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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인의 자성과 미래 지면기사
인류는 정착생활을 한 이래 끊임없이 다양한 건축을 지속하고 있다. 심지어 곤충들도 안전하고 아름다운 집을 짓기에 여념이 없다. 도시는 점적인 건축이 면을 이루어 형성된다. 건축에 의하여 도시의 모습과 성격이 형성되어진다. 인류가 만들어낸 불멸의 유산 중에서 가장 많은 대상이 바로 건축이다. 건축재화의 가치 역시 큰 부분을 차지한다.흔히 건축은 '인간의 생활을 담는 그릇'이라 하거나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라고도 한다. 즉 생활을 담는 공간이기에 인류에게는 필수적인 존재이며 당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척도가 된다. 그러나 산업화와 도시화 이후 건축이 자산적 가치를 지니면서 그 의미는 오히려 부정적으로 변하였다.나는 지방대학 건축과를 졸업하고 어렵게 모교의 교수가 되어 후배이자 제자인 젊은이들을 가르치며 30여년간 참으로 보람되고 행복하게 살아왔다. 부끄럽지만 돌이켜 보니 나름대로 연구업적도 쌓았고 수많은 제자를 두었으며 교수랍시고 적은 지식으로 여기저기 다니면서 많이도 써먹었다. 또한 어려웠던 시절 힘들게 공부하여 성공한 제자들을 보면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그러나 요즘처럼 제자들을 보기가 민망한 때가 없다. 철밥통이라는 교수로서 너무나 안이하게 지내다 이제야 주변을 돌아보는 시간들을 갖고 있는 것이다. 입학생을 선발하기 위한 면접에서 왜 건축과를 지원했느냐고 물으면, 우리시대를 이끌어 갈 건축가가 되기 위해서라고 말하던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입시생을 기억한다. 물론 진정으로 건축가가 되기 위해서 온 것 보다는 본인의 성적에 맞추어 지원한 것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근래 한국건축계의 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아 이들에게서 밝고 원대한 직업인으로서 미래를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런 이들을 위해 교수가 무엇을 해주었고 해줄 수 있는가 생각하니 답답하다.국가발전의 원동력이었던 건설산업시대는 이미 지나간 것 같다. 대도시의 아파트는 줄서서 사려했고 부의 척도가 되었는데 이젠 팔리지 않아서 난리다. 경향각지에 있는 건설사들은 부도가 나고 사라지는 경우가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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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사람 대한으로 지면기사
이스라엘이 1948년 아랍 국가들의 위협 속에서 국가건설을 선언한 이후 국가존망이 걸린 두 번의 결정적인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1967년 6월의 6일 전쟁과 73년 10월 전쟁이다. 이 두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시리아를 주축으로 하는 압도적인 수적 우위의 아랍 연합군의 침략을 격퇴했다. 아랍세계는 더 이상 군사력으로 이스라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인식하였고 결국 1977년 이집트·이스라엘 정상회담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국가로서 지위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쟁 발발 시 해외에서 많은 유대계 젊은이들이 참전하기 위하여 이스라엘로 달려간 것은 잘 알려진 감동적 이야기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도 해외에서 영주권을 가지고 살면서도 고국으로 돌아와 병역의무를 다하는 해외동포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해외 영주권자의 자진 입대 희망자를 위한 '영주권자 입영' 제도가 2004년 실시된 이후 외국 영주권을 취득해 병역을 면제받았지만 자진 입대한 젊은이가 1천명을 넘었다. 무척이나 자랑스럽고 가슴 뿌듯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국내에서도 극히 일부이긴 하나 군 복무를 피하기 위해 부당한 방법을 쓰는 젊은이들이 있는 요즈음 병역의무가 면제되었음에도 군 복무를 자원하는 것은 한민족으로서의 자긍심과 깊은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없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자원입대하고자 귀국한 재외동포 젊은이들과 대화를 해보면 군 생활을 통하여 조국에 대한 자부심, 정체성을 얻기 위하여 입대한다고 말한다. 많은 경우 부모님들의 권유가 있었다고도 한다. 실제로 훈련 중인 국외 영주권자들을 대상으로 입대동기를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한국인으로 인정받고 싶어서'라는 응답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지구촌 170여 국에 퍼져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이 각자의 거주국에서 자리잡고 살아가는 애환과 그들의 성공담은 늘 우리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특히 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젊은이들은 '나의 뿌리는 무엇인가' 하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늘 안고 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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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 한류'를 기다리며 지면기사
