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공감

  • [인터뷰… 공감]수원연극축제 총연출 임수택 감독

    [인터뷰… 공감]수원연극축제 총연출 임수택 감독 지면기사

    새로운 시도를 할 때는 늘 우려의 시선이 따른다. 그러나 이런 우려를 극복하고 늘 대성황이라는 반전을 안기는 이가 있다. 바로 연출가 임수택의 이야기다. 국내에 처음으로 '거리예술' 장르를 도입한 임 감독은 지난 2003~2014년 12년간 '과천한마당축제' 예술감독을 지내면서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연출가로 이름을 알렸다. 축제 연출을 처음 맡았을 당시 유럽을 방문했던 그는 거리에서 자유롭게 공연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이를 마당극으로 이뤄지던 '과천한마당축제'에 도입해 장르를 거리극으로 확장했다. 무모한 도전이라는 주변의 걱정 어린 시선도 있었지만, 그는 성공적인 축제를 만들었다. 지역주민뿐만 아니라 타지에서도 많은 관람객이 방문했고, 반응이 좋자 안산·고양·서울 등지에 거리예술을 표방하는 축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무대를 옮긴 이유는?수원화성도 좋지만 너무 넓어 적절치 않아'경기상상캠퍼스' 아늑하면서 다양한 공간#수준 높은 콘텐츠가 많다고 했는데'생기있는 축제' 만들기 위해 꼬박 1년 고심공간과 작품의 조화·완성도 등 고려해 선별지난해부터는 수원연극축제 총감독을 맡게 된 그는 다시 한 번 '거리예술'의 마법을 시도했다. 사실 기존 수원화성에서 펼쳐지던 행사는 정체성을 찾지 못해 한때 존폐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다행히도 장소와 장르 변경은 관람객의 발길을 잡는 데 성공했다. 당시에도 도심을 떠난다는 점에서, 그리고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장르를 전진 배치한다는 점에서 일각에서는 우려의 시선도 있었지만, 대 반전을 이끌어낸 것이다. 축제에는 지난 2017년보다 3~4배 많은 이들이 찾았고, 풍성한 볼거리에 관람객의 반응도 뜨거웠다.그는 "수원연극축제의 이전 무대는 수원화성 행궁광장이었다. 수원의 상징적인 공간인 수원화성은 좋은 무대이긴 하지만, 너무 넓어서 공연예술을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며 "반면 경기상상캠퍼스는 아늑하면서도 다양한 공간이 있어 프로그램을 짜기 수월

  • [인터뷰… 공감]연임 성공한 김종식 인천항만물류협회장

    [인터뷰… 공감]연임 성공한 김종식 인천항만물류협회장 지면기사

    내항 부두운영사들 다양한 의견 귀기울여… 항운노조 설득 끝에 국내 첫 '통합' 성사어려움 겪고 있는 인천항 '수입 화물 종류 다양화·배후단지 기능 강화' 가 해결 열쇠'항만 구역 개방' 관련 시민 요구 증가… 앞으로 진행될 남북 경제협력에도 대비해야인천항은 수도권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1883년 1월 부산항과 원산항에 이어 세 번째로 개항한 인천항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며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국가 경제 발전의 견인차 구실을 하는 인천항은 변화의 물결을 맞고 있다. 인천항 화물은 벌크(무더기 짐)에서 컨테이너로 바뀌었으며, 화물의 중심지는 2015년 문을 연 신항으로 옮겨가고 있다. 벌크 화물을 주로 다루는 내항은 항만재개발을 위한 절차를 본격적으로 밟고 있다.인천항 33개 하역업체로 구성된 인천항만물류협회 김종식(59) 회장은 최근 연임에 성공했다. 그는 경인일보 인터뷰에서 "인천항 기능을 재배치하는 작업이 일정 부분 마무리되고 있다"며 "새로운 인천항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라고 강조했다.그는 2016년 8월부터 인천항만물류협회장을 맡고 있다. 그동안 김종식 회장이 가장 중점적으로 추진한 사업은 인천 내항의 10개 부두운영사(TOC)를 하나로 합치는 일이었다. 1974년 개장한 내항은 모두 8개 부두로 구성돼 있다. 1997년부터 부두별로 시설 운영권 계약을 맺은 10개의 TOC가 운영됐으나, 벌크 화물 감소로 일감이 급격히 줄면서 이들 TOC는 연간 60억~70억원의 적자를 기록하는 등 경영 여건이 나빠졌다. 그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인천항 벌크 물동량은 큰 폭으로 줄기 시작했다. 하지만 북항이 개장하면서 벌크 화물을 하역하는 시설은 오히려 늘어났다"며 "내항은 10년 전보다 물동량이 절반 수준으로 감소하는 등 위기를 맞았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해양수산부는 2014년부터 인천 내항 TOC 통합을 추진했다. 하지만 자사 소유의 사업장을 포기해야 하는 TOC, 일자리 감소를 우려하는 항운노조 등 관계 기업·단체와의 입장 차가 커 협

