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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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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과 가고파 지면기사
노산 이은상, 현대시조 개척의 선구자다. 특히 1932년 발표된 '가고파'는 김동진이 작곡하여 고향이 어디에 있건 향수에 젖어들면 누구나 부르곤 하는 국민 애창 가곡이다. 이 노래가 발표된 지 81년 만인 올해 마산역장은 문화적 관문으로 역의 분위기를 가꾸고자 하는 의욕에서 '가고파' 시비를 세웠다. 그러나 민주성지 마산을 부르짖는 일부 시민단체의 반발에 부딪혀 시비 존폐문제는 진퇴양난에 빠져있다. 차제에 '가고파' 시비 존립의견을 지지하는 여섯 가지 이유를 들어 갈등 종식에 조그마한 지혜를 보태고 싶다.첫째 '가고파'는 작가의 생애보다 작품에 포인트를 맞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마산의 관문인 마산역에 '가고파' 시비를 세운 뜻은 정감 있고 아름다운 마산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이지 노산의 생애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전 국민이 알고 함께 부를 수 있고, 미항 마산의 모습을 잘 알릴 수 있는 시로 '가고파' 만한 작품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둘째 노산은 친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때 '친일혐의' 운운하면서 워낙 많이 언론에 오르내려서 지금도 노산을 친일인사로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2009년 11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이은상은 올려있지 않다. 1903년에 태어나서 1982년에 타계한 노산의 일생을 살펴볼 때 일제통치 36년이 그대로 그의 생애를 관통해 갔음에도 불구하고 친일인사는커녕 오히려 일본에 항거하다 옥고를 치른 애국투사였다.셋째 노산은 권력에 연연한 인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노산의 중요 프로필을 보면 대학교수, 언론사 간부, 문화단체 회장을 지낸 것이 대부분이다. 그가 권력에 집착했다면 장관이나 총리, 국회의장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욕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넷째 특히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대체로 옹호하는 입장에 섰지만, 그의 일관된 진심은 민족사랑, 조국사랑이 바탕이었다.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노산은 일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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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이승만대통령 낚시터 지면기사
2012년 7월 청남대에서는 '건국의 대통령 이승만을 만나다'라는 특별전이 열렸다. 이 전시회가 열릴 즈음, 그 분과 관련된 희귀 사진들이 대거 전시공개되었다. 우연히 이승만 대통령의 희귀사진들을 살펴보다가 나는 뜻밖에 사진 하나를 발견했다. 대통령이 창덕궁 정자에서 프란체스카 여사와 낚시질을 하는 사진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이승만 대통령의 낚시 취미에 대해 깊이 있게 조사하다가, 재미있는 가설에 도달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일생은 낚시와 함께한 세월이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관련된 우스갯소리중 그 유명한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란 아부도 낚시중 일어난 일이었다고 한다. 이 농담은 이승만 대통령이 진해에서 낚시를 즐기던 중 있었던 일로, 지금도 그 장소는 이승만 대통령 별장 및 정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65호)로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화진포에 있는 이승만 대통령 별장도 낚시와 뗄 수 없는 장소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휴양을 위해 찾았던 화진포 별장에는 생전의 유품들을 복원해서 생동감있게 전시하고 있다. 여기에는 유족들이 기증한 것으로 알려진 대통령이 사용하시던 낚싯대가 전시되어 있다. 이곳 화진포 별장에서 즐겨 낚시를 하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전시하고 있는 듯했다.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던 날도 낚시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일 오전 8시경 대통령은 창덕궁 후원에서 낚시를 하던중, 황급히 달려온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북한의 남침사실에 대해 보고받았다고 알려져 있다.그 분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했던 4·19 의거에도 낚시가 있었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전국민의 분노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던 4월 11일. 부정선거 규탄 시위 도중 사라진 17살 남학생의 주검이 발견됐다. 어떤 낚시꾼이 마산항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시신은 시위중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군이었다. 당시 김주열 군의 주검은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는 참혹한 상태였다. 김주열의 죽음은 부패한 정권에 대한 분노의 폭발점이 되어, 마침내 4·19를 통해 12년간 장기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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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를 여는 한민족네트워크 지면기사
