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미당 서정주 시전집
    춘추칼럼

    미당 서정주 시전집 지면기사

    詩 950편 ‘탄생 100주년’ 맞아 사후 첫 간행한국 시문학의 역사이며 우리 생활언어의 변천사우리도 이제는 서로의 흠결 관용으로 껴안아 줘야미당 서정주 시전집(전 5권)이 최근 출간됐다. 1933년부터 2000년까지 70년 가까운 창작기간 동안 발표한 시들 950편을 모아 미당 사후 처음으로 간행하는 정본 시전집이다. 문학계의 경사다. 서정주는 한용운, 김소월, 정지용, 김영랑, 백석 같은 선배 시인들보다 오랜 기간 작품 활동을 했으며, 훨씬 많은 작품을 남겼다. 파란만장한 우여곡절과 번민하는 오욕칠정을 지나 심층 생의 매력을 탐구하는 삶의 지혜와 원숙한 달관을 풍성하게 보여준다. 더구나 올해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 해다. 뜻깊은 시기를 맞아 시의 한 생애와의 온전한 만남은 거듭 경사스러운 일이다. 미당 시전집은 한 개인의 생애사이기도 하지만 우리말과 정신의 역사이기도 하다. 가령 그가 20대 초반에 쓴 ‘화사’라는 시에서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여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뚱아리냐” 했을 때, 현대 맞춤법 규정과 충돌하는 이상한 소릿값을 감지하게 된다. 주류어가 아닌 변두리어, 교양인의 문어가 아닌 일상 구어로서 자존감을 지켜 나가려는 젊은 시인의 의지는 ‘푸른 하늘을 원통히 물어뜯어야 하는’ 뱀의 저주받은 운명과 동일시되어 일제 강점기의 혹독한 환경에 대응하는 ‘조선어의 투혼’을 증언한다. 암시적 어법 속에 강렬한 저항의 포즈가 있는 것이다.‘큰 이얘기 작은 이얘기들이 오부록이 도란그리며 안끼어 드는 소리.……’(내리는 눈발 속에서는)가 보여주는 관용과 긍정의 세계는 한국전쟁 뒤의 참화와 폐허를 견뎌내는 민초들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으며, ‘이때는 꽃은 아직 없었고/꽃노릇을 대신하고 노는 것은/초록빛 도마뱀들이었었네/그리고 타오르는 불빛의/제비들이 날아다녔네.’(멕시코의 영봉 씨트랄테페틀이 어느 날 하신 이야기)에 오면 세계를 굽어보는 여유와 활달한 상상력이 눈과 귀를 즐겁게 해준다. 그래서 이 시전집은 그 자체로 한국 시문학의 역사요 우리 생활언어의 변천사다.미당의 아름다운 시 세계를

  • 우리에게는 독립기념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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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는 독립기념일이 없다 지면기사

    일제 왕비시해에 백성분노 응집된 이름 ‘대한민국’백범선생의 첫째·둘째·셋째도 소원이었던 ‘독립’명색이 독립국인데 독립은 아직도 어려운 숙제우리에게 독립은 익숙한 말이다. 독립협회도 독립문도 독립신문도 독립군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기원하는 의미의 독립이었거나 그 뒤에 생긴 독립군은 마적패로 몰리면서 일제의 토벌 대상이 되었던 군대였다. 대한제국은 백성들의 헌금으로 독립문을 세우고 우리는 그걸 국보로 삼고 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의 개선문적 성격이 짙은 그 독립문은 대한제국과 함께 일제의 감시와 묵인 하에 벌인 조선왕조의 마지막 불꽃놀이였다. 그것들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비를 끔찍하게 시해했던 일제가 들끓는 국제적 여론에 몰리어 시혜적으로 베푼 잔치였던 셈이다. 사무라이들을 동원하여 조선의 왕비를 시해한 사건은 한반도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일제가 저지른 만행들 중 으뜸가는 원죄다. 일제는 그 흔적을 지우려고 왕비의 주검을 현장에서 화장해버렸고, 조선왕조는 2년이 넘도록 그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범인을 처벌한 뒤에 장례를 치러야 하는 왕가의 규율 때문이었다. 왕비를 시해한 사무라이들에게는 손도 못 대고 왕비의 주검을 화장할 때 장작더미를 옮겼던 궁인들 세 명을 범인이랍시고 처형했지만 그런 꼼수는 이미 장례의 명분으로는 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왕비시해 장면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다는 에조(英臟)보고서에는 옷을 벗긴 나신(裸身)의 왕비를 사무라이들이 능욕한 뒤 칼로 찔러 죽이고 화장했다고 적혀 있다. 대한제국은 그렇게 시해당한 왕비를 황후로 승격시켜 장례의 명분으로 삼는다. 능욕당하고 화장당한 왕비는 시신도 없는 황후가 되어 그렇게 장례를 치렀다. 당시의 자객 가쯔이까는 왕비에게 휘둘렀던 칼을 쿠시다 신사에 자랑스럽게 기증했다. 독립을 잃은 식민지의 참극이 어찌 이뿐이었겠는가. 왕비가 시해당한 뒤 대한제국의 친일내각 총리 김홍집은 광화문 네거리에서 격분한 군중에게 맞아 죽었다. 안중근 장군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도 왕비시해사건이 부른 피의 복수였고 황해도 해주의 평범했던

