계적인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는 그 '창조적 파괴' 음을 미친 듯 축가로 연주했다. '베를리너 환상곡'이었다. 한국인도 현장에 섰다. 그녀들은 통일 독일이 한없이 부럽다는 뜻으로 '한국은 하나(Korea ist Eins)'라는 피켓을 치켜들었다. 감격의 서장(序章)은 이내 독일인의 벅찬 기대로 이어졌다. 서독의 '라인강의 기적'이 이제 동독의 '엘베(Elbe)강의 기적'으로 이어지리라는 장밋빛 기대였고 희망이었다. 그 장밋빛 환상의 실현을 위해 다음 해인 90년 7월 동독 경제는 서

  • 불령선인의 꿈 지면기사

    안재성이 쓴 소설 '경성 트로이카'를 읽다가 '이럴 수가…' 싶은 대목을 만났다. 2차 트로이카가 와해된 후 이재유(李載裕)가 이관술(李觀述)과 함께 양주 공덕리(현 서울 노원구 창동)에 은신하면서 조악한 등사기로 찍어낸 잡지의 내용이다. 동지들과의 연락선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에서 이재유는 자신의 현장경험과 상상력만으로 당대 노동자들이 쟁취해야 할 목표를 제시했다. 의료보험과 국민연금의 실시, 출판과 집회의 자유, 동일노동에 동일임금, 주5일제와 같은 의미가 되는 주당 40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놀랍다. 이재유가 잡지를 낸 시점이 1936년 10월 중순이니, 그는 무려 60~70년이나 시대를 앞서가는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철저한 사회주의자였던 그의 꿈은 비록 '당대'는 아니지만 먼 훗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모두 합법화되어 있지 않은가. 다시 찬찬히 생각해 보면, 시대를 '선취'한 부분은 새삼스러운 게 아닐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권리 가운데 피의 역사를 갖지 않은 게 있던가. 생각나는 대로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지금은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여성 참정권을 쟁취하기 위해 1913년 영국의 운동가 에밀리 와일링 데이비슨은 경마장의 달리는 말 사이로 뛰어들어 목숨을 내던졌다. 1886년 시카고 헤이마켓에서는 8시간 노동제를 주장하던 시위행렬에 폭탄이 날라들고, 이와 관련해 4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메이데이(5월1일)는 바로 이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러므로 이재유가 정말 빛나는 부분은 '선취'도 '선취'려니와, '꿈'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지 않을까. 1936년이면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사변을 지난 중일전쟁으로 치닫던 절망의 시대였다. 국내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은 이미 명맥이 끊긴 상태였고, 사회주의자 일부만 간신히 지하투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도 사람다운 삶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꿈꾸는 '후테이센징(不逞鮮人)'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희망적인가. 얘기가 좌파 '후테이센징' 쪽으로 흘렀지만, 그렇다고 우파 불령선인의

  • 올림픽정신과 남작 쿠베르탱 지면기사

    근대올림픽 창시자 쿠베르탱 남작의 요즘 심경은 어떨까. 만일에 남작이 살아있어 최근 올림픽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업지상주의와 국가패권주의에 매몰된 각국의 메달 경쟁을 보고 있노라면 슬픔을 감당키 어려웠을 것이란 상상을 해본다. 정치색이나 상업성을 배제한 채 오로지 스포츠를 통한 인류의 공존과 평화증진만을 구상했던 남작이고 보면 최근의 올림픽 무대는 그를 낙심하게 만들었을 것이란 생각에서다. 지난 30일 열전 17일간 지구촌을 밝히며 평화를 염원했던 올림픽 성화가 꺼졌다. 많은 아쉬움속에 제28회 아테네올림픽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번 올림픽은 신기록에 도전하는 각국의 스포츠 건각들에겐 의미가 남달랐다. 근대올림픽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고대올림픽 발상지에서 치러진 경기로 이들에겐 일생의 크나큰 영광이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들의 기록은 정당하고 공명정대하게 평가받았어야 했다. 하지만 아테네 올림픽은 그렇지 못했다. 전부를 나무랄 수는 없지만 일부 종목의 판정은 추문의 결정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판정결과는 끊임없는 시비를 남겼고, 오심에 채점조작 의혹이 불거지며 그에 대한 동기와 배경까지 의심하는 분위기가 가세됐다. 남자체조 개인종합에서 우리의 양태영이 그렇고 역도의 양미란이 그렇다. 그밖에도 우리와는 관련이 없으나 여자배영 200m와 펜싱 플뢰레 남자단체 결승전 등 종목을 바꿔가며 곳곳에서 심판의 과실이 이어지는 희대의 해프닝을 연출했다. 특히 체조에서 잇달은 오심은 결국 관중을 흥분시켰고 야유속에 잠시 경기를 중단하는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졌다. 불이익을 당한 선수가 관중을 진정시켰다면 올림픽의 심판진 작태는 더이상 열거할 필요가 없다. 체조의 요정 코마네치가 한탄했을 정도라면 말이다. 뻔한 규정을 두고 벌인 심판들의 석연치 않은 잦은 오심이 종내는 승부조작설까지 만들며 당치 않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고 만 것이다. '올림픽 대회의 의의는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데 있으며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보다 노력이다'라는 올림픽 강령이 있다. 또한 올림픽은 국가대

