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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 안의 거짓

    음악 안의 거짓 지면기사

    음악은 언어와 달리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노래나 교향곡에 담긴 선율은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 만들어지기는 어렵다. 만약 심금을 울리는 선율이 매력적인 차이콥스키 6번 교향곡의 제목이 '비창'이 아니라 '행복한 하루' 였다면, 이 곡을 기만하는 것은 음악의 제목일 뿐이지 음악 자체가 될 수는 없다. 딸림화음이 으뜸3화음으로 진행하지 않고, 다른 화음으로 진행하는 경우인 '거짓 마침(Deceptive Cadence)'도 거짓말이 아니라 나중에 올 화음적인 해결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주는 하나의 표현법이다. 음악은 기만의 도구가 아니다.반면 언어는 누군가를 기만시키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아무리 엉뚱한 정보라도 청중들로 하여금 신념과 확신이 가득 찬 메시지로 받아들일 수 있게 꾸며댈 수 있다. 물론 음악에서도 신념과 확신에 찬 연주가 연주자의 기대와는 달리 청중들에게는 다른 의도로 엉뚱하게 전달될 수는 있다. 이것은 고의가 아닌 거짓말을 하는 것과 아주 비슷하다.구두를 통한 거짓말은 글을 통해 거짓을 전달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내가 안했어'라고 종이에 쓰는 것 보다 말로 거짓말 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법이다. 물론 사람이 거짓말을 하게 되면 신체적으로 미세한 반응을 보이는 등 표시가 난다. 거짓을 말할 때 마음대로 조정하지 못하는 얼굴 근육들의 경련, 빨라지는 맥박, 높아지는 체온 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훈련을 받거나, 잘못된 정보를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논리적 사고와 과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진실을 가려낼 수 있다.음악을 지배하는 세 개의 원칙은 리듬, 화음, 멜로디이다. 이 원칙들이 모두 존중되었을 때, 우리는 아름다운 음악을 감상한다는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이 원칙들이 존중되지 않으면 음악이 아름답기는커녕 지루하거나 짜증이 날 정도로 불쾌한 경험이 될 수 있다. 이 세개의 원칙을 바탕으로 음악이 완성된다면 감동적인 연주를 청중과 나눌 수 있다. 연주자가 연주를 할 때 성실하게 준비를 안 했거나 해석의 의도가 불명확하면, 연

  • 독서율 최하위의 한국인

    독서율 최하위의 한국인 지면기사

    인류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인격자나 사상가를 성인(聖人)이라고 호칭한다. 일반적으로 오늘의 세계에서는 4대 성인으로 석가·공자·예수·마호메트를 거론한다. 공자를 제외한 세분들은 성인이자 신처럼 받드는 종교의 창시자가 되어 수많은 교도들이 그분들의 정신과 사상을 받들고, 그분들이 행한 행실을 본받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면서 살아가고 있다. 다만 공자는 종교의 창시자가 아니라 유학(儒學)이라는 학문의 창시자가 되어 인류를 교육하는 교육자로서 존경을 받고 있다. 보통의 인간들은 그런 4대 성인의 가르침이 담겨있는 성서(聖書)나 성경(聖經)을 필독서로 여기면서 그분들을 본받으며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는 책을 고르자면 첫째 예수의 말씀인 '성서'요, 둘째가 공자의 가르침이 담겨있는 '논어'며, 그 뒤를 이어 석가의 경(經)인 '불경(佛經)'이요, 마호메트의 '코란'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성서나 성경을 읽지 않으면 인간이 인간의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대로 읽지 않고 살아가는 것도 사실이다.어떤 통계를 보면 OECD 가입 국가 중에서 한국인들의 독서율이 가장 낮다는 기록이 있다. 그것은 사실이라고 믿을 수 있다. 영국 사람으로 셰익스피어의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자기 나라의 최고 문학가의 책을 읽지 않는 국민이 문화민족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니, 5대 비극이니 하는 그런 책은 문자를 아는 영국인들은 대부분 읽었음에 분명하다. 그래서 영국인은 자신들이 300년이 넘도록 식민지로 여겼던 인도라는 거대한 나라를 두고, 인도를 버렸으면 버렸지 셰익스피어는 버릴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우리나라의 지폐에는 우리 국민들의 멘토 격인 네 분의 인물 초상화가 실려 있다. 일천원 권에는 퇴계 이황, 오천원 권에는 율곡 이이, 일만원 권에는 세종대왕, 오만원 권에는 사임당 신씨의 초상화가 인화되어 있건만, 우리 국민들이 과연 이 네 분에 관한 책이나 그분들의 저서를 몇 권이나 읽었겠는가.왜 책을 읽어

