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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지슬'과 스탈린의 편지

    영화 '지슬'과 스탈린의 편지 지면기사

    흑백 영화 '지슬'을 인상 깊게 보았다. 음울한 화면에 펼쳐지는 리얼한 장면과 그곳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영상과 고통이 가슴 저리게 다가왔다. 누가 죄 없는 이들을 이토록 고통스럽게 하는가. 영화가 끝나고도 관중은 한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에서 접근하여 토벌대와 양민의 관계를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데 일정 부분 성공했다는 느낌이 전해 왔다. 아마 영화가 주는 가슴 저린 감동 때문에 관중들은 무언가 여운을 가지고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4·3사건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마지막 자막에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미군과 미군정 당국'이라는 문구는 영화 전체를 다시 되돌아보게 했다. 정말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한라산'의 작가 현길언의 증언을 읽게 되었다.제주 4·3사건은 항쟁사가 아니라 수난사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현길언의 주장이다. 현길언 자신이 4·3사건 당시 아홉 살의 나이로 제주 남원읍 수당리에 살다가 가족들과 20여일간 피난살이를 했고 일가친척들이 수난을 당한 당사자라고 한다. 4·3사건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맞선 권력투쟁이 아니라 제주도민의 수난사라는 것이 그의 증언이다. 현길언의 장편 '한라산'은 제주도민의 삶을 누구보다 생생하게 다루고 있으며 2003년 간행된 이청준의 '신화를 삼킨 섬'에서는 민속학자 고종민을 통해 수평적 관계가 수직적 관계로 변할 때 발생하는 지배와 피지배의 역학적 구도로 인해 4·3사건이 발생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민초들의 희생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두 편의 작품은 유사한 현실인식을 보여 준다. 결국 권력을 지향하는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는 현실의 왜곡과 변형으로 인해 우리가 경험한 사실이나 진실이 그대로 역사에 기록되는 것은 아니다.4·3사건은 뒤이어 일어난 6·25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이는 한반도를 두고 권력 투쟁의 장으로 만든 거대한 정치세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2005년 소련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에서

  • 누가 크고 사나운 늑대를 무서워하나?

    누가 크고 사나운 늑대를 무서워하나? 지면기사

    세계 곳곳에 있는 나의 가족들과 친구들로부터 요근래 부쩍 안부를 묻는 메일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김정은의 섬뜩한 협박에 대한 충격적인 머리말과 기사로 가득한 독일 온라인 뉴스를 읽는 것으로 매일 하루를 시작해왔다. 그러나 한국의 뉴스는 북측의 향후 동향보다는 태평스럽게도 K팝과 스포츠에 관해 좀 더 중요하게 다루는 듯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 나라는 북한의 가능할지도 모를 잠재적 핵공격과 전쟁 도발의 위협을 받고 있는데도 말이다.나는 여전히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했을 당시의 소요를 기억하고 있다. 김일성의 사망일 하루 전 한국에 막 도착했던 나는 사연을 제대로 모른 채 당시의 야단법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추후 어쨌든 지금보다 더 걱정스럽긴 했던 것 같다. 지난 20년에 걸쳐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되어 왔던 북측의 위협으로 인한 모든 분쟁과 소규모의 충돌은 나의 공포심을 점차 잃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위험한 지역에 가장 가깝게 살고 있으면서도 그 공포는 적게 느끼는 것 같은 우리네 삶은 그래서 더욱 신기한 모습이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특히 근래, 한국에서보다 북한에 대한 톱기사가 더욱 많았다. 한국의 승려들과의 인터뷰와 통일에 대한 그들의 생각, 그리고 거대한 로켓을 올라타고 있는 김정은의 이미지가 커버로 실린 독일 유력 시사 주간지인 '스피겔'지(주당 백만부 이상이나 발행)까지 어디고 빠지는 곳이 없었다. 어떻게 이 계속되는 북측의 위협 이벤트에 대해 한국과 서양측의 지각이 이렇게도 다를 수 있단 말인가?어쩌면 그 오랜 시간 동안 우린 학습하듯이 실제로 어떻게 북한이 움직이는지에 대해 배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공포속에서 공포심과 함께 살아가는 것과는 확실한 거리를 두고 살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에게 완전히 비이성적이며 거의 자폭하는 듯해 보이는 북한의 도발 상황은 한국인들에게는 아마도 그동안 끊임없이 있어왔던 북한의 위협과 공격 중 그저 지나가는 또 하나의 골칫거리로 보이는 것일까? 심각하게 따지고 보면 북한의 대공격으

