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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광장]올가와 메카, 그리고 인간 지면기사
로봇에 의존해서 살면서도이성·몸이 없다고 학대하는 인간기계 아닌 여성·아동·빈곤층 등물음도 없이 폭력 대상될 수 있다 왜 다르고 함께 살 수 없는지?누가 질문하고 질문하지 않는가동네 중학생들과 책읽기 모임에서 '에이 아이(A.I.)'라는 영화를 보았다. 우리는 종종 SF소설이나 영화를 보면서 미래를 상상해보고 현실을 돌아보기도 한다. 요즘 쏟아져 나오는 미래학 도서들보다 이런 과학적 픽션에 근거한 작품들이 훨씬 더 깊이가 있다. 확률이 아니라 성찰에 근거한 미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때로는 상상할 수 없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나온 "너는 올가인가, 메카인가"라는 물음도 그런 것이다. 올가는 유기적(organic) 존재를, 메카는 기계적(mechanical) 존재를 뜻하는 줄임말이다. 한 부부가 아들을 대신할 로봇을 입양한다. '엄마'라고 부르는 인공지능과 교감하며 차츰 정이 들게 된다. 영화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 '데이빗'이란 이름을 가진 인공지능 로봇이다. 하지만 냉동 중이던 진짜 아들이 완쾌되어 집으로 돌아오자 데이빗의 자리는 위태로워진다. 어느 날 생일 파티에 온 아이들은 데이빗을 장난감처럼 취급하며 괴롭힌다. "넌 우리와 달라, 넌 가짜고 우리는 진짜야, 넌 메카, 난 올가라구!" 겁에 질린 데이빗은 "도와줘!"를 외치며 가짜 형제를 껴안은 채 물에 빠진다. 그 일로 데이빗은 인간 가족에게서 영영 버려진다. 진짜 인간들은 메카와 올가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구분선을 그어 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짜 인간은 질문을 한다. 어째서 난 메카고 넌 올가지? 어째서 난 가짜고 넌 진짜지? 오직 로봇만이 왜냐고 묻는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다름에 대해서. 그의 질문은 왜냐고 묻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하면 진짜 인간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어떻게 하면 엄마의 진짜 아이가 되어 함께 살 수 있느냐고. 그리고 그 방법을 찾아 나선다. 자신의 모든 지식과 경험을 동원하여, 자기에게 아무런 정보도 입력되어 있지 않은 낯선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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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광장]초고층아파트, 왜? 지면기사
땅값 비싼 곳 개발밀도 높아많은 건축면적 확보 위해높게 짓는 건 당연한 경제 법칙고부가가치로 투자자도 몰려영향력 있는 사람들에 의한결정권 행사 관행 없어져야서울 강남의 재건축 아파트의 건물 높이를 두고 주민과 시 당국이 서로 의견 차이를 보이면서 사업추진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주민들의 주장에 의하면 법적으로 허용된 최고 높이로 건축을 하겠다는 것이고, 시에서는 주변 환경과 경관을 고려하여 건물을 일정높이(35층)로 제한하겠다는 것을 두고 팽팽히 맞서다가 결국에는 주민들이 시의 주장에 승복하면서 이 문제는 일단락이 된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몇몇 아파트단지에서는 시장이 바뀌면 시의 의견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때까지 기다려보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 생각하여 잠시 사업을 연기하는 곳도 있는 모양이다. 사실 건물의 높이에 대한 문제는 역사적 배경이나 내용이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이 신에 대한 인간의 도전을 응징하는 종교적 의미에서의 신의 노여움이었다면, 인간의 경제력과 기술의 상징으로 탄생한 마천루는 현대도시의 발전과 매력을 경쟁적으로 보여주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인류역사에 있어 건물의 규모나 높이는 그 시대의 정치적, 종교적 권력과 경제적 힘의 크기에 따라 비례해왔음을 알 수 있다. 고대의 피라미드나 왕궁, 중세교회의 첨탑과 돔, 성곽도시의 종탑과 망루, 산업혁명시대의 공장의 굴뚝 등이 바로 상징적, 실용적 목적에 의한 인간의 높이에 대한 열망을 보여준다. 철강 산업의 발달과 건축기술의 혁신적 발전으로 건축물의 높이는 더 이상 인간의 의지를 시험해보는 대상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파리 만국박람회에 등장했던 에펠탑을 두고 당시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이 일어난 것이 불과 130년 전인 1889년이었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시카고와 뉴욕을 중심으로 초고층건물들이 경쟁적으로 들어서면서 소위 마천루의 도시라는 이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때를 즈음하여 대도시의 관광상품으로 등장한 그림엽서에 초고층건물들이 즐비한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즐겨 사용되었고, 지구촌의 유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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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광장]수능을 앞둔 수험생들에게 지면기사