  • '독도의 시간'이 다시 한번

    '독도의 시간'이 다시 한번 지면기사

    '독도의 시간'이 다시 돌아왔다. 몇 년에 한 번씩 거의 아무도 살지않고 있는 바다 한가운데 몇 개의 돌들로 이루어진 이 섬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흥분하는 시간이 바로 내가 말하는 '독도의 시간'이다. 그렇다면 여러분들도 내가 말하는 독도의 시간에 대해 알게 됐다.90년 중반부터 한국에 있어온 나는 이 특별한 시간을 몇 차례 경험했고 이는 보통 이 섬에 대한 일본의 억지 주장에 시민들의 격렬한 분노를 느끼면서 이 시간이 도래되곤 했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어떤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걸 좀더 설명하자면 국내 정치 단체인 당간의 내부적 문제들이 많은 시기에 이 독도의 시간이 인터넷상의 팝업창처럼 뜨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완전한 우연일까하는 점이다. 그리고 지금이 그런 느낌이 드는 시간이다. 대통령의 친족이 감옥에 가고 그의 몇몇 측근 사람들이 뇌물 수수 및 그 밖의 다른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그리고 야당도 대통령 선거를 얼마 앞두고 실제론 끝나지 않는 내부 갈등으로 더좋은 상황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지금 한국의 정치 현장은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이럴 때 제대로 쓸 수 있는 조커(카드 게임에서 바라는 카드로 대용할 수 있는 카드)는 무엇일까? 옷 소매에서 슬며시 독도 카드를 내밀어 부정과 부패 또는 무능력한 정치가들에 대한 모든 분노를 밖으로 향하게 돌려쓴다. 그리고 얼마나 자주 독도 카드를 쓰든 그 힘은 언제나 강력하다. 내부 문제들에 집중하지 않고 그 즉시 국민 모두가 뛰어들어 갈 수 있는 분노 집합체를 형성하는 것이다.독도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확실히 일본과의 관계는 뚱해지고 지난 나쁜 식민지의 이슈도 함께 불거진다. 과거 잘못에 대한 사죄 요구 등 일본과의 많은 문제들이 수면에 떠오른다. 나의 개인적 믿음은 한국의 대부분의 정치가들의 최대의 두려움은 아마도 일본이 언젠가 제대로 완전히 사과하는 일일 것이다. 일본이 만약 독도에 대한 억지 주장을 철회하고 더이상 교과서를 포함한 어떤 책에도 그들의 전쟁을 영광의 시대로 적지않고 전쟁을 일으키고 일본군 위안부에게 저지른 만행을 완