  • 4·19혁명 정신을 계승하자

    4·19혁명 정신을 계승하자 지면기사

    1960년 4월 내가 다니던 동대문 밖 숭인동의 동덕여고는 온갖 봄꽃이 피어나면서 소녀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그 평온한 일상을 뒤흔든 사건이 18일 고려대학교 대학생들의 함성이었다. 안암동에 있던 고려대 학생들이 시내로 들어가기 위하여 신설동을 거쳐 우리 학교가 있던 숭인동을 경유하여 동대문 쪽으로 향했던 것이다.이 후 전개된 상황은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하는 느낌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정권 연장을 위한 3·15 부정선거에 대한 젊은이들의 항거는 시민은 물론, 교수사회까지 합세하게 만들었다. 경무대로 향하던 학생들에게 발포명령까지 떨어지고 결국 피를 보고나서야 이승만 대통령은 26일 하야성명을 발표하였다.4·19는 그야말로 학생들의 순수한 의거였다. 정권을 탈취하려는 목적이 없는 자연발생적인 혁명이었다. 정치권은 외무부장관 허정을 수반으로 과도정부를 구성하여 정권을 야당이던 민주당에 넘겼다. 야당은 파벌싸움에 얼룩지고 수권능력이 부족하였다. 더구나 직전에 조병옥 신익희 같은 거물 지도자들을 잃은 상태여서 구심점이 약했고 사회 전반에 팽배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추슬러 국가동력으로 묶기엔 역량이 미약하였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컸으나 아직 훈련이 부족했던 것이다.그 후 개혁 열풍은 국가전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그 열풍을 비껴간 분야는 거의 없었던 듯싶다. 나는 공교롭게도 학생회장이 되어 있었다. 나는 고려대 학생회장의 부름을 받고 고등학교-대학교 학생회장 모임에 참석하였지만 여고생도 참여한다는 명분과 머릿수를 채우는 역할에 불과하였다. 정작 문제는 학교 안에서 일어났다. 학생회에는 학생들의 개혁 요구가 물밀듯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 중에서 감정이 보이는 것은 회의를 통해 걸러내고 학교에 보고하고 건의하는 방식을 취했다.개교한지 50년이나 된 학교라 오래된 문제점들이 누적되어 있었지만 학교 당국은 미온적으로 대처하였고 한번 터진 봇물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그 와중에서 나는 갈피를 잡으려고,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사태는 악화되어 결국 동맹휴학으로 치달았다.

  • '한국의 지식인' 그 부끄러운 자화상

    '한국의 지식인' 그 부끄러운 자화상 지면기사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구한말 시인 문장가로, 1855년 전남 광양에서 태어나 구례에서 칩거하며 살다가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며칠 후 통분을 이기지 못해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음독자결했다. 그때 나이 56세. 절명시 한 수가 가슴을 저민다.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온세상이 이젠 망해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식자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반면 같은 시인이면서도 미당 서정주는 나라와 민족을 배신하는 행적을 보여준다. 가미가제 특공대원으로 죽은 일본군 오장에게 바친 헌시는 읽을수록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중략)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온 원수 英美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리쳐서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 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미당의 비열한 행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수십 년 후까지 이어진다. 1987년에 발표된 전두환 56세 생일 축시를 보자.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 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중략)---'한 번은 고은이 미당의 친일 행각을 비판한 적이 있었다. 옳은 지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미당의 제자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감히 한국의 시성(詩聖)을 비난하다니 하면서 고은을 맹렬히 공격했다. 이런 얼빠진 지식인들 덕분에 미당은 죽을 때까지 한국 최고의 시인으로 대접을 받았다. 그에게는 지식인으로서의 정의나 양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단지 시적 감각과 감성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시적 기교와 감성적 문체는 부도덕한 사람도 얼마든지 그럴듯하게 꾸밀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바로 미당이다.서구의 경우 지식인 그룹 가운데서 작가나 시인들은 단연 시대를 리드하는 행동하는 지성으로 손색이 없다. 1936년 스페인에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 증오의 관계?