네트워크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 개인·기업뿐만 아니라 국가·민족까지도 네트워크를 통하여 소통의 기반을 넓혀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네트워크는 또 다른 네트워크를 낳고, 수많은 네트워크가 모여 하나의 허브를 만들고, 서로 다른 허브들이 연결되어 더 큰 네트워크를 만든다. 1+1=2로만 인식되던 것이 100도 되고 무한대(∞)도 되는 새로운 가능성의 시대, 더불어 살아가는 시대를 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모두가 '사회적 연결고리'(social connectedness)가 활성화된 결과이다.그런 시각에서 한민족의 과거와 현재를 보자. 150여년 전, 당시 조선사회에서 전개되었던 정치·경제·사회적 상황 하에서 어쩔 수 없이 내 나라를 등져야만 했던 해외 이주자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어서 하와이 멕시코 등지로 제법 큰 규모의 집단이주도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들은 국권 상실과 함께 졸지에 외지에서 나라 없는 백성이 되고 만다. 일제 강점기에도 강제동원, 강제이주, 징병 등등의 이유로 원하지 않는 해외 이주가 계속되었다. 그토록 원하던 해방이 되었지만 이들은 남북이 갈라지고 국경이 가로막혀 돌아오려야 돌아올 수 없었다. 정부수립 이후에도 사람들의 해외이주는 계속 되었다. 해방 전 이주는 자기의사에 반한 이주였거나 국내 사정이 워낙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던 강제이주라면 해방 이후의 이주는 보다 나은 삶을 찾기 위한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해외이주라는 차이가 있다 하겠다. 그렇게 고향을 떠난 사람들과 그 후예들이 오늘날 전 세계 170여개국에 720만명에 이른다.그렇지만 태평양바다 건너에서, 중앙아시아와 동북만주에서, 일본열도에서, 그리고 5대양 6대주 이역의 땅에서 우리와 아무런 관계없이 살고 있을 걸로 생각했던 나라를 떠난 이들과 그 후손들은 놀랍게도 자신들의 뿌리와 문화를 보존하기 위하여 노력하여 왔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쿠바의 한인 후손 3~4대들이 인천의 이민박물관을 방문하여 100여년 전 제물포를 떠났던 선조들의 사진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짓는 장면은 그들이 이제 모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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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유산과 인문학을 통한 도시재생 지면기사
인간이 집짓기를 시작한 이래로 그들의 희망은 안전하고 편리하며 아름다운 집짓기를 원했을 것이다. 동물이나 곤충까지도 건축적 본능이 있는데 인간은 건축과 도시를 건설함으로써 신에 도전이라도 하듯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열망을 끊임없이 드러내곤 했다. 현재 세계적으로 도시화 추세는 50%에 이르고 장차 20년 후가 되면 약 75%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토마스 무어가 유토피아라는 단어를 만들어내기 이전에도 인류는 현실세계의 한계를 뛰어넘는 신세계를 원하였다. 이런 인류의 열망은 어려움으로 가득한 현대사회에서 이상향으로 나타나며, 해결 방안으로 도시구조에 대한 얘기도 거론되고 있다. 무어는 이상도시왕국 건설을 통해 당시 영국의 사회경제적 병폐와 종교적 자유 및 개방화되어가는 유럽 경제체제에 대한 경제적, 공유사회적 유토피아를 제시하려고 하였다.그렇다면 온갖 열망으로 가득한 지구상에서 공동생산, 공동분배에 6시간 노동하고 8시간 잠자고 나머지는 오락이나 취미생활을 하며, 경직된 관료주의가 아닌 민주주의와 민중 중심의 사회주의가 정립되는 나라가 있을까. 또한 도시공간이 유토피아처럼 구현될 수 있을까? 19세기말 영국인 하워드는 대도시와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지역에 전원과 도시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는 자족적인 도시건설이 황폐화된 도시를 개선하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서 건축가 라이트는 브로드에이커 시티라는 이상도시안을 내놓았다. 이 안은 극단적인 저밀도도시로 특징적인 것은 교통체계다. 거주자 모두가 자동차를 소유하고 헬기형태의 교통수단을 이용한다. 입체화된 여러 층의 도로로 구성되어 철도, 화물수송차, 고속교통수단인 모노레일 등이 층별로 이용된다.이처럼 혁신적인 사상가와 건축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도시공간을 통해 유토피아를 실현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르네상스 이래로 수백년간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열망과 도시성장이 같기 때문이다. 즉 산업화를 거치면서 빠른 속도로 성장한 현대도시들은 일정한 공간 안에 사람과 건물을 비롯한 엄청난 재화를 탐욕적으로 몰아넣었다. 결국 도시는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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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밤의 영웅론 지면기사