  • 지역신문 살리기

    지역신문 살리기 지면기사

    민주주의의 기본은 다양한 목소리의 공존이다. 다수 의견만 큰 소리를 내고, 소수 의견이 제 소리를 내지 못할 때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게 된다. 정치, 경제, 문화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중앙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사회구조에서 중앙과 지방의 여론 균형성, 다양성은 존재할 수가 없다. 이 땅에서 지방은 모든 면에서 변방이고 지역민은 영원한 소수자일 뿐이다.지역의 소수 목소리를 대변하는 지역신문들이 죽어가고 있다. 이미 많은 지역신문들은 뇌사상태에 빠져있거나 산소 호흡기에 기대어 겨우 목숨만을 연장하고 있을 뿐이다. 지역신문이 이렇게 몰락하게 된 원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중앙지의 지나친 독점과 정부의 중앙지에 대한 편파적인 지원 때문이다. 공공재 성격을 띠고 있는 신문시장을 시장의 자율에 맡겨놓으면 조중동이 모든 것을 독과점하게 되는 정글의 법칙이 작동될 수밖에 없다. 중앙지들은 1년만 구독하면 6개월 무료, 자전거, 선풍기, 상품권은 물론이고 심지어 현금까지 지급하는 등 시장 질서를 크게 어지럽히고 있다. 여기에 이명박 정권은 여론의 다양성 명분을 내세워 조중동에 종합편성채널이라는 방송사업까지 내주어 이들은 지역의 광고시장까지 침범하게 되었다. 두 번째 원인은 지역신문의 지나친 난립이다. 부산과 대구, 강원 지역을 제외하고 대부분 지역의 일간신문들이 너무 많다. 솥단지의 밥은 한정되어 있는데 숟가락 들고 덤벼드는 사람은 계속 늘고 있으니 모두가 배곯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라북도 전주지역은 인구가 고작 65만명 정도인데, 지역일간신문은 무려 13개이다. 인구비율로 따지면 세계에서 가장 언론의 자유가 넘쳐나는 도시이다. 발행부수가 1천부 미만이고 오직 관공서에만 배달되는 신문도 있다고 하니 참으로 어이가 없다. 이런 난립현상은 광주-전남, 경기지역 역시 마찬가지다.이렇게 지역신문들이 난립하는 이유는 지역신문시장의 기능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반시장의 경우 적자를 보는 회사는 보이지 않는 손의 작동에 의해 자동으로 퇴출된다. 그러나 지역신문시장은 새로운 신문이 시장에

  • 지식의 노예

    지식의 노예 지면기사

    한강의 기적을 경험한 우리나라는 급성장과 함께 그 속도와 성취감에 중독된 느낌이 든다. 물론 중독 자체는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속도중독과 성공집착은 우리국가에 대단한 경쟁력을 가져다주며 어마어마한 원동력을 제공해준다. 하나 이에 의한 사회적 부작용도 무시하지 못한다. 부작용의 증상은 세계 자살률 2위와 낮은 행복지수로 뚜렷하게 진단되어 있고 다양한 사회부문에서도 고통의 자국은 선명하다. 딜레마다. 자연자원이 희박한 우리나라로서는 인간자원을 최대로 활용해야 하고 선진국의 문턱으로 들어섰다고는 하나 앞으로 해결해나갈 과제들이 무겁게 우리 어깨를 누르고 있어 긴장을 놓을 틈이 없다. 어떻게 하면 지속적이고 발빠른 발전을 유지하면서 우리의 행복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사회와 개인의 진화가 동시에 진행돼야 올바른 해법이 나오지않을까 싶다. 만약 지금 나날이 거론되고 있는 사회복지가 사회적 진화의 열쇠라면, 개인적 진화의 핵심은 바로 교육에 있다. 교육은 사회가 축적한 지식, 기술, 습관, 가치관 들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아주 엄격한 주입식 방식으로 지식과 기술을 전달해왔고 시험과 성적을 우선시 하며 인재들을 발굴해왔다. 그러나 지식이 전달되는 과정에서의 습관과 가치관, 그리고 인격형성은 고려되고 있는지 궁금하다.우리나라 학생들과 의사소통을 할 때마다 느끼는 어려운 점이 있다. 질문을 해야할 때 또는 받았을 때 발언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의 발언자체가 두려운 것인지 아니면 틀린 말을 할까 우려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위험한 습관이 될 수 있다. 배움의 장에서 자기 의견이나 질문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것은 학생이 갖춰야 할 기본적 태도이며 이런 습관의 연장선에서 토론식 교육이 가능해진다. 동료 앞에서 감정이나 의사를 표현하는 연습은 초등교육 시절부터 진행돼야 하며 그 연장선상으로 중학교 시절부터 토론식 수업이 진행돼야 한다. 토론식 교육의 장점은 주어진 정보를 접했을때 동료들과 다양한 각도의 해석 및 견해를 교환하며 그 정