    증오의 관계? 지면기사

    국제행사에 관련된 일을 하다 보니 행사 개최 준비를 위해 한 해 중 꽤 많은 시간을 국내 여러 도시에서 보내게 되는데 이것은 언제나 내게 큰 행운이었다. 덕분에 나의 홈타운인 광주에서 한국에 있는 어느 도시로든 어떻게 가는 것이 가장 좋은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어떤 때엔 그곳이 부산 또는 대전이기도 했고 지금껏 가장 자주 가는 곳은 아무래도 서울이며 올해 들어선 대구에 갈 일이 잦아지고 있다. 최근에 대구 왕래가 잦다 보니 광주와 대구를 연결하는 그 불편한 88고속도로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볼 만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88고속도로는 그야말로 한국의 역사를 반영한다. 거의 바뀌지 않은 오늘날의 광주와 대구간의 좋지 않은 관계를 상징하는 기념물로 이어오는 듯하다. 도로만 보더라도 호남 지역과 영남지역은 대칭적인 양극 같은 것은 아니지 않나 싶다. 경제 및 산업 동력을 갖춘 부산, 대구, 울산 그리고 포항 등이 위치한 영남지역은 서울과 경기지역 다음으로 국내에서 가장 개발이 잘된 지역이다. 반면에 호남지역은 후진국이었던 한국이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는 비약적인 경제 기적을 만들어 낸 지난 40년 동안 다른 지역에 비해 발전이 뒤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더 앞서나갈 수 없었다. 경상도 지역을 기반으로 한 보수적 힘들이 세력을 갖고 있는 동안 전라도는 늘 혁명적인 좌익의 기지였다.그래서 88고속도로는 내게 있어 두 지역이 서로 친해지는 데엔 무관심하다는 명백한 진술로 여겨진다. 원래 이 도로는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직후 계획되었던 것으로, 당시 전두환이 화해의 제스처로 호남인들에게 내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대구와 광주를 연결하게 된 도로가 지금껏 실제로 변화되어온 것을 보자면 꽤 흥미롭다. 1984년 개통된 이후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도로는 예전과 거의 다름없다. 온 나라 전역이 공사 현장임에도 불구하고 돈이 부족하다는 이유 등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대도시인 대구와 광주에 제대로 된 고속도로(심지어 KTX 등 다른 교통편도 없이) 하나 만들지 못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아마도

  • 대한민국에 문장가가 없다?

    대한민국에 문장가가 없다? 지면기사

    2008년 3월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 된 직후였다. 청와대 비서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문장을 좀 다듬을 일이 있는데 아무리 알아봐도 우리나라에 문장가가 없는 것 같다. 문장 잘 하는 사람 좀 추천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나 역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다시 "왜 이렇게 문장가가 없는지 궁금하다. 옛날에도 그랬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 시대에는 문·사·철을 함께 하지 않아서 문장가가 나올 수 있는 토양이 안 되어 있다. 옛날에는 문·사·철을 겸수하는 학문체계였기 때문에 문장가가 많았다"고 대답하였다.문장이란 화려한 수사만 나열해서도 안 되고 알맹이가 있어야 한다. 메시지가 없는 문장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그 알맹이, 다시 말하면 메시지는 철학과 역사를 공부해야 생긴다. 그런데 철학만 공부하면 공허해지고 역사만 공부하면 사건의 나열이나 현상만을 제시하고 만다. 그래서 철학과 역사는 상호보완해서 연구해야 한다.그 방법을 전통시대에는 경경위사(經經緯史)로 표현했다. 경경의 앞의 경(經)자는 날줄을 말하고 뒤의 경(經)자는 경전을 공부하는 경학을 말한다. 경학을 날줄로 한다는 뜻이다. 뒤의 위사에서 위(緯)자는 씨줄을 말하고 사(史)자는 역사를 말한다. 역사를 씨줄로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경경위사란 경학을 날줄로 삼고 역사를 씨줄로 삼아 입체적으로 진리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경학에서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또 인간답게 사는 길은 무엇인가를 말한다. 예컨대 사람은 참되고 착하고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는 진선미(眞善美)라던가, 사람은 효도를 해야 한다던가, 사람은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등 삶의 지표는 시간이 경과해도 변함없는 동서고금의 진리임에 틀림없다.역사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제반 양상을 밝히는 학문이다. 그래서 역사에서 시간개념을 빼면 역사로 성립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인간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시간에 따라 추적하는 학문이 역사다. 역사는 인간 군상들이 살아가는 하나하나의 예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렇게 경학과 역사를 날줄과 씨줄로 삼아

