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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장(助長) 의 끝

    조장(助長) 의 끝 지면기사

    가을이 익어간다. 하루가 다르게 들판은 점점 황금빛으로 물들어간다. 논배미에 가까이 가서 보면 이 논이나 저 논이나 벼들의 키가 가지런하다. 이삭의 무게로 고개를 숙인 각도조차 한결같다. 문득 놀라움에, 내리비치는 햇살을 따라 하늘위로 눈길을 돌린다. 눈이 부시다. 태양과 하늘의 공평함에 눈이 부신다.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 '하늘과 땅은 어떤 종류를 특별히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하였더니 지금 들판에서 그 현장을 본다. 햇살이 고루고루 비치기에 벼의 키 크기가 저리 고르고, 하늘에서 뿌려주는 빗줄기도 이곳저곳이 두루같기에 이삭의 무게조차 저렇게 평등한 것이리라. 저 천지자연의 공평무사함에 기대어, 제 욕심만 채우는 자를 두고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라고 손가락질 했을 것이고 또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라며 제 결백을 하소연하기도 했을 터였다.그러나 지금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공평과 공정에 목마르다. 지난 해 난데없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낯선 책이 초장기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것이 그러하고, 올 여름 느닷없이 안철수 현상이 온 나라를 들었다 놓았던 것도 그러하다. 안철수 현상을 두고, 좌파라느니 우파라느니 편을 가르는 분석들도 있었지만, 실은 유독 이 정권들어 심각해진 권력의 사유화와 공공성의 훼손에 대한 반발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문득 조장(助長)의 고사가 떠오른다. 옛날 중국 땅에 오랜 가뭄이 들었다. 봄에 심은 묘들이 크지를 못하고 말라 죽을 판이었다. 하루는 정신이 맑지 못한 노인이 들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오면서 "아이구, 힘들구나. 내가 묘를 키워주고 왔네"라는 것이다. 자식들이 놀라 들로 나가보니 묘를 키워준답시고 뿌리를 뽑아 올려, 온 들판의 싹들이 말라죽게 되었더라는 이야기다. 오늘날까지도 나쁜 짓을 도우는 것을 '조장한다'라고 쓰는 어투가 된 내력이다. 조장의 고사는 사사로움과 어리석음을 상징한다. 세상의 어려움을 '내'가 나서서 널리 바로 잡겠다는 설익은 영웅주의와 사물의 이치를 모르는채 덤벼드는 무지의 낭패가 이 고사속에 들어있다. 조장이 무서운 것은, 그냥 내버려두는 것보다

  •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지면기사

    이상향으로 번역되는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은 토마스 모어가 1516년에 지은 소설책의 제목이었다. 그는 그리스어에서 두 단어를 차용해서 만들었는데, 그 뜻이 이중적이다. TOPIA는 장소, 땅이라는 분명한 뜻을 가지는데 비해, U의 의미가 이중성을 띤다. '유'라고 발음되는 그리스어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eu, ou가 다 같이 '유'로 발음되지만, eu는 좋다라고 하는 뜻이며 ou는 아니라고 하는 뜻이니, e와 o를 빼고 그냥 'u-topia'라고 하면, 좋기는 좋은데 이 세상에 없는 곳이라는 것이 된다. 그 책 속에는 유토피아를 설명하는 그림이 있다. 그림 속의 유토피아는 위쪽에 그려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며, 이곳에 오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정해진 입구에 도달해야 한다. 모든 출입을 감시하는 망루가 입구에 솟아 있고, 이를 통과하면 내부를 해자가 또 감싸고 도는데, 곳곳에 설치된 감시망루를 거쳐 섬의 가운데로 들어가면 이 땅을 다스리는 영주의 성채가 나타난다. 즉 한 통치자의 지배하에서 철저한 감시체계를 거쳐 안전을 담보 받는 세계가 유토피아의 모습이었다.르네상스 시대의 사회에 대단한 영향을 준 이 책은 급기야 신도시의 중요한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이윽고 유토피아를 구현하기 위한 신도시들이 아프리카 북부에서 스칸디나비아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에 유행처럼 세워졌다. 르네상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유토피아의 꿈은 변하지 않았다. 시대마다 새로운 삶을 꿈꾸며 등장한 신도시 모두가 이상적 세계를 동경한 것이었으며 현대의 마스터플랜이라는 도시계획의 수법도 유토피아의 실현을 목표로 한 것이다. 그러나 실현된 유토피아의 사회가 그야말로 이상향이었을까? 불행히도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범죄는 잘 계획된 도시에서 오히려 더욱 많아졌고 갈등과 대립은 전형적인 도시의 문제가 되었다.우리의 땅에도 근대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안은 많은 신도시들이 유토피아를 꿈꾸며 세워졌으나 많은 도시문제를 양산한 바 있다. 신도시는 그렇다 쳐도, 더 큰 문제는 오랫동안 고유한 삶터를 일구어온 우리의 옛 도시에