10월 수출이 사상 처음으로 5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한국의 경상흑자는 총 422억2천만 달러로 같은 기간 일본의 415억3천만 달러를 제쳤다. 이것도 사상초유의 일이다. 10월 기준 외환보유액은 3천432억3천만 달러까지 증가하여, 역시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최근의 원화가치 상승은 이러한 한국 경제의 실적을 바탕으로 외국 투자자들이 한국 경제를 믿는 마음이 반영된 측면도 있으므로 가슴 속 저 깊은 곳으로부터 약간의 뿌듯한 기분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원화가치의 상승은 수출업체들에게는 바로 수주물량의 감소와 채산성의 악화를 의미하는 것이다.아닌 게 아니라 하반기 들어 다른 통화들에 대한 원화가치는 가파르게 치솟고 있다. 6월 이후 5개월간 달러, 엔, 위안화 등에 대해서는 약 10% 가까이 상승하고, 인도네시아 루피에 대해서는 약 20% 상승하고 있다. 환율변동으로 인한 손실을 피하기 위해서는 한국무역보험공사에서 제공하는 수출보험 가입, 파생상품 시장에서 선물환계약을 통한 환리스크 헤지(hedge) 등을 활용할 수 있겠지만 원화로 수출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면 기본적으로 환율변동으로 인한 수익성 불안을 크게 낮출 수 있을 것이다.우리나라는 최근 인도네시아(100억 달러), UAE(54억 달러), 말레이시아(47억 달러)와 통화 스와프 협정을 맺었고 호주와 조만간 통화 스와프를 추진하고 있다. 종전까지 통화 스와프가 위기에 대비해 달러를 확보해 두려는 목적이 강했던 데 반해 이번 통화 스와프는 서로 자국 통화로 교환하는 LC(Local currency) 통화 스와프 방식을 통해 무역 결제 기능을 지원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2008년 12월 중국과 체결한 560억 달러 상당의 한·중 통화 스와프도 위안화와 원화 간 스와프 방식이다.한국은행 김중수 총재는 지난달 25일 공식석상에서 "중국이 23개국과 스와프를 맺어 위안화 시장을 만든 것처럼 최근 3건의 통화스와프 체결은 원화 국제화란 큰 길에서 작은 걸음을 뗀 것"이라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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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대문의일본식 석등을 철거하라 지면기사
10월 21일 나는 패배했다. 물론 나는 이길 수 없을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침묵하고 지나갈 수 없었기에 선택한 승부였다. 나에겐 확신이 있었다. 2013년의 대한민국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서슴없이 소송의 길로 나아가게 했다.대한민국 권력의 최고 심장부 청와대 대문에는 일본식 석등이 설치되어 있다. 우리나라 전통미술사에 따르면, 궁궐이나 민가에 석등이 설치된 전례가 한 번도 발견되지 않는다. 우리의 전통문화에 따르면, 석등은 묘지나 사찰에서만 발견될 뿐이다. 석등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조명기구가 아니라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종교적 이유'로 설치되는 구조물이다.다시 말해 청와대 대문의 석등은 최소한 우리 문화적 전통에서 볼 때는 대단히 이질적인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좀 더 심도있게 살펴보면 우리는 청와대 대문의 석등 양식이 야스쿠니 신사와 같은 일본 신사의 양식이란 사실과 조우하게 된다.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우리의 궁궐 건축은 일본식 조경에 많이 오염될 수밖에 없었고, 해방 이후 궁궐의 일본식 조경문제는 사회문제가 되어 지속적으로 철거되어 왔다. 최근에도 창덕궁 앞의 일본식 석등, 환구단의 일본식 석등, 국립서울현대미술관의 일본식 석등 등이 잇달아 철거된 것이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현재 대통령 관저로 쓰이는 청와대는 원래 조선시대 경복궁의 일부였다. 그러나 일제의 국권침탈 후 조선총독부는 경복궁 안에 청사(廳舍)를 신축하면서 1927년 오운각(五雲閣) 외의 모든 건물과 시설을 철거하고 총독관저를 이곳에 짓는다. 따라서 역사적 경위를 고려할 때, 청와대가 일본식 조경에 오염될 여지가 많았고, 실제로 이미 학계와 문화재청에 의해 '일본식 조경' 문제가 지적된 사항이었다. 그러나 다른 궁궐의 일본식 조경이 철거되거나 개선된 것에 반해, 청와대의 일본식 조경문제는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다.이런 흐름들에 힘입어 나는 2013년 1월 청와대의 석등에 대해 철거를 요청하는 소장을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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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긴 여행 지면기사
