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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공동체 이야기] 열 번째 ┃에필로그 지면기사
교육·경제·생활문화예술 3개분야 8개 공동체 가능성 엿봐자생위한 강한의지 중요 “정부 지원에 길들여지지 말라” 경고피한방울 안섞인 타인들 강요보다 ‘느슨한 연대’로 접근해야사소함이 가져온 무서운 변화 “다같이 잘먹고 잘살자” 여운 남겨마을이 사라졌다. 이웃사촌은 옛말이 된 지 오래다. 개인주의가 현대인의 상징인양 자랑스레 여겨졌지만, 우리 마음속 어딘가는 공허함을 감출 수 없었다. ‘마을 공동체이야기’는 그 공허함을 위로받고자 시작됐다.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게 당연한 시대에 다같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스스로 용기를 낸 이들의 이야기였다.지난 3개월 간 경기도 내 8곳의 마을 공동체를 만났다. 교육과 경제, 생활문화예술 등 크게 3가지 분야로 이동하면서 마을과 주민들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지면을 통해 대부분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마을을 소개했지만, 취재 중 만난 모든 공동체가 좋은 결과를 얻은 건 아니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공동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도 했지만,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사례도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희로애락 속에서 우리는 마을 공동체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목 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는 속담이 꼭 맞다. ‘문탁네트워크’와 ‘무지개교육마을’, ‘행복한 칠보산마을공동체’는 시대의 철학과 교육에 대한 깊은 갈증에서 비롯됐다. 밥벌이를 고민하던 주민끼리 힘을 모아 탄생한 곳이 ‘잔다리마을’과 남양주 ‘아낙네’다. ‘혼밥’이 일상이 된 젊은이들과 세월의 흐름에 황폐화 돼버린 마을주민들의 고독은 한양대 자토펙토와 이웃문화생활협동조합을 탄생시켰다. 목적과 이유는 다르지만, 이들 공동체가 지금까지 무사히 마을을 유지하고 있는 데는 공통점이 있다. ‘자생(自生)’을 향한 강한 의지와 느슨한 연대다. 이들의 시작점을 살펴보면, 지자체와 정부의 도움 없이 주민들의 힘만으로 시작한 공동체가 있는가 하면, 상당수는 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거나, 성장의 과정에 물밑 지원을 받은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외부의 물질적 지원은 마을 공동체가 제 모습을 갖추는 데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게 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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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공동체 이야기] 아홉 번째┃의정부 ‘문화살롱공’ 지면기사
2008년 박이창식 대표 중심 ‘카페 공간’서 작품·전시활동 시작 사진·영상 등 활용 수몰위기지역 주민간 가교로 사회적 역할‘금이 간 유리그릇 붙이는 접착제’ 척박한 땅 문화예술 씨뿌려유리로 만든 그릇은 항상 깨질까 조심스럽다. 제 아무리 내구성 강하게 만들었다 자부해도, 유리가 가진 소재의 성질 자체가 깨지게 마련이다. 사람을 담는 공동체도 유리그릇과 다를 게 없다. 누구보다 단단하게 다져진 세월을 자랑해도, 인간관계 속성상 아주 작은 균열에도 흔들리고 금이 가는 게 공동체다. 수십 년을 동고동락하고, 수백 년 조상 대대로 같은 성을 가진 가족끼리 모여 사는 마을도 외부의 충격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이미 금이 가버린 마을 공동체로 뛰어들어 균열을 메우고 상처를 보듬으려 노력했던 예술가 공동체의 이야기다.의정부에 ‘공간’이란 이름의 작은 카페가 있다. 이곳은 뜻 맞는 예술가들의 공동체 ‘문화살롱공’의 소통창구다. 문화살롱공 박이창식 대표는 2008년 이 곳 지하실에 작품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2003년부터 ‘스폰치’라는 이름으로 그룹 예술활동을 했는데, 주로 사회적 고민들이 깃든 현장에 개입해 의미를 던질 수 있는 예술적 행위를 해왔어요. 