  • 말랑말랑한 힘 소프트파워를 키우자

    말랑말랑한 힘 소프트파워를 키우자 지면기사

    애플이 아이폰과 아이패드 등으로 세계 시장을 휩쓸고, 구글이 모토롤라와 합병하면서 IT코리아가 20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IT 강국으로까지 불렸던 우리 대부분의 SW회사들도 경영 악화로 워크아웃에 놓인 상태다. 업계는 이 모두가 정부의 오락가락 정책 혼선이 빚은 결과라고 성토한다. SW 경쟁력의 핵심이 기업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성장시키지 못해 뒤늦게 뒷북을 치고 있지만 앞으로 이로 인한 폐해가 얼마나 될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한때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며 키웠던 벤처기업이나 신지식인을 부추겨 세웠던 신화는 신지식인 1호였던 영화 용가리 심형래 감독의 좌절로 막을 내리고 말 것인가. 지금껏 소프트웨어를 지켜 온 기업들은 대기업들이 부족한 인력을 모두 빼가는 현실에서 할 말을 잃는다. 비단 IT 업계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반의 현상일 것이다. 가깝게는 겉만 화려하게 지어진 미술관, 공연장, 무늬만의 오페라하우스 등 선진국과 비교하지 않아도 속을 들여다보면 속빈강정의 궁색함이 그대로 드러난다.사정이 이러하다보니 소프트웨어의 근간이 되는 개인의 독창성이나 창의력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왜곡, 변질되기가 일쑤다. 소설가, 화가, 작가, 발명가 등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보호하고 지원하는 진심어린 창작 지원이 없다. 때문에 창작자들이 겪는 척박한 현실은 양질의 소프트웨어 개발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래도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미국 등 세계시장에서 큰 호응을 끌고 있다거나 걸음마 단계에 있지만 우리 공연물들이 국제무대 진출을 염두에 두고 제작에 땀 흘리고 있는 모습은 희망이다. 엊그제 국립극장에서 판소리 수궁가를 보았다. 세계적인 오페라 연출가 아힘(Achim Freyer) 프라이어가 1인 오페라라 할 수 있는 판소리에 스토리 배역을 나누고 입체적인 무대를 만들어 판소리의 세계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결코 우리 힘으로 세울 수 없었던 정교한 무대와 작가의 상상력이 보태져 판소리의 새 지평을 열어 보인 것이다. 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쉽게 알아듣기 힘든 사설이나 문화적 차이를 과연 외국인들

  • 다양성은 왜 필요한가?