  • [인터뷰… 공감]태영호 前 영국주재 북한공사

    [인터뷰… 공감]태영호 前 영국주재 북한공사 지면기사

    남북, 정치·사회·경제등 심각한 격차, 통일되면 북한 사람들이 한국 이해하기 힘들 것北 해외 노동자 10만명 달해… 거짓선동으로 주민 자극한다면 신뢰 무너지는 것 한순간제재 심할수록 북한 장마당 활성화… 美, 北 핵기술 이란 이전등 막고자 협상장 나올 것그렇게 애절 할 수 있을까. 말 한마디 한마디에 동포를 생각하는 그의 절규가 녹아 있었다. 태영호(57) 전 영국주재 북한공사의 최근 행적을 두고 나오는 말이다.태 전 공사는 북송 위기에 처한 10살 여자 어린이를 포함한 탈북자 7명이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송 위기에 처하자 "여자 어린이를 살려달라. 몸부림이라도 쳐보자"며 중국 당국에 호소했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인 '태영호의 남북동행포럼'에서 북송 위기에 처한 상황을 전하면서 이렇게 안타까워 했다.그는 그의 블로그를 통해 "약 2년 전 탈북해 현재 한국에 거주 중인 아이의 부모가 딸을 포함한 탈북자 7명의 북송 위기 소식이 전해진 직후 자신을 찾아와 딸을 구해달라고 호소했다"고 말했다. 태 전 공사는 "만일 내 아들이 이 순간 중국 공안에 잡혀 북송될 위기에 처해 있다면 나는 미쳤을 것이다. 10살짜리 딸을 데리고 있는 이 나라의 모든 어머니들이여! 딸을 제발 부모의 품으로 보내달라고 함께 (중국 공안을 향해) 몸부림이라도 쳐보자. 기적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느냐"고 호소했다그는 그들의 목소리가 밤새 귀에 쟁쟁히 울려와 잠을 잘 수가 없다고도 말했다."2016년 여름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전 영국주재 북한 공사 태영호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한 블로그에는 "제가 한국에 와서 보니 북한에 대해 많은 분야가 잘못 알려져 있고 저 역시 한국에 대해서 몰랐던 것을 많이 알게 됐다"고 첫 구절을 적었다.이어 "저는 우리의 통일은 남북한의 현실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블로그는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북과 남 사이의 소통의 가교가 되고 싶습니다"며 "저는 이 블로그에서 오직 진실만을 이야기 하려고 하며 혹시 틀린 부분이 있으면 여러분의 기탄 없

  • [인터뷰… 공감]14년간 서해 5도 누빈 원지영 사진작가

    [인터뷰… 공감]14년간 서해 5도 누빈 원지영 사진작가 지면기사

    옹진군청 공무원으로 해마다 20회 넘게 출장… 사진전도 두 번 열어박사 학위 취득 과정서 인연 닿았는데, 어느덧 1만3천장 발자취 쌓여2010년 연평도 포격때 가장 먼저 현장 도착 '사진기자협회 특별상'도남북 화해 분위기 조성 후 사진도 변화… 작품 소재 더 많아지길 소망인천 옹진군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는 이른바 '서해 5도'라고 불린다. 이들 섬은 위도상으로 한반도의 허리쯤에 있지만, 1953년 정전협정 직후 설정한 북방한계선(NLL·Northern Limit Line)을 기준으로 하면 남한의 서해 최북단에 있다. 두 차례의 연평해전,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 포격을 겪으며 국민들에게는 '한반도의 화약고'로 각인됐다. 지난해 '4·27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이 서해 5도에서 무력행위를 중단하기로 합의하면서 평화의 기운이 감도는 듯도 싶지만, 섬은 여전히 각종 군사시설에 둘러싸여 수천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다.서해 5도는 '국가지질공원' 지정이 추진될 정도로 독특한 자연풍경을 갖고 있는 동시에 군사적 긴장이 공존한다. 수많은 사진작가가 매료될 만한 피사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진가로서 서해 5도에서 작품활동을 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백령도는 4시간 가까이 여객선을 타야 하고, 적은 배편 때문에 무조건 1박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날씨 탓에 여객선 결항이 잦아 섬에 들어가거나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같은 접경지역이지만, 서해 5도보다 접근성이 좋은 비무장지대(DMZ·Demilitarized Zone)를 소재로 한 작품사진이 더 많은 이유라는 게 사진작가들 설명이다.원지영(46) 사진작가는 서해 5도를 가장 많이 찾아 작품을 남기고 있는 작가로 꼽힌다. 2005년부터 인천 옹진군청 미래협력과 공보팀에 근무하면서 사진 촬영 업무를 맡아온 직업적 특성이 서해 5도 전문작가로 만들었다. 그는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 등 서해 5도로만 매년 20차례 이상씩 출장을 다니고 있다. 14년 동안 드나든 인천 섬의 모습이 이제는 눈 감고도 훤하다고 한

  • [인터뷰… 공감]경제적 재기 돕는 이계문 서민금융진흥원장 겸 신용회복위원장

    [인터뷰… 공감]경제적 재기 돕는 이계문 서민금융진흥원장 겸 신용회복위원장 지면기사

    ■진흥원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신용등급 6등급 이하등 1470만명 추산저리금융상품 공급하고 상담 서비스도■효율적 지원을 위한 노력은?글 쓰기 서툰 고객 위해 '종이없는 창구'디지털 시스템 구축 통해 상담시간 늘려"불이 나면 '119'에 전화하듯이 재무적으로 어려울 때는 '1397'을 눌러주세요."이계문(58) 제2대 서민금융진흥원장 겸 신용회복위원회 위원장은 "병에 걸리면 병원에 가서 제때 치료를 받아야 낫듯이 재무적 어려움이 있을 때 빨리 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를 찾아 상담받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서민금융진흥원은 2016년 3월 '서민의 금융생활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에 따라 서민금융 총괄기구로 출범하고 채무에 어려움을 겪는 서민, 취약계층의 채무 부담 완화를 위해 전국에 47개 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햇살론, 바꿔드림론, 미소금융 등 서민대출상품을 취급, 금융분야 사회안전망 역할을 맡고 있다. 지난해 10월 취임한 이 원장은 '소통하는 서민금융 전문가'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는 취임 후 6개월 동안 전국에 설치된 47개 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 중 15곳을 방문했으며 진흥원과 신용회복위원회, 콜센터 소속 모든 직원들과 유관 단체 관계자들과의 간담회는 물론이고 전문적인 업무처리 능력 향상을 위한 연수과정을 실시함으로써 수요자 중심의 서민금융 지원기관으로 발전을 이끌고 있다. # 서민금융진흥원의 역할과 지원 현황서민금융진흥원은 제도권 금융 이용에 어려움을 겪는 저신용·저소득 서민들을 위해 저리의 정책서민금융상품을 공급하고 종합상담·맞춤대출·컨설팅·금융교육 등 자활·상담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경제적 자립과 자활을 높이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와 함께 신용회복위원회는 개인워크아웃, 프리워크아웃 등 채무조정 지원제도를 통해 채무를 상환 능력에 맞게 조정하고 분할해 상환할 수 있도록 지원함으로써 과중한 채무로 고통받는 서민들의 신용회복 및 경제적 재기를 돕고 있다.현재 서민금융 지원대상인 신용등급 6등급 이하 또는 연소득 3천500만원 이하의 저