그 와중에 작가들이 함께 모여 작품을 고민하고 때로는 전시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겠다 싶더라구요.”그렇게 문화살롱공은 ‘작가중심의 공간’으로 출발했다. 1년이 지난 2009년, 지하뿐 아니라 1층까지 작품 공간으로 사용키로 하고 올라와 보니 마을이 보였다. “마치 음지에서 양지로 올라온 느낌이었죠. 지하에 있던 시간은 그저 우리 작품에만 집중했던 시간이었는데, 1층에 올라오니 전면 창을 통해 지나가는 주민들이 보이고 마을에 관심이 생겼어요.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죠. ‘무언가 마을에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경기북부를 안고 함께 갈 수 있지 않을까’.”그때부터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경기 북부 일부 지역에 우연히 수몰지가 형성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2000년부터 추진된 한탄강 홍수조절용댐 건설로, 연천군 고문리와 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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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공동체 이야기] 여덟 번째┃수원 ‘행복한 칠보산마을 공동체’ 지면기사
어린이집·대안학교 설립 등공동육아 목적으로 첫 발부모들도 아이와 함께 성장초창기 교육모델 벗어나사회적 공동체 하나 둘 생겨대보름 행사 등으로 결속마을신문 통해 주민들과 공유지역문제도 함께 해법 모색삶의 가치 ‘개인 → 공공’ 변화지난 1일 오후 4시 수원시 호매실동 자목마을에 펼쳐진 논. 달력은 봄을 알렸지만 여전히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겨울이다. 한 해를 시작하는 의미의 ‘정월대보름 축제’를 위해 삼삼오오 모인 주민들이 볏짚을 쌓고 쥐불놀이를 하기위해 깡통에 구멍을 뚫는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주민들과 아이들은 꽤 익숙한 듯했다. 제법 큰 아이들이 모여 앉아 볏짚을 꼬아 줄을 만들자 꼬마들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한지 위에 소원을 담은 그림을 그려 줄에 매달았다. 아이와 함께 축제에 나온 한규성 (44)씨의 말이 인상 깊다. “마을 사람들 얼굴 보러 나왔죠. 이 많은 사람들이 날씨도 추운데, 고생스럽게 아이까지 데리고 이 곳에 나온 건 서로 보고 싶으니까 나온 거예요.” 겨울 끝자락 바람이 매서웠지만, 사람들의 얼굴엔 이미 봄이 번지고 있었다.뿌리가 깊은 나무는 강한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는다. 위기가 지나고 나면, 깊은 뿌리를 토대로 여러 갈래 줄기를 뻗고 열매도 맺을 것이다.이날 자목마을에서 만난 ‘행복한 칠보산마을 공동체(이하 칠보산 마을)’는 15년을 이어 온 뿌리 깊은 공동체다. 보통 마을공동체의 시작이 정부나 지자체의 정책에서 비롯되기 쉬운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소수 주민들이 자발적 의지로 공동체를 출발시켰다. 어떻게 15년을 이어왔을까. 호기심보다는 의구심이 앞섰다.칠보산 마을의 마을신문을 만들고 있는 최창규 (45)씨의 답이 꽤 명쾌하다. “15년을 쌓아온 인맥이 원동력이죠. 아이들 교육문제로 시작했지만, 공동체 속에서 아이들이 커가는 만큼 부모들도 성장했어요. 그 성장의 밑거름은 주민들이 끈끈하게 엮어 온 신뢰와 정이에요.”현재 칠보산 마을 속 공동체는 10여 개에 이른다. 칠보산 마을의 시초가 된 공동 육아 협동조합 ‘사이좋은 어린이집’과 ‘사이좋은 방과후’, 대안학교인 ‘자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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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공동체 이야기] 일곱 번째┃수원 ‘이웃문화협동조합’ 지면기사