  • 거대한 부패 그리고 약탈

    거대한 부패 그리고 약탈 지면기사

    한국은 과연 선진국이 될 수 있을까. 이같은 물음에 어떤 사람은 한국은 지금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기 때문에 선진국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일본의 장기 경기 침체와 유럽의 경제 불안 같은 것도 없는 한국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라고 열변을 토하기도 한다. 자기도취에 빠진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착각이야말로 무지에서 비롯된 것임은 말할 나위없다.단언컨대 한국은 결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선진국은 경제발전 하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산유국으로 부를 누리는 사우디아라비아나 브루나이 같은 나라를 보고 선진국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선진국은 경제발전뿐만 아니라 넘쳐 흐르는 문화가 있고, 빈부격차가 없는 복지사회와 함께 흔들림이 없는 윤리의식이 사회의 저변을 받치고 있고, 상류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살아있고, 거기다 부패가 없는 깨끗한 사회여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한테는 그 어느 것 하나 가진 것이 없다.현재 한국이 선진국이 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사회 전반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부패현상이다. 국가기반을 좀먹어들어갈 정도로 심각한 부패가 존재하는 한 한국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선진국이 될 수 없다.오늘날 한국의 부패는 그물망처럼 촘촘히 짜여져있는데다 합법적으로 진행되고 있어 감히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권력을 휘두를 수 있고 서민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고액의 수입이 보장되는 높은 자리는 서로 끼리끼리 나누어 갖는다. 법조인들의 전관예우라는 행태,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는 지방자치단체장의 정당 공천권을 움켜쥔채 내놓지 않으려는 국회의원들의 질긴 탐욕, 선거때마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상류층들만의 공천파티, 정경유착으로 인한 대기업 위주의 경제구조, 두껑을 열면 터져나오는 상류층의 비리 백태….교육계라고 예외는 아니다. 비싼 등록금 때문에 대학생들은 울상이고, 대학 당국은 차비도 안 되는 강의료로 시간강사들을 착취하고 있는데도 고액연봉을 받는 교직원들은 나몰라라하고 자기 안전만을 꾀하고 있다.연전에 일본 외상 마에하라 세이지가

  • 미래창조와 판타지 산업

    미래창조와 판타지 산업 지면기사

    박근혜 정부의 2대 중심축은 복지와 미래이다. 미래창조부에 대한 무게 비중이 다른 어떤 정부 조직보다 더 크고 무겁다. 과학에서도 IT산업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 또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이다. 일단 과학이 미래 국부 창출의 핵심적 역할을 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오직 미래의 과학을 선점하는 국가만이 세계 경제에서 선도적 위치를 차지하리라는 것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래 창조의 근원을 논하는 것은 무언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우둔함의 소치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과학에 우선하는 것이 인문학이요 문화예술이라는 사실 또한 변함이 없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더라도 그 과학을 발전시키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거나 이를 향유하는 문화예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과학은 무용한 것이 될 것이다. 과학을 위한 과학은 인간을 과학의 노예로 만드는 과학 만능의 것이 되고 말 것이다.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이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면서 시적 영감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는 자연의 법칙을 창안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래를 창조한다는 것은 인간의 꿈을 실현한다는 것이며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도 인간의 상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달나라에 가고 싶다는 인간의 꿈이 없었더라면 이태백의 시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우주선을 타고 달에 착륙하는 과학적 성취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과학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그 과학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이 없다면 그 과학은 무용한 것이다. 과학을 발전시키는 것도 인간이요 그것을 향유하는 것도 인간이다. 인간은 꿈을 먹고 사는 존재이며 미래의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사는 존재이다. 이는 새로운 정부가 구상하고 있는 과학에 대한 집중적인 지원에 대한 인문학자의 억지 하소연이 아니다. 인문학적 측면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판타지 산업이다. 판타지 문화라고 할 수도 있는 이는 물론 디지털 코드의 시대에 탄생한 새로운 문화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산업에서 우선 거론할 수 있는 것이 영화산업이다. 최근 한국 영화는 관객 1천만명