포항지진으로 연기됐던 수능내일이면 진짜 시험 보는 날작은 여진없이 잘 마치길 기원모든 실력 발휘한 날로 기억되길인생·미래 결정하는 날 아니니실망 않길 바라며 '모두 파이팅!'일주일 전 포항에서 일어난 진도 5.4의 큰 지진으로 사상 처음,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일주일 연기되었다. 그 날 하루를 위하여 3년을 쉼 없이 달려온 재학생이나, 더한 고생을 했을 재수생이나 삼수생들, 휴가 받아 수능을 치러 나온 군인들, 학부모들 등등 모두 수능 연기라는 큰 충격에 빠졌지만 그 누구보다 괴로운 사람들은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포항의 수험생들이었을 것이다. 수능은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수능을 보는 이들을 위하여 이해해주고, 감수하는 점이 많다. 그만큼 우리 국민 전부가 교육에 관심이 많다는 뜻일 것이고, 학력고사 세대든 수능 세대든 시험을 앞둔 그 절박한 심정을 스스로 겪어보았거나, 자식들을 통해 겪어보았기 때문이리라. 영어듣기평가를 위하여 항공기 이착륙 일정을 조정하고, 출근을 늦추고, 금융시장 개장시간도 늦추는 등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 벌어져도 큰 불만 없이 당연히 양해하고 감수해야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아니 더 나아가서 수능 날에 지각하다 겨우 입실하는 수험생을 보며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정도로 감정이입이 된다. 작년에 도시락에 깜박 잊고 놔둔 엄마 핸드폰 때문에 부정행위로 간주되어 시험도 보지 못한 어느 고3 학생의 사연을 듣고 모두가 자기 일처럼 안타깝고 속상해하지 않았던가. 지진이 난 직후 긴급회의를 하고, 현장에 나가보는 등 발 빠르게 움직인 정부는 "효율"보다는 학생의 "안전"을 먼저 생각했다는 점에서 안도감을 주었다. 그러나 시험 12시간 전 연기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다보니 수험표나 고사장은 그대로 유지되는지, 원래 합격자 발표를 하기로 예정된 학교는 예정대로 발표하는 지 등 이런 저런 혼란이 많았다. 다행히 하루 만에 대학교별 논술, 면접 일정도 거의 일주일 순연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여행취소 수수료 등을 수험생 가족이 전부 부담해야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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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광장]대입 수능시험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본다 지면기사
다양한 인재 시험으로 평가하고줄 세우는 제도 개혁돼야 하지만수능 통해 대학에서 학습 가능성제대로 평가 받는 것은 필요어떠한 수시전형에서도최소한의 수능성적 반영 있어야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이 내일로 다가왔다. 올해 수능 응시인원은 지난해보다 1만2천460명이 감소한 59만3천527명으로 60만 명 선이 무너졌다. 전체 응시자 중 재학생은 감소한 반면, 졸업생은 13만7천532명으로 전년도에 비해 2천412명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나 대학 입시에 재도전하는 수험생들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최근 대입 전형 추세를 보면, 수능 성적순에 따라 입학이 결정되는 방식이 아닌 수시 전형의 비중이 80% 까지 확대됐다. 잘 알려져 있듯이 수시는 학생부종합전형을 비롯한 교과전형, 특기자전형, 논술전형 등이고, 정시는 수능으로만 신입생들을 선발한다. 수시 전형은 수능 일변도의 학생 모집 방식이 아니라, 대학이 자율적으로 모집 체계를 강화할 수 있고, 일회적인 시험 결과가 아닌 장기간의 고교 생활이 녹아든 학생부 반영이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선호되는 경향이 있다. 학생들 입장에서도 다양한 선택의 기회가 부여된다는 면에서 긍정적일 수 있다. 그러나 수시의 경우 기본적으로 획득해야 하는 수능 점수를 정해 놓은 전형도 있지만 수능 성적을 아예 반영하지 않는 '수능최저 없는 전형'이 늘어나면서, 수능 시험에 대한 무용론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입시전문기관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수능 점수와 무관하게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경우가 정원의 10% 내외이며, 이는 앞으로 계속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러한 방식이 수능 본래의 취지와 어긋나고 나아가 고등학생들의 기초학력 저하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다.본래 수학능력시험은 말 그대로 '대학에서 학습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평가하는 시험'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집행·감독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도 수능의 목적을 "대학 교육에 필요한 수학 능력 측정으로 선발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확보하며,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내용과 수준에 맞는 출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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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광장]마트의 왕국 지면기사