  • 평택, 잘못하면 부안 꼴 난다 지면기사

    한·미 양국의 국책사업인 평택 주한미군 허브기지 조성 사업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국방부는 9월까지 주민설명회를 마치고 올 정기국회에서 미군기지 이전합의서에 대한 비준 절차를 거친 뒤 내년이 끝나기 전에 토지 매수를 완료한다는 방침이다. 국방부 시간표대로라면 내년말 쯤이면 823만평, 여의도 8개를 합친 평택 땅이 미군의 수중에 떨어진다. 이미 미군이 차지한 400여만평에 용산기지와 2사단 이전을 위해 423만평을 추가 제공하기로 합의한 결과다. 그러나 한미 양국의 구상대로 기지이전이 순조로울 것으로 낙관하기는 힘들다. 평택시의 여론이 이를 수용하기에는 복잡미묘하게 갈려있기 때문이다. 우선 일제시대부터 대대로 주둔군에게 고향 땅을 내주고 쫓겨나는 일에 이골난 기지이전 지역 주민들은 단 한평의 땅도 더 이상 줄 수 없다며 반대하고 있다. 1941년 팽성읍 안정리에 일본군이 기지를 만들면서 시작된 평택 '기지주변 사람들'의 고초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일본군이 물러나자 마자 미군이 기지를 차고 앉더니 끊임없이 기지를 확장시켜 나갔다. 그때마다 그 땅의 붙박이들은 대책없이 쫓겨나야 했다. 제대로 된 보상 한번 없었던 건 물론이다. 안보라는 공공재만 확보할 수 있다면 소수가 죽어나가건 말건 상관하지 않았던 시절에 그저 그 곳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당해야 했던 야만적 희생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짓을 또 겪어야 한다니 차라리 목숨을 가져가라는 기지주변 주민들의 반발은 당연하다. 이들에게 보상금의 액수를 운운해봐야 감정의 문제가 말로 해결될 리 없다. 미군기지 이전에 호의적인 여론도 전제가 있어 만만치 않다. 평택시가 안보 공공재 실현을 위해 희생하는 만큼 상응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평택 발전을 법으로 보장하라는 요구다. 평택지원특별법 제정이 찬성의 핵심 전제이다. 법안에 평택시의 자주적 도시설계 인정, 수도권정비계획법 적용완화, 국제평화도시 건설, 이주대책 및 보상의 명문화, 재원조달 방안의 명문화가 담겨야 한다는 것이다. 평택시민들로서는 충분히 요구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문제는 평택의 턱

  • 2,500만의 99.99%가 친일파였다 지면기사

    1930년 2천43만, 40년 2천354만, 45년 2천500만. 일제 식민지의 우리 인구 중 과연 친일파는 몇%나 됐을까. 엄밀, 엄격히 말해 충정공 민영환(閔泳煥)이나 매천 황현(黃玹) 등처럼 자살을 했거나 면암 최익현(崔益鉉)처럼 굶어죽은 이들을 제외한 99.99%가 친일파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땅을 침탈, 유린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죽도록’ 싫어 순도(純度) 100%의 애국심을 고이 간직하려 했다면 앞의 애국지사들처럼 자결하는 길밖에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망국의 분노와 식민지 백성의 서러움을 못 이겨 땅을 치는 통곡 끝에 자결하지 못한 사람,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침탈 원수들과 도저히 하늘을 함께 이지 못한다며 하늘로 치솟거나 땅으로 꺼져들지 못한 사람, 그래서 침략 원수들과 함께 이 땅의 신성한 공기를 나눠 마시며 구명도생(苟命圖生), 구차한 목숨을 부지해야만 했던 모든 식민지 백성이 어쩔 수 없는 친일파가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반민족적인 색깔로 매국에 앞장섰던 이른바 ‘을사 오적(五賊)’을 비롯해 유달리 친일 행적을 드날린 이들도 없지는 않았고 일제의 ‘조선공로자명감(朝鮮功勞者銘鑑)’에 적힌 353명도 간과할 수 없을지 모른다. ‘오오 폐하의 고굉(股肱→팔다리)이여!…’ 등 낯뜨거운 향(向) 천황 용비어천가와 일제 찬가를 읊은 친일 문필가도 있긴 있었다. 그러나 그들 유약한 선비들이 자살로 항거하지 못하는 한 일제의 강권(强勸)과 협박, 회유를 피할 수는 없었다. 거의 모두가 창씨개명을 할 수밖에 없었고 목구멍 보전을 위해 ‘와레와레와 고고쿠신민나리(우리는 皇國臣民이다)…’로 시작되는 일제 찬양 주문(呪文)을 낭랑하게 외울 수밖에 없었다. 그걸 외워야 배급을 타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식민지 ‘신민(천황의 백성)’은 참새 발바닥에 묻은 피가 더 진하냐 제비 발등에 묻힌 피가 더 오염됐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죽지 못해 친일파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어를 쓰지 않으면 교육을 받을 수 없던 모든 ‘생도(학생)’가 친일파일 수밖에 없었고 징병 또는 징용으