올해에도 어김없이 풍성한 가을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 이른 추석이 지나고 추수를 하는가 하였더니 단풍이 들고 벌써 아침 저녁으로는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는 탓일까? 그냥 일상에 빠져 달리기만 하였던 예전과는 달리 올 가을엔 왠지 허전하고 가슴 답답하다. 그래 모든 것을 버리고 훌쩍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되돌아보니 인생이라는 긴 여행을 시작한 지 벌써 60년이 되었다. 환희와 고뇌가 함께 하였고 성공과 좌절이 반복되었다. 신비로운 생명체로 태어나 신의 섭리대로 살아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 원하지도 않았던 삶이 이곳에 던져졌고 목적지도 모르는 종착역을 향해 길고 긴 여정을 살아온 것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선인들이 무언가 의미있는 세월의 절점들을 만들어 자기성찰 기회를 주는 것 같다. 70세의 고희(古稀), 77세의 희수(喜壽), 80세의 산수(傘壽), 88세의 미수(米壽), 90세의 졸수(卒壽), 99세의 백수(白壽), 100세의 천수(天壽)라는 뜻이 주는 의미가 무겁다. 요즘은 80에 돌아가셔도 아쉽다 하니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울지 모르겠다. 인생도 여행처럼 출발했으니 언젠가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섭리일 텐데 어리석게도 무언가 잡고 놓지 않고 있는 것 같다.지난 여름 이름하여 회갑여행을 아내와 함께 다녀왔다. 평소에 가고 싶은 곳을 숙의하던 중 서유럽의 박물관이 있는 대도시를 가자는 데 동의하고 10여일 만에 여기저기를 주마간산격으로 점만 찍고 다녀왔다. 뒤늦게 사진을 정리하며 여행지를 되돌아보니 아름다운 추억이지만 한편으로는 언제 여기를 또 갈까 하는 생각에 아쉬운 느낌도 든다. 여행 자체가 좋아 충분히 준비하지 않고 그냥 허둥지둥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차분히 보고 느끼고 올 만큼 여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냥 허둥지둥 살아가는 것이지 여행처럼 선택하고 준비하고 나중에 스스로 되돌려 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알랭드 보통은 '여행은 생각의 산파'라고 하였다. 비행기나 배, 기차보다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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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韓商), 글로벌 코리아의 기수 지면기사
19세기말 일본에서 활동하던 미국 필라델피아 출신의 목사이자 동양학자 그리피스는 조선에 한 번도 와보지 않은 채 중국과 일본의 문헌에만 의존하여 조선역사에 대해 책을 쓰고 책명을 '은둔의 나라 조선(The Hermit Nation Corea)'이라 붙였다. 은둔이란 단어가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하나 결국 그가 서양에 소개했던 조선은 쇄국으로 빗장을 걸어 잠근 무기력한 이미지의 나라였다. 그리피스가 무역으로 세계 10위권의 국가경제 규모를 만들어낼 진취적인 기상이 우리의 핏속에 흐르고 있었음을 상상이나 했을까? 그가 다시 태어나 세계 5대양 6대주 모든 곳에 진출하여 경제활동을 하며 부를 일구고 있는 우리 한인경제인들의 모험가 정신을 본다면 한국을 운둔의 나라가 아닌 어떤 나라로 소개할는지 궁금하다.한상(韓商)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5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 이민사에서 한상은 1960년대 미주지역으로 이민이 본격화되면서 출현하였고 1980년대 이후 우리 경제의 비약적 발전과 함께 성장하였다. 한상은 아직 전체적으로 경제규모 면에서나 영향력에 있어 세계의 대표적인 민족 네트워크인 중국의 화상(華商)이나 유대인상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화상은 동남아와 미국에, 유대인상도 미국, 유럽, 남미 일부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은 역사도 길다. 그들에 비하여 짧은 기간 중 한상이 보여준 성장세는 참으로 놀라울 정도이다. 이미 국내에도 잘 알려진 미국 일본에서 성공한 한상들은 물론이지만 아프리카 오지를 비롯하여 극도로 치안이 나쁜 중미지역, 문화적인 어려움과 제약이 그 어느 곳보다 심한 중동지역, 보통사람은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을 서태평양이나 카리브해의 조그만 섬나라에 이르기까지 세계 도처에서 수 없이 많은 한상들이 우리 민족 특유의 억척스러움과 근면 성실함으로 현지에서 뿌리내리고 경제력을 키워나가고 있다. 앞으로 한상이 성장할 잠재력은 무한하다. 개개인의 역량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 현재 세계 175개국에 퍼져있는 700여만명의 재외동포를 연결하는 세계적 차원의 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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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개성을 꽃피우기 위해서는 지면기사
