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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악범과 인권 지면기사
인간이 만든 형벌 중에서 가장 잔인하면서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사형제가 드디어 한국에서도 도마 위에 올랐다. 지난 6일 국가인권위원회가 정식으로 국회에 사형제 폐지의견을 제출했기 때문이다. 이번 인권위의 결정이 법적 구속력은 없다할지라도 국가기관 최초의 결정이란 점에서 그 상징성과 파장이 적지 않다. 벌써부터 누리꾼들은 사형제 폐지와 존치 측으로 패가 갈려 사이버공간을 달구고 있다. 시민단체들도 법리공방을 준비하고 있다. 조만간 사형제 폐지에 대한 국민여론이 비등할 전망인데 국민여론이 어느 쪽으로 기우느냐에 따라 현재 국회 법사위에서 심의중인 ‘사형제폐지특별법안’의 본회의 통과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추정된다. 인권관련 시민단체들은 인권위의 결정을 환영하고 있다. 이들이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데는 생명의 소중함과 인권 때문이다. 인권위원회는 현행 사형제가 헌법 제10조(인간존엄가치 및 행복추구권)와 제37조 제2항(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천주교인권위원회는 “사형제도는 국가가 인간의 생명을 박탈하는 것으로 그 자체가 살인행위”라고 오래 전부터 목청을 높이고 있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도 사형제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인 생명권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반인권적 국가제도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이번 인권위의 결정이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유엔인권협약의 취지에도 부합한다는 것이다. 사형제가 존치되는 한 인권선진국으로의 도약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사형제 폐지는 거스를 수 없는 세계적 대세임도 강조한다. 2005년 2월 현재 전세계 여러나라들 중에서 사형 폐지국은 118국인데 반해 사형 존치국은 78국이다. 사형존치국에 포함된 나라들 중에는 우리나라를 비롯, 미국, 일본을 빼곤 대부분이 중국, 북한 등 후진국들이다. 더욱이 이들은 사형제의 범죄예방효과가 증명된 바 없다는 점과 오심으로 인한 억울한 희생자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미국의 경우 1976년 이후에 사형이 선고된 7건 중 1건이 무죄임이 밝혀졌다. 그리고 최근 사법살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인혁당사건처럼 집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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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다, 행복하라 지면기사
폴란드인 카롤 보이티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 또한 행복하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선종했다. 그동안 수차례나 선종 직전의 고비에서 용케 되돌아와서 성베드로 광장에 모인 신자들에게 자상한 미소와 손짓으로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보여주었던 그였다. 바티칸 교황청의 표현대로 그리스도는 마침내 천국의 문을 열어주어 그를 맞아들였고 가톨릭 국가와 신자들은 물론 팔레스타인 무장세력 하마스에 이르기 까지 세계는 지금 그를 추모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업적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이제 성속(聖俗)의 역사가들에게 남겨진 몫이다. 다만 그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는 참으로 강렬해 사제로서 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그의 크기가 남달랐음을 보여주고 있다. 행복하다, 행복하라! 말문이 트이고 문자를 남기게 된 이후 모든 인류가 소망했던 삶이다. 