  • 식량자급목표를 정하자 지면기사

    “구아바, 구아바, 망고를 유혹하네~~.” 가수 김C의 표정이 일품이다. 전편 이효리의 망가진 망고송보다 더 코믹한 김C의 CF를 아무 생각없이 들여다보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구아바가 뭐지? 찾아보니 잉카 지역 식물이란다. 망고는 열대 과일이다. 남미와 열대과일이 배타고 태평양 건너와 만들어진 캔 음료가 국내에서도 히트를 쳤다. 농산물 개방시대가 실감난다. 하긴, 그런 게 구아바 망고 뿐이랴. 그런데, 도대체 배삯이 얼만데, 저 이국과일들을 실어와 그렇게 값싼 음료를 만들어 팔 수 있을까. 아마존 열대우림을 밀어낸 자리에 거대한 콩 농장을 만들고, 그 콩을 미국이나 호주에 싣고 가 소를 먹이고, 그 소고기를 다시 우리나라에 실어 와 파는 데도 국내산 소고기보다 훨씬 싸다. 아무리 교통이 발달하고, 농업 목축업이 효율화 되었다고 해도 참으로 헤아리기 힘든 요술같은 셈법이다. 이걸 신자유주의의 승리라고 해야 하나, 지구차원의 낭비요 착취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우리나라 과실류의 자급률은 높은 편이다. 2002년 현재 88.9%나 된다. 물론 100%를 넘던 10여년전에 비하면 낮아진 것이고, 자유무역협정(FTA) 시대를 맞아 칠레 등지에서 재배된 과일들을 비행기로 배로 실어와도 우리 과일보다 싸므로, 앞으로 더 하락할 게 분명하지만, 곡물자급률보다는 월등히 높다. 곡물자급률은 2002년 30.4%, 2003년엔 더 낮아져 26.9%에 불과하다. 사료로 쓰이는 곡물류를 제외할 경우에도 58.3%밖에 안된다. 한국사람이 먹는 곡물을 기준으로 보면 하루 세끼 가운데 한끼도 자기 땅에서 지은 작물로 짓지 못한다는 얘기다. 단지 쌀만은 자급률 107%다. 그저 밥만 우리 쌀로 차려먹는 셈이다. 국수나 빵은 거의 전부 남의 것이다. 밀의 자급률은 고작 0.7%고, 콩은 7.3%니까. 지난 70년만 해도 밀은 15.4%, 콩은 무려 86.1%였다. 자급률을 칼로리로 따져봐도 47%다. 한국인의 활동에너지 가운데 절반 이상이 바다 건너 먹거리로부터 나온다는 뜻이다. 일본의 열량자급률이 40%이므로, 일본보다야 아직은

