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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오쯔양과 한일협정문서 지면기사

    자오쯔양(趙紫陽)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사망했다. 남의 나라 정치지도자의 자연사를, 그것도 지금은 사람들에게 완전히 잊혀졌던 한 노(老)정객의 죽음을 굳이 떠올리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1989년 6월 중국정부는 톈안먼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수천여명의 학생과 시민들을 장갑차 등으로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자오쯔양은 당시 중국공산당 총서기로서 참극이 벌어진 직후 스스로 베이징대학을 찾아 “너무 늦게 찾아와 미안하다”며 울먹였다가 실각한 인물이다. 최고 권력자로서 현실에 안주하기 보다는 양심을 선택한 점이 그가 돋보이는 이유다. 필자는 거인의 죽음에 대한 중국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톈안먼사태의 주역인 베이징대 학생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톈안먼사태 때 언론매체역할을 했던 베이징대 게시판이나 인터넷에서는 그를 애도하거나 혹은 그의 업적을 기리는 대자보는 물론 글귀하나 찾기 힘들었다. 중국정부의 통제 때문이기도 했겠으나 대학생들의 반응은 더욱 가관이었다. “10여년 전의 지도자가 죽었는데…흥분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천하의 중심이라 자부하는 중국인들의 의식수준이 겨우 이 정도인가 하는 느낌에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중국인들에게 있어 톈안먼사태나 자오쯔양은 이미 잊혀진 역사의 유물이었을 뿐이다. 우리네 사회는 어떠한가. 며칠 전에 정부는 한일협정 관련 문건 중 극히 일부를 공개했다. 진작에 공개되었어야 했다. 한일협정에 대한 진실규명작업은 우리 사회 바로세우기와 관련한 중대한 과제이기 때문인데 그것은 첫째, 일제 침략의 직·간접 피해자에 대한 보상작업의 적절성은 물론 구겨진 한국민들의 자존심도 회복하는 것이다. 둘째, 박정희 정권에 대한 실체적 진실규명작업도 이루어져야 한다. 헌정사상 가장 긴 기간동안 독재로 일관했던 박 정권의 치적에 대한 검증작업은 단 한차례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 셋째, 한국과 미국, 일본간의 올바른 관계 정립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이 참에 독도의 영유권문제도 확실하게 해야 한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이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진다. 이번에 문건의 일부공개만으로도

  • 도시락 행정이 짓밟은 童心 지면기사

    살다보면 크고 작은 시비를 목격하기도 하고 휘말리기도 한다. 그런 시비가 절정에 달하면 '법대로 하자'며 서로를 어르는 지경에 이르기 일쑤고, 실제로 법대로 해결하고픈 심경을 경험한 일이 한 두번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비는 법정에 이르기 전에 인간적으로 해결된다. '법대로 하자'는 으름장이 실제상황으로 벌어졌을 때의 골치 아픈 상황을 잘 알아서다. 법으로 시비를 따지는 일이 대부분 시간적, 경제적, 정신적 고통을 수반해서다. 그리고 일단 송사에 엮이게 되면 주변의 관심이 부담이다. 그것이 '동정'이든 '비난'이든 간에 주변 여론의 중심에 선다는 게 보통사람으로선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서다. 그래서 '목소리 큰 놈'이 이기고, 억울한 사람은 침묵하는 부조리가 수시로 일어난다. 노일레 노이만은 소수의 주도적 여론이 전체 여론으로 확산되는 침묵의 나선이론으로 언론의 효과를 설명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부조리를 설명할 때도 침묵의 나선이론은 적절할 때가 많다. 객소리를 길게 늘인 것은 '건빵 도시락' 파문 때문이다. 지금까지 파문의 전개과정을 보면 초점은 건빵 도시락에만 맞추어져 있지, 정작 그 도시락을 배달받았던 결식아동들의 고통은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형국이다. 그동안 여론은 상식을 배반한 도시락 메뉴에 경악하고 분노했다. 불같은 여론의 화살은 곧바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비양심적인 도시락 공급업자에게로 향했다. 급식을 제공한 결식아동을 7만에서 40만으로 늘린다면서도 어떻게 전해줄건지, 도시락은 어떻게 꾸릴건지 안중에 없었던 무뇌(無腦)행정을 질타했다. 또 그것도 알량한 사업이라 이문을 남기겠다고, 결식아동들의 반찬 값을 떼먹은 업자들의 상혼이 여론의 노도(怒濤)에 휩쓸렸다. 그래서 복지부장관은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다고 고개를 떨구었고, 여당은 진상조사단을 꾸린다 난리를 피우고, 검찰은 관련 공무원과 업자들을 수사한다며 법석이다. 그런데 정작 목소리를 내야 할 주인공은 여론의 목청에 짓눌려 침묵한 채 치유하기 힘든 고통을 되새김질 하고 있으니 가슴아픈 일이다. 바로 건빵 도