사실 동서고금 인류가 심혈을 기울여 모색했던 인간적 삶의 요체는 '행복한 삶'이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와 주의와 사상은 하나같이 행복추구에 대한 사유의 집적인 셈이고 실천강령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신의 계율에 따르든 인간적 이성과 상식에 의지하든 행복으로 충만한 삶을 영위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제도속에서 항상 상처주고 상처받으며 살고 있다. 하기야 절대적 신념인 종교와 세속적 삶의 규칙인 법과 제도가 여전히 유효한 것은 사람이 스스로 완벽한 행복을 실현하기엔 자질이 부족한 종(種)이어서 그럴 것이다. 그래서 '행복하다 행복하라'는 교황의 유언은 평생 신의 말씀을 실천한 사제의 보람이 담겨있는 진심일테고, 현실의 인간들에게 한없이 부러운 인간 밖의 경지일 수 밖에 없다. 구태여 요한 바오로 2세를 인간세로 끌어내려 평가한다 해도 그는 행복한 삶을 살았고 그 행복의 근원은 화해에서 비롯된 듯 하다. 그는 종교간 대화의 수호자 역할을 자임했고 기도교인의 유대인 박해에 대해 사과를 했다. 분쟁과 격변의 현장을 찾아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생을 바쳤다. 살아생전에 가톨릭 개혁을 저지시킨 보수 반동이라며 요한 바오로 2세를 열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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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이마와 덩샤오핑 눈 지면기사
관상가(觀相家)들이 합창하듯 하는 말이 있다. “이마가 세상을 움직인다.”는 것이다. 한 시대의 멱살을 꺼들어 올려 냅다 흔들었다 내려놓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이마가 넓고 천장 샹들리에 불빛에 반사돼 반짝이는 대머리를 가졌다는 게 관상가의 말이다. 왜 그런가도 말한다. “이마가 바로 관상학에서 일컫는 하늘의 뜰(天庭)이고 하늘의 창고(天倉)이기 때문이다. 이마란 부모나 윗사람의 은덕이 붙어 쌓이는 곳으로 뜰이든 창고든 넓을수록 좋은 것이다.” 얼굴을 우주에 비유한다면 턱은 땅이고 코는 사람, 이마는 하늘에 해당한다는 관상학 논리다. 과연 그런가. 세계적인 정치가부터 보자. 1984년 1월 9일자 ‘타임’지에 실린 소련 최고 권력층인 핵심 정치국원 8명만 훑어봐도 “과연” 소리가 절로 나온다. 고르바초프 체르넨코 티코노프 그로미코 유스티노프 로마노프 등의 이마는 하나같이 훤하다. 92년 말 중국공산당 제14회 전당대회 중앙위원회에 늘어앉은 핵심 인물의 이마도 마찬가지고 루스벨트 트루먼 아이젠하워 존슨 닉슨 포드 카터 부시 등 역대 미국 대통령의 이마도 대문짝처럼 넓다. 독일의 빌리 브란트와 헬무트 콜, 프랑스의 미테랑, 이란의 호메이니, 이집트의 무바라크,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 포르투갈의 소아레스, 일본의 요시다(吉田)와 나카소네(中曾根)도 널찍한 하늘 뜰과 창고를 가졌고 쿠바의 카스트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케야르 유엔 사무총장도 그렇다. 아라파트나 사우디 국왕 등 아랍 지도자들의 이마만 터번에 가려 확인할 수 없을 뿐이다. 63년 11월 22일 댈러스의 괴한 오스월드의 흉탄에 맞아 죽어간 존 F 케네디는 바로 이마가 좁기 때문이라는 게 당시 세계 유명 관상가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총살형을 당해 독재와 사치생활을 마감한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도 이마 때문이었다는 풀이다. 그렇다면 이마가 좁은 레이건은 왜 괜찮고 이마가 드넓은 닉슨과 다나카(田中)는 왜 중도하차했는가. 그 점에 대해서도 말한다. 다른 부위의 너무나 좋은 점이 이마의 약점을 카버해 주고 반대로 다른 부위의 너무도 나쁜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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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어서는 사람들 지면기사