    다양성은 왜 필요한가? 지면기사

    애플 최고 경영자(CEO)였던 스티브 잡스는 대학에서 서체를 공부했고 그것이 훗날 애플 컴퓨터의 아름다운 활자를 만드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는 사실을 많은 독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당시에 그는 서체 공부와 컴퓨터와의 관계를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러한 잡스의 지식은 놀랍게도 훗날 애플 컴퓨터회사에 혁신을 가져왔다.이처럼 혁신은 기존 사고방식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에서의 시도와 노력에서 생긴다. 따라서 혁신은 대부분 과거의 틀에 얽매이는 다수의 집단에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과감히 추구하는 소수의 집단에 의해서 성공적으로 시도되는 경우가 많다.다양한 정보와 생각을 받아들이려는 태도는 산업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서도 필요하다. 기존의 가치관과 생활태도를 고집하면 정체된 사회를 살아가는 데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역동적인 국제화 사회를 헤쳐가는 데는 힘들 것이다. 미국의 대학들도 이런 점을 생각하여 학생들을 교육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예전에는 미국 대학들이 역사적으로 차별 대우를 받았던 흑인들에게 보상해주는 차원에서 다양성(diversity)의 문제를 다뤘지만, 근래에는 다양한 배경 (인종, 성별, 소득, 종교 등 여러 측면)과 사고 방식을 가진 사회 구성원이 어떻게 갈등을 해결해 가면서 살 것인가 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물론 이것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사회환경을 반영해서다.다양화는 항상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니다. 대학교수들은 수업 중 다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어도, 학생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두려워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백인이 대부분인 대학이나, 교수가 종신 계약 (테뉴어)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는 교수는 학생들의 수업평가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사람들은 왜 자기와 다른 사고 방식을 좋아하지 않을까? 이것은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나 불편함이다. 멋진 곳으로 여행을 떠날 때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한편에서는 가슴이 설레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미지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느낀다. 아름답다고 평판이 난

  • 버선과 양말

    버선과 양말 지면기사

    천도교의 핵심 사상은 인내천(人乃天)이다. '사람이 곧 하느님이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권력이 곧 하느님'으로 바뀌거나 '돈이 곧 하느님'으로 변질되는 순간, 어떤 종교든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이것이 한국 종교사의 교훈이다. 신라 제2대 임금의 왕호는 '남해차차웅'이다. 훗날 당나라 유학생 김대문은 차차웅이 곧 무당(巫)을 뜻한다는 기록을 남겼다(삼국사기). 신라 초기 임금님들은 무당이었다는 말이다. 하나 권력에 취하고 돈과 결탁한 무당들은 힘을 남용하다가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연오랑·세오녀가 일본으로 떠나자 신라땅의 해가 빛을 잃었다는 설화는 샤머니즘의 몰락을 상징한다(삼국유사). 고려는 불교국가였다. 한때는 개성의 대사찰에 속한 사병들이 시내에서 세력을 다퉈 전투를 벌일 정도였다. 조선의 건국 명분 가운데 하나가 권력화한 불교의 척결이었다. 정도전의 '불씨잡변'속에 불교 배척의 철학이 오롯하다. 이에 응대하여 승려 함허가 '현정론'이라는 저술을 통해 유불공존을 모색했지만, 때가 늦었다. 조선조 500년간 승려들은 천민 대접을 받았다. 조선은 유교국가였다. 조선 후기 고을마다 서원들로 넘쳐났다. 시골 선비들의 패악질에 지방 수령들이 곤욕을 치렀다. 흥선대원군이 600여곳의 서원들을 혁파하면서, "정녕 백성에게 해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일갈할 정도였다.지금 텅빈 채로 퇴락한 향교 건물이나, 먼지만 소복하게 덮어쓴 골짝구비의 열녀비·효자각·홍살문 등은 경직된 조선 유교의 폐해를 증거한다.새로운 종교나 사상은 '약한 고리'를 치게 마련이다. 조선말기 천주교는 천민들과 양반가 주부들 사이에 은밀히 퍼져 나갔다. 당시 양말도 함께 전래되었던듯, 푸른 눈의 신부들은 천주교를 양말에 비유했단다. 버선이 사람의 발에 꼭 끼어 발을 압박하는 반면, 양말은 누구든 신을 수 있는 신축성에 빗댄 것이었다. 버선이 계급과 성별로 사람을 차별하는 유교를 상징한다면 양말은 양반상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천주교의 평등한 사랑을 상징한 것이다. 개신교는 일

  • '스펙터클의 사회'