주식회사로 첫발 시행착오… 협동조합으로 ‘판’ 바꿔 다시 시작공연·전시 원하는 소비자들 직접 예술가 끌어들이는 형태지동서 폐가 꾸며 상설공간 만들자 마을에도 활기 ‘작은 기적’도예·목공 등 주민·조합원간 공유… “문화예술 생태계 만들고 싶어”여럿이 함께 걷다 보면 걸음은 느려질 수밖에 없다. 걷는 모양새며 성격도 제각각이니 보폭의 차이는 당연하고, 서로 합을 맞춰 함께 걸으려면 평소보다 조금 늦게 걷는 것 외엔 뾰족한 방법이 없다.마을 공동체를 유지하는 일도 이와 비슷하다. 공동체의 의사결정이란 구성원 개개인의 의견을 수렴하고 논의를 거쳐 합의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보폭을 맞춰 함께 걷는 일처럼 걸어온 거리는 비록 얼마 되지 않지만 그래야 함께 걷는 이들은 행복할 수 있다.수원 지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마을 공동체 ‘이웃문화협동조합(이하 이문협)’을 만났다. 이들의 좌우명은 ‘다함께 잘 놀고 잘 살자’다. 실제로 이문협은 2010년 잘 놀고 싶은 청년들이 ‘문화 프로젝트팀’을 결성해 시작한 조직이다. 서울에선 이미 ‘좀 논다는’ 사람들이 홍대, 대학로 등 이른바 핫플레이스에 모여 재밌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서울을 벗어나면 청년들이 신명나게 놀 수 있는 ‘판’이 없다는 게 아쉬웠다.수원에서도, 특히 지동엔 버려진 집들이 많았다. 한때는 수원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번화가였지만 지금은 노인과 값싼 방을 찾아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살고 있다. 청년들은 이곳에 ‘문화사랑방’을 만들기로 했다.하지만 순탄치는 않았다. 다같이 놀기위해 ‘공간’을 운영했는데, 주식회사로 시작한 게 화근이었다. 회사이다 보니 사장과 직원이라는 계급이 생겼고 각자 자리에서 회사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렸다. 이대로는 놀자고 시작한 사랑방 운영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청년들은 판을 바꿨다. 주식회사를 버리고 사장과 직원이란 이름도 휴지통에 넣었다. 2012년 협동조합으로 형태를 바꿔 모두가 조합원이 됐다. 다함께 잘 놀고 잘 살기 위해 동등한 위치에서 다시 시작한 것.최연지(27·여)씨는 이문협 창립시기부터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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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공동체 이야기]여섯 번째┃남양주 마을기업 ‘아낙네’ 지면기사
아낙네 9명 영농조합법인 설립 ‘첫 발’콩 한가마씩 투자해 된장 담그기 시작시장보다 후한 납품가 주민 작물 구매히트상품 ‘깻순 장아찌’ 등 15가지 판매전국 각지서 견학 농한기도 활기 넘쳐전통음식 체험·장독대 분양까지 확대마을 기업은 애초부터 정부와 지자체가 만든 ‘허울 좋은’ 이름일지 모른다. 기업이라면 응당 이윤 극대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고, 효율성을 지상 최고의 가치로 여겨야 하는데, 성공했다는 마을 기업들은 이윤을 극대화하지도, 효율성을 높은 가치에 두지도 않는다. 기업이라지만 영리보다는 마을 공동체 공존의 터전이라는 의미가 더 크기 때문이다.남양주 조안면에 꽤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마을기업 ‘아낙네’도 마찬가지다. ‘아낙네’ 영농조합법인은 고추장과 된장, 장아찌를 담그는 마을 기업이다. 마을에서 나는 작물만 고집하고, 시어머니한테 배운 재래식 손맛을 원칙으로 삼았다.아낙네 창립때부터 함께 해 온 홍순복(54·여)씨의 말이 재밌다. “행정자치부에서 우수기업 선정하는데, 저희도 선정 대상자가 됐더라구요. 그런데 최종적으론 떨어졌어요. 일자리 창출 부분에서 점수가 낮았대요. 우리끼리는 웃었죠. 일거리 없는 겨울을 잘 지내보려는 마음들이 맞아서 시작했고, 우리 스스로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공동체를 결성했으니까요.” 더 많이 벌려면, 규모를 키워야 하고 불필요한 비용들을 없애야 하지만, 아낙네는 ‘지금 이 정도’가 좋단다.시작은 미미했다. 농촌 아낙네들은 겨울이 되면, 거리로 나섰다. 농번기에는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정신없이 지내지만, 흔한 비닐하우스도 없어 겨울엔 손을 놀릴 수밖에 없었다. 식당, 공장 등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찾아 몇 푼 안 되는 돈을 손에 쥐면서, 아낙네들은 숱한 겨울을 보냈다.그러던 중 2009년, 정부가 ‘좋은 마을 가꾸기 사업’을 시작했다. 남양주시 조안면이 정부 지원 사업의 대상지로 선정됐고, 차량 드나들기도 어려웠던 거친 흙길에 아스팔트가 깔렸다. 도로 형편이 나아지자 마을 모양새도 점점 좋아졌다. 깜깜했던 시골 마을이 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낙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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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공동체 이야기]다섯번째┃오산 ‘잔다리마을공동체’ 지면기사