'날이 풀리면 한번 내려오겠다곤 했지만/ 햇살 좋은 날 오후 느닷없이 나타나는 바람에/ 물묻은 손 바지춤에 문지르며/ 반가움에 어쩔 줄 몰라하듯/ 나 화사하게 웃으며 나타난 살구꽃 앞에 섰네//…몇 달째 소식 없어 보고 싶던 제자들/ 한꺼번에 몰려와 재잘대는 날/ 내가 더 철없이 들떠서 떠들어쌓는 날/ 그날 그 들뜬 목소리들처럼/ 언덕 아래 개나리꽃 왁자하게 피었네// 나는 아직 아무 준비도 못 했는데/ 어어 이 일을 어쩌나/ 이렇게 갑자기 몰려오면 어쩌나/ 개나리꽃 목련꽃 살구꽃/ 이렇게 몰려오면 어쩌나'. (도종환, 꽃소식) 지난 주말 광교산 '꽃밭가득'에 다녀왔다. 겨우내 흙에 묻혀 봄꽃을 가꾸어온 정성을 보고 싶었다. 올해는 1주일쯤 늦으리라는 꽃소식을 먼저 들어보려는 욕심도 없지 않았다. '꽃밭가득'은 경기수원자활후견기관이 운영하는 화초사업단이다. 세 동으로 지어진 온실 안에는 손바닥만한 모종이 빼곡했다. 라벤다 로즈마리 프리몰라 팬지 페튜니아 알리삼 데이지…. 눈물인 듯 웃음인 듯 알록달록 작은 꽃을 피워낸 화분들과 이제 막 여린 줄기와 잎을 틔워올린 땅꼬마 화분들이 서로 어깨를 기대고 있었다. 온실밖 바람은 아직 차다. '꽃밭가득'은 올해로 세 번 째 봄을 맞는다. 3년 전 대한성공회 교동교회 신도 한 분이 거저나 다름없는 임대료로 1천500평 땅을 내주었다. 흙을 짚고 다시 일어서려는 사람들로 화초사업단이 꾸려졌다. 어떻게든 자활을 하려는 사람은 많지만 흙을 만지는 일은 기피하는 세태는 생활보호대상자들이라 해서 다를 바 없다. 수십명이 거쳐가고 15명이 남았다. 흙이 좋아 이 일에 매달린 이들은 숱한 시행착오 끝에 이제 정말 꽃밭을 가득히 채워가는 중이다. 고작 한달에 75만원 자활급여를 받으며 하루 12시간씩 일한 보람도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꽃밭가득'은 지난해 2천500만원의 수익을 거두었다. 그 어느 곳보다 정성껏 가꾼 꽃들인데다 가격경쟁력에서도 뒤지지 않아 학교와 시가지 화단 조성 일감이 늘었기 때문이다. 올해도 햇살이 퍼지는대로 꽃밭을 만들어달라는 학교가 벌써 여러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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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 키운 사회를 교정해야 지면기사
일선교사의 말 한마디가 교육계는 물론이고 우리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요약하면 일진회라는 학교폭력 조직의 반사회 성향이 방치할 수준을 넘긴지 오래됐다는 것이다. 일진회가 주도하는 교내폭력이 일상화되고 교사들이 이를 외면함으로써 학교공동체가 사실상 붕괴직전에 놓여있다는 그의 증언은 즉각 현실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국이 학교폭력의 심각성을 인식해 지난해 7월 학교폭력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을 내놨지만 일상적인 상식과 법률만으로는 학교 폭력을 근절시키기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수없이 있었던 터였다. 급기야 교육인적자원부와 경찰이 합동으로 나서 일진회를 해체해 나가겠다고 발표했고 국무총리를 비롯한 장관들이 기자회견을 자청해 학교폭력을 근절하겠다고 수선을 피우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얼마나 성과를 거둘지 두고 볼일이다. 일진회의 실체는 사실 어제 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다만 우리 사회가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해왔을 뿐이다. 한창 혈기왕성한 청소년들의 일탈행위로 치부한 채 그들로 인해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당해온 피해 학생들의 호소를 짓눌러온 것이다. 이처럼 무관심으로 일관하다가 현직교사의 적나라한 일진회 실체 공개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는 정부와 우리 사회의 경악은 위선에 가깝다. 우리 사회의 뒤늦은 호들갑과 과잉대응에 그동안 학교폭력에 희생된 학생들이나 부모들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목숨을 끊은 애들이 몇명이고, 가출과 전학·유학 등 도망친 아이들이 몇명인데, 그동안은 몰라서 지금 이 난리법석인가 하고 말이다. 한 선생님의 현장 고발이 충격적으로 여론에 전파된 것이 그 내용의 선정성 때문이라는 사실 또한 생각해 볼 거리다. 성인단체도 아니고 조무래기들이 결성한 일진회라는 모임의 일탈 행위가 어른의 인식과 통념을 뛰어넘고 있다는 데 여론은 놀라고 또 놀랐다. 이들은 이미 전국 조직망을 구성하고 있으며 난폭한 폭력행사는 예사고 성인들조차도 상상하기 어려운 공개적 성행위가 이뤄지는 섹스쇼를 즐기고 있다니 어른들의 아연실색은 당연하다. 섹스머신, 노예팅, 깔식은 무슨 소리고 일진회 끼리는 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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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섬게임과 수도권 지면기사