  • [인터뷰… 공감]'대공분실 보안관리소장' 맡은 고문피해자 유동우씨

    [인터뷰… 공감]'대공분실 보안관리소장' 맡은 고문피해자 유동우씨 지면기사

    국가폭력의 상징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배우는 학습장으로 바뀌고 있는 남영동 대공분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운영할 예정인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 정문 경비초소에는 특별한 사람이 일하고 있다.군사정권 때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보냈던 고문 피해자 유동우(70) 씨. 그가 38년 만에 남영동 대공분실(민주인권기념관)의 보안관리소장으로 돌아왔다.1970년대 인천 부평수출산업단지에서 노동운동을 이끌었고, 80년대 민주화 투쟁에 헌신한 그는 노동 수기 '어느 돌멩이의 외침'의 작가로도 유명하다. 비참한 공장 노동자의 삶을 고발하고, 그들의 고통을 세상에 알린 이 책은 동시대를 살았던 민주화운동 활동가의 필독서이기도 했다.유동우씨는 전두환 정권의 대표 공안조작사건인 '학림사건'에 휘말려 1981년 8월 2일부터 37일 동안 이곳에 감금돼 고문을 받았다. 1987년 민주화를 이끌어내는 데 선봉에 섰지만, 정작 본인은 고문 트라우마와 환청에 시달리며 민주화의 봄을 한껏 누리지 못했다.그런 그가 30여 년 만에 남영동 대공분실에 돌아온 것은 대단한 결심이었다. 고문 피해자가 남영동 대공분실의 '문지기' 역할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기념관 측의 제안을 수락, 지난해 12월부터 보안관리소장을 맡아 일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을 찾는 시민을 가장 먼저 맞이하고 있다.남영동을 잊기 위해 민주화 운동 경력마저 지우려 했던 그의 삶을 되찾아 준 게 남영동이라니 대공분실은 그에게 아이러니한 존재다.유동우씨는 "극한의 인권유린을 당했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민주화의 소중함을 알리는 인권의 문지기가 되겠다"고 말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 [인터뷰… 공감]'민주인권기념관' 탈바꿈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 피해자서 보안관리소장 된 유동우씨

    [인터뷰… 공감]'민주인권기념관' 탈바꿈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 피해자서 보안관리소장 된 유동우씨 지면기사

    #민노련 결성 주도등 민주화 운동에 매진했는데'우리는 가난해서 지옥에 가야하는 사람' 말에 충격노조 결성 후 해고당해… 전국 누비며 재야노동운동#남영동 대공분실은 어떤 곳이었나예비군 훈련 중 연행, 신체검사 후 속옷 한 장 걸쳐5층 조사실서 무차별 폭행·협박… 기절땐 물끼얹어38년 전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경찰에 무자비한 고문을 당할 때만 해도 오늘 같은 날이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1970~80년대 인천에서 민주화 운동에 매진한 유동우(70)씨는 매일 아침 남영동 대공분실로 출근할 때마다 만감이 교차한다.국가폭력의 상징이었던 남영동 대공분실이 경찰의 손을 떠나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재탄생을 앞둔 가운데 유씨는 지난해 12월부터 이곳을 지키는 보안관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의 공안조작사건에 휘말려 남영동 대공분실에 불법 구금돼 모진 고문을 당했던 그가 이제 민주주의와 인권을 되새기는 기념관의 '문지기'이자 역사의 산증인으로 시민들을 맞이할 채비를 하고 있다.유동우 씨는 "우리 역사에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보람되게 일하고 있다"며 "백범 김구 선생도 일제에 짓밟혔던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면 정부의 문지기 역할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라고 말했다.지난 12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만난 유씨는 1981년 8월 2일 오전 이곳에 끌려온 날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33살의 그는 예비군훈련에 소집돼 안양의 한 부대 연병장에서 제식훈련을 받고 있었다. 사복을 입은 건장한 사내 둘이 찾아와 군복 명찰을 확인하더니 양옆으로 팔짱을 끼고 '나가서 얘기 좀 하자'며 데려갔다. 그들은 부대 울타리를 벗어나자마자 경찰이 권총을 옆구리에 들이대며 대기 중인 승용차에 그를 태우고는 눈에 검은 천을 씌웠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 유씨가 눈을 떴을 때 처음 본 장면은 벽과 바닥이 모두 짙은 붉은색으로 돼 있는 4평 남짓의 조사실, 그리고 4명의 수사관이었다."그때는 남영동에 대공분실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옷을 모두 벗고 굴욕적인 신

  • [인터뷰… 공감]道·전국 지역신용보증재단 '첫 직원 출신' 이민우 경기신보 이사장

    [인터뷰… 공감]道·전국 지역신용보증재단 '첫 직원 출신' 이민우 경기신보 이사장 지면기사

    직업군인 꿈꾸던 체육학도, 대학 졸업 전 경안상호신용금고 입사10년차 사표내고 개인 사업… 녹록지 않자 지금의 경기신보 '인연'무슨 기관인지 설명했었던 시절, 전단지 붙이고 상인회 찾아다녀직원 출신 수장 매너리즘 빠질 수 있는 우려 '새로움' 좇으며 불식보증료 면제 '다드림론' 등 준비… 中企·소상공인들 곁에 있을 것'샐러리맨의 신화'. 지난해 11월 이민우 당시 경기신용보증재단(이하 경기신보) 영업부문 상근이사가 이사장 후보로 낙점됐을 때 가장 많이 언급됐던 말이다. 다만 신화는 저절로 쓰이지 않았다. 늘 새로운 길을 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10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할 때도, 미래를 알 수 없는 신생 기관에 입사했을 때도, 갖은 풍파 속 임·직원이 18명에 불과했던 작은 조합을 경기도 최대 산하기관으로 성장시키며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도 그랬다. 경기도·전국 지역신용보증재단 첫 직원 출신 이사장이 그인 이유일 터다.9일, 그가 이사장에 취임한 지 꼭 100일이 됐다. 100일간의 걸음도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가보지 않은 길을 열었고, 맨 앞에는 이 이사장이 서 있었다. 지난 4일 이 이사장의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걸어온 길을 되짚을 때보다 닦지 않은 길을 이야기하는 목소리에 더 힘이 실려있었다.# 문견이정직업군인을 꿈꾸던 체육학도였다. 금융기관에 발을 들인 것은 차라리 우연에 가까웠다. 대학교를 졸업하기도 전 첫 직장인 경안상호신용금고에 입사했다. 낮에는 상호신용금고 대리로, 밤에는 대학생으로 20대 후반을 보냈다. 30대 중반, 가장 왕성하게 직장 생활을 할 10년차에 문득 사표를 냈다. 정치든, 사업이든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다. 작은 개인 사업을 시작했지만 녹록지 않았다. "회사에서 꼬박꼬박 월급 받으며 살면 안 되냐"는 가족들의 애원이 들릴 무렵, 지인이 이력서를 함께 내보자고 했다. 당시엔 '조합'이었던 지금의 경기신보였다. 전국에서 제일 먼저 생긴 지역신보인 만큼 무엇을 하는 기관인지, 왜 만들어졌는지 알고 있는 기업인·상공인