  • 南아시아가 '초토화됐다'고? 지면기사

    지난해 12월26일 남아시아 지진→해일이 발생하자 이튿날 아침 7시 TV 뉴스부터 보도 기자와 앵커는 줄곧 “남아시아 일대가 초토화됐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어느 신문도 28일자 지면에 '태국 푸케트 초토화'라는 제목을 달았다. '초토화(焦土化)'가 무슨 뜻인가. '焦'는 '탈 초'자다. 전쟁으로 폭격을 맞거나 화재가 나 모두 타버리고 재만 남은 상태가 '초토'다. 그런데 해일로 물바다가 됐다가 쓸려간 자리를 가리켜 '초토화됐다'니? 이야말로 물인지 불인지, 물불을 가리지 못하는 망발이 아니고 무엇인가. 작년 9월20일 아침 모 방송 워싱턴 특파원도 “허리케인으로 플로리다주 일대가 초토화됐다”고 하는 등 홍수가 날 때마다 TV에선 물을 가리켜 불이라 하니 기가 막힐 일이 아닐 수 없다. '초토화됐다'는 말 자체도 어폐가 있다. '화'는 '될 화(化)'자다. 따라서 '초토화됐다'고 하면 '됐다'는 뜻이 겹친다. '됐다'를 붙이지 말고 '초토화'로 쓰는 게 옳다. 어떻게 이 같은 말이 반복되는 것인가. 까닭이야 말할 것도 없이 '탈 초(焦)'자가 머리에 입력돼 있지 않아 인지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물과 불을 가리지 못하는 말이 '초토화'라면 밤중인지 새벽인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방송 용어가 또한 '새벽 1시'다. 남아시아 의료진, 자원봉사단이 '새벽 1시'에 어디에 도착했다는 등의 말을 서슴지 않는다. 1시, 01시는 자시(子時)인 한밤중이지 새벽이 아니다. 1시가 새벽이면 그럼 2시에 해가 뜨는가. 새벽이란 날이 밝을 녘, 먼동이 틀 무렵, 해가 뜨기 직전의 시간대다. 여름엔 5∼6시, 겨울엔 4∼5시경이 새벽이다. 여명, 서광이 비칠 때가 새벽이다. '새벽 1시'가 아니라 '오전 1시'다. 그런가하면 한자와 순 우리말을 분별치 못해 잘못 말하는 대표적인 방송 용어는 또 '강추위'다. '강추위'란 눈을 동반하지 않은 '맨 추위'를 가리킨다. '강'은 强이나 剛 등 한자가 아니라 순 우리말 접두사다. 눈물도 안나오는데 억지로 우는 울음인 '강울음'이나 '강새암을 부린다' '강짜를