공동체는 없고 시스템만 있는 곳세계가 '마트'를 닮아 가는 듯모든 게 예측 가능한 질서있는사회에선 갈등도 분쟁도 없다평화롭고 안전하다 여기지만그 곳에서 정치는 사라진다'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 나오는 공동생활의 기본 원칙들은 아주 간단한 것이다. 무엇이든 나누어 가져라, 정정 당당하게 행동하라, 물건을 제 자리에 놓아라, 네가 어지럽힌 것은 네가 치워라, 남의 마음을 상하게 했을 땐 미안하다고 말하라, 밖에선 손을 꼭 잡고 서로에게 의지하라 등등. 그 원칙대로 유치원에서 배운 것만 실천하면서 살아도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말도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유치원에 오기 전에 이미 아이들은 사회를 배우고 오기 때문이다. 그 사회 학교는 '마트'가 아닐까 한다. 아이가 어렸을 때 근처에 있는 대형마트에 놀이 삼아 자주 갔다. 마트에는 온갖 물건들이 쌓여 있었고, 나는 느리게 동선을 이동하며 손가락으로 '사과, 바나나, 귤' 같은 것을 가리키며 알려주었다. 마트는 없는 것이 없는 세계였고, 세계의 모든 단어를 배울 수 있는 작은 학교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마트는 우리가 이 세계의 질서를 파괴하지 않는 한,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지도 간섭하지도 않는 곳이었다. 그때 나는 그곳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편리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어느 날, 나는 세계의 학교 같은 마트에서 가르쳐줄 수 있는 단어들이 거의 '명사'에 한정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트에서 배운 명사의 세계는 곧 상품의 세계였다. 동사는 빈약했다. '사다(buy)'와 '~하고 싶다' 말고는 거의 없었다. 먹고 싶다, 갖고 싶다, 사고 싶다, 사야겠다, 사지 말자 등등. 그걸 깨닫고 나서 나는 이 학교가 무서워졌다. 대형마트는 이 세계가 얼마나 풍요롭고 안전한지를 보여주는 거대한 교과서였다. 하지만 거기엔 그 세계를 만드는 노동은 보이지 않았다. 물건은 모두 개체로만 존재했다. 사과는 사과나무에서 열리지만 마트의 사과는 언제나 하나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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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광장]역사보존과 도시개발 지면기사
도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만 살다가는 곳이 아니라후손들도 살아가야 하기에삶의 흔적 새겨진 곳이 역사미래도시에서의 삶과 모습 그려보는 지혜 절실하게 요구우리는 살다보면 매우 난처한 질문을 받는 경우가 가끔 생긴다. 어릴 때는 엄마가 좋은지 아빠가 좋은지를 물어봐서 당황스럽고, 좀 더 커서는 사랑과 우정 중에 하나를 선택받기를 강요당하기도 하며, 술자리에서는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하라고 다그치는 경우도 있다. 문재인정부가 들어서고 나서는 원자력에너지냐 대체에너지냐로 나라가 시끄럽고 각종 사안마다 이거 아니면 저거라야 한다는 흑백논리와 이분법적 편 가르기가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이 나라의 모든 의사결정방식을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시장이나 관료들은 물론 전문가들에 따라 도시의 흔적이나 역사유적 그리고 중요한 역사적 건물을 보존해야 한다는 입장과 개발과 변화를 통해 도시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서 개발이 지연되기도 하고 행정이 마비되어버리기도 한다. 이런 일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나라마다 도시마다 항상 겪는 일이고보면 이런 논쟁은 도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이기도 하고 도시의 변화와 발전에 대한 인식의 차이일 수도 있다.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이나 도시의 흔적들을 보존하는 일은 누가 뭐라 해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역사보존이 개인의 이해나 공공의 필요에 따라 상충되는 경우에는 그 해법이 상당히 까다로워진다. 80년대 초 일본의 역사도시 교토의 철도역 복합개발을 두고 보존과 개발이라는 가치가 충돌한 예는 유명하다. 10년이라는 지루한 공방 끝에 1993년 드디어 개발로 결정되었고, 그 과정에서 역사보존과 개발에 대한 다양한 연구와 논의가 이루어진 것도 건축과 도시계획분야로서는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세계적으로 역사적 유적이나 주요건물과 함께 도시경관에 대한 규제는 오래된 역사도시의 경우는 매우 엄격하게 시행되고 있다. 영국 런던의 경우는 도시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신축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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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광장]무엇이 중요한가 지면기사