수입콩 거부 ‘전두부’ 생산마을 어른들 투자로 일궈행안부 지원 받았지만비싼 탓 판로확보 어려움TV 전파 타자 주문 폭주정직하고 좋은 콩 생산 노력주부들 식생활 교육 등사회적 기업 살리기 앞장시민이 주인인 기업 만들고파성공한 기업의 기준은 무엇일까? 매년 매출 신기록을 달성하는 기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유능한 인력을 다수 보유한, 인재가 제발로 찾아와 창의력을 불태우며 일하는 기업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기업을 지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공한 마을기업 대표 홍진이(40)씨의 이야기를 들으니 ‘성공 후에도 성공의 비결을 지켜내는 기업이 진짜 성공한 기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잔다리마을공동체 농업법인(주) 홍진이 대표로부터 마을기업의 성공 비결을 들었다.“사정이 너무 안 좋을 때는 수입콩을 쓰자는 의견도 있었고, 전두부가 아닌 일반 두부를 만들자는 주장도 있었어요. 문을 닫더라도 그렇게는 하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렸죠. 그때 다른 결정을 했다면 지금의 잔다리는 없을지도 몰라요.”홍 대표가 꾸려가고 있는 잔다리마을공동체는 마을주민들이 투자해 만든 마을 기업이다. 지난 2011년 행정안전부 마을기업으로 선정되면서 설립했다. 선정되기까지 시와 도 단위로 치러진 경합을 거쳤다. 오산시에서 마을기업을 공모할 때 40여개의 업체가 몰렸다. 홍 대표는 그 당시 남편 홍성권씨와 세교동에서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부모님께서 농사를 지으셔서 그런지, 저도 농사에 관심이 많았어요. 자연히 먹거리는 우리 지역 농산물, 우리 손으로 키워낸 작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식당에서 파는 음식은 마을에서 난 재료만 사용했어요.” 마을기업 창업 아이템은 두부였다. 매일 먹는 식재료인데다, 여타의 마을기업 인기 아이템이던 고추장이나 김치보다 값도 저렴하니 판매가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업’을 만들고 경영하는 것은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다. “두부를 만들려면 콩을 불려 갈아야 하잖아요. 콩 불린 물도, 두부를 만들고 남은 콩 찌꺼기도 폐기물이라 처리시설을 해야 했어요. 마을 어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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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공동체 이야기]네번째┃안산 대학동 '자토팩토리' 지면기사
한양대 에리카캠 교수와 학생인근 마을 정비사업으로 첫발안산시 지원센터 뒤이어 개소이후 학생들 마을동아리 구성쓰레기 무단투기 차단 캠페인벽화그리기·집밥 프로젝트도시행착오 끝 어엿한 공동체로방학이라 한적한 대학 캠퍼스의 한 교수실에 교수와 학생들이 둘러앉았다. 이들은 안산 한양대학교 에리카캠퍼스 인근 마을에서 벌어진 지난 9년간의 변화에 대해 들려주었다. 대학을 중심으로 교수가 마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학생들이 마을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였다. 변화는 안산 선부동에서부터 시작됐다. 2006년 어느날 갑자기 YMCA활동가들이 김용승 교수(한양대 건축학과)를 찾아오면서 부터다.YMCA활동가들은 마을 정비사업을 하고자 했으나 구체적인 방법을 알지 못했다. 마침 가까운 곳에 한양대 캠퍼스가 있었고, 교수들은 방법을 알겠거니 생각하고 무작정 김교수를 찾아왔다. "인상 좋아보여서 거절은 안하겠다 싶어 찾아왔다더군요. 대학원 연구생 서너명과 함께 사동에 있는 어린이집 주변에 시범삼아 정원만들기를 진행했어요. 정원이라지만 거창한 건 아니고 녹색지대가 없는 다세대주택 밀집지역에 약간의 채색을 한 셈이죠."워밍업을 끝낸 팀은 지원금을 받아 본격적인 정비 활동을 벌였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선부동일대 주택밀집지역에 15개의 작은 정원을 만들었다. 