  • 하루살이답게 살기 지면기사

    “하루살이처럼 살겠다.” 새해 덕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어느 동료가 털어놓은 신년계획이다. 하루살이라…. 처음엔 유행 지난 말장난같더니 곱씹어볼수록 의미가 그럴듯하다. 일간신문을 만드는 직업적 특성은 말할 것도 없고, 갈수록 변화무쌍해지는 시대를 사는 지혜로서 그만한 다짐도 없겠다 싶다. 그럼 나도 슬쩍 벤치마킹해 볼까. 하루살이답게 살자! 하루살이는 하루만 사는 곤충이 아니다. 성충은 인간의 척도로 기껏해야 몇시간, 길어야 하루 정도 살지만, 유충으로 지내는 시간은 꽤 길다. 대개 1년이고, 어떤 종류는 3년씩이나 기다린다. 성충이 되어 엄숙한 '혼인비행'을 할 날을 차분히 준비하는 것이다. 성충 하루살이는 자지도 먹지도 않으면서 후세를남기기 위한 짝짓기 비행에 나선다. 마지막 혼신의 힘을 불살라 사랑을 하고, 생명을 이어가는 작업에 몰두한다. 물론, 하루살이가 주는 어감이 고울리 없다. 무계획적이고 무모하고 허접스런 삶의 상징이 하루살이 아니던가. '하루살이같은 삶'이라는 표현 뒤에도 소시민적 무기력함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 역사적 허무주의의 악취도 난다. 하지만 그것도 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내 아무리 멋진 계획을 세우고 굳은 의지를 다진들 쓰나미처럼 덮쳐오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 앞에서 속수무책이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차라리 하루살이처럼, 하루살이답게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내느니만 못하지 않을까. 하루하루를 생의 첫날처럼, 끝날처럼…. '생마 갈기가 외로 질지, 바로 질지'라는 우리 속담이 있다. 어린 말의 갈기가 어느 쪽으로 넘어갈지 예측할 수 없듯이, 어린아이의 장래는 미리 알 수 없다는 게 본뜻이다. 그런데 올 연초에는 이 속담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2005년의 갈기가 과연 어느 쪽으로 질 것인가. 한반도를 덮은 먹구름은 우중충하고, 경제는 어렵고, 정치는 어지럽다. 사방이 가물철 수숫잎 꼬이듯 꼬였다. 대립과 분열의 골 또한 너무 깊다.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 어설픈 화해와 봉합은 물론 정답이 아닐 것이다. 갈등을 극단까지 밀고가서

  • 갑신년을 보내며··· 지면기사

    어느 신문에선가 신인 여가수가 서울역을 찾아 노숙자들을 위로하고 빵과 음료를 나누며 희망의 메시지가 담긴 노래를 선사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여러분도 한때는 행복한 가정을 꾸린 가장이었다”며 “당장은 힘겨워도 그때를 기억하며 희망을 잃지 말자”고 격려했다니 그 마음이 얼마나 따사롭던지…. 엄동설한 한겨울 길거리에서 추위와 절망에 시달리는 노숙자에게 그 여가수의 따뜻한 위로는 그야말로 천상의 복음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매년 연말이 되면 우리사회 곳곳에서는 불우이웃돕기 행사가 벌어진다. 그중에서도 자선냄비는 연말 온정의 상징이 된지 오래다. 남비 모금액은 우리사회 온정의 지표처럼 여겨져왔다. 골깊은 불황의 터널에도 그 자선냄비 온정이 줄어들지는 않았다고 한다. 역시 이 사회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것은 어려운 때 일수록 민초들 속에서 녹아 나오는 훈훈한 인정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며 안도감을 느낀다. 비록 연례행사라 해도 바쁜 일상에서 한번쯤 불우이웃을 되돌아보는 연말의 자선 행렬은 우리가 함께 사는 공동체의 소중함을 체험하는 귀중한 시간이다. 올해는 참으로 억장이 무너지는 사건사고가 많았던 해로 기록될 것이다. 전대미문의 연쇄살인 사건이며 경찰관 살해도주 사건, 불량만두소 파동, 한강다리 자살 신드롬, 유명 운동선수와 연예인들의 병역기피사건, 휴대전화를 이용한 대입시험의 대규모 부정행위, 그리고 조그만 마을을 송두리째 뒤흔든 미성년자의 집단성폭행사건 등 헤아리기 조차 벅찬 대형 사건들로 불황에 찌든 민심은 더욱 고단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정치권에 불어닥친 삭풍은 어느해 보다 감당키 어려웠다. 기존 정치권의 일대 지각변동을 불러온 대통령 탄핵과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헌재의 위헌 결정, 고 김선일씨 참수사건과 이라크 파병결정, 국보법 등 4대법안이 불러온 국회공전과 파행 등 정치적 격변이 이런저런 집회의 촛불속에 출렁거리지 않았던가. 뭐니뭐니해도 우리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건 삭막한 세상에 희생되는 어린이들의 참변이다. 생활고에 내몰려 한가족 동반 자살에 휩쓸린 어린이나, 어른없는 집을 지키다 화

