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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디아스포라, 국력의 외연 지면기사
민족분산 또는 집단이주를 뜻하는 디아스포라(diaspora)는 원래 BC 6세기 유다왕국이 망하면서 바빌론으로 끌려가 포로 생활을 하였던 유태인들을 가리켜 사용되었다. 역사에서 패전국민이 승전국의 노예로 전락한 예가 수없이 많을 테지만 유독 2천600년 전 바빌론에서 포로로 지냈던 유태인을 지칭했던 디아스포라의 의미가 오늘날 일반적으로 다른 나라로 집단이주하여 사는 사람들 모두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진화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바빌론의 유태인들은 현지에서 동화되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오히려 번성했고, 훗날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유태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유엔 인구국의 통계에 따르면 현재 자신이 태어난 곳을 떠나 사는 사람들이 세계 인구의 3%에 해당하는 2억 명에 달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175개 국가에 720만의 해외동포가 있다. 물론 이 통계에는 이주 1세대의 후손들이 대부분이긴 하나 국내인구(남북한 전체)의 10%에 달하는 우리 동포가 전 세계 5대양6대주에 퍼져 살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한민족은 중국인, 유태인 못지않은 세계적인 디아스포라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각지로 이주한 역사적 배경이 시대별로 다르고 현지 문화와 사정도 같을 수 없기 때문에 세계 각지의 재외동포사회를 하나로 묶어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더라도 같은 핏줄의 한민족이기에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되고 있다. 첫째가 재외동포들은 어는 곳에서든 근면함과 성실함으로 현지 다른 이민사회보다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있다. 둘째로 한민족 특유의 교육열과 우수함으로 다음세대의 현지 주류사회 진출률이 다른 소수민족보다 높다. 셋째로 강한 뿌리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헌팅턴(S. Huntington)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념의 대립이 끝나면서 문화, 민족의 개념이 중요시되는 시대조류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1990년대 말까지만 하여도 정부의 재외동포 정책은 현지에서 잘 정착하도록 지원하는 현지화정책에 초점이 두어졌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재외동포의 가치와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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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작가들 지면기사
한국사회에서 작가들은 이렇게 무관심 속에서 방치되어도 좋은 존재들일까?수년 전 작가들의 수입을 조사한 결과 한국 작가들은 월 평균 20만원의 수입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은 그때보다 상황이 더 악화돼있는 만큼 한국 작가들은 한 마디로 수입이 전혀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실 다른 직업이 없이 순수하게 창작에만 매달려있는 전업 작가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는 극빈계층에 속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금도 관심을 끌지 못한 채 우리 사회의 한쪽 구석에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방치되어있다.작가는 한 국가의 문화를 창조해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소외되어있고, 버림받은 처지나 다름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문학은 한 국가와 민족의 혼과 얼이 배어있는 것이고, 작가는 자기 나라의 언어를 통해 작품을 완성하고 그것을 국민들에게 읽힌다. 문학이 없으면 언어가 없어지고, 언어가 없는 국가와 민족은 망하게 마련이다. 오늘날 우리 언어를 이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고 세련되게 다듬은 사람들은 정치가도 아니고 기업가도 아니다. 작가들이야말로 주린 배를 달래면서 우리 언어를 살려온 주역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쓰레기처럼 방치되어있다.아파트가 안 팔리고 부동산 경기가 침체되면 정부는 법을 뜯어고치고 온갖 편법을 동원해서라도 부동산 경기를 부양시키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작가들의 작품이 진열되어있는 책방들이 연달아 문을 닫고 출판사들이 줄줄이 폐업을 하는데 대해서는 눈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 한국 정부가 수립되고 지금까지 역대 정부에서 작가들에게 관심을 기울인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군사정권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민주화 투쟁으로 정권을 잡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문학에 대해서 문외한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해마다 가을이 되면 한국에서는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안 나오는가 하고 두리번거린다. 정부나 국민들이나 염치가 없기는 막상막하이다.한국에서는 작가라는 존재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저 그렇고 그런 존재일지 모르지만 외국에 나가보면 작가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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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학에 대한 불편한 진실 지면기사