    '스펙터클의 사회' 지면기사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행사 중 하나인 베니스비엔날레는 1895년에 시작되었다. 그 역사적 전통을 자랑하는 만큼 해마다 내거는 주제 또한 세계에 던지는 파장이 크다. 21세기가 시작되는 2000년에 열린 베니스건축비엔날레의 주제는 '덜 미학적인, 더 윤리적인(Less Aesthetics, More Ethics)'이라는 문구였다. 나도 그 전시회에 초청을 받아 참가하였지만, 이 주제를 접하고는 적지 않게 놀랐다. 내가 아는 한, 서양건축사에서 윤리라는 단어는 그리스시대 이후에 사용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윤리는 우리 선조들의 덕목이었다. 우리의 선조들은 집을 지을 때 늘 자연과 건축과 인간 간의 관계를 염려했으며, 집은 그 관계를 잇는 고리의 역할이었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집의 형태는 기와집 초가집 뿐이었지만 내외부의 공간은 주변의 조건에 따라 변화무쌍하였다. 그러나 지난 시대 우리는 근대화가 서양화인 줄 착각하게 되면서 이 아름다운 윤리의 방식을 추방하고 서양이 일러준 미학의 성취를 위해 열심히 매진하고 있는데, 이제 서양은 윤리를 끄집어 내며 새 시대 새로운 화두로 삼는다고 하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서양건축사 책을 펼치면 처음부터 끝까지, 신전과 성당, 왕궁이나 별장, 경기장, 공연장 등 기념비적 건축물의 나열이며, 이들 건축에 대한 형태와 비례, 장식이나 재료 등에 관한 미학적 해설로 일관한다. 즉 한 건축물 자체만의 존재 방식과 그 역사가 서양건축사라고 할 수 있다. 그 건축물이 스펙터클할수록 더 많은 지면을 차지하며 그 시대의 중요한 성취로 기술되는 게 당연시되었다.도시 또한 마찬가지여서, 스펙터클한 건축물을 곳곳에 배치하고 이들을 대각선의 각도로 이어서 가장 스펙터클한 광경을 확보한 곳에 그 도시를 지배하는 자의 궁전을 두면, 이게 바로 봉건시대의 도시가 된다. 르네상스시대 전 유럽에 걸쳐 이상도시란 이름으로 유행처럼 지어진 모든 도시들이 그러했으며, 베르사유를 필두로 한 바로크의 도시들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현대의 신도시들도 이

  • 노래방과 열린 합창의 차이

    노래방과 열린 합창의 차이 지면기사

    우리가 즐겨 찾는 노래방 열기가 머지않아 국민합창운동에 옮겨 붙을 태세다. 각지에서 많은 합창경연대회가 열리고 방송에서도 '남자의 자격 합창단'에 이어 '청춘합창단'이 오디션을 마쳤다. 청춘합창단 응시자들의 제 각각의 사연을 보는 시청자의 눈시울이 뜨겁다. 그 뿐인가. 가수가 되고 싶어 수만 명이 장사진을 치는 광경이 방송의 전파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유독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가무(歌舞) 민족의 원형질(DNA)을 타고난 때문이라고 본다. 일본에서 가라오케가 노래방 형태로 상륙한 이후 가공할 속도로 확산되었고 음주 후에 즐기는 국민 오락이 된지 오래다. 숨 가쁜 산업화, 근대화를 거치면서 노래방은 스트레스 해소의 탈출구요 가장 수월한 사교 공간이었다. 그런 '노래방'은 한국인 특성인 '폭탄주'와 함께 '빨리 빨리'의 속성을 가장 잘 빼닮았다. 시간과 비용의 효율성을 잘 갖춘 소통 구조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이제 세상은 변해 G20정상회의를 치렀고, 국가브랜드를 생각하는 고급화, 선진화의 길목에 서서히 일상 소비문화에도 변화가 엿보인다. 우리가 밖에 내놓은 한류문화의 반응에 우리 스스로 놀라면서 자긍심과 함께 그동안 획일적으로 답습해 온 것들을 새로 보고 보다 양질의 문화 트렌드를 찾아야 할 때다.우리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방(room)문화' 강국이다. 유럽 사교문화의 상징인 '살롱'이 들어 왔지만 본질이 왜곡된 채 '룸살롱'이 되어 버렸다. 전화방, PC방, 찜질방, 키스방, 온통 밀폐된 방 천국이고 경찰과 담당 공무원들이 불법 단속을 하지만 업주들의 신출귀몰한 아이디어엔 늘 박자가 늦다. 사실 군사정권 시절 '댄스' 역시 오랫동안 금기로 여겨져 오다 '스포츠댄스'란 이름으로 사면 복권된 후 지금은 세상의 모든 춤을 추는 자유시대를 맞지 않았는가. 수준 높은 문화는 낮은 문화를 끌어올리는 강한 힘이 있는데 일단 맛을 보게 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다. 아무리 그림에 문외한이라도 오랫동안 좋은 그림을 벽에 붙였다 떼면 그 때 허전함을 느끼는 것처럼 미의 경험을 통해 눈이 높아지면 저급한 것에 등을 돌리