  • [인터뷰… 공감]류은규 사진작가, 조선족의 잊혀진 흔적 "더 많이 알려졌으면…"

    [인터뷰… 공감]류은규 사진작가, 조선족의 잊혀진 흔적 "더 많이 알려졌으면…" 지면기사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과 그들의 후손인 조선족의 삶을 담아낸 사진전 '잊혀진 흔적' 전이 최근 막을 내렸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유명한 류은규(57) 옌볜대 교수가 26년 동안 현지에서 찍은 사진과 입수한 자료들로 꾸민 '잊혀진 흔적' 전은 지난 2월 28일부터 3월 31일까지 인천아트플랫폼 B동 전시장에서 개최됐다.1개월간 진행된 전시회엔 2천여명의 관람객이 찾아 성황을 이뤘다. 사료적 가치도 높은 류 교수의 사진과 자료들에 관람객들도 큰 호응을 보낸 것이다.류 교수와 그의 아내이자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도다 이쿠코 인천 관동갤러리 관장은 "전시회 초창기에는 역사적 관심으로 인해 많은 분들이 전시회를 찾는다는 느낌이었는데, 전시회가 중반을 넘어서면서 재차 전시회장을 찾는 분들이 생기고, 입소문이 더해지면서 가족 단위 관람객들도 많이 오셨다"고 말했다. 전시 막판에는 관람객이 줄기 마련인데, 마지막 주말이었던 지난달 30일에만 200여명의 관람객이 전시회를 보고 돌아갔다. 잘 알려지지 않은 만주일대의 독립운동사를 알리는 사진전이 한 달로 막을 내린다는 것에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도 있었다. 류 교수는 "전시회를 보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라는 관람객의 말을 들었을 때 열심히 해야겠다고 한 번 더 다짐했다"면서 "인천 분들이 많이 오셨는데, 이외 지역으로도 퍼져서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밝혔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 [인터뷰… 공감]3·1운동 100주년 기념전 개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류은규

    [인터뷰… 공감]3·1운동 100주년 기념전 개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류은규 지면기사

    #'잊혀진 흔적' 展 많은 관심 끌었는데中서 항일운동 흔적 수집·조선족 살펴중립지키고 검증 신경써서 전시회 구성#조선족을 26년간 찍고 있는 이유는하얼빈서 우리역사 왜곡되는 것 목도만주지역 이주사 '객관적 기록' 결심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류은규(57) 옌볜대 사진학과 교수의 3·1운동 100주년 기념전 '잊혀진 흔적'이 지난 2월 28일부터 3월 31일까지 인천 아트플랫폼 B동 전시장과 윈도우갤러리에서 개최됐다.'잊혀진 흔적'전은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과 그들의 후손인 조선족의 삶을 조망하기 위해 기획됐다. 1990년대 초부터 26년 동안 중국에서 항일운동의 흔적을 수집하고 독립운동가 후손과 재중동포의 모습을 찍어온 류 교수는 이번 전시회에 작품 70여점과 아카이브 250여점을 출품했다. 전시회는 '역사의 증언자들', '그리운 만남', '80년 전 수학여행', '삶의 터전', '또 하나의 문화' 등 5부로 구성됐다. 전시회는 2천여명의 관람객이 찾을 정도로 관심을 끌었다. 류 교수의 시선과 수고가 고스란히 담긴 작품들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한 것이었다.류 교수에게 작품 활동과 이번 전시회에 관한 이야기, 앞으로 계획 등을 들어보기 위해 지난 1일 오전 인천 아트플랫폼 전시장을 찾았다. 류 교수는 아내인 도다 이쿠코 인천 관동갤러리 관장과 함께 전시장으로 들어섰다. 인터뷰 후 부부가 함께 전시 작품들을 떼어낼 예정이었다. 전시회 개막을 앞두고 부문 별로 나누고 작품들을 걸고, 전시회장을 꾸미는 데 1주일 가까운 시간이 소요됐지만, 떼어내는 데는 반나절이면 충분할 거란다.류 교수는 "학생들에게도 강조하는 부분인데 '역사 관련 전시회는 가장 중립적으로 올바르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으면서 한 쪽 편에 서서 찍을 순 있겠지만, 찍고 나선 중립을 지켜서 전시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서 "검증도 매우 중요하다. 중국 현지 교수와 국내 전문가들