주민들과 손잡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전 작업은 주민들과 상관없이 진행해도 됐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없었어요. 마을 정비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그 마을에서 매일 생활하는 주민들과의 소통과 교감이라는 걸 배우게 됐죠." 다가구주택 사잇공간과 앞·뒤 공간, 주차장 등의 공간을 정비하려면 집주인의 동의가 필요했다. "귀찮아 하시고요,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하시고, 혹시 집이 상할까봐 걱정하시더라고요. 이런 일을 하겠다던 사람이 그동안 없었고, 생활에 크게 도움이 되는 일도 아니었으니까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진행하자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안하겠다고 손사래 치던 주민들이 산뜻해진 동네를 보고 동참했다. 변화를 이끌어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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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공동체 이야기]세번째┃무지개교육마을 지면기사
초·중등 대안학교 운영과천지역 교육공동체30명 모여 10년간 성장장애·비장애 경계없고의·식·주 주제로 공부부모도 교육받으며 변화저소득층 돕는 봉사 등지역민과의 연대도 중시각종 사업·활동도 활발대안학교 성공위한 조건자발성·리더 양성 손꼽아"사업 아닌 사람에 투자를"아이와 대화를 나눌 때는 언제나 긴장하게 된다. 예상치 못한 대답이 예사로 튀어나오고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하기 일쑤다. 그런데 손수민(15)양과의 대화를 마친 후에는 청량감이 느껴져 미소가 절로 나왔다. 참 반듯하면서도 말랑한 아이였다. 손양과의 대화는 '무지개학교'에 대한 호감과 관심을 키웠다.'무지개학교'는 과천시에 있는 대안학교다. 공원마을길에 초등무지개학교가 있고, 샛말로에 중등무지개학교가 있다. 학교를 중심으로 '무지개교육마을'이 존재한다. 지난 주 소개한 '문탁 네트워크'와 마찬가지로 교육공동체마을이다. 다른 점은 문탁이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주체라면, 무지개교육마을은 공부를 시키려는 사람들, 학부모들이 주체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자녀교육이 경쟁 일색, 사교육 지향이라는 큰길로 뻗어가는 동안, 이들은 좁은 샛길을 개척했다. 이 마을 사람들의 모토는 '삶과 교육은 하나'다. 이 모토를 상식으로 여기는 30여명의 주민이 모였다. 2003년 초등학교를 설립하고 운영철학을 세웠다. 2007년부터는 교육과정을 정립하고 마을 조직을 체계화 하는데 힘을 모았다. 2011년에는 6년과정의 중등학교를 설립했다. 역사가 10년이 넘었다. 무지개교육마을은 이제 견고한 다리처럼 사람과 지역사회를 연결하고 있다.수민이는 8년동안 무지개학교에 다녔다. 올해 중등학교 3학년이 된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는 직접 만든 옷을 선보였다. 초등3학년부터 진행되는 살림반 수업에서는 '의', '식', '주'를 주제로 공부를 한다. 이는 우리 삶에서 자연스럽게 만나는 주제이며 삶의 근본이 되는 것들이다. 무지개마을 아이들은 학교에서 이런 것들도 배운다. 수민이는 이중에서도 의복에 관심을 더 두었다. 패션디자이너가 되겠다는 장래희망을 가지고 있다. 장래희망은 이것 말고도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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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공동체 이야기]두번째┃문탁 네트워크 지면기사