  • 대제학도 양보했던 선비정신

    대제학도 양보했던 선비정신 지면기사

    조선왕조 500년은 선비정신으로 버텼던 나라였다. 여러 차례 국난을 당했었고, 임진·병자의 양란에는 사실상 국가가 망하기 직전에 이른 참혹한 형편의 나라였다. 그러나 망하기 직전의 나라는 다시 살아나 무려 500년의 긴긴 세월을 견뎌냈었다. 그렇게 버텨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여러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하나만 든다면 바로 조선민족의 선비정신이었다. 국난에는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나라를 건져내야겠다던 선비정신, 자신의 몸보다는 국가가 더 중요하다는 선비정신, 못 먹고 못 입고 못 살아도 한 가닥 양심과 도덕성만은 버리지 못한다던 선비정신, 모두 함께 살고 기쁨과 슬픔도 남과 함께 나누자던 선비정신이 조선을 동방예의지국으로 만들었고 나라가 그만큼이라도 버틸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때라고 모두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상류층의 지성인들은, 오늘처럼 돈만을 위해서, 권력만을 위해서 염치고 뭐고 없이 자기가 제일 잘났고 자기만이 제일 훌륭하다고 여기지 않은 사람이 많았었다. 자기만이 반드시 대통령이 되어야 하고, 자기만이 가장 훌륭하다고 떠들면서 남은 모두 자기 아래로 보는 그런 몰염치한 사람이 오늘처럼 많지는 않았었다. 자기보다 학식이 높고, 인격이 훌륭하고 덕행이 높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큰 벼슬이나 이권이라도 기꺼이 양보할 줄 아는 선비정신을 지닌 인물들이 상당히 많았었다. 자기만이 대통령감이라고 떠들면서 추호라도 양보하면 정치인의 자격이 없다고 매도당할 정도의 그런 몰상식한 세상이 그때는 아니었다. 상대방을 깎아내려야만 자기가 올라가고, 상대방을 조금이라도 칭찬하면 자신이 추락된다는 요즘의 그런 논리를 지니지 않은 선비들이 그때는 그래도 있었다. 그것이 조선의 힘이었다. 조선시대의 그때로 가보자.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수정실록'에 나오는 기록이다. 선조 원년(1568) 8월 초하루의 기사에 퇴계 이황이 홍문관 겸 예문관 대제학에 제수되는 기록이 있다. "이황이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게 하다. 이때 박순이 대제학이 되자 이황은 제학으로 있었는데, 박순이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높은

  • 도그 데이즈(Dog days-삼복 더위 때)

    도그 데이즈(Dog days-삼복 더위 때) 지면기사

    서양에서 '도그 데이즈(dog days -직역-개같은 날들)'는 여름 중 가장 덥고 습기가 많은 날을 뜻한다. 더위가 계속되는 요즘 잠자리에서 일어나 맞는 아침 그 자체가 고통과도 같다. 어떤 일도 하기 싫을 정도의 고통스런 열기와 높은 습도 때문에 온 몸의 힘과 에너지가 쏙 빠져나갈 정도다. 이런 날씨와 맞서기 위해선 에어컨을 켜고 사는 일이 상책인 듯하다. 아니면 산으로 여행을 떠나 시원한 개울가 다리 밑에 눕거나 말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개고기를 먹는 일로도 더위를 대신할 수도 있겠다.그래서일까? 엉터리 주장이라는 것이 명백하지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개같은 날들'이란 의미는 한국으로부터 온 것일 수도 있다. 그것도 수세기를 걸쳐 오면서 아주 더운 여름날 동양의학에 따라 몸의 열을 식히고 여름에 기를 보충하기위한 방법으로 말이다. 근래 들어 부쩍 나의 절친한 친구들이 함께 영어로 '도그(dog-개)'를 먹으러 가고 싶은지 물어왔다. 당연히 영어로 들어도 그것이 길에서도 사먹을 수 있는 핫도그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외국인들이 개고기를 먹는데에 부정적일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친구들이 조심스럽게 주저하며 얘기하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몇 차례 이미 개고기를 먹은 바 있으며 그걸 먹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어려서부터 늘 집에서 친구와 가족과도 같았던 개들과 살아온 내가 이렇게 개고기를 먹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내 한국인 친구들과 외국인 친구들은 더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다. 지금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어렸던 시기의 개의 이름은 푈자였다. 북실북실한 털로 덮인 따듯한 배를 베고 누워 함께 잠이 들었던 나의 첫번째 친구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다른 동물들 역시 사랑하고 내 어린 시절엔 토끼며 새들이며 그밖에도 다양한 다른 동물들과 한집에 살았다. 내가 키우던 그 동물들을 무척 사랑했지만 그렇다고 나는 채식주의자가 되지는 않았다.그러나 거의 모든 종류의 동물을 먹으면서 단지 개고기를 먹는 것을 야만인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이상