  • [인터뷰… 공감]'수원 야구 붐' 꿈꾸는 이숭용 KT 단장

    [인터뷰… 공감]'수원 야구 붐' 꿈꾸는 이숭용 KT 단장 지면기사

    ■수원과 인연이 깊은데현대 시절 한국시리즈 정상 올라KT 만원관중서 흥행 가능성 확신■야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아버지 따라 축구를 시작했지만유니폼 멋있어서 야구부에 가입추억의 팀 태평양과 현대를 아는 프로야구 팬들은 수원 KT 이숭용 단장은 꾸준함과 리더십이 뛰어났던 선수로 떠올린다. 이단장은 1994년 신인선수드래프트에서 2차1라운드(전체 1번)에서 태평양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한 후 현대를 거쳐 넥센에서 은퇴를 했다.재정적으로 어려웠던 태평양에서 신인 시절을 보냈고, 현대 왕조의 전성기와 신생팀으로 뛰어든 히어로즈선수단에서는 주장으로서 선수단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이 단장에게 프로야구팬들은 캡틴, 미스터 쾌남, 마지막 황태자라는 애칭을 붙여줬다.신생팀 KT의 창단 코칭스태프로 수원으로 돌아온 이번 시즌부터 단장으로서 수원 야구의 붐을 확신하고 있다. 이 단장의 야구인으로서의 철학과 단장으로 꿈꾸는 야구를 들어 봤다.# 전율을 느꼈던 그 순간, 수원 야구의 가능성을 봤다.서울에서 태어난 이 단장은 스스럼 없이 수원을 자신의 제2의 고향이라고 한다. 인천을 연고로 했던 태평양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지만 현대 유니폼을 입고 수원에서 현대 왕조의 우승 순간을 함께했다. 이 단장은 "아직도 2015년 3월28일 창단 후 첫 1군 홈 개막전이 열리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kt위즈파크에 수원 야구 팬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질때 발바닥부터 전율이 시작돼 온 몸으로 퍼졌다. 그 모습에 수원 야구의 가능성을 봤고 KT와 함께 계속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그는 "현대가 목동으로 가기전 수원야구장을 홈경기장으로 사용했지만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열기였다.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던 순간에도 수원야구장은 비어 있었다. 그랬던 수원야구장에 KT라는 신생팀의 첫번째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온, 가득찬 수원 야구팬들의 모습에 감동했었다. 현대 왕조에서 느끼지 못했던 전율을 느꼈고 수원 야구는 분명히 꽃을 피울 것이라고 믿게 됐다"고 했다.이어 이 단장은 "당시 창단한지 얼마 안된 상황이기에 선수단 자체는

  • [인터뷰… 공감]인천시민이 좋아하는 쌀막걸리 '소성주' 키워낸 정규성 인천탁주 대표

    [인터뷰… 공감]인천시민이 좋아하는 쌀막걸리 '소성주' 키워낸 정규성 인천탁주 대표 지면기사

    #막걸리협회 신임 회장직을 맡았는데회원사들 한목소리 낼 수 있도록 노력업계 간 기술교류 없는 문제 개선할것#시민 사랑 받도록 성장시킨 비결은?장기간 주주배당 않고 품질개선에 투자기본 충실하려고 했던 노력, 결실 맺어"비결 같은 건 없어요. 돌아보면 그저 못살게 될까봐 두렵고 겁났습니다. '금수저'까지는 아니어도 '은수저'쯤 쥐고 태어났는데, 그래서 주변에 늘 잘 사는 사람들이 있었죠. 그런데 그 부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폐지를 주워야 할 정도로 무너지는 경우를 자주 목격했어요. 그게 두려웠습니다. 살아남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했습니다."인천 사람들이 사랑하는 쌀막걸리 소성주를 만드는 인천탁주제조 제1공장(이하 인천탁주)의 정규성(62) 대표의 이야기다.정규성 대표는 한때 맥주에 밀려 '아무도 찾지 않던 술'로 전락했던 지역 막걸리를 시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지금의 '소성주'로 키워낸 주인공이다.그는 1996년부터 인천탁주의 대표를 맡고 있다. 인천탁주는 11명의 주주가 운영하는 협동조합 형태의 회사로, 인천지역 11개 탁주 양조장이 연합해 1974년 설립됐다.정규성 대표는 최근 전국의 크고 작은 100여개 막걸리 제조 기업이 모인 단체인 사단법인 한국막걸리협회 회장직을 맡게 됐다. 인천의 소성주뿐만 아니라 전국의 막걸리를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술로 키워내는 역할까지 해야 해 어깨가 무겁다. 지난 10일 청천동에 있는 공장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신임 막걸리협회 회장직을 맡아 어깨가 무거울 것 같다. 어떠한 계획을 갖고 있나."대형 막걸리 회사인 대한탁약주제조중앙회 회장직도 맡고 있는데, 크고 작은 막걸리 회원사들이 한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취임사에서 말했습니다. 또 업계 간의 기술교류가 거의 없는데, 이 부분도 노력하기로 했습니다. 막걸리 업계가 전문가 그룹이 두텁지 않고 학문적으로도 연구가 많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업계가 스스로 만들어가야 합니다."-IMF 직전인 1996년부터 인천탁주 대표를 맡아 지금까지 대표를 맡고

  • [인터뷰… 공감]양평에 '소아암 어린이 공원묘원' 만든 하이패밀리 대표 송길원 목사

    [인터뷰… 공감]양평에 '소아암 어린이 공원묘원' 만든 하이패밀리 대표 송길원 목사 지면기사

    소아암으로 세상 등진 아이, 장례 제대로 안치르기도사후에도 그들을 기억할 공간 만들기 위해 묘원 마련아이와 부모 위해 장례·안장 무료… 화초장으로 진행# 소아암으로 세상 떠난 어린이들, '그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곳' 공원묘역국내 최초로 소아암으로 세상을 떠난 아이들을 위한 공원묘원을 찾아가는 길. 양평 두물머리(양수리)에서 공원묘원이 자리를 잡고 있는 양평군 서종면 도장리까지 가는 길 왼편은 맑은 북한강이 전날 내린 눈으로 한 폭의 수채화로 차창 밖으로 흐르고 오른편은 흰 눈에 덮여있는 야트막한 산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20여분 남짓 승용차로 달려 도착한 하이패밀리 진입로. 입간판 안내를 따라 꼬불꼬불 이어진 깎아지른 듯한 시멘트 포장길 300여m를 오르니 큼지막한 흰색 건물과 계란 모형의 커다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하이패밀리 동산. 이곳에는 더블유 스토리 건물과 청란교회 등이 있다. 교회 이름처럼 푸른 모양을 한 예배당이 있어 가족단위로 명상과 예배를 드릴 수 있다. 밖에서 보면 좁아 보이지만 들어가면 꽤 공간이 넓고 천장이 아파트 2층보다 높다.개신교 가정사역 단체인 하이패밀리(Hi Family)가 지난 2016년부터 서종면 도장리 매곡산 자락 중턱 9만9천여㎡ 부지에 건립하기 시작한 가족테마파크 '하이패밀리 동산'이다. 복합문화공간이자 가족 생태계복원을 위한 '힐링필드'인 이곳에 지난 2월 15일 문을 연 어린이 전문 화초장지(葬地) '안데르센 공원묘원'이 자리를 잡고 있다."백혈병 등 몹쓸 병으로 어린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들은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들은 또한 안타깝게 떠난 아이를 제대로 장사 지낼 마땅한 곳이 없어 강물이나 산야에 재를 뿌리고 훗날 아이를 찾아갈 기억의 공간이 없음에 또다시 큰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직원 안내를 받아 사무실을 찾아가 만난 하이패밀리 대표 송길원(62) 목사가 안타까운 현실을 속으로 삭이듯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송 목사는 "부모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난 자