대학이 없는 한국을 생각할 수 없다. 한국의 눈부신 발전은 모두 한국의 대학에서 젊은 인재를 양성한 결과이다. 자연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노동력과 창의성이며 이에 의지하여 오늘의 국가적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미래를 구상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의 대학은 어떠한가. 그 불편한 진실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토로할 용기가 있는 것인가. 아마도 이는 쉽지 않은 결단이 요구되는 일이다. 여기서 필자가 경험한 한국대학의 진실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고백해 두고자 한다.우선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반값 등록금이다. 학생들의 등록금 부담을 경감시켜 주기 위해 반값 등록금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문제는 정치권에서 처음 공론화시킨 다음 그들의 생색내기 용으로 전락한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실질적인 대책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선거 전략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젊은 유권자를 유혹하는데 성공했을지는 모르지만 실제 대학 현실에서 반값 등록금은 여러 가지 부작용을 만들어내고 있다.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수업 시간을 단축한다든가 강의 단위를 대형으로 조정한다든가 아니면 전임 교원에게 수업시수를 더 많이 요구한다든가 하는 일이 여러 대학에서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반값 이야기로 인해 대학에서는 등록금 인상은 말을 꺼낼 수도 없는 분위기이고 이에 역행하면 여러 제재 수단을 동원하겠다는 교육 당국자의 위협이 무섭기도 하다.그러나 다른 한 편에선 한국의 대학 경쟁력을 논하는 상반된 요구가 있다. 국내 순위가 정해지고, 아시아 순위가 발표되고, 세계 순위가 대대적으로 보도된다. 일부에서는 한국의 대학 경쟁력이 아주 부진하다고 질타한다. 한국의 대학이 새로운 세기를 선도하는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세계 수준의 성과물을 산출하게 만드는 확실한 지원과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최근 정부는 미래창조의 현장이 대학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대학이 미래 창조의 생산 현장이 되기 위해서는 장기적이고 현실적인 대책을 추진해야 정부의 발표가 현실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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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의 등장 지면기사
한국에 오자마자 한국인에 대해 받은 첫 인상은 매우 열심히 일한다는 것이었다. 불과 삼사십년 전에 전쟁과 가난에 힘들어하던 나라에서 아시아 강국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던 눈부신 급성장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결과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특히 천연자원이 펑펑 쏟아져 나와 부국이 된 나라들과는 전혀 다른 경우이다. 한국의 성공은 힘든 노동이 불가피하다면 어떤 고통도 참고 견딜 수 있는 강인함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러한가?그동안 피와 땀 그리고 눈물로 한국을 일으켜 세웠던 이전 세대와 달리 앞으로 이끌어갈 세대는 전과 같지 않다. 젊은이들에게 전에 없던 게으름을 목격하면서 앞으로 한국의 위상을 지켜갈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특히, 늙은 용이 깊은 잠에서 다시 깨어난 듯 과거의 위력을 회복하기 시작한 중국의 급부상을 본다면 이런 노파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물론, 학교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해가 진 후에도 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고층 빌딩가의 사무실에선 밤 늦게까지 일하는 사람들로 불이 꺼지지 않는 이 나라에서 어떻게 감히 게으름에 대해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한국에서 '오래 일하는 것'은 종종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고 싶은 내용은 왜 한국인들이 그렇게 변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과거 한국은 성공에 굶주려 있었다. 그러나 한 이십년 전부터 등장한 신세대들은 빈곤에서 오는 어려움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지 않는 듯하다. 부모들은 아이의 안녕을 추구하며 결국 응석받이로 키우고 있는 셈이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을 때 종종 볼 수 있었던 어처구니 없던 광경 중의 하나가 3층 밖에 안되던 건물 안 승강기 앞에서 학생들이 겹겹이 줄 서 있던 모습이다. 서둘러 계단으로 가면 그나마 지각은 면할 수 있을텐데도 지각을 하더라도 덜 걷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느 날 함께 등산을 하기로 하고 약속 장소에 나가보면 학과 학생 대부분이 참석하지 않았다.심지어 그 전에 점심을 사겠다고 학생들에게 제안을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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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자 6·25 지면기사