  • 우리와 미국인은 어떻게 다른가?

    우리와 미국인은 어떻게 다른가? 지면기사

    며칠 전 과천시 공무원 네 분이 필자가 살고 있는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벌링턴시와 자매결연을 맺기 위하여 오셨다. 앞으로 모든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되면 문화 교류의 일환으로 한국의 고등학생, 지도교사 등이 내년 1월부터 벌링턴에 오게 될 예정이다. 앞으로 국제화의 흐름에 따라 한국의 타 도시들도 과천처럼 외국과의 교류가 늘어날 것이라 예상된다. 특히, 한국은 전통적으로 미국과 깊은 관계를 맺어 왔기 때문에, 미국인과의 접촉이 더 활발해질 것으로 본다. 따라서 한국인과 미국인이 어떻게 다른가 필자가 평소에 느낀 점을 몇 가지 적어 본다. 첫째는 친절이다. 대체로 미국인은 사람을 마주치면 동네에서든 일하는 곳에서든 모르는 경우에도 웃는 얼굴로 지나가거나 또는 "하이"라는 말을 던진다. 남녀 노소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인사를 잘 건넨다. 특히 작은 도시로 갈수록, 또한 북부보다 남부에서 그렇다. 미국인이 친절하다고 해서 한국에서 생각하는 친한 친구의 개념으로 이해했다가는 나중에 큰 실망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친절은 이 사람들의 몸에 밴 습관이고 문화이지, 상대방에 대하여 큰 호감을 갖고 있다는 표시는 아니며, 또한 호감을 갖고 있다 해도 공과 사는 분명하게 선을 긋기 때문에 웬만한 청탁은 들어주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 실망하기 쉽다. 둘째는 프라이버시다. 이곳 사람들은 남의 사생활에 대해서 인간으로서 호기심이 있겠지만 물어보는 것을 꺼린다. 특히 결혼관계나 재산관계의 경우 처음 만난 사람에게 묻는 것은 실례다. 한국인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사는 집이 얼마나 큰지, 가격이 얼만지 스스럼없이 묻는 경우가 있다. 몇 살인지, 결혼은 했는지, 언제 할 것인지 묻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보통 여행이나 취미, 영화나 책 등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만난 사람들과 한다.셋째, 초대의 개념이다. 한국의 경우는 손님을 초대했을 때 음식을 얼마나 잘 차렸는지, 접대한 술이 얼마나 고급인지, 또한 손님들은 얼마짜리 선물을 마련해야 하는지 등에 신경을 많이 쓴다. 미국의 경우는 초대받았을 때 맨손으로 가는 경우도 많고, 주인도 거기에

  • "브레이빅의 가족"