가끔 밤하늘에 선을 그으며 떨어지는 유성을 발견할 때가 있다. "아, 또 지도자 한 사람이 세상을 뜨는구나." 나는 혼잣말로 탄식한다. 그런 상상력은 물론 역사소설을 읽어 얻은 것도, 무협지를 통해 학습한 것도 아니다. 유년시절 어른들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그런 상상력을 갖게 했다. 여름이 되면 별식을 만들어 함께 먹으면서 식구들은 멍석이나 마루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며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곤 했다. 그런 정겨운 분위기 속에서 어머니는 곧잘 옛 얘기를 해주셨다. 우리는 영웅들의 얘기를 들으며 꿈을 꾸었다. 가난하기 그지없는 시대의 아이들이었지만 그런 얘기들이 우리들에게 꿈을 갖게 했다. 삭막한 세상을 건너면서 허방에 쉽게 빠지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다면 그런 영웅을 닮고 싶었던 소박한 소망 때문인지도 모른다.영웅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탄생될 수 있지만 대체로 수난의 시대에 나타난다. 주권을 상실한 나라, 민권을 탈취당한 독재정권, 전쟁과 기아상태에 있거나 민족이 곳곳에 흩어진 불행한 나라, 이런 비정상적인 환경 속에서 그 어둠을 헤치고 일어서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여 존경을 받게 되는 사람이 영웅이다.그러나 오늘날은 영웅의 탄생이 어려워졌다. 대체로 많은 나라들이 민주적 절차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고 있고 쉽게 명분 없는 전쟁을 할 수가 없고 매스컴의 발달은 한 개인의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용인하지 않고 그 내면을 낱낱이 밝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쩌면 정상적인 나라의 국민들은 영웅이 출현하지 않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또 아무나 영웅이라 말할 수도 없다. 토머스 카알라일은 영웅의 조건으로 성실성과 통찰력을 들었다. 그래서 평생 갖지 않겠다는 소신을 실천한 걸인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영웅으로 인정하면서도 통찰력이 부족한 나폴레옹은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이런 견해와 관계없이 프랑스의 많은 사람들은 그 반대의 입장을 취할 것이다.동서양이 인정하는 현존하는 영웅이 있다면 누가 그 호칭에 가장 적당한 인물일까? 그 답변으로 만델라를 든다면 나는 기꺼이 찬성할 것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실시한 최초의 평등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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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대통령 기념식수는 가짜 지면기사
학창 시절 도산서원에 간 적이 있었다. 거기서 거짓을 행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자 했던 조선시대 올곧은 선비정신에 대해서 들었다. 그리고 천원짜리 지폐의 뒷면에 그려졌던 나무 '금송'을 기억한다. 금송의 표지석에는 "이 나무는 박정희 대통령각하께서 청와대 집무실 앞에 심어 아끼시던 금송으로서 도산서원의 경내를 더욱 빛내기 위해 1970년 12월 8일 손수 옮겨 심으신 것입니다"라고 새겨져 있다. 거기서 나는 친구들과 유명한 나무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던 추억이 남아 있다.2011년 나는 국가기록원에 소장된 도산서원 관련 파일을 읽다가 도산서원의 금송이 혹시 가짜가 아닌가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결국 나는 문화재청과 안동시에 도산서원에 심어진 금송이 박정희 대통령이 심은 나무인지의 여부를 묻는 사실조회를 신청했고, 두 기관은 고심 끝에 '현 금송은 1973년 4월 22일 새로 구입한 것을 원위치에 재식수한 것'이라고 답변했다.국기기록보존소에 보관된 문서에 따르면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이 기념식수한 금송은 2년만인 1972년 고사했고, 현 금송은 안동군이 당시 예산 50만원을 들여 한국원예건설을 통해 1973년 심은 나무로 판명되었다. 대통령 기념식수가 관리소홀로 고사하자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해 몰래 새 금송을 심은뒤, 지금까지도 사실을 은폐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도산서원의 금송은 우리나라에서는 자생하지 않는 일본 특산종이란 이유로 여러차례 구설에 올랐었다. 금송은 금강송 등 소나무와는 완전히 다른 낙우송과로 일본에서만 자라는 특산종이며 고유종으로, 한반도에는 자생하지 않는 식물이다. 일제시기 현 청와대 자리에 조선총독관저를 건립할 때, 총독부 관료들과 일본 군인들이 일본에서 옮겨다가 심은 수종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금송은 일본을 대표하는 나무이자 일본 왕실과 사무라이 정신을 상징하는 나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화폐도안으로 적절치 못하다는 비판이 있었다. 게다가 금송이 40년간 지나치게 성장해서 도산서원의 경관을 가리는 등의 문제가 드러나자 안동시는 2003년 금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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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의 꿈을 생각하며 지면기사