  • 곳감보다 무서운 수혈 지면기사

    '수혈이 필요한데 사용을 허락 하시죠' '의사선생님 수혈만큼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얼마전 한 대학병원에서 목격한 장면이다. 부인의 만성지병이 도져 결국 수술을 해야하는 딱한 입장에 처한 한 직장인이 수술과정에서 필요한 수혈을 다른 방법으로 대체할 방안이 없느냐며 한사코 의사의 수혈권고를 거부하고 있으니 진풍경이다. 최근 간염이나 에이즈 등에 감염된 혈액이 수년간 유통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혈액 관리에 비상이 걸린 것은 물론이고 수혜자들 사이에 불신이 확산되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자체 조사 이후 검찰 수사로 확인된 혈액 관리의 실태는 한마디로 '재앙' 그 자체다. 에이즈 바이러스가 잠복한 혈액이 헌혈단계에서 걸러지지 않고, 수혈을 통해 무려 7명에게 에이즈를 감염시켰다. 이들중 3명은 이미 사망했다고 한다. 또한 검사 직원들의 실수로 B형·C형 간염 혈액도 버젓이 수혈돼 8명이 간염에 걸렸다. 엉터리 채혈, 부실한 혈액관리, 무책임한 혈액공급 등 적십자사의 3박자 무능행정이 제대로 맞아돌아가 엄청난 결과를 빚은 것이다. 수혈이 필요한 환자나 보호자 입장에서는 오염혈액에 대한 의심으로 수혈 자체를 수용하기 힘들게 됐다. 불량 혈액 유통에 따른 패닉 현상은 상당 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더욱이 말라리아 감염 혈액에 의해 수혈 환자가 말라리아에 걸린 사례도 4건이나 확인됐고,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은 혈액이 140여 차례에 걸쳐 의약품 제조 등에 쓰이기도 했으며, 에이즈 혈액으로 판명돼 폐기하고서도 전산 등록을 늦게 하는 바람에 같은 에이즈 감염자가 또 헌혈을 한 사례도 100여건 넘게 적발됐다. 뒤늦게 나선 검찰은 헌혈할 때 병력 조회를 하지 않아 부적격 혈액이 유통되도록 한 혈액관리 부실의 책임을 물어 해당 혈액원장 등 27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및 혈액관리법 위반 등 혐의로 무더기로 사법처리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말만들어도 오싹할 노릇이다. 틀림없는 인재(人災)라는 사실에 더욱 몸서리치게 된다. 로또한장에 백년가약이 무너지고 매일 마주치던 이웃이 연쇄살인범이라는 어처구니 없

  • 누가 저주의 모자를 씌우는가 지면기사

    1960년대 중반부터 10년간 중국대륙을 암흑천지로 만들었던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毛澤東)이 실용주의 노선의 정적을 숙청하기 위해 기획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만취한 홍위병들이, 노선투쟁의 제물로 지목된 지식인과 지도층에게 가한 맹목적 학대극이었다. 중국의 석학 계선림은 자신이 겪은 문혁 체험기록 '우붕잡억(牛棚雜憶)'에서 당시의 광기를 '미혼탕을 마신 비인(非人)들이 우귀사신(牛鬼蛇神)을 학대한 10년 재앙'으로 정리했다. 문혁 시절 혁명파는 마음대로 자본주의파와 반동권위를 지목했다. 재판도 없었고 자기변호도 허용되지 않았다. 다만 타도대상을 인민 앞에 무릎 꿇리는 것으로 족했다. 중세를 암흑에 몰아넣은 종교재판도 피고에게 유리한 변호는 일절 허용하지 않았지만 불리한 증언만은 귀담아 들었다. 재판의 모양새는 갖췄던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중국의 문혁이 자본주의파와 반동권위를 선별하는데는 '지목'과 '인민의 고함'만으로 족했다. 계선림은 '우붕잡억'에서 모자를 얘기한다. “당시에는 온갖 모자가 세상에 가득 찼으며 크기도 아주 다양했다. 나에게는 자본주의파, 반동학술권위 이렇게 두 모자가 크지도 작지도 않고 아주 적당할 것 같았다.” 중국 지식인과 지도층은 혁명파들이 학대자를 구별하기 위해 만들어 준 '정치 모자'를 쓴채 소귀신 뱀귀신이 되어 외양간, 우붕에 갇혔던 것이다. 실용주의 노선으로 성장가도를 질주 중인 지금, 중국에선 '문화대혁명'이란 단어는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해 있다. 그런데 사회주의 중국에서도 진절머리 치는 사상·이념·정체성 투쟁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한창이다. 그것도 정권을 주고 받으며 국가를 이어가야 할 여야 정당이 서로에게 피아를 구분하는 정치 모자를 씌우는 적대적 이념논쟁과 정체성 논란을 벌이고 있으니 보통 큰 일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적대적 정치 모자를 씌우는 가해자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조작된 피해자들로 응전(應戰)할 뿐이라며, 싸움판을 키워가고 있으니 더욱 비극적이다. 한나라당은 집권세력이 자신들의 머리에 '극우' '친일' '반공' '유신' '반민주'의 모자를 씌우려 한