과천시민들이 격앙되어 있다. 앞으로 과천시문제가 어떻게 전개될지 가늠되지 않는다. 정부 주요부처들을 대거 충남으로 이전하는 ‘신행정중심 복합도시특별법’이 지난 3월 2일에 국회에서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처럼 과천시는 수도권인구분산계획에 의거, 지난 20여년 전에 새로 건설한 대표적인 행정중심도시로 보건복지부, 과학기술부 등 총 11개 부처들이 입주해 있다. 과천시의 경제는 이곳에 근무하는 6천여 공무원들과 과천청사를 찾는 민원인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더구나 쾌적한 주거환경에다 서울 강남을 지척에 두고 있는 관계로 집 값 또한 강남수준에 버금간다. 그런데 이번 특별법의 국회통과로 과천의 젖줄이 일거에 사라짐은 물론 재산상의 손해까지 입어야할 판이니 7만여 과천시민들이 흥분할 밖에. 수도권 주민들도 심기가 편치 못하다. 수도권에 소재해 있는 공공기관 190여 개가 신행정수도 건설을 전후해서 지방으로 이전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수도권은 과천에 비해 덩치가 엄청날 뿐 아니라 지역경제를 지탱하는 꿀단지들이 상대적으로 많아 과천처럼 불만의 소리는 당장 감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전이 본격화되면 그 파장이 어느 정도일지 오리무중이다. 지금은 단지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을 뿐이다. 더욱 수도권 주민들을 씁쓸하게 하는 것은 나머지 지자체들의 행태이다. 각 지자체들은 이참에 어느 공기업을 빼올까 저울질하는 한편 서로간에 치열한 물밑경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죽어 가는 들소의 시신을 뜯어먹으려는 세렝게티평원의 하이에나들처럼 말이다. 또한 현정부의 국정운영을 보면 기득권층을 옥죄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강남의 집 값을 잡겠다고 집권기간 내내 수도권에 융단폭격을 한 터에 서울대 등 명문대를 없애기 위해 대학교 수시 모집을 대폭 늘렸으며 법조계와 의료계를 흔들기 위해 로스쿨과 의학전문대학원제도를 도입했다. 차제에 수도권주민들에게는 이번 행정수도 이전도 위의 경우처럼 우리나라 부(富)의 중심인 수도권 흔들기로 비쳐져 개운치 못하다. 수도권 과밀억제와 지방균형발전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인구의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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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영화제 망가뜨리기 지면기사
문화 인프라가 한 도시의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얘기는 이제 상식이다. 부천시는 이런 상식을 상식으로 정착시킨 도시다. 97년 제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PiFan)를 개최하기 전만 해도 부천시는 수도권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공장과 사람이 밀집한 공해도시에 불과했다. 그러나 영화제를 개최하면서 도시의 운명이 달라졌다. '사랑과 환상과 모험'이라는 영화제의 테마와 같이 국내외에서 몰려든 영화와 영화인들로 도시 전체에 환상적인 활력이 넘치기 시작했고 그 활력은 전체 시민들에게 전이돼 부천은 생명력이 넘치는 도시로 변신했다. 이제 부천은 대한민국만의 지명이 아니라 세계적 지명으로 성가가 높다. 부천은 부천시민만의 도시가 아니라, 판타스틱 영화장르를 추구하는 세계 영화인들의 메카로 성장했다. 공해에 찌든 회색도시 부천에 영화제가 총천연색 생명의 색깔을 입혀준 것이다. 그러나 화무십일홍이고 아홉수의 고비는 반드시 겪게 마련인 것인지 올해로 9회를 맞는 부천영화제가 존폐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위태로우니 큰 걱정이다. 위기의 전말은 세상에 알려진대로다. 부천국제영화제의 오늘을 만들어낸 김홍준 전집행위원장을 부천시가 해촉하면서 부터다. 지난해 영화제 개막행사에서 부천시장을 소개할 때 그 이름을 깜박한 김 위원장에게 불경죄를 물은 것이다. 