국가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꿈을 꾼다. 1776년 대서양 연안에서 출발했던 신생 미국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대륙을 가로질러 태평양까지 도달하는 꿈을 꾸었고, 그로부터 70년 후 멕시코와 전쟁 끝에 지금의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5개주를 매입함으로써 20세기 팩스 아메리카나 시대를 열었다. 우리에게도 꿈이 실현되었던 위대한 역사의 장이 많다. 멀리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대정복과 신라의 삼국통일 위업도 꿈의 결실이고, 가까이는 1960년대 잘 살아보세 꿈과 80년대 민주화의 꿈은 오늘의 발전된 한국의 모습으로 실현되었다.중국도 꿈을 꾸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작년 11월 당 총서기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을 위한 '중국의 꿈'(中國夢)을 천명하였다. '중국의 꿈'이 아메리칸 드림과 같이 13억 모두가 잘살고 행복한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해석도 있고, 중국 전래의 유교문화와 공자사상의 회복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시 주석이 '중국의 꿈'을 발표한 장소가 국립박물관이라는 사실이 내용보다 더 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국립박물관은 아편전쟁(1840) 이래 중국이 서방 열강에 의해 당했던 '굴욕의 세기'를 공산당이 영광스럽게 만회했음을 가르치는 선전의 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의 꿈'이 어떤 함의를 갖든 그 것이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은 거인의 귀환과 같이 불안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한편 일본의 아베 총리가 꾸는 꿈에는 시대착오적인 부분이 있다. 작년 말 재집권에 성공한 이후 아베 총리가 보인 대외침략 부인 발언, 각료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허용 등 우경화 행보는 그의 역사 인식이 퇴행적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더욱이 지난달 참의원 선거 압승으로 상하원을 다 장악한 아베의 자민당이 이른바 보통국가로 가기위한 평화헌법 개정과 같은 국수주의 기치를 더욱 노골적으로 내세우지 않을까 걱정된다. 만에 하나 중국의 정책에서 패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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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 즈음에 지면기사
인정하기 싫지만 내가 벌써 환갑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 60갑을 맞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자연의 섭리이지만 자꾸 이를 거부하고 있다. 특히 요즘은 다들 건강하고 오래 사니 환갑이라 하여 어디에다 명함도 못 내놓는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 없음은 몸과 마음에서 나타나는 늙어감이다. 어느덧 눈도 침침해지고 다리에 힘도 없고 인지능력도 많이 떨어져 간다. 제자의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자꾸 섭섭함을 느끼는 것이다.공자님은 '논어'에서 나이 예순에 이르자 '천지만물의 이치에 통달하고, 듣는 대로 모두 이해할 수 있다'하여 이순(耳順)이라 하였는데 아무리 보통사람이라고 하여도 난 도무지 그렇지 않다. 명색이 교수이고 이제 손자까지 보았는데 오히려 화를 더 자주 내고 잘 토라지고 갈수록 어린 애로 변하고 있는 것 같다. 생물학적으로 여자에 비하여 남자가 나이 들면 원래 그렇다 한다. 그래서 조금은 위로가 되지만 몸은 쇠잔해 가고 마음은 쫌생이처럼 좁아진다. 살 만큼 살았고 누릴 만큼 누렸으니 이젠 욕심을 버리고 적당한 위치로 물러나 자족하고 은둔하듯 지내야 할 터인데 아직도 꼭 이름 석자를 어딘가에 올리려 하고 가지고 갈 수도 없는 재산을 모으려 한다. 이런 나의 모습이 마치 떨어지려는 밧줄이라도 잡고 바둥거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여 불편하다.나보다 생일이 빨라 이미 환갑을 지낸 아내는 한바탕 소동을 치렀다.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인인 아들 내외는 일생 아들만을 위하여 평생을 살아온 엄마 환갑엔 전혀 관심도 없었다. 엎드려 절 받는 것처럼 내가 며칠 후면 엄마 환갑이야! 라는 정보를 미리 주어 겨우 몇 푼 용돈을 받아내는 장면을 연출하였다. 예전엔 거의 아들과 동지적 입장에서 공감하였던 내가 이젠 아내의 편이 되었다. 아니 더 솔직히 얘기하면 나도 몇 달 후면 환갑이 되어 겪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번에 아들 편이 되지 않고 아내와 동지가 된 것이다.사실 난 몇 년 전부터 노후준비를 나름대로 하고 있다. 건강관리, 정년 이후 일거리 찾기, 악기연주와 합창단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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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는 철새들 지면기사