  • 모두가 공무원 교사가 되어야 하나

    모두가 공무원 교사가 되어야 하나 지면기사

    필자는 어렸을 때 매달 25일을 그리도 기다렸다. 그날은 평소 잘 먹어보지 못하는 생과자를 먹게 되는 행복한 날이기 때문이다. 매달 25일은 평생 공무원이셨던 아버님의 월급날이었다. 아버님 월급날만 되면 온 식구들이 밤늦게까지 눈 빠지게 아버님을 기다렸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자식들은 아버님이 사오시는 생과자를, 어머님은 아버님의 월급봉투를 기다리셨다.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면 여간 손해가 아니었기에 어떤 때는 밤 12시 까지 두 눈을 비벼가면서 기다린 적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리도 기다리던 아버님이 오셔서 생과자를 풀어놓으면 5명이나 되는 자식들은 우르르 달려들어 정신없이 먹어댔다. 그러나 어머님은 누런 월급봉투에서 꺼낸 몇 푼 안 되는 돈을 세어 보시곤 항시 한숨만 내쉬시고, 멋쩍으신 아버님은 우리 자식들에게 너희들은 절대 공무원하지 말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데도 우리 5남매 중 필자를 포함하여 3명이 아직도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피할 수 없는 집안의 팔자라는 생각이 든다. 한 때는 기피직업이었던 공무원이 이제는 선망의 직업이 되었으니 세상 참 많이 바뀌었다. 필자가 지난 4월 전라북도 도민 1천명을 대상으로 자녀들이 어떠한 직업을 갖기를 바라는 지 조사하였다. 조사결과 아들과 딸의 선호 직업은 각각 달랐는데 아들의 경우는 공무원이, 딸은 교사가 가장 많았다. 먼저 아들의 경우 공무원이 22.7%로 가장 선호되고 있는 직업이며, 이어서 의사가 10.1%로 두 번째, 사업가가 9.9%로 세 번째로 많이 지적되었다. 이밖에 교수(9.4%), 외교관(7.6%), 법조인(5.3%), 과학기술자(4.6%), 회사원(4.1%), 교사(3.8%), 언론인(3.0%) 순으로 많이 지적되었다. 딸의 경우는 4명중 1명꼴인 26.6%가 교사를 가장 선호하였으며, 공무원이 15.0%로 두 번째로 많았다. 이밖에 약사(8.0%), 간호사(6.0%), 은행원(4.0%), 디자이너(4.0%), 교수(3.8%), 외교관(3.5%) 순으로 많이 지적되었다. 이러한 결과를 20년 전