  • [인터뷰… 공감]'국토정보 플랫폼 사업' 이끌고 있는 현남위 LX 경기지역본부 국토정보사업 처장

    [인터뷰… 공감]'국토정보 플랫폼 사업' 이끌고 있는 현남위 LX 경기지역본부 국토정보사업 처장 지면기사

    인공 지능(AI), 사물 인터넷(IoT), 클라우드 컴퓨팅, 빅데이터, 모바일 등 첨단 정보통신기술이 경제·사회 전반에 점차 융합되면서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한 플랫폼 구축이 갈수록 중요시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지식정보기술을 매개체로 한 공급자와 수요자를 연결하는 중계자가 아직까지 부족한 상황이다.또한 지능정보기술이 인간의 신경망처럼 도시 구석구석까지 깔리기 위해서는 생산과 제조에 앞서 공간정보 구축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와 관련한 사업은 아직 초창기나 다름없다.그나마 한국국토정보공사(LX)가 가상공간과 물리적 공간의 경계가 희석되는 디지털 혁명 기반의 기술융합 시대를 발 빠르게 준비하고 있을 뿐이다.#공간구축의 필요성은?건물·도로등 도시 인프라 효율적 관리'공공데이터' 활용해 새로운 가치 창출LX는 지난 2004년부터 공간정보를 신규사업으로 정해 기술발전을 대비해 왔고, 지난 2015년에는 사명까지 바꾸며 지적사업에서 국토정보사업으로 업무영역을 확대, 4차 산업혁명의 중간자 역할과 기초자 역할을 하고 있다.그 중심에는 현남위(58) LX 경기지역본부 국토정보사업 처장이 있다. 1985년 공사에 입사해 30여년간 지적 사업과 더불어 국토정보 사업을 최일선에서 이끌어 왔다.지난해부터는 지역본부 전체 국토정보사업분야 회장을 맡아 스마트사회를 선도하는 국토정보 플랫폼 사업의 나아갈 방향을 안내하고 있다.이를 위해 그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 역시 '공간과 정보를 아우르는 여정'으로 정한 뒤 국가공간정보체계 구축 지원과 공간정보·지적제도 연구개발 및 지적측량 수행 등을 통해 국가발전에 이바지하는데 총력을 다하고 있다.현 처장은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훨씬 크지만 바로 이런 거대한 두려움 속에 거대한 기회가 숨어있다"면서 공간구축의 힘든 여정을 단편적으로 토로했다.하지만 그는 공간 구축의 어려움보다는 성과가 더욱 크다고 설명했다.지난해 판교 자율주행 공간정보플랫폼 구축, 정부 및 지자체와 협업을 통한 3차원 지하공간통합지도 작성 등을 추진한 현 처장은 "남들이 가보지 않은 길이

  • [인터뷰… 공감]문화발전 기여 장관상 받은 손동혁 인천문화재단 문화교육팀장

    [인터뷰… 공감]문화발전 기여 장관상 받은 손동혁 인천문화재단 문화교육팀장 지면기사

    "인천민예총은 여러 예술 장르의 진보적 예술가 연합체로 내년이면 30주년이 된다. 예술가들이 태생적으로 얽매이기 싫어하는 데다 시인, 소설가에, 화가, 풍물,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독특한 인물들이 모여 일을 도모하다 보니 그리 쉽지 않은 조직이다. 인천민예총도 초기엔 부침이 심했는데, 변변한 사무실 하나 없이 동가숙서가식 하던 차에 혜성같이 나타난 인물이 있었으니, 노래패 출신의 손동혁이다. 그가 사무처장으로 일하게 되면서 경직되지 않은 조직력과 탁월한 기획력을 발휘하여 민예총의 노둣돌을 놓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이는 없을 것이다. 지금은 인천문화재단에서 팀장으로 일하고 있는데, 척박한 인천 문화를 생각하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 손동혁이 던지는 문화정책에 대한 혜안이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부단한 공부와 발로 뛰는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항상 미덥다."인천 부평여고 미술교사로 있는 김정렬 작가가 이달 중순 마련한 개인전 '인천인물 열전(列傳)'에서 손동혁(50) 인천문화재단 문화교육팀장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의 경력 사항을 담은 프로필만 A4용지 3장에 달하는데, 김정렬 선생은 손동혁 팀장의 이력을 짧은 글에 잘도 담아냈다. 1987년 대학에 입학하면서 노동자 노래패에 몸을 담았으며 인천민예총, 주안영상미디어센터 등에서 실무를 총괄한 그는 지금 인천문화재단에서 시민들을 위한 다채로운 문화·예술 교육 사업을 기획하고 있다.손동혁 팀장은 최근 문화체육관광부의 민간자문 프로젝트팀 '새문화정책준비단' 19명의 총괄위원 중 한 명으로 참여해 '문화비전 2030'을 수립하기도 했다. 손 팀장은 문화예술 정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최근 문체부장관상을 받았다. 인천문화재단이 기관으로나 개인으로 문체부장관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손 팀장은 "이번 '문화비전 2030'은 정부가 문화계 블랙리스트 논란을 딛고, 민간 중심 준비단을 구성해 이들이 만든 계획안을 장관이 수용하고 발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기존에는 관이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아 계획을 짰다고 하면, 이번에는 분과