젊은 영혼의 편력을 도시적 감수성으로 노래해서 화제가 되었던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최영미 시인이 새로 펴낸 시집 '이미 뜨거운 것들'에는 '한국의 정치인'이란 작품이 있다.대학은 그들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하고/기업은 그들에게 후원금을 내고/교회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병원은 그들에게 입원실을 제공하고/비서들이 약속을 잡아주고/운전수가 문을 열어주고/보좌관들이 연설문을 써주고/말하기 곤란하면 대변인이 대신 말해주고/미용사가 머리를 만져주고/집안 청소나 설거지 따위는 걱정할 필요도 없고 (도대체 이 인간들은 혼자 하는 일이 뭐지?)지나치게 직설적이어서 굳이 설명을 덧붙일 필요조차 없다. 여기 그려진 현실은 당연히 이 시 속의 가상(假想)현실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 속의 가상(假想)현실을 바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게 되는 실제의 풍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래서 이 시에 공감하는 독자가 많다. 공감하는 독자가 많다는 것은 이 시가 현실에 가깝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깨어있는 일부 정치인들이 이런 일상으로 부터 탈출을' 꿈꾸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해왔지만 안타깝게도 눈에 띄는 성과가 별로 없다. 또 이 풍경이 중앙정치의 한 단면일 뿐이라고 우기는 사람에게도 고개를 끄덕여 주기가 어렵다. 학식도 인품도 의심스러운 사람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예사로 주는 지역 대학들이 있고 무소불위의 파워로 제왕적 지자체장을 지낸 뒤 사법 처리되는 경우를 우리는 허다하게 보아왔기 때문이다.지금은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풍이 불기 시작했다. 지역 정가의 미풍은 태풍을 예고하는 신호다. 텃새들은 텃새들대로 새로운 일전을 준비하고 있고 철새들은 철새들대로 성공을 꿈꾸며 조심조심 끼어들기를 시도하고 있다. 텃새라고 무조건 믿을 수도 없고 철새라고 굳이 내칠 필요도 없다. 여러 지역, 여러 기관에서 경험을 쌓은 눈 밝은 철새들이 있다면 근시안적이고 비전 없는 텃새들보다 훨씬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선거 때만 고개 숙이고 찾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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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주립박물관 조선왕실어보는 도난품 지면기사
2010년 이후부터 나는 미국 LA로 건너간 조선왕실 어보(御寶)의 행방을 추적 중이다. 현재 LA의 주립 박물관(LACMA)에 전시중인 이 어보는 높이 6.45㎝, 가로·세로 각 10.1㎝로 거북이 모양의 손잡이가 있으며, 조선 11대 임금인 중종의 왕비 문정왕후의 존호인 '성열대왕대비지보(聖烈大王大妃之寶)'란 명문이 새겨져 있다. 1547년 아들인 명종(재위 1545~1567)이 "경복궁 근정전 섬돌 위에 나가 '성렬인명대왕대비'라는 존호를 올리고 덕을 칭송하는 옥책문과 악장을 올렸다"는 실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서울 종묘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었던 조선왕실의 어보가 어떤 이유로 LA까지 흘러가게 된 것일까?이 어보의 존재가 밝혀진 것은 2010년 여름이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미국지역에 있는 한국문화재의 실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LA 주립박물관이 문정왕후 어보를 소장하고 있는 사실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정부는 6·25를 전후한 시점에 유출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확실한 입장은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그즈음 나는 직접 미국 메릴랜드의 국가기록원을 방문, '아델리아 홀 레코드'라고 불리는 문서 전문을 입수하게 되었다. 미국 국무부 관련 '아델리아 홀'여사가 작성한 이 문서는 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으로 흘러들어온 불법 문화재를 조사하고, 원산국으로 문화재를 반환한 경위를 작성한 문서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기에 6·25전쟁 당시 한국에서 문화재를 약탈한 미군범죄에 대한 조사 보고서와 반환 경위에 대한 기록이 수록되어 있었다.아델리아 홀 레코드의 마이크로필름 4 :774에는 '한국의 도장(Korean official seals)'이란 파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열어 보니 1956년 5월 21일 아델리아 홀이 당시 양유찬 주미 한국 대사와 전화로 나눈 통화내용이 있었다. 47개의 조선왕실 어보가 미군에 도난당했다고, 미국 정부에 분실사실을 신고하는 내용이었다.더불어 '한국의 보물이 사라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