  • 진화 중인 중앙-지방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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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화 중인 중앙-지방 관계 지면기사

    단체장·교육감, 점점 힘 강해지면서 중앙과 갈등주도적 역할수행, 진화해 가는 자연스러운 현상서로 혁신과정 적절하게 수용해 협력 이끌어야이번 메르스(MERS) 전염병 사태는 한국 사회의 여러 부정적 측면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정치적으로 두드러진 것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 협력 부재이다. 지난 6월 4일 박원순 서울시장의 메르스 관련 긴급기자회견 이후 이에 대한 찬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한편에서는 잘한 일이라고 하고, 다른 편에서는 중앙정부를 무시한 월권행위라며 비판하고 있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은 다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 협력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사실 중앙정부, 지방정부, 그리고 시도 교육감 사이에서의 갈등 혹은 협력부재 현상은 최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정치적 현상이다. 작년 말 교육부와 서울시 교육감 사이에 자율형사립고 지정 취소를 두고 벌어진 힘겨루기, 올해 발생한 누리과정 무상보육 예산편성을 둘러싼 중앙정부와 지자체, 시도 교육감 간의 갈등, 그리고 무상급식을 둘러싼 경남도지사, 경남교육감, 경남 도내 시장·군수들 간의 갈등 등은 좋은 사례들이다. 시도 교육감도 국민의 투표에 선출된 정치적인 자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모든 사례들은 상이한 수준의 정치권력 간 갈등 내지 협력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다.어떻게 보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사이(혹은 상이한 수준의 정치권력 사이)에서의 갈등은 당연한 일이며, 실제로 지방분권화가 일정 수준 이뤄진 국가에서는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일이다. 수평적으로 나눠진 대통령 권력과 의회 권력이 서로 갈등하듯이, 수직적으로 나눠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권력 또한 갈등하게 되어 있다. 권력은 나눠지면 서로 갈등하고 투쟁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아무리 법으로 두 정부의 영역과 역할을 구분하려고 해도 실제 정치과정과 정책과정에서 정부 간 영역 다툼은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한국은 지방선거가 부활하고 진정한 지방자치가 실시된 지 20여 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지방분권화는 미약한 수준에 머물

  • 우리나라는 사춘기를 벗어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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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는 사춘기를 벗어났을까? 지면기사

    외형보다 내실 추구 ‘거화취실’… 선진국 향한 조건포장된 공약에 환경·교육정책 오락가락해선 안돼사회 요구 인재상도 점차 능력·인성 위주로 변화최근 읽은 책 속에서 저자는 중국을 사춘기 소녀처럼 감정이 아주 예민하고 불안정하면서,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사춘기의 나라’라고 표현했다. 한참 사춘기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중학생 아들의 모습을 함께 상상하면서 ‘우리나라는 과연 사춘기를 벗어났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본다. 사춘기 아이들은 신체적·정신적으로 급격히 성장하는 과정이라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이고, 자기중심적이면서 겉으로 보이는 외형적 모습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 대부분 아이들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잘 넘기고 올바른 자아와 가치관을 가진 참된 성인으로서 성장해 간다. 아이들이 사춘기를 지나 참된 성인으로 성장해 가는 모습에 비춰 아직 인간의 됨됨이와 내면의 충실함보다는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을 더 중요시하고, 자기중심적 사고에 사로잡혀 사회 곳곳에서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사춘기 성인’이 적지 않은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스스로 답을 적어본다.우리나라가 사춘기를 벗어나 참된 성인, 즉 선진국으로 성장해 가는데 ‘거화취실(去華就實)’의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국내 모기업의 경영철학으로도 유명한 이 사자성어는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을 중요시하기보다는 기본에 충실하면서 내실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변화와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오랜 시간을 걸쳐 완성돼 온 선진국의 다양한 정책과 제도를 화려하고 거창한 단어로 포장해 여기저기서 마구 쏟아내고 있다. 물론 성공적인 변화와 개혁은 새로운 정책과 제도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기존에 시행하고 있는 정책과 제도에 대한 충분한 평가와 환류, 내실화를 위한 투자와 노력 없이 무조건 새로운 정책과 제도, 조직이나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에는 더욱 신중할 필요가 있다. 또한 지도자의 강력한 추진력에 의존해서 단기간에 눈에 보이는 가시적이고 하드웨어적 성과만을 생각하고, 정책이나 계획수립 단계에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

  • 석남꽃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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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남꽃 이야기 지면기사