이에 영화인들은 작품 출품을 거부하고 영화제 불참을 결의했고, 후임 집행위원장은 며칠인가 상황을 지켜보더니 자리를 내던지고 말았다. 부천시의 오기 또한 만만치 않다. 집행위원장 없이 영화제를 열겠다고 뻗대고 있으니 그렇다. 터무니없는 시장님의 신경질과 공무원들의 심기 보좌로 부천 시민과 세계 영화인들의 영화제가 표류하는 사태에 이르렀으니 어이없는 일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부천영화제를 살려야 한다는 여론이 솟구친 건 당연하다. 부천시민과 지역 문화계가 부천시를 나무라는 한편 영화계를 달래며 화해를 종용한 것은 영화제의 성공적인 유지를 염원하는 마음에서다. 이런 판국에 부천영화제 전임 프로그래머들이 '반(反)부천영화제'를 제9회 부천판타스틱영화제 기간중에 개최키로 결정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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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중계도 안 하는 나라 지면기사
지난 설날은 그래도 행복했다. 쿠웨이트 골문을 시원스레 2대0으로 뚫어준 월드컵 예선 축구 덕분이었다. 그 시간만은 체불 임금을 주지 못해 몸을 피한 중소기업 사장도 여인숙 TV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쥔 채 열을 올렸고 선물 꾸러미 챙길 돈이 없어 고향의 뿌리로, 피붙이 곁으로 가지 못한 나그네 설움 근로자들도 단칸 방 문고리가 떨어져나갈 듯 고함을 쳤는가 하면 홀로 사는 노인도, 병실의 백혈병 어린 천사들도 핏기 마른 손, 고사리 손이 터지도록 손뼉을 쳐댔다. 서울역, 수원역 노숙자도 굴러가는 공을 쫓아 벌쭉벌쭉 웃음을 굴렸고…. 2대0 그 순간만은 90으로 솟구친 이 땅의 국민 행복지수였다. 같은 시간 북한과 싸운 일본 축구 열기도 대단했다. 시청률이 무려 57.7%였다고 했다. 1억3천의 57.7%라면 자그마치 7천500만 인구가 지하의 지진 신이 놀라도록 발을 구르며 와 와 소리를 질러댄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고도 놀랍고 이해할 수 없는 건 북한은 중계를 하지 않았다는 외신 보도였다. 중계 비용 때문인가, 아니면 2대1로 질 거라는 점괘를 믿었던 것인가. 이유야 어떻든 말이 안 되는 그 이유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그 날 저녁 조선중앙TV는 설날 특집 노래 프로와 영화를 방영했고 축구가 한창인 8시 뉴스 대엔 63회 생일을 앞둔 김정일 총서기에게 보낸 해외 각국의 선물을 소개하는 게 주요 뉴스였을 뿐 축구는 일언반구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김정일화(花) 축제에 마냥 도취해 있었다. 기가 막힐 일이다. ‘위대한 지도자 동지’와 북한 인민은 월드컵 예선 축구에 그토록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것인가. 축구보다는 ‘하늘이 낸(天出) 지도자’께서 받으신 생신 선물이 천 배나 만 배나 더 궁금하고 즐겁다는 것인가! 만약에 한국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을 2대0으로 이긴 축구를 중개하지 않았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까. 그 시간 축구 중계는 하지 않고 북한 인민의 팜파도어(pompadour) 올백 머리형의 노무현 대통령이 보톡스 주사를 맞고 쌍꺼풀 수술을, 의학 용어로는 안검하수(眼瞼下垂)증,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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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가르치는 일 지면기사
'고백신 태고내 2·3·4 초중말'. 중학교 때 역사시간에 외워야 했던 '암구호' 가운데 하나다. 내용인즉 이렇다. 고구려·백제·신라의 고대국가 체제를 정비했던 왕은 각각 태조왕 고이왕 내물왕(마립간)이며, 그 시기는 2세기 초, 3세기 중반, 4세기 후반이라는 의미다. 물론 삼국의 고대국가 확립은 이보다 훨씬 소급된다는 게 지금의 정설이지만, 당시엔 이게 '국정교과서 역사'였고, 시험에 반드시 나오는 사실(史實)이었으므로 달달 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역사선생님의 독창적 아이디어인지, 대대로 전수된 비방인지는 알 수 없으나, '태정태세문단세…', '태혜정광경성목…' 등등과 더불어 수많은 역사 암호를 암기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작은 머리로는 도통 그 의미를 알아낼 수 없었던 지긋지긋한 암호들은 당시 중학생들에게 던져진 통과의례의 주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때 그 선생님들도 그런 식으로밖에 역사를 가르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무척 안타깝지 않았을까.