국가나 자본에 포획당하는 나의 시간을어떻게 지켜낼 것인가머리 맞대 공부하는 것이 공동체가 있는 이유삶을 바꾼다는 목표 '인문학 공간'이 핵심경제활동 펼치는 '마을 작업장' 갖추고지역사회와 소통·교류위한 '카페'도 운영이희경 대표 중심 5년전 9명서 100여명으로고정된 이미지 거부 '별도 규칙' 안세워강좌·토론회에 자립프로젝트까지 영역 넓혀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어느 골목의 야트막한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주소가 큼직하게 쓰인 카페가 보인다. '874-6'이라고 쓰고, '파지사유'라고 읽는다. 숫자 아래로 '마을 공유지'라는 글자가 보인다. 이곳은 말하자면, '마을회관' 같은 공간이다. 얼핏 보면 그냥 카페지만, 뒤쪽으로 대형 세미나실이 있고, 밥과 반찬과 빵을 만들 수 있는 조리실도 있다. 필요한 사람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다. 마을회관이 있으니 당연히 마을이 있다. 파지사유 맞은편 건물 1층에 '월든'이라는 마을 작업장이 있고, 계단으로 한 층을 더 올라가면 이 마을의 핵심 본거지인 '인문학 공간'이 드러난다. 이 곳이 바로 '문탁 네트워크(이하 문탁)'다.문탁은 이렇게 세 공간으로 구성된 마을이다. 마을이 있으니 마을 운영의 원칙이나 구성원이 지켜야 할 규칙이 있을 터, 이희경 대표를 만나 이를 물었다. "규칙이요? 우린 그런 거 없어요. 규칙 없는 게 규칙이에요." 사실 본인은 마을 대표도 아니란다. 문탁의 탄생을 주동한 인물이라 대표격으로 활동하는 것 뿐이다. 문탁 식구는 100여명이다. 1년동안 세미나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인원만 그정도다. 5년전 9명이 모여 인문학 공부를 시작하던 것에 비하면 10배 이상 늘었다. 어느 조직이나 덩치가 커지면 일이 생기고, 이를 처리하기 위한 규칙이 필요해진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그때 그때 필요한 규칙을 발명해서 써요. 대의제를 차용하지도, 매뉴얼을 정하지도 않죠. 현장에서 논의를 하고 방법을 찾아서 해결하는 거예요. 규칙의 성질이 단단하지 않고 끈 같다거나, 심지어 연기의 형태라고 할 수 있죠. 매번 논의해서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게 피곤할 수는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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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공동체 이야기]첫번째┃프롤로그 지면기사
전통마을과 달리 틀 깨고 생겨'씨족체' 아닌 '공동체' 차이점교육·학습이나 경제·문화예술 등같은 목표·삶의 지향점 추구'축제'처럼 전시행정 부작용 우려지자체 정책적 조직 찬반 논란도'…그 당시 마꼰도는 선사시대의 알처럼 매끈하고, 하얗고, 거대한 돌들이 깔린 하상으로 투명한 물이 콸콸 흐르던 강가에 진흙과 갈대로 지은 집 스무채가 들어서 있던 마을이었다. 세상이 생긴 지 채 얼마 되지 않아 많은 것들이 아직 이름을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지칭하려면 일일이 손가락으로 가리켜야만 했다.'(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中)최근 수 많은 손가락들이 성공한 '마을'을 지목하고 있다. 주변에 마을 주민이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도 많아졌고,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경험담을 들려주는 지인도 여럿 있다. 보다 적극적으로, 전혀 새로운 형태의 마을을 구상하는 것을 소일 삼아 즐기는 이도 간혹 만날 수 있었다. 요컨대, 마을이 대세다. 요즘의 마을은 물론, 넓은벌 동쪽끝으로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는 전통적인 마을과는 다르다. 전통의 마을들이 자연환경에 따라 생겨났다면, 요즘 마을들은 환경을 부수고 탄생한다. 산업화, 도시화, 개인화가 집약된, 넓은 벌판도 모자라 허공까지 꽉 채운 아파트와, 사회에 만연한 불신과 배타주의 밖으로 걸어나온 사람들이 마을을 만든다. 전통 마을의 구성원이 '씨족체'라면, 요즘 마을은 '공동체'가 핵심이다. 같은 목표나 삶의 지향점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교육이나 학습, 경제 활동, 문화예술활동을 마을 안에서 함께 한다. 90년대 중반께부터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한 공동체의 마을은 처음에는 아주 천천히 우리 사회의 한 귀퉁이를 물들였다. 그러던 것이 요즘은 '대세'가 됐다. 마을의 수가 많아진 것은 물론 각 마을의 특성도 다양해 졌으며, 마을을 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별나다'에서 '부럽다'로. 선망과 호기심을 품고 '거기는 뭐하는 곳이에요?' 라며 슬쩍 문틈을 들여다 보는 이들이 많아졌다. '아이를 나으면 육아 공동체에 들어가고 싶다'거나 '퇴직하면 공동체에서 공부를 해볼까'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