  • 국어를 내버리는 나라 지면기사

    왜 한자 교육이 필요하고 ‘왜 한자를 알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왜 국어 교육이 필요하고 ‘왜 국어를 알아야 하는가’라는 우문(愚問)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이 나라가 한자 교육을 외면, 한자 문맹 국가를 만들어 가는 까닭은 한자는 우리 문자가 아니라는 오해 때문이다. ‘漢字’는 물론 중국 산(産) 글자다. 그러나 우리가 쓰고 있는 한자는 장장 2천년 전 이 땅에 영주권을 갖고 귀화(歸化)한 글자로 이미 ‘漢字’가 아닌 ‘韓字’가 돼버렸고 오직 우리만이 쓰고 있는 글자라는 것을 왜들 모른다는 것인가. 일본으로 건너간 한자도 마찬가지다. 중국 글자가 아닌 일본 글자 ‘日字’가 된 것이다. 예컨대 ‘國語’라는 말만 해도 중국에선 ‘꿔위’ 일본은 ‘고쿠고’라 읽고 ‘學校’도 중국에선 ‘수에샤오’ 일본은 '갓코'로 읽는 소리가 각각 다르다. '국어'와 '학교'로 읽는 민족은 우리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國語'와 '學校'를 중국 글자라 하여 외면할 수 있는가. 이는 일본에 귀화한 일본 한자가 중국 것이니까 모두 내다버리고 일본 고유문자인 가나(假名)만 쓰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되면 일본어는 존재할 수도 없다. 한자가 중국서 온 글자니까 버리자는 것은 마치 영어가 로마자니까 영어를 버리자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영어가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왔으니까 영어를 몽땅 내다버리자는 논리나 다를 바 없다. 영어뿐이 아니라 같은 로마자를 쓰는 독어, 불어, 이탈리아어, 에스파냐어 등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한자를 버리는 식이라면 영·독·불·이·스페인어도 버려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각각 엄존하는 까닭은 한·중·일의 한자처럼 알파벳 글자는 같지만 각각 발음이 다르고 뜻이 다른 독특하고 고유한 언어로 귀착, 굳어졌기 때문이다. 중국어의 ‘愛人’은 부인, ‘丈夫(장부)’는 남편을 뜻하고 ‘老婆(노파)’는 마누라, ‘約束(약속)’은 단속을 의미한다. 일본어 역시 ‘文句’는 불평, ‘師走’는 뜀박질하는 스승이 아닌 ‘섣달’이고 ‘靑大將’은 푸른 옷의 장수가 아니라 구렁이다. 중국 한자는 글자 모양도 달라졌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 '예배를 강요하지 말라' 지면기사

    지난 주 한 고교생이 학교에서 잘렸다. 좋은 말 놔두고 굳이 이렇게 표현하는 까닭은 그가 원치않는 퇴학을 당했기 때문이다. 미션 스쿨의 학생회장이던 그는 학교의 허락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교내방송을 통해 학생회장 퇴임의 변을 남겼다. '예배를 강요하지 말라'는 게 그 요지였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선생님들이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거리로 나가 1인시위를 벌였다. 학교측은 전학으로 수습하려고 했으나, 그는 고민끝에 이를 거부했다. 학교측은 결국 학칙에 따라 그를 제적키로 결정했다. 저간의 사정은 매스컴을 통해 대략적으로 알려졌다. 인터넷에서 '강의석'이라고 치면 그가 기록한 자세한 일지와 숱한 네티즌들의 의견까지 덤으로 읽을 수 있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명이 이런저런 이유로 학교를 떠나야 하는 판에 고교생 하나 잘린 사건을 침소봉대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사건에는 고교생이 '감히' 1인시위에 나섰다는 흥밋거리를 넘어서, 현재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교육, 종교, 청소년인권, 표현의 자유 등등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표면적인 얘기부터 해 보자. 그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열에 아홉은 학교측을 비난하는 글이며, 그 중에 대여섯은 밑도 끝도 없는 욕이다. '종교의 자유가 뭔지도 모르는 미친학교' 쯤은 약과고, 학교폭파론에서 기독교박멸론까지 논리도 설득력도 없는 언어폭력이 난무한다. 이런 단세포적인 공격으로 우리 사회의 어떤 부분이 바로잡힐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 이런 인터넷 쓰레기들은 점차 걸러질까, 아니면 오히려 더 극성스러워질까. 물론 종교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학교측의 처사가 잘못된 것은 분명하다. 학교측은 강군 제적이 종교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교칙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명하고 있지만, 예배를 강요하지 않았다면 애초부터 생기지도 않았을 문제이고, 학교측이 예배에 반기를 든 그를 어떻게든 '추방'하려고 한 흔적도 역력하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된 나라에서 특정종교행사 참여를 강제하는 교칙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것은 '뺑뺑이배정'이 아니라 지원입학을 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