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70~80년대 대학 신입생들의 필독서가 된 이유 역시 그런 역사교육과 무관치 않을 터이다. 역사는 무미건조한 사실의 집적이 아니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카의 가르침은, 당시 서양 역사학계의 수준으로 보자면 그닥 신선한 것도 심오한 것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백신 2·3·4…' 세대에게는 마치 심봉사 눈뜨듯 역사를 보는 눈을 번쩍 열어주는 '묘약'처럼 받아들여졌다. 금기의 영역으로 남아있던 해방전후사와의 본격적인 '대화'가 시도되기 시작된 것도 이 무렵이다.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논란의 핵심은 바로 이 '대화'와 관련이 있다. 역사와 어떤 대화를 나눌 것인가, 무엇을 배울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대화로서의 역사'에 눈뜬 수많은 역사학자·역사교사·역사학도가 70~80대를 통과하면서 스스로 질문을 던졌고, 진지하게 해답을 찾아나섰다. 금성출판사의 교과서는 그런 노력이 맺은 중간 결실 가운데 하나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지난달 말 창립한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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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노병(老兵)의 인생유전 지면기사
프랭크 시나트라의 수많은 히트곡중 하나인 마이웨이(My Way)는 자신의 생애를 서사적으로 읊은 불후의 명곡이다. 연배가 지긋한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폼나게 불러보고 싶은 곡이지만, 프랭크와 같은 분위기를 만들기는 여간 어렵지 않다.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만의 방식대로 살아온 인생을 독백하듯 되돌이키며 만족한 미소를 짓는 사나이의 기품어린 표정, 그런 표정으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장식하고픈 보통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보통 사람들은 늘 멋있는 인생을 꿈꾼다. 김영삼 처럼 중학교 시절부터 대통령의 꿈을 키우고 싶고, 카이사르와 같이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며 세상을 호령하다가, 맥아더 처럼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는 근사한 퇴장의 변을 남기고 싶어한다. 그러나 세상이 큰 인물들로만 넘친다면 비극일 것이다. 그들의 빛나는 인생 뒤엔 그들의 욕망 실현에 이바지한 수많은 보통사람들의 인생사가 고여있다. 보통 사람없이 위인이 탄생할 수 없는 건 시대를 초월한 진리이고, 이제는 보통사람들이 주인행세를 하는 민주주의의 세상이다. 보통 사람들의 인생이 권력과 금력과 명예를 가진 자들의 인생 만큼이나 소중하게 대접받아야 할 세상인 것이다. 그러나 만인의 인생이 평등하게 존중되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가치는 어디까지나 지향해야 할 대상이지 실현 대상은 아니라는 점이 보통 사람들을 절망시키곤 한다. 72세의 노구를 이끌고 북한을 탈출했다가 중국 공안에 잡혀 다시 북송된 한만택씨의 인생유전은, 어떤 정치제도하에서도 희생되는 인생이 있기 마련이라는 비참한 진실을 일깨워 준다. 늙은 노병이 프랭크와 같은 인생 서사를 남기려 조·중 국경을 넘었을리 없다. 반세기 훨씬 전에 포로로 잡힌 그 순간 부터 그의 인생은 멈춰버렸을 것이다. 그가 얼마 남지 않은 인생에서 이루려 했던 꿈은 단 하나, 고향 땅에 돌아가 늙어버린 가족과 얼굴 모를 후손들과 재회한 뒤 그 땅에 묻히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고국 땅을 밟아 가족들에게 하고팠던 가슴속의 한마디는 무엇이었을까. '나 이제야 돌아왔네' '너무 늦게와 미안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