해마다 6월이 오면 제일 먼저 6·25전쟁의 기억이 떠오른다. 이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는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처럼 아득한 옛날에 일어난 전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6·25전쟁은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현재 진행중이다. 그 명칭도 6·25사변에서 한국전쟁으로, 그리고 6·25전쟁으로 변화하였다.1950년 6월 25일 유난히 화창한 일요일이었다. 콩볶는 소리(따발총 소리)는 요란한데 라디오에서는 "국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총소리는 요란한데 대통령은 아무 일 없다고 하니 38선이 지척인 춘천의 시민들은 갈피를 못잡고 피난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 날 피난민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총알이 마당에 떨어지고 나서야 피난을 서둘렀지만 때는 이미 늦었던 것이다.비상식량으로 미숫가루를 만들고 우리 네 자매들은 꼬까옷으로 단장하였다. 아마도 잠깐 나들이 떠나는 것으로 착각하지 않았나 싶다. 대로는 위험하다하여 산길, 들길로 가던 피난길의 산천은 녹음방초 우거지고 뻐꾸기소리, 꾀꼬리소리 등 온갖 새들의 지저귐으로 하여 천국이 따로 없었다. 뒤에서는 전쟁이 쫓아오고 눈앞에는 천국이 펼쳐지는 이율배반의 계절이었다. 처음에는 신나서 달려가던 피난길은 차츰 고행길이 되었다. 맏이인 내가 아홉 살, 그 다음이 여섯 살, 네 살, 두 살이었으니 나는 차라리 어른 취급을 받으며 걸었다.청평의 솔이 마을에 이르자 서울이 점령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후 진행된 상황은 필설로 다하기 어렵고 우여곡절 끝에 춘천으로 돌아왔을 때는 엄마와 나 단 둘만 남았다. 인민군 치하의 춘천은 아비규환의 생지옥이었다. 하늘에서는 쉴새 없이 폭격이 계속되고 어른들은 부역에 끌려가서 집에 홀로 남아 방공호로 달려가는 일을 되풀이하였다.미처 방공호로 피신하지 못했을 때는 두 엄지손가락으로 두 귀를 막고 나머지 네 손가락 두 쌍으로 두 눈을 누르고 솜이불을 뒤집어썼다. 폭격에 귀가 멀고 눈이 튀어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숨이 컥컥 막히는 무더운 여름에 폭탄의 파편을 막을 수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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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세상 지면기사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무지처럼 무서운 것은 없는 것 같다. 무지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사고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런데 무지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무지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속성이 있다. 인정하기는커녕 자신은 유식하고 현명하다고 생각하면서 세상을 휘저으려고 든다. 그 결과 이 사회에 엄청난 피해를 입힌다.무지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부류가 바로 가짜들이다. 가짜들은 가짜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만들어내고, 그래서 이 세상에는 가짜 물건들이 범람하고 있다. 가짜 인물군과 가짜 물건들은 서로 한 통속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만 따로 떼어놓고 말할 수 없고, 그 유기적인 관계로 해서 해악은 견고한 아성을 구축하고 있다.필자가 알고 있는 어떤 이는 수십년 전부터 석박사 학위 논문을 대필해주는 것을 업으로 삼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석사학위 논문은 한 편에 500만원, 박사학위 논문은 1천만원, 이런 식으로 나름대로 공정가격을 매겨놓고 생계를 위해 밤낮으로 가짜 논문을 써주고 있다. 그렇게 해서 그동안 배출된 석박사가 줄잡아 수백 명은 된다고 하니 그 수를 전국적으로 확대 계산해보면 어머어마한 숫자가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양산된 가짜 석박사들이 성스러운 캠퍼스에 우글거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서글픈 생각이 든다. 그런 가짜들한테서 학문을 배운 대학생들의 실력이 오죽하겠는가. 그런 행태는 해외유학파라고 다르지 않다. 신정아 사건이 말해주듯 외국에서 가짜 학위를 받아가지고 와서 교수 행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다.자격증도 없는 가짜 의사들뿐만아니라 자격증이 있어도 가짜나 다름없는 엉터리 의사들도 수두룩하다. 해마다 전국에서 엄청나게 많은 의사들이 쏟아져나오다보니 실력은 뒷전이고 돈벌이에 급급해서 인간 생명을 상품처럼 주물러댄다. 얼굴을 망쳐놓은 가짜 성형외과 의사, 관절과 척추를 멋대로 수술해서 완전히 병신으로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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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학생들과 한국 도깨비 지면기사