팔공산 부근의 후배 시인 댁에서 야생화를 구경하고 온 적이 있다. 칠월말의 정원은 스산한 느낌이었다. 담장을 수놓고 있는 능소화 외엔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화원의 주인은 40여년 야생화를 가꿔온 고수답게 야단스런 수사로 우리를 피곤하게 하지 않았다. 모든 꽃은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것, 화원은 넓이의 한계가 있어 필요한 것을 그 꽃의 특성에 맞게 심고 그 특성에 맞게 관리한다는 것, 재배할 자신이 없는 꽃을 아무 곳에서나 구해 와서 심어놓고 죽이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잔잔하게 설명했다. 들꿩나무는 물을 많이 요구하고 산수국은 수정이 되고나면 돌아앉고 능소화는 독성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 식물들은 저마다 다른 특성이 있다. 양지를 좋아하는 꽃이 있고 음지에서도 잘 피는 꽃이 있다. 계절 따라 피는 시기도, 색깔도, 모양도, 다른 것이 꽃이다.돌아올 때 내 등 뒤에 흘리던 말이 지금도 여운으로 남아 있다. 옛날에는 분에 담아 키워서 가끔 선물로 드렸지만 지금은 줄 수도 없고 주고 싶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왜 주고 싶지 않다고 했을까? 우선 자기만큼 꽃을 사랑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 사람에게 자기가 애지중지 키운 꽃의 미래를 맡기고 싶지 않아서 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화원은 철저한 계획하에 짜여진 것이어서 어느 꽃 하나도 빠져나가면 전체의 조화가 깨져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가꾸어온 많은 꽃들은 그 꽃 각각의 특성으로 그 화원의 아름다움에 공헌하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얘기는 너무도 당연하고 평범한 것이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자꾸 되새겨진다. 가령 우리 한국시단에 시인이 너무 많다고 하는 이가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많아서 좋을 수가 있다. 다만 그 많은 시인들이 존재해야할 이유를 증명할만한 개성적인 작품을 쓰고 있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이 경우는 화가에게도, 음악가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해야 할 기준이다. 대가들의 흉내를 내는데 평생을 보내고 있는 사람, 아예 시인이나 화가나 음악가라고 하기엔 부끄러울만큼 못 미치는 재능을 지닌 사람들은 자기만의 향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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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잡혀간 조선 국왕의 투구를 보다 지면기사
한마디로 좀 놀랐다. 2013년 10월 1일 설레는 마음으로 도쿄 국립박물관 동양관 전시실을 들어섰을 때, 그토록 바라보고 싶었던 조선 국왕이 착용한 '대원수 투구'가 전시되어 있었다. 조명을 받아 빛나는 황금 용문양과 백옥 장식을 넘어서 거기에는 분명 무언가가 뿜어져 나왔다. 투구를 직접 보기 직전까지 이것이 조선왕실에서 대대로 고종까지 전래된 '조선 대원수 투구'임을 어떻게 알 수 있냐고, 약간의 비아냥거림을 섞어서 질문하던 기자들 조차 더 이상의 의심을 접었다. 투구에 서린 장엄한 아우라는 군신(軍神)의 수호가 함께 하는 제왕의 투구임을 분명히 느끼게 했다.2010년 10월 '조선왕실의궤 반환절차'의 마무리 작업을 위해 도쿄에 갔을때, 문화재 환수운동의 협력관계에 있는 도쿄 고려박물관 이사 이소령 선생님에게서 뜻밖의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일제시대 도굴왕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직접 유물의 출처를 기록한 '오구라 컬렉션 목록'이란 책을 구했다고 했다. 이소령 선생님이 보여주신 책을 펴자마자 나는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의 용봉문 투구에 대한 출처부터 확인해 보았다. 오구라는 이 투구가 '조선왕실의 전래품'이라고 기재해 놓고 있었다. 그때까지 막연한 추정만 있었던 '제왕의 투구'가 문서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이 기록은 오구라 컬렉션의 반환 근거까지 제시해 주고 있었다.조선왕실의 소유품이라면 개개인의 매매로 유통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게다가 1910년 국권을 빼앗긴 뒤에도 '궁내부장관'이란 부서가 조선 왕실의 유물과 재산을 관리했으므로, 허가없이 왕실의 물건이 민간이나 해외로 유출되는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였다. 하물며 '임금의 투구'와 같이 상징성 큰 물건이 매매되어 일본으로 넘어갔다는 것은 도굴 혹은 절도가 아니면 불가능한 행위였을 것이다.그날 이후 나는 오구라 컬렉션에 대해 문제를 제기키 위해 '조선 대원수 투구'를 전면에 내세우기로 하고 이 투구의 특별열람과 공개를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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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행복지수가 말해 주는 것 지면기사