  • [인터뷰… 공감]수원시노사민정협의회 김명욱 사무국장

    [인터뷰… 공감]수원시노사민정협의회 김명욱 사무국장 지면기사

    시의원 시절부터 노동문제·지역 일자리 남다른 관심… 2016년 취임올해 사업 방향·목표, 붓글씨로 적어 사무실 벽에 붙여놓는등 '열정''수원형 일자리' 2025년까지 1만개 만드는 중장기적 개발 전략세워최저임금 인상등 노동환경 어려워진 곳 찾아가 '분쟁 방지' 지원도"경제가 어려울수록 노사민정이 책임감을 갖고 대화와 협력에 나서야 한다."올해로 9년 차를 맞은 수원시노사민정협의회는 노동자와 기업인, 수원시를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수원시 노사민정협의회는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갈등 등 지역 사회가 해결해야 하는 경제적 난제를 대화와 타협으로 풀어나가기 위해 노력 중이다. 수원시 노사민정협의회는 고용노동부가 주관하는 노사민정 협력 사업 평가에서 2010년과 2012∼2014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2016년에 이어 2017년에도 기초지자체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 지역 노사민정협의회의 롤 모델이 되고 있다.그 중심에는 김명욱 수원시 노사민정협의회 사무국장이 있다. 지난 2016년부터 수원시 노사민정협의회를 이끌고 있는 김 사무국장은 올해 사업 방향과 목표를 붓글씨로 손수 적어 사무실에 붙여놓는 등 일에 대한 열정도 과시하고 있다. 수원시의회 재선 의원이기도 했던 김 사무국장은 시의원 시절부터 노동문제와 지역 경제 일자리 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기도 했다.김 사무국장은 현재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동자와 기업인, 시민과 자치단체가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먼저 청년 실업 등 일자리 문제에 대해 그는 노·사가 함께 상생할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 사무국장은 "중소기업들은 인재를 얻지 못해 힘들어 하지만 청년들은 일할 만한 기업이 없어 하소연하고 있다"며 "노사가 함께 상생할 수 있는 해결책 중 하나는 '일자리 미스매치'를 해소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임금 조건과 근로 복지를 높여 기업의 일자리 수준을 높여야 한다"며 "동시에 청년들도 중소기업 취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 [인터뷰… 공감]'학교발전 봉사 각오' 최용규 인천대학교 신임 이사장

    [인터뷰… 공감]'학교발전 봉사 각오' 최용규 인천대학교 신임 이사장 지면기사

    #처음 제의 거절, 결국 수락한 이유는지금까지 총장·박사들이 맡았던 자리지역사회서 역할해달라 요청에 결심#현재 학교의 문제와 역점사업 구상은모든 구성원이 노력하지만 방향성 없어평생학습원·추가 캠·역사연구소 등 추진 '인천대학교'는 인천 사람들에게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게 할까. 10대~30대라면 '집 가까운 국립대', 40대 이상이라면 최초 설립자인 '선인학원'이 먼저 다가올 터이다. 고등학생이라면 가장 경쟁률이 센 인천대 대표 특성화 학과인 '동북아국제통상학부'가 생각날 수도 있다.최용규(63) 인천대학교 신임 이사장은 지난 8일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경북대, 전남대, 부산대는 그 지역 주민들의 자랑으로 여겨지는데 인천대는 아직 '국립대'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며 "이사장 재임 기간 인천대학교를 인천 시민들이 자랑할 수 있는 '자부심'이 될 수 있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인천대학교는 1994년 시립대학교로 전환돼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지 올해로 16년 차를 맞았다. 시민의 열망을 모아 지역 각계 인사들이 한목소리로 시립화를 이끈 후 2013년에는 그 뜻을 다시 모아 국립대학법인 대학교로 전환시켰다. 2009년 신축 이전한 송도 캠퍼스 인근으로는 최근 몇 년 사이 세계적 수준의 바이오 업계가 들어서면서 바이오 연구 분야를 특성화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맞기도 했다.지난 1일 이사장으로 취임한 최용규 인천대학교 이사장은 "처음 이사장 제의를 받았을 때 그간 총장, 박사들이 이사장을 해왔기 때문에 거절했다"며 "그러나 지역 사회로부터 지금 인천대학교의 발전, 나아가 인천의 발전을 위해 역할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아 이사장직을 맡아 봉사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최용규 이사장이 짚고 있는 인천대학교의 가장 큰 문제는 '방향성'이 없다는 점. 최용규 이사장은 "모든 구성원들이 노력하고 있지만 지금은 사공이 없어 돛도 닻도 없는 상태와 같다"고 지적했다. 이어 "총장, 이사장, 학생은 언젠가 학교를 떠나는 사람들인데 이들이 그만둔다고 해서 대학

  • [인터뷰… 공감]'전국 지방자치단체 1호 정식 임명' 김준재 경기도 역학조사관

    [인터뷰… 공감]'전국 지방자치단체 1호 정식 임명' 김준재 경기도 역학조사관 지면기사

    전국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처음으로 '정식' 역학조사관이라는 명함을 갖게 된 김준재(59) 조사관을 인터뷰하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지난달 안양지역에서 발생한 홍역이 이달 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안산·시흥지역에서 집중 유행한 탓이었다. 올해 들어 도내에 발생한 홍역 환자는 13명. 다행히 더 이상 환자가 늘지 않은 채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최일선에 있는 김 조사관은 환자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이들과 접촉한 1천600여명을 살피느라 한 달 가까이 밤낮을 잊은 모습이었다. 25년가량 일반 병원에서 소아과 의사로 지내왔던 그가 50대 후반, 일반인들에겐 이름조차 생소한 '역학조사관'의 길을 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잠시 허락된 시간. 지방자치단체 1호 역학조사관인 그의 이야기를 짧게나마 들어봤다.# 베테랑 소아과 의사의 '새 길'역학조사는 감염병의 발생 원인과 특성을 파악하는 일이다. 이에 대한 전문가가 역학조사관이다. 질병의 원인을 수사하듯 다방면으로 찾아 감염병을 예방하고 실제 발생 시 확산을 막는 게 주된 업무다 보니 '질병 수사관'으로도 불린다.과거에도 역학조사관이 있었지만 그 중요도에 비해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비교적 적었다. 많지 않은 역학조사관들의 헌신에 기대 이뤄지는 게 보통이었다. 같은 의사들 조차 역학조사관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을 때였다. 지자체의 역학조사관들의 사정은 더욱 좋지 않았다. 한 조사관의 근무기간이 1~2년 정도에 그치다보니 지자체에 감염병 관리 노하우가 축적되기 쉽지 않았다. 그러다 2015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가 전국을 강타했다. 시·도 단위에도 전담 역학조사관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이뤄졌다. 제도가 정비됐고 교육과정도 강화됐다.김 조사관이 '역학조사관'이 된 것은 메르스 사태 이후인 2016년이다. 서울에서 일반 병원을 개업해 25년가량 소아과 의사로 일했다. 아이를 건강하게 기르는 점에 대한 저서에 참여하기도 했다. 보람된 일이었지만, 의사로서 더욱 새롭고 의미 깊은 일을 하고 싶었다. '가보지 않은