    "브레이빅의 가족" 지면기사

    어린 아이들 머리통에다 총을 겨눠 쏘아죽여 놓고도 흐뭇하게 웃음을 지었다는 놈. "사람은 죽였지만,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는다"라고 내뱉었다는 녀석. 신문을 보니 그에게 극우민족주의자, 정신병자라는 이름을 붙여놓았다. 심드렁하게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며 넘어갔다. 먼 나라의 사건들은 대개 그렇게 지나간다. 이 땅에서도 힘겹고 다급한 사건들이 연일 터져 나오는 까닭이다.얼마 뒤 그 아비라는 사람이 "그를 내 아들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그는 자살했어야 했다"라고 말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문득 숨이 막혔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개인의 책임을 중시하는 서구문화와, 관계를 중시하는 동양문화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나쁜 짓을 했기로서니 제 자식을 두고 자살했어야 한다고 차갑게 내뱉은 아비를 보면서, 잔인한 서양사회의 속살을 엿본 듯했다.동양의 전통사회는 달랐다. 춘추시대 중국 땅에 제 아비가 이웃집 양을 훔친 것을 관가에 고발한 자식이 있었다. 그 나라 임금이 자랑스레 '우리 백성들은 이렇게 정직하다'라며 공자에게 뻐겼다. 공자가 이를 두고, "우리 동네의 정직함은 아비가 자식의 허물을 감춰주고, 자식이 아비의 죄를 숨겨주는 데 있소이다"라고 답했다는 고사(논어)가 그 예다.엄혹한 반공법 시대에도 간첩인 아비를 숨겨준 자식을 처벌하지 못했던 까닭도 이런 전통 때문이었다. 정직이라는 '직선'이, 부모자식 간의 비호, 또는 불법이라는 '곡선' 속에서 피어날 수 있다고 본 공자의 생각을 주목해야 하리라. 서양에서는 고독한 개개인들이 모여 계약을 통해 사회를 이룬다고 본 반면, 동양에서는 인간(人間)이란 말에서 보듯 '사람의 사이', 즉 관계를 사람다움의 핵심으로 여긴다. 그러니 이 땅에서는 차마 아비가 제 자식을 두고 '자살했어야 한다'라는 말은 할 수가 없다. 문득 범죄자가 준비해두었다는 성명서 속에 "부모의 이혼으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라는 대목이 눈에 밟힌다. 또 "그의 글 속에는 깊은 고독감을 찾아볼 수 있다"라는 분석들에도 눈길이 간다. 그러고 보면 그 녀석은 동아시아의 일본과 한국을 그

  • "보이지 않는 도시들"

    "보이지 않는 도시들" 지면기사

    우후죽순 대형건물 시민과 괴리감만동네골목 신경쓰는 도시계획 세워야쿠바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의 작가 이탈로칼비노(1923~1985)가 쓴 '보이지 않는 도시들(le cita invisibili)'이라는 책이 있다. 1972년에 초간된 이 소설이 나로 하여금 도시에 대한 관념을 크게 전환하도록 만든 책이다.마르코폴로가 여행 중에 들렀던 도시들을 쿠빌라이칸에게 묘사하며 들려주는 내용으로 된 이 작은 책은 그 소제목의 구성부터 예사롭지 않다. 전체 아홉 개의 장으로 나누어 첫째 장과 마지막 장에 각각 열 개의 도시, 나머지 일곱 장에는 각기 다섯 개의 도시를 넣어 전체 쉰 다섯의 도시를 설명하는 글로 구성되어 있다.책의 곳곳에는 우리로 하여금 도시에 대한 상상과 성찰로 이끄는 내용이 즐비하다. 인상 깊은 몇 가지 문장들을 발췌하면, '자이라'라는 도시를 설명하면서 이 도시에 있는 높은 탑이나 형태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고 하며, "도시는 이런 것들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도시 공간의 크기와 과거 사건들 사이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단호히 얘기한다.또한 그는 "도시의 형태는 그 목록이 무한하다. 모든 형태가 자신의 도시를 찾고 새로운 도시들이 계속 탄생하게 될 때까지 그 변화가 끝나고 나면 도시의 종말이 시작된다"라고 도시의 운명을 진단한다. 도시는 과거의 기억에 새로운 욕망이 덧대어져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물체라는 것. 따라서 늘 새롭게 바뀌어 나가는 도시에 완성이란 있을 수 없다.만약 어떤 도시가 완성된다는 것은 그 도시의 몰락을 의미할 뿐이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랜드마크나 거대한 건축물, 기념탑 등은 도시의 본질적 요소가 아니며, 우리 주변에 있는 자그마한 건축물이 더욱 중요하고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가 바로 도시의 본질적 요소라는 것을 이 책은 줄곧 강조하고 있다.우리가 도시를 이해하는 방법은 대개 그 도시에 있는 상징적 시설물들을 통해 얻는 인상인데, 사실 이것들은 그 도시에 거주하는 도시민의 삶과는 괴리가 있게 마련이다. 실제로 나는 내가 사는 서울의 남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