일·가족·친구 다 포기할순 없지만우선순위 정하고 삶 균형 맞춰야온 국민이 일주일에 한끼 정도사랑하는 사람들과 모여 먹고담소 나누며 행복 느끼길 소망적어도 밥 같이 먹어야 식구니까심리학자가 쓴 '행복의 기원'을 보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식사를 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최대 행복이라고 한다. 요즘은 혼밥, 혼술 등이 널리 퍼져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밥은 모여서 먹어야 제 맛이다. 양푼에 열무김치와 고추장을 넣고 온 식구가 둘러앉아 비벼먹는 비빔밥이나, 캠핑장에서 구워먹는 삼겹살과 소시지도 그 맛 자체보다 같이 먹는 사람들이 정겨워서 더 좋은 것이다. "학교는 지각해도 밥을 굶어서는 안 된다"는 부모님 말씀 덕분에 고등학교 시절, 지각은 해봤어도 아침식사를 거른 적이 없었다. 온 가족이 아침과 저녁 거의 매번 머리를 맞대고 둥근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던 추억이 바로 어제 일 같다. 먹을 땐 국물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엄격한 집안도 있었겠지만 우리 가족은 조잘조잘 하루 종일 있었던 일을 서로 경쟁하듯 이야기하기 바빴다.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밥상머리 교육'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정치적인 이슈나 뉴스 거리가 있을 때 서로의 의견이나 생각을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눈을 기를 수가 있었다. 때론 새 운동화가 필요한 이유를 대면서 부모님을 설득하고, 용돈 인상을 협상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요즘 세태는 어떠한가. 애들은 애들대로 학원 가느라 바쁘고,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회식과 모임에 각자 바쁘다보니 온 식구가 다 모여 식사를 하는 날이 과연 일주일에 몇 번이나 될까. 심지어 애들은 학원에서 학원으로 이동하는 차안이나 길가의 편의점에서 김밥이나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고 급하게 도시락을 먹는 애들도 있다니 밥상머리 교육은커녕 소화 걱정을 해야 할 판이다. 가족끼리 외식을 하는 것에서도 예전에 볼 수 없던 매우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담소를 나누기보다는 각자 게임이나 문자 하느라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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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광장]4차 산업혁명과 대학 교육의 변화 지면기사
국가적 화두 '제4차 산업혁명'대학은 용어 집착할게 아니라학교별 특화된 목표 설정하고시대에 맞는 인재 육성 위해융합적 지식 키울수 있도록색다른 교육·사고 방식 가져야'4차 산업혁명 시대'라는 표현이 새 정부의 화두가 되고 있다. 지능정보화 사회를 기반으로 산업 체계가 혁명적으로 바뀔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물론 이와 관련해서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이 용어는 클라우스 슈밥(Klasu Schwab)이 2016년 세계경제포럼 기조연설에서 언급한 이후 국내에서 유달리 급격하게 확산되었는데, 이 표현 자체는 이미 20세기 초반에도 언급된 바 있고 학자에 따라 4차 산업혁명을 설명하는 방식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 개념의 혼돈에 따른 방향성 논쟁은 이미 지난 대선 기간에 나타났다. 대부분의 대선 후보가 우리나라 산업 육성의 지향점으로 제4차 산업혁명을 들고 나오면서 누가 4차 산업혁명을 이끌 적임자인지에 대한 주요 담론이 형성되기도 했다. 또한 관료들이나 전문가들 역시 개념이 소개되었던 초기와 달리 그 방향성과 한국사회의 적용 방안에 대해 어느 정도 정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그래서 현재는 무엇이 제4차 산업혁명인지에 대한 논쟁보다는 세계적인 산업변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것이며, 새로운 먹거리를 창출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우선 기계화, 산업화, 정보화의 3단계 산업혁명 이후 지능화로 대변되는 4차 산업혁명이 인공지능이나 빅 데이터 기술로 인해 추동되면서 국가 시스템이나 산업, 사회 및 삶의 영역 전반에 걸쳐 혁신적인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사회는 기회 요인과 위협 요인을 두루 갖고 있다고 보이는데, 기회라고 하면 우수한 ICT 기반, 인적 자원의 높은 교육 수준, 제조업 경쟁력 등을 들 수 있겠고, 위협이라고 하면 첨단 지능기술 수준이 낮고 이에 대한 전문 인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하지만 대학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러한 위협 요인이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제4차 산업혁명이 국가 과제로서 중요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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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광장]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 지면기사