  • 장롱속의 아이 지면기사

    연말 풍경이 지금처럼 우울했던 기억이 별로 없다. 중동 산유국의 횡포로 유난히 추웠던 겨울도 보내봤고, IMF경제위기에 감원의 칼바람을 고스란히 맞아야 했던 겨울도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그 고통을 같이 이겨내려는 사회적 합의라도 있었다. 아이들은 고사리손을 호호불어 에너지절약 포스터를 그리며 성장주도세력으로 커나갔고, IMF때는 금붙이를 들고나선 시민들끼리 공동체의 진한 연대를 나누며 오히려 행복했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그 누구도 소외를 원치 않는다. 살아가는 일 자체가 끊임없는 연대의 확인 과정이다. 집단내에서 안전하다는 연대감은 삶을 유지시키는 순도 높은 엔돌핀인 셈이다. 집단적 위기가 집단의 발전으로 승화되는 건 이같은 연대의 확인과정이 강력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위기를 말하면서도 '위기속의 연대'에 무관심하거나 체념하고 있으니 진정한 위기는 이 때문이다. 장롱속에서 굶어죽은 어린 소년의 비극은 연대 없이 파편화된 우리 사회의 알몸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순전히 아이 입장에서만 보면 꼬마의 비극은 부모를 잘못 둔 탓이다. 벌어먹이지 못하면 먹을 수 있는데다 버려라도 줄 일이지 장롱속에 가두다니, 폭력보다 더한 체념이요 무지가 아닌가. 장롱 문짝을 경계로 이승과 저승이 공존했던 그 비극적인 체념의 공간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누가 일거리 잃은 아버지와 정신지체 어머니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그들도 모두 굶어죽을 심산 아니었을까. 그 집안의 텅빈 냉장고가 그들의 체념어린 각오를 흉칙하게 증명하고 있잖았던가. 그래서 우리는 꼬마의 부모 대신, 우리의 공허하고도 전시적인 사회 네트워크를 치열하게 비난한다. 4살박이가 장롱속에서 굶어 죽어가는 동안 이웃들은, 동사무소 직원들은 무엇을 했던가. 엽기적인 비극의 충격에서 헤어나기 위해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 비극에 책임질 희생양을 찾느라, 이렇듯 분주하다. 그러면? 그러면 우리를 대신해 아이의 죽음에 책임질 사람들을 지어낸다 해서 우리의 책임은 없어지는 것이고, 우리는 그 순간 부터 두발 뻗고 편한 잠을 청할 수

  • 붉은 머리띠와 하늘에 주먹질 지면기사

    '하늘에 맹세한다' '하늘이 내려다본다'고 말한다. '하늘이 두렵지도 않느냐' '천벌(天罰)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경고도 있다. 하늘에도 눈들이 있고 맹세도 받고 심판도 내릴 무서운 존재들이 있긴 있는 것인가. 하긴 유사 이래만해도 '하늘나라'에 전입신고를 한 수십 억, 수백 억 혼령과 귀신이 자옥하게 떠 있을 것이고 하늘대국(大國)에도 잘난 대통령과 못난 대통령, 똑똑하고 머저리 같은 총리를 비롯해 판·검사와 헌법재판관까지 고좌(高座)에 높직이 버티고 앉아 있을 게 아닌가. 그리고 누구보다도 하늘나라엔 하나님이 계시다. 기독교의 하나님(God)과 이슬람의 알라(Alla) 신을 비롯해 하늘 길을 신봉하는 천도교 등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신도 하늘에 본적과 현주소를 두고 있을 것이다. 신화를 봐도 우리의 환인(桓因)과 중국의 반고(盤古), 일본의 다카마가하라(高天原) 등 민족 신은 모두 하늘에 있다. 그렇다면 아주 '쬐끔'이라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워할 줄 알고 하늘의 심판을 받고 천벌을 받을까 두려워할 줄도 알아야 사람이고 정상이다. 그런데도 이 땅에선 저 신성하기 그지없는 하늘을 향해 1년 365일 애니 데이, 애니 웨어 주먹질, 주먹총질 하지 않는 날이 없고 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눈만 뜨면 하늘나라 판·검사와 헌법재판관 나리들을 향해, 하나님 쪽을 향해 주먹질을 해대고 있는 것이다. '하늘 보고 주먹질한다'는 말은 '당치도 않은 짓을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우리는 과연 하늘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을지 겁부터 앞선다. 2004년 이 해도 딱 보름을 남겨둔 1년 내내 우리는 눈만 뜨면 하늘에 주먹질을 해댔다. 떼를 지어 떼만 쓰면 통한다는 떼법(法)의 '떼∼한민국' 온갖 시위대가 매일같이 도처에서 하늘을 향해 '떼 주먹질'을 해온 것이다. 양대 노총과 전교조, 전공노가 그랬고 '4대 개혁법'인지 '개악법'인지를 둘러싼 정당과 국가 원로, 각계 단체가 그랬고 전국 지자체 이해 상충 단체들이 그랬다. 솥단지를 내동댕이쳤고 한 달에 5천여 곳씩 급증한 노점상들이 싸웠고 성매매 여성들이 하늘을 향해