국민의 행복감 정도를 조사하는 전문 기관들이 발표하는 국가별 행복지수 순위는 그야말로 들쑥날쑥이다. 우리나라는 지난달 발표된 유엔의 2013년 세계행복보고서에서 조사대상 156개국 중 41위를 기록하였다. 그 이전 미국의 여론조사기관인 갤럽 조사에서는 146개국 중 97위를 한 적도, 몇 년 전에는 100위 밖으로 벗어 난 적도 있다. 한편 이번 유엔 보고서는 가장 행복한 국가들로 덴마크를 위시한 북유럽 국가들을 꼽았는데, 영국의 신경제재단(NEF)은 오래전부터 부탄, 방글라데시, 파나마, 쿠바 등 동남아와 중남미 저개발국을 행복지수 상위권의 국가로 평가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을 행복지수 150위, 개인소득 4만 달러의 싱가포르를 최하위 권으로 평가한 기관도 있었다. 이는 조사기관의 평가기준이나 조사방법이 다른 탓이겠으나, '당신은 행복 합니까?'라는 질문에 응답자들이 각각 해석하는 행복의 의미가 다른 것에도 그 이유가 있다. 문화권별로 가치와 관습이 다르고, 또 행복이란 지금 내가 처한 상태에 대한 감정일 뿐만 아니라 내가 이웃에 비하여 어떠하며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대한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문화와 관계없이 모든 사회에서 사람들은 질 높은 삶, 좋은 건강, 안정된 미래를 위하여 많은 소득과 사회적 성취를 원한다. 그런데 얼마만큼의 재산과 성취에 만족하는가 하는 것은 다분히 상대적이다. 19세기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밀(John S. Mill)은 사람은 '부자'가 되길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더 부자'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렇듯 우리는 그것이 재산이든, 명예이든, 성취감이든 내가 가진 것을 내 주변 이웃의 것과 비교하여 만족감 또는 불만을 느낀다.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기 보다는 남과의 차이를 더 의식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사람의 본성이니, 경쟁의 룰이 공정하지 못한 사회라면 상실의 불만은 분노로 변하고 사회의 행복지수는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다.어제의 나, 지금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에 대한 비교도 개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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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로 소통하다 지면기사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난 이래 참으로 많은 길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당시 로마가 세계 최강국이었기 때문에 모든 인적 물적자원이 중심인 로마에 있고 이들이 서로 지역을 달리하여 쉽게 통한다는 의미이다. 사실 로마의 길은 원래 군사적이고 상업적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제국 로마를 통치하는 방법은 법과 군사력에 의한 엄격한 규율이었다.흔히 비단길이라고 부르는 실크로드는 고대에 비단무역을 계기로 하여 중국과 서역 각국을 이어준 육해교통로를 말한다. 말이 실크로드이지 목숨을 건 머나먼 행로였다. 이 길은 처음에는 전쟁을 위한 길이고 문물을 거래하는 길이며 종교적으로는 포교의 길이 되었다. 실크로드가 처음으로 열린 것은 前漢(기원전 206~기원후 25) 때이다. 한무제는 서아시아로 통하는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장건을 중앙아시아에 파견했는데 이를 계기로 중앙아시아 및 지중해의 동편에 이르는 서방 각지와 문물이 왕래하게 된 것이다.기독교가 번성하였던 중세이래 유럽인들은 크고 작은 많은 순례지들을 돌아다녔다. 그들에게 성지순례는 살아있을 때나 죽고 나서 속죄를 위한 중요 수단이 되었다. 본인이 신체적으로 불편하면 대리인을 보내기도 하였다 한다. 어디로 순례를 다녀왔는가에 따라 등급이 매겨졌는데 예루살렘이 최고의 등급이고 로마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그 다음 등급이었다. 특히 북부 유럽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순례지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였고 1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스페인 북부의 모든 길은 이곳으로 이어졌다. 순례자들은 성 야고보의 유해가 있다는 대성당을 찾았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750㎞에 달하는 여정을 도보 순례를 하고 있다. 장대한 산악지대와 고풍스런 마을들, 숲으로 뒤덮인 길을 걸어 성지에 도달하는 영적 희열은 대단하다.우리에겐 어떤 길이 있었을까? 요즘 경주에서는 문화엑스포의 일환으로 경주와 이스탄불을 잇는 새로운 실크로드를 개척하고 있다. 중국 서안에서 출발하는 실크로드가 아닌 경주에서 시작점을 잇는 실크로드이다. 8세기의 신라승려 혜초는 요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