지난 16일 한국 시인 20여 명과 중국 난카이대학에서 '한중 시낭송 및 세미나'가 있었다. 중국의 대학생들이 과연 한국의 시나 문학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의구심을 가지고 강의장에 들어섰는데 중국대학생들의 반응은 진지하고 무거웠다. 150여 명의 중국 학생들은 강연 내내 진지하게 듣고 있었으며 강의가 끝난 다음에 여러 학생들이 한국문학에 대해 질의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이 누구며 한국에 프랑스문학의 영향은 어떤 것인가. 시와 음악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 등등의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이질적인 언어와 문화가 시를 통해 만나는 순간이었다. 그들의 호기심을 넘어선 한국 시에 대한 관심은 애초에 우리가 가지고 갔던 우려를 단번에 불식시키는 것이었다. 다음날 60여 명의 대학원생들과 한국현대시에 대한 학술적인 세미나가 있었다. 여기서 필자는 '한국현대시와 도깨비'라는 제목으로 짧은 발표를 했다.한국인들은 모두 도깨비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할 수 없는 이 한국인의 특성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디지털적인 상황에 가장 잘 맞는 성격 중의 하나이다. 비약적이고 돌발적이며 진취적인 한국인의 기질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고 역경을 기회로 21세기 비약적인 국가발전의 원동력을 발휘한 것이다. 도깨비는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역경이라도 이를 극복하는 힘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 나의 강연의 요지였다. 물론 도깨비는 인간이 되고자하며 또 인간 세계에 잘잘못이 있을 때 이를 징벌하는 역할도 하는 것이 한국의 도깨비이다. 이런 이야기는 어린 시절 할머니로부터 수 없이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한 것이다. 그리고 후일 일연의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상당수의 기록들은 도깨비 이야기를 적어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동안 왜 우리는 서양의 신화나 전설을 훌륭하다고 말하고 동양의 그것은 무시해 왔는가, 나는 이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고구려인들이 축구를 하고 신라인들이 전자산업을 일으키고 백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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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메시지 보내기 지면기사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할 수 없지만 분명 1990년대 중반의 어느 날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였다. 당시 삼성의 새로운 광고 문구를 보았는데 광고판 자체가 매우 커서 시선이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소리치는 듯해 보였다. 'Samsung-The best company in the world'(삼성-세계 최고의 회사) 순간 웃음이 나왔고 잠시 후 이 광고문장은 재미로 보는 작품과 같은 것인지 아니면 진짜 광고인지 한 순간 의아하게 생각해 볼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에도 한국인들의 정서를 충분히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광고의 영문 의미에 대해 추후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90년대의 과거 이야기고 삼성은 지금의 삼성이 아니었다. 지금의 글로벌 기업 삼성이 그들의 비즈니스 파트너와 고객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어쨌든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배운 것들은 이곳의 모든 것은 '최고', '최대', '최선'의 것들이라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겸손을 미덕으로 여겨선지 내게는 이런 큰소리치는 듯한 자랑식의 표현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며 최대, 최고 등의 수식어가 붙은 것들에 대해 맞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이유를 찾아보게 만든다. 이런 반응이 유치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이가 다가와서는 나는 최고라고 말을 걸어왔다면 순간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순간 정상적이고 자연스런 반응으로 이상하다고 말하고 싶은 욕구가 생길 것이다. 그래서 통역가와 컨설턴트로 더 많은 일을 하게 되면서부터 한국 회사들에게 우선적으로 부탁하는 것 중의 한가지가 국외 비즈니스 상대들에게 좀 더 겸손하고 지나치게 과장하지 말라는 것이다.'디 에아츠테'(의사들)라는 독일의 한 유명한 펑크록 밴드가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세계 최고의 밴드'라고 늘 주장한다. 