  • 자본이 태업하는 나라 지면기사

    헷갈리는 말이 난무한다. 가장 최근에 들은 모순된 표현은 '12월의 열대야'다. 어느 방송국 드라마 제목이라고 했다. 뭐야? 누굴 놀리나? 서민들은 겨울나기가 한 걱정인 판에 열대야라고? 엄동설한에도 벌거벗다시피 사는 인종들이 벌이는 그렇고 그런 사랑놀음 아냐? 그러나, 전혀 동이 닿지 않는 말들을 갖다붙여 은유와 상징을 만들어내는 기법에 과민반응을 보이는 건 비웃음을 자초하는 일이 될 터.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처럼 잘 빠진 사랑얘기가 되는지나 국으로 지켜보는 게 상수다. 그러나 '우익혁명'이라는 말은 여전히 얼떨떨하다. 지난 2000년 당시 부시 진영이 클린턴에 맞서 내세웠던 구호 중에 하나가 '우익혁명'이다. 그가 올 대선에서 승리하자 우익혁명의 승리 운운하는 기묘한 표현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세상에! 우익도 혁명을 한다고? 구체제(앙시앙 레짐)를 지키고, 기존질서 유지(스테이터스 쿠오)를 추구하는 세력에게 붙여진 전통적인 이름이 우익 아니었던가? 우익이 하는 건 '친위쿠데타'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세상이 뒤죽박죽이 된 거야, 내가 처음부터 뭘 잘못 배웠던 거야? 곧이어 '수구적 좌파'라는 표현도 등장했다. 이것도 상식을 심하게 흔든다. '적'자가 붙기는 했지만, 옛 것 지키려고 안달하는 세력이 어째서 계속 좌파라고 불릴 수 있지? '우익혁명'식 조어법과 쌍생아 아냐? 물론, 스탈린처럼 체제방어적 정권에 대해 그런 지칭이 성립할 여지는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형편이 과연 그런 걸까? 혼란스럽다. 하지만 '우익혁명'이나 '수구적 좌파'는 그런대로 이해할 만하다. 밑바닥에 깔린 정치적 의도를 감안하고, 뒤집힌 상식을 다시 이리저리 엮으면 된다. 그래도 안 되면 헛심 쓸 필요 없이 그런 말이 있나보다 하고 살면 그만이다. 하지만, '자본의 태업'이라는 표현만은 호락호락 넘어갈 수 없다. 우리네 살림살이에 막대한 영향을 직격탄으로 미치기 때문이다. 누가 갖다붙인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사회에 '자본의 태업', 심하게는 '자본의 파업'이라는 말이 등장한 지는 꽤 됐다. 현 정권이 들어선 직