  • 영웅의 길

    영웅의 길 지면기사

    루드비히 반 베토벤(1770~1827)은 그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쓴 1802년에 하나의 악상에 대한 아이디어를 갖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803년에 서양음악사의 전환기를 장식할 곡을 창조한다. 이 곡의 원고 첫장에는 겸손하게 필기된 작곡가의 이름 위에 '보나파르트 헌정'이라고 굵은 글씨로 표기됐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작곡품이 초연될 3개월 전인 1804년 5월, 프랑스 혁명의 집정이었던 나폴레옹이 자기 자신을 황제로 공포하고 나서자, 여기에 배신감을 느낀 베토벤은 원고 위의 보나파르트의 이름을 종이가 찢어지도록 긁어 지웠다고 한다. 결국 이 곡은 1806년 '영웅 교향곡(Eroica Symphony), 위대한 인간의 기억을 기념하며'라는 곡명으로 출판됐다. 에로이카(Eroica)는 이탈리아어로 '영웅적' 이라는 뜻을 지니는 단어다.영웅의 의미를 사전에서는 '위험과 불우에 처한 또한 약자의 입장에서 전인류의 안녕을 위해 용기와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정의로운 일을 하는 자' 라고 되어있다. 이 뜻은 원래 군사적인 용감한 행위와 관련돼 사용됐으나 근대에는 도덕적 고결함과 관련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하나 사실 어느 인물이 사회에서 영웅적 지위로 우상화되기 위해서는 위의 면모 뿐 아니라 뛰어난 능력과 통찰력 있는 시대정신까지 갖춰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 영웅이 완벽하길 기대한다.그렇다면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자. 과연 영웅이 되고 싶어서 개인의 철저한 계획아래 실현하는 경우가 있는가? 나폴레옹이 프랑스 혁명을 이룩해 영웅이 된 것은 결코 아니다. 프랑스혁명은 그가 나타나기 전 벌써 진행중이었다. 미라보, 라파예트 등 각자 다른 사상을 가진 혁명가들에 의한 연쇄적 사건들이 축적되고 있었으며, 1799년 혁명 막판에 나타난 나폴레옹 장군은 쿠데타를 성공시켜 혁명의 절정을 찍는다.이상가들에 의해 시작된 프랑스혁명은 한 실용주의자의 혁신에 의해 추진력을 가지게 됐으며 '말하는 시대'는 '일하는 시대'로 교체됐다. 특별한 당파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 국민의 공공이익을 존중하고 대중의 지지를 얻는 질서

  • 뇌물죄는 반드시 들킨다

    뇌물죄는 반드시 들킨다 지면기사

    '절대 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다'라는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들은 그냥 떠도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리에 가까울 정도로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말임에 분명하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헌법에 의해 권력은 십년에 이르지 못하고, 5년에 그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권불5년이다'라고 본다면 권력의 무상함은 옛날의 일과 다르다. 상왕의 권력이라던 '영일대군', 최고 권력자의 멘토라던 '방통대군', 차관급이면서도 왕의 지위에 가까운 권력을 지녔기에 '왕차관'이라던 권력자들이 연달아 구속되어 감옥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세간의 이야기가 이렇게 맞아떨어지는 것인지 참으로 신통하기만 하다.부패했기 때문에 천년의 제국 로마도 힘없이 망해버렸고, 500년의 조선왕조도 부패했기 때문에 망하고 말았다. 부패하면 나라도 망한다던 말도 역시 맞는 말임에 틀림없다. 권불5년인데, 천년 만년 가리라고 위세당당하게 권력을 쥐락펴락하던 그들의 신세가 너무나 허망하게만 보인다. 국가를 대표하여 자원외교를 펼치면서 세계를 누비던 권력, 4대 종편을 허가해 주면서 언론매체를 장악했던 권력, 모든 인사는 왕차관을 거쳐야만 이루어진다던 그런 권력, 그들은 모두 '뇌물'이라는 사슬에 걸려 막강한 권력의 힘을 잃고 옥창의 별빛을 바라보고만 있게 되었다.한국의 역사는 '뇌물'과 무관한 때가 많지 않았다. 청와대 안방에서 뇌물을 챙겼다고 임기가 끝나자 두 전직 대통령(전씨·노씨)이 뇌물죄로 처벌받은 것을 비롯하여, 대통령 주변의 실세들이 처벌되었던 것이 한두번이 아닌데, 왜 그런 범죄는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인가. 아버지와 아들은 천륜의 관계다. 대통령의 아들도 뇌물죄만 확인되면 천륜도 어쩌지 못하고 구속시킬 수밖에 없는데, 여타의 친인척이나 실세들이라고 빠져나갈 어떤 길이 있겠는가.'세상에 완전 범죄는 없다'는 말도 우리가 경험한 바로는 진리에 가까운 말이다. 공직자들의 청렴만이 나라를 바르고 깨끗하게 다스릴 수 있다고 그렇게도 역설했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그의 '목민심서'에서 명확하게 밝힌 바 있다. "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