    신라시대 연인의 애절한 사랑에 등장한 꽃젊은 예술가들 전통이야기 콘텐츠화 했으면…정성 다해 투자한다면 놀라운 미래 열릴것바람이다. 바람 분다. 남풍 동풍 훈풍 분다. 그 바람 빗겨 타고 종달새 쨋재거리고, 우쭐우쭐 청보리는 제 허리통 부끄럽다. 우람한 산엣총각, 수줍은 들색시 썸타는 5월. 햇살은 서글서글, 따끈한 듯 선선하다. 태아들은 그래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린다.생명이다. 숨결이다. 가슴 뛰고…, 피는 잘 돌고…, 마음은 박자도 없이 퉁기쳐 달아나는 꿩 새끼들 기분이다. 다들 몰라도 장미는 그걸 아는 눈치다. 산에도 들에도 거리에도 담장 안에서도, 장미는 별까지 자라고 싶다. 꽃피는 건 좋은 일이다. 어머니 배 속 생명의 태동처럼 아름다운 일이다. 보라. 유전자를 복제해서 생명을 영속시키는 게 사랑의 생물학적 정의다. 바람이 선들 불어 아기 발가락 꼬물거리면 지상의 모든 장미의 눈들은 나비처럼 날아올라 서로의 짝을 찾는다. 모든 생명체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붓다의 가르침이 교향곡처럼 울려 퍼지는 순간이다. 5월엔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 부처님 오신 날이 몰려 있어서 꽃구경을 자주한 편이다. 카네이션이며 장미며 작약꽃 송이송이들이 지하철 승객들처럼 어디에서 실려 왔다 어딘가로 실려 가고, 꽃이 있던 그 자리엔 그 빛깔과 향기의 기억만 점차 희미해져 간다. 그렇게 5월이 가는 동안 간절한 옛날 꽃이야기 하나 떠올라 꽃 사라진 그 자리를 채운다. 정보화 사회 다음 사회는 이야기와 감성이 지배하는 사회라는데 우리의 옛날 꽃 이야기는 여기에 얼마나 어울리는 콘텐츠일지 기대된다. 신라사람 최항은 자(字)를 석남(石南)이라 한다. 애인이 있었으나 부모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죽었다. 죽은 지 이레 만에 그녀의 집에 찾아가 ‘이제 부모 반대가 없으니 뜻을 이루자’ 말하고 석남꽃 가지를 나누어 머리에 꽂은 채 항의 집으로 함께 오게 되었다. 항이 자기 집 담을 넘어갔는데 동이 틀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집안사람이 아침에 나와 보니 여인이 기다리고 있는지라 이상히 여겨 물으니 항이 함

  • 부르다가 죽을 이름이여
    춘추칼럼

    부르다가 죽을 이름이여 지면기사

    4·3, 4·16, 4·19… 그 많은 죽음 두고 세월은 갔다정작 용서받아야할 몸통은 끝내 나타나지 않아하늘의 말로 우짖는 새소리, 곳곳에 사무칠 것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 처박혔어도 세월은 가고 4월이 가고 또 5월이 간다. 4·3이나 4·16이나 4·19나 5·18의 학살과 참살, 무고하게 짓밟힌 그 떼죽음들은 이 나라가 과연 민주공화국인가를 거듭 의심하게 한다. 방방곡곡에 암매장된 한국 현대사는 과연 언제까지 암매장된 채로 세월호와 함께 처박혀 있을 것인가.진실을 인양하자고들 하는데 배가 인양된다고 한들 과연 그 참살의 진상이 인양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다.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진상조사위원회는 진상은폐위원회가 되고 있지 않나 하는 혐의가 지워지지 않는다. ‘세월호의 실소유주가 국정원이 아니라면 나를 고소하라’는 성남시장은 아직도 고소당하지 않았다.용서해 주고 싶어도 용서받을 몸통은 끝내 나타나지 않은 채 세월이 간다. 정권의 시녀였던 언론사 건물이 5·18 때 광주에서 불타기도 했지만 번식력이 왕성한 그 시녀들을 믿고 이 나라는 자식의 영정을 품에 안은 유족들에게 마구 최루액을 쏜다. 눈물 마를 날 없이 사는 유족들에게 얼마나 더 눈물을 쏟으라고 이 나라는 하필이면 최루액 섞은 물대포를 그토록 쏘아댄단 말인가. 짜고 매운 눈물에 범벅된 채 쓰러진 유족들을 질질질 유치장으로 끌고 가는 나라, 이게 나라냐고 사람들은 목이 아프도록 되묻는다.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이 나라가 과연 민주공화국인가를 의심하게 하는 떼죽음의 현장, 팽목항이나 거창이나 무등산이나 한라산 기슭에 소월의 시구를 새겨 초혼비라도 세운다면 떼죽음 당한 원혼들과 그 유족들에게는 그나마 작은 위로가 될 것인가.세월호에 갇혀 생목숨을 잃은 단원고 학생의 아버지가 며칠 전 집안에서 유서도 없이 자살했다. 그 아버지는 유서 대신 아들의 이름만 부르다가 부르다가 죽었으리라. 먼저 간 아들의 혼령은 어떡하라고 하필이면 어버이날에 자살했는지 그 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