  • 고령화 시대와 노인성치매 지면기사

    주변에서 흔히들 사용하는 벽에 ×칠해가며 오래 살라는 말이 있다. 뚝 짤라 내 오래 살라면 이보다 좋은 덕담은 없다. 그러나 실상 앞의 단어들을 연결해 붙여 놓으면 뭐를 벽에 덕지덕지 발라가며 살아가라는 뜻이니 이정도에 미치면 분명 엄청난 욕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인간의 본성이 아무리 오래 살고 싶어도 어느 누가 멀쩡한 제정신으로 멀쩡한 벽에 ×칠해가며 살고 싶겠는가. 그렇다면 말년을 치매나 앓으며 생을 연장하라니 악담중 악담이다. 한국은 지금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기현상이 많은 우려를 낳고 있는 터이다.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2001년 현재 전체인구의 7.4%인 354만명이며 20년후인 2022년에는 14.3% 대로 진입할 것으로 추정되는 바 80~90년대의 고도성장과 생활의 윤택함이 환경을 크게 바꿔 놓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사회는 점차 노인사회로 변하게 된다. 그렇다면 노인복지 부분은 당면한 현안이며 또한 이들의 각종질환은 소홀할수 없는 대목이 아닐수 없다. 최근 우리사회는 불행하게도 노인치매환자가 급증하고 있어 상황에 따라 가정을 흔들며 또다른 사회문제를 불러온다. 이미 전국 노인인구의 8.3%에 해당하는 30만명이 치매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을 수용하거나 적절한 관리와 치료를 감당할 시설이 태부족이라는 지적이다. 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들 대부분은 열악한 여건속에 방치되어 있는 반면 그나마 시설원을 이용하는 치매환자는 여간 운이 좋은 편이 아니라는 관계자들의 자조적 푸념이다. 본보는 지난달 27일자 현장르포를 통해 치매노인들의 미흡한 사회보장대책을 고발하고 있다. 인천의 경우 인천지역에는 현재 16만4천945명의 노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중에는 8%인 1만3천196명이 치매를 앓는 환자이며 매년 0.3%씩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더욱이 1천여명이 넘는 환자는 중증으로 전문적인 치료와 수용이 절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1만명이 넘는 환자수에 비해 보호시설과 전문 요양원은 수용인원이 고작 700명 선에 불

  • 분도(分道), 권력게임의 대상 아니다 지면기사

    경기 분도론이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경기북부의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당론화 하는 과정에서 분도론은 급격하게 정략적 의제로 변질되고 있다.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다짜고짜 결론 부터 말하려 한다. 경기 분도는, 만일 그것이 시대적 요구라면 국가발전 전략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이지 당론으로 관철할 정치 의제가 아니다. 국가경제에서 경기도가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행정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이유 때문에 분도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경기도에 모여 사는 1천만 도민의 규모를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인구 몇만의 선거구를 떼었다 붙였다 하는 일도 지역의 장래와 관련해 끝없는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판이다. 하물며 1천만 인구 규모의 경기도이다. 이를 700만, 300만 짜리로 쪼개는 일은 700만, 300만 인구의 삶의 질을 새롭게 규정하는 일이다. 쪼개는 쪽과 유지하는 쪽, 어느 쪽이 도민 삶의 질을 향상하는데 더 유리할지 장고에 숙고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일을 모두 생략하고 다음 지방선거에서 경기북도 지사를 선출한다는 로드맵이 나돌아 다니니, 아무리 급해도 우물앞에서 숭늉 달랄 순 없는 일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경기 분도론은 해묵은 지역 이슈다. 문제는 10여년이 넘은 이슈건만 그때 그때 정치권의 형편에 따라 부침을 거듭해온 선거이슈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점이다. 단 한번도 국가발전 전략 차원이나 주민 삶의질 향상 차원에서 과학적이고 심층적인 논의로 결론을 맺어 보질 못한 것이다. 그 결과 경기도민들에게 분도는 한번도 의미 있는 현안으로 수렴된 적이 없었다. 다만 남북으로 갈려 막연한 찬반의 입장만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렇게 된데는 정치권의 잘못이 크다. 지방자치 실시 이후 본격화된 경기북부의 분도 요구는 그동안 번번이 이를 반대하는 세력의 위세에 의해 공론장으로 진입할 수 조차 없었다. 모두 정권과 경기도지사, 경기도 다수의석의 정당이 일치했던 과거의 일로, 분도를 요구하는 세력은 10여년간 소수의 설움을 삼켜왔던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분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