  • 낯선자들의 사회

    낯선자들의 사회 지면기사

    한국 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주로 농촌에 모여 살았던 인구는 서울과 그 인근으로 옮겨 이제는 전 나라의 절반 수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었고 부산, 대구, 대전, 인천과 광주와 같은 그외 다른 주요 도시는 누구라도 기회만 있으면 옮겨가는 곳들이 되었다.한국에 처음 발을 내디딘 지 20년이 지난 지금 이제껏 보아오던 급격한 도시화는 생각보다 더욱 무섭게 느껴진다. 설 연휴 서울에서 있었던 층간 이웃의 살해사건은 이런 급속한 사회 발전의 부작용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한 남자가 두 명의 이웃을 살해한 이유가 층간의 소음 때문이라고 했다. 이 섬뜩하고 잔인한 범죄로 온 나라 사람들이 경악했고 모두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에 놀랐다.설을 쇠고 서울에서 광주로 내려오는 동안 나는 서울이 텅비어 있는 것 같았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서울에서 광주로 가는 고속도로는 다른 편 상행선에 비해서 또 다른 날들에 비해서도 매우 한산한 편이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고향에서 서울로 돌아오고 있던 길이라 서울 안은 몹시도 한가로웠다. 그러고 보면 서울에는 본래 서울이 고향이 아닌 사람들이 가득 모여 사는 곳으로 다른 지역에서 이주한 이방인들의 거대한 도가니다.안타깝게도 아파트에서 사는 우리네의 라이프 스타일은 명백히 이런 상황을 호전시키지 못한다. 한 예로 광주에 처음 왔을 때 아파트에서 살 만한 형편이 되지 않아 광주 방림동의 한 주택가에서 살게 되었다. 그 동네엔 한국 그 어디에도 흔한 아파트 한 동 없이 오직 올망졸망 모여있는 작은 집들과 간혹 가다 남아 있는 한옥이 전부였다. 그래서 나의 아내와 나는 재미로 그 동네를 방림 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사실 정겨운 작은 마을처럼 느껴졌던 곳이라 마을이라 불렀던 것 같다.우리는 동네 이웃들을 잘 알았고 나이 많으신 이웃 어른들은 햇빛 좋은 날이면 어김없이 길가에 나와 앉으시곤 한나절 내내 얘기를 나누며 함께 시간을 보내곤 하셨다. 동네 곳곳 어디서고 일체감을 느낄 수 있었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를 알고 우리도 그

  • 학생교육원에 의병정신을 담자

    학생교육원에 의병정신을 담자 지면기사

    1959년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은 내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안겨주었다. 당시 나는 서울의 동덕여고에 다니고 있었는데 학생회장 후보로 대대장 후보와 함께 왕십리에 있던 무학여고에서 간부 학도훈련을 받았다. 서울시교육청이 서울에 있는 모든 여고에서 학생 두 명씩을 선발하여 장미반과 백합반으로 분반, 숙식시키며 집중교육을 시켰던 것이다.간부로서의 자질 함양이 목표라고 했는데 교과과정은 다양하였다. 당대의 저명인사들이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 리더십에 대한 정의, 투철한 국가관과 애국심에 대한 담론 등은 물론이고 자유시간엔 레크리에이션 시간도 있었고 뚝섬에 수영하러 가기도 하였다. 간부학생으로서의 자부심이 있어서인지 교육은 사고하나 없이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졌고 훈련하는 선생님이나 훈련받는 학생이나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벌써 50년이 훌쩍 넘었건만 어제 일같이 생생하다.뒤에 회고해 보니 이 경험은 내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그전까지는 사회나 국가에 대하여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오직 나 하나에만 관심을 갖고 살았는데 나를 넘어선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해 학생회장이 되어 4·19혁명 와중에서도, 그 후의 내 삶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시절의 경험은 누구에게나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 생각한다.'강원학생교육원'은 강원도내 청소년들에게 의병정신을 고취하는 곳으로 알고 있다. 그 학교가 위치한 가정리가 바로 조선 망국의 시기에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의암 유인석 장군의 사적지이므로 그곳의 시설물이 의병운동이나 의병정신과 관련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의암선생이 어떤 인물인가는 재론할 필요조차 없겠지만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김구선생이 노구를 이끌고 춘천시 남면 가정리까지 거동하여 의암선생 묘소에 제의를 행하며 바친 고유문을 보면 더 분명해진다.의병정신은 한마디로 애국정신이다. 의병정신의 뿌리는 깊다. 의병운동은 멀리 조선 중기 병자호란과 임진왜란까지 소급되는 외세배격운동이자 구국운동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민초들이 일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