예를 들어 콘서트장 무대에 커다랗게 현수막을 걸거나 밴드이름의 수식어로 자주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그들의 음악은 완전히 말도 안 되게 웃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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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에 종교를 돌아본다 지면기사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헌법에 보장된 나라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대한민국에는 국교가 없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국민은 누구나 종교를 선택할 권리가 있고 자신이 선택한 종교를 믿을 자유가 있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헌법에 규정되었다고 하여 종교문제가 쉽고 편안한 일일까?전통시대에도 새로운 종교가 들어오면 기존의 종교와 부딪치면서 사달이 일어났다. 불교가 신라사회에 들어올 때도 이차돈의 순교가 있었다. 조선후기에도 천주교에 대한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같은 사건을 천주교에서는 박해(迫害)라고 하지만 공식기록에는 사옥(邪獄)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두 개의 용어는 인식의 차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 후에 기독교도 들어와 우리 사회는 불교, 기독교, 천주교 등으로 대분되는 종교지도를 갖게 되었다. 그 외에 대종교나 천도교 등 민족종교도 존재하지만 교세는 미약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상에서 열거한 종교, 그 어디에도 귀속되지 않는 사람은 무교(無敎)라고 하지만 사실은 유교라고 하는 편이 맞다. 왜냐하면 조상을 숭배하는 유교적 제의인 제사를 지내고 유교적 가치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양한 종교지도를 가진 만큼 문제도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가정의례문제이다.가정에서 행하는 대표적인 의례가 제사이다. 제사는 아득한 옛날부터 있어왔지만 유교적 제의가 확고하게 뿌리 내린 것은 조선후기이다. 신분을 불문하고 제사는 효도의 구현으로 제사 안 지내는 이는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는 사회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래서 여인들이 머리를 잘라 팔아 제사비용을 마련한다거나 무엇에 쪼들리는 상황을 "가난한 집 제삿날 돌아오듯 한다"는 말이 생겨났다.종교가 다양화된 현재도 제사는 제일 큰 가정의 행사이고 친척간의 화합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우리사회가 도시화하고 핵가족화하고 있다는데 있다. 아파트생활을 하면서 많은 친척들이 모일 공간이 부족하고 직장생활을 하므로 제사시간을 조정하는 일도 만만치 않으며 특히 제물을 준비하는 일을 고역으로 여기게 되었다.전통시대는 농경사회였고 마을 중심으로 친척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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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즘 지면기사
일본 적군파, 독일의 대명사 바더 마인호프, 이탈리아의 붉은 여단은 모두 1960~70년대에 악명을 떨쳤던 좌파 테러단체들이다. 그러나 좌파 테러단체들은 70년대를 고비로 공산주의 몰락과 함께 소멸되고 대신 새롭고 강력한 힘을 가진 테러단체가 등장하는데, 바로 이슬람 무장세력의 테러이다.이슬람 테러의 상대는 처음에는 이스라엘이었지만 그 영역이 점차 확대되어 지금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방 세계이고, 문명 충돌의 양상까지 띠고 있다. 이슬람 테러의 가장 충격적인 신호탄은 1972년 9월5일에 발생한 뮌헨 올림픽 테러이다. 그날 새벽 팔레스타인 '검은 9월단'소속의 무장괴한들은 이스라엘 선수촌을 습격, 이스라엘 선수 11명을 살해한다. 골다 메이어 여수상은 이스라엘 정보부인 모사드에게 전세계를 뒤져서라도 테러분자들을 색출하여 처단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때부터 모사드는 20년에 걸쳐 보복작전을 수행, 테러분자들을 모두 암살한다.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차이는 무엇보다도 표현의 자유에서 비롯된다. 기독교 문명은 과거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신성 모독과 같은 개념을 상실, 비판에 익숙해지고 너그러워진 반면 이슬람은 신성 모독을 금기시, 편협한 종교관으로 신성을 모독한 자를 단호하게 응징한다. 영국 작가 샐먼 루시디가 소설 '악마의 시'에서 마호메트를 풍자하고 코란을 악마의 계시라고 썼다가 호메이니의 명령으로 목에 100만 달러의 현상금이 내걸린 채 이곳저곳으로 도망다닌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갈수록 격렬해지던 이슬람 테러는 급기야 2001년 9월11일 뉴욕의 세계무역센터를 공격함으로써 그 정점에 이른다.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9·11테러는 사망자만 3천여명에 이른 대참극이었는데, 테러를 감행한 19명의 테러리스트들은 대부분이 함부르크 공대 출신들로 독일에서 나고 자랐다. 그들은 왜 테러리스트가 되었을까?이슬람 테러와 미국과의 관계는 2차 대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군이 침공해오자 스탈린은 소련연방 내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출신 이슬람 청년 수백만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