  • [인터뷰… 공감]'하남시 백년도시위원회 위원장' 김신일 前 교육부총리

    [인터뷰… 공감]'하남시 백년도시위원회 위원장' 김신일 前 교육부총리 지면기사

    김상호 시장이 위원회 의견 존중하겠다는 분명한 의지 밝혀 참여 결심집단지성 발현 통해 갈등 최소화, 위원회 논의 품질 끌어올리는게 핵심3기 신도시 선정 교산지구, 먼저 주민 마음 이해하고 목소리 대변할 것하남시는 김상호 하남시장 취임 이후 중요 정책과 현안 사업을 소수 정책결정자의 판단이 아닌 민간의 자문과 제안을 바탕으로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 민간의 자문과 제안을 할 기구가 바로 '하남시 백년도시위원회'다.대학교수·기업인·시민·시의원·공무원 등 지난해 말 공모를 거쳐 선발된 50여 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백년도시위원회는 시 중요정책과 현안사업에 대한 자문 및 제안에 대한 역할을 수행하며 숙의 민주주의를 기본원칙으로 합의적 의사결정을 통해 운영될 예정이다.김신일 전(前) 교육부총리를 위원장으로, 일자리경제위원회(10명), 복지문화위원회(10명), 안전도시위원회(10명), 교통환경위원회(10명), 자치행정위원회(10명) 등 5개 분과로 나눠 운영될 백년도시위원회는 하남시 미래발전에 대한 목표 및 방향성 설정, 공약사항 이행 평가, 중요정책의 자문 형성 과정에 직접 참여해 민선 7기 시장의 개혁 의지를 실천할 방침이다.백년도시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김 위원장과 인터뷰를 통해 백년도시위원회의 의미와 역할을 알아봤다.김 위원장은 백년도시위원회에 대해 "지방자치단체는 단체자치(지방분권)와 주민자치(주민참여)라는 두 가지 부문으로 구성되는데 지난 1987년 지방자치단체가 부활한 이후 30년 동안 단체자치 부문은 상대적으로 많은 진전이 있었으나, 주민자치 부문은 아직 보완할 부분이 많다"며 "문재인 정부도 단체자치보다 주민자치를 강조하고 있고 백년도시위원회 역시 주민참여를 위한 제도적 장치 중의 하나"라고 소개했다.백년도시위원회는 5개 분과 위원회를 운용해 전문성을 높이고 위원회 자체적 판단에 의한 자문활동과 공론화를 포함한 다양한 자문 방법의 활용 등이 보장돼 있어 '강화된 형태의 자문위원회'로 평가된다. 위원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더 높은 수준의 주민참여를 위한 훌륭한 가교역할이 가

  • [인터뷰… 공감]초등 교과서속 '까만나라 노란추장' 주인공, 농학자 한상기 박사

    [인터뷰… 공감]초등 교과서속 '까만나라 노란추장' 주인공, 농학자 한상기 박사 지면기사

    ■영국행 포기하고 아프리카 간 계기는1971년 당시 내전으로 피폐 기근 심각'식량안전으로 국위선양' 서울대 휴직■23년간 현지서 연구생활 성과는카사바·얌 등 품종개량 73개국에 보급석박사 수십명 배출 '고기잡는 법' 교육그의 삶을 거슬러 얘기하면 한편의 위인전이 된다. 실제로 그의 얘기는 1980년대 초등학교 교재 '생활의 길잡이'(3학년 2학기)에, 최근에는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국어읽기'에도 소개됐다. 한 출판사가 2001년도에 펴낸 '까만나라 노란추장'이란 책은 그의 얘기를 동화로 만들었는데 지금까지도 아이들에게 큰 공감을 얻으며 47쇄나 발행되기도 했다. 외국 특히 나이지리아에선 '추장(농민의 왕)'으로까지 추대되며 신문 1면을 여러 번 장식하기도 했다.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상까지 수차례 받아 세계적인 학자로 두루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그는 바로 농학자 한상기(87) 박사다.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에서 의료활동으로 사람들을 구원했다면, 한상기 박사는 식물유전육종학으로 이들을 구해냈다. 요즘 세계 곳곳에서 한국의 명예를 드높이는 이들로 나도 모르게 가슴 뿌듯해지고, 절로 자부심이 드는 경험을 하곤 한다. 베트남의 영웅이 된 축구감독 박항서,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며 전 세계적 팬덤을 형성한 BTS(방탄소년단)가 현재를 대표한다면, 한 박사는 1970~80년대 아프리카에서 식량난을 이겨내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로 추앙받는다. '한국에서 온 아프리카 성자'라고까지 불렸다.# '일왕불퇴' 각오로 아프리카 광야에 서다1933년 충청남도(청양군 청남면 인량리) 칠갑산 자락에서 한상기 박사는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정산향교의 전교(典校, 교장격 관리자)를 지낸 유학자인 아버지와 자식을 위해 먼 길을 마다 않고 불공을 드리며 헌신하는 어머님 밑에서 그는 엄하게 자랐다. 어릴 때부터 농업에 관심이 많아 식물유전 육종학자가 되고자 서울대 농대에 입학(1953년)했고, 미국 미시간주립대를 유학해 유전육종학 박사학위를 딴 후 1961년부터 서울대 농대 교수로 재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