마을이 사라진곳엔 아파트가다랭이 논은 모두 풀숲에 묵히고전망 좋은 곳엔 펜션·카페 들어서옛날의 이웃공동체도 없어지고장소의 의미도 변해 버렸으니흔적 지워진 곳에서 고아된 듯이번 추석에도 그랬다. 언제부터인가 고향에 갈 때마다 고향을 잃어버린 느낌이 든다. 마을도 사라지고, 옛날부터 같이 살던 이웃공동체도 없어지고, 장소의 의미도 모두 변해 버렸으니, 기억과 흔적이 지워진 곳에서 점점 고아가 되는 것만 같다. 고향집 앞 골목길이 2차선 차로로 확장되었을 때는 1980년대였다. 동네 집들이 길 만드는 터를 내느라 허물어지게 되었다. 다행히 우리 집은 살아남았다. 그 때 '살아남은' 집들은 행운이라 여겼고, 떠나게 된 이웃들은 위로를 받았다. 친근한 이웃들과 함께 살던 곳을 떠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이웃공동체의 상호부조 체계가 작동하는 곳에서는 무언가 아쉽고 위급할 때 손 내밀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들의 관계에서 떨어져 나온다는 것만큼 위험하고 불안한 일은 없다. 갑자기 밥이 떨어져도, 연탄불이 꺼져도, 옷을 빌려 입거나 돈을 꾸어야 할 때도, 옆집 문을 두드려야 했으니까. 보상금이 얼마든, 새로 정착하게 될 동네가 어디든, 처음부터 다시 관계와 신용을 쌓아야 하는 시간이 지나야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이웃을 얻게 될 것이니 새로운 곳으로의 이주는 설레는 일이 아니라 살처럼 익숙한 고장을 잃고 낯선 사람들 틈을 헤매야 하는 실향의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90년대가 지나고 한 이십년이나 흘렀나, 그랬을 때인데 이번에는 소방도로를 낸다고 오래된 동네 한 토막이 허물어지게 되었다. 그 때도 고향집은 살아남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행과 불행이 바뀌었다. 떠나는 사람들이 축하를 받고 남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다. 부동산 시장도 그닥 형성되어 있지 않은 소도시에서 낡은 집을 짐처럼 지고 있던 사람들은 보상금을 받고 집을 처분하게 된 것을 행운이라 생각하고 좋아하였다. "관광객들이 많이 와서 길은 좁고 차도 막히고 자꾸 개발을 해야 한다고들 하니 곧 성님도 좋은 일이 있겠지." 동기간처럼 친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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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광장]민주적 공간으로서의 도시 광장 지면기사
광장은 시민들에게 바꿀 수 없는사회체계 구조적 의사소통의 장모든 사람들 자유롭고 평화로운평등이용 공공공간임에도 불구때론 독선적이고 폭력이 난무특정집단 불법 장기점유 없어야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탄핵을 몰고 왔던 촛불집회가 열린 곳도, 이에 맞서 탄핵만은 안 된다고 소리를 높인 태극기집회가 열린 곳도 둘 다 광장이라는 이름의 장소였다. 사람들이 그들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할 때면 왜 광장이라는 곳에 모여 집단적으로 소리를 높여 외쳐야만 하는 것일까? 정치학에서 말하는 직접민주주의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인가? 고대 그리스에서 행해진 직접민주주의의 현장이 아크로폴리스라는 공공장소였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서구의 도시문화를 대표하는 광장이라는 이름의 공공공간을 집단시위와 투쟁의 장소로 이용해오고 있는가? 최근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와 민주노조의 천막농성 등 특정집단이 장기적으로 의사표시를 하는 장소가 되어버린 광장이 과연 이런 용도로 계속 사용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지 모르겠다. 우리가 농경사회로부터 근대도시사회로 넘어오면서 그 이전에 겪어보지 못했던 도시생활 중 한 가지가 바로 광장과 공원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광장은 앞서 말했듯이 고대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 로마의 포럼, 중세와 르네상스의 광장을 거치면서 유럽 도시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아 왔다. 반면 공원은 과거 귀족들이 소유하고 있던 대규모 장원이 민주화의 거센 물결에 떠밀려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바뀌어 진 것이기에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문화권의 도시에서는 광장이나 공원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말하자면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광장이나 공원과 같은 도시의 공공공간은 오랜 역사 속에서 생활화된 광장도 아니었고 종교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상징공간도 아니었으며, 목숨을 걸고 투쟁한 전리품으로서의 공원도 아닌, 어느 날 갑자기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기에 그 소중함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우리에게도 정치적 의미에서 서구의 광장과 같은 기능을 담는 곳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왕의 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