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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대정신과 선현들의 어록

    시대정신과 선현들의 어록 지면기사

    역사의 길에는 여러 갈래가 있다. 역사의 길은 항상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수난의 길도 있고, 극복의 길도 있고, 희망의 길도 있다. 이 길 위에 수놓았던 선현들의 영혼의 울림 같은 시대의 종소리를 되새겨 보는 것도 오늘날을 열어 가는 데 귀중한 교훈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역사를 오래된 미래라고 하지 않는가.원효의 아들 설총이 지은 화왕계(花王戒)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뒤 해이해져 가는 왕실을 비롯한 사회 분위기를 바로잡기 위해 신문왕(신라 31대 재위 681~692)에게 지어 바친 유교의 교훈서이다. 그 속에는 왕을 모란꽃에 비유하여 장미꽃의 화려한 유혹에 현혹되는 임금에게 풍요로운 때일수록 띠풀도 아껴야 하고 지도자는 진실과 허구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할미꽃의 진언으로 신문왕을 각성케 했다는 이야기다.한편 지배층의 부패가 극심해서 민생이 도탄에 빠져가는 고려 말에 가정 이곡(1238~1351)이 지은 차마설(借馬說)을 통해서는 시대를 바로잡기 위한 지성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돈이 없어 말을 빌려 탈 때 날쌘 말을 빌렸을 때는 낙상의 위험이 크고 야윈 말을 빌렸을 때는 넘어질까 조심하여 냇물은 걸어서 건너고 비탈길도 조심하여 오히려 낙상의 위험이 적다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잘나갈 때 조심하라는 이야기다. 덧붙여 모든 것은 다 빌린 것으로 세상 떠날 때 가져갈 것이 없는데 제 것인 양 착각하고 집착하여 화를 자초한다는 뜻이다.우리 역사에서 민족문화의 토대를 이룬 세종대왕(조선왕조 4대, 재위기간 1418~1450)의 따뜻한 정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 중에 세종대왕이 즐겨 썼던 생생지락(生生之樂)이라는 말이 있다. 나라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고 백성은 먹을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는 말과 함께 지도자가 성심으로 이끌면 백성들은 부지런히 근본에 힘써 종사하여 그 생업을 즐거워한다는 이야기로 세종대왕의 나라사랑, 인간사랑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러한 따뜻한 마음이 노비에게 부부합산 160일의 출산휴가를 주고, 글을 몰라 어두운 세상을 사는 백성들을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광명

  • 억울한 표정을 짓는 공직자들

    억울한 표정을 짓는 공직자들 지면기사

    기름유출 현장 냄새 때문에 입 막은건 '오해라고'카드사 정보유출 국민탓인양 막말 '실수 정도로'고위직 기용때 논문표절 학계 해명에도 '손사래'세상 살다보면 누구나 억울한 일 한두번 겪기 마련이죠. 예전에는 이게 힘이 없는 사람과 재수가 없는 사람들이 겪는 일들이었지요.어느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하루 묵으려고 어느 집에 머뭅니다. 해는 서산에 걸리고 나그네는 봉당에 앉아 주위를 살핍니다. 그때 마당에 무언가 반짝 빛나는 것이 보입니다. 저런, 옥구슬이 떨어졌군, 하고 그걸 주워 주인에게 돌려줄 생각을 하는 순간 그 집의 거위도 햇빛에 반짝이는 구슬을 본 모양입니다.저녁에야 주인집은 옥구슬이 없어진 것을 깨닫습니다. 구슬을 어딘가에 흘렸다는 생각보다 누군가 훔쳐갔다는 생각을 먼저 하는 것이죠. 나그네는 사람들에게 묶이고, 날이 밝으면 관가로 끌려갈 참입니다. 나그네는 자기 옆에 거위를 함께 묶어달라고 말합니다. 다음날 아침 나그네 옆에 묶인 거위가 눈 똥에 옥구슬이 나왔습니다. 진즉에 말하면 지난밤 풀려났겠지만, 그러면 죄 없는 거위가 성급한 사람들에게 배가 갈려 목숨을 잃었겠지요.톨스토이의 소설 '하느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에는 그보다 끔찍한 얘기가 나옵니다. 어느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여인숙에 듭니다. 그날 밤 여관주인이 누구에겐가 살해되고 나그네는 살인 누명을 쓰고 먼 곳에 있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청춘을 감옥에서 다 보내고 머리까지 허옇게 센 노인이 되었을 때 진범이 들어와 지난날 여인숙 주인 살해사건을 자기가 저질렀다고 말합니다.끝내 진실이 밝혀지긴 했지만, 감옥에서 보낸 저 청춘을 어떻게 할까요? 진실이 밝혀져도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어디 있을까요? 그런데도 주인공은 하느님이 진실을 저버리지 않았다는데 감사합니다.그런데 요즘 우리나라 관료들 가운데 자신의 업무와 관련해 억울한 일을 당한 듯한 표정을 짓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이 보면 어디 가서 누구에게도 억울한 일 절대 당하지 않을 것처럼 힘 있고 권력 있는

  • 서둘러 갈 일이 무엇인가

    서둘러 갈 일이 무엇인가 지면기사

    신년사 잘 살펴보면 새해 예견하는 단초 발견진정한 소통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시작변화가 늦으면 시장은 최후를 경고하고 위협새해 정월이다. 다음 주면 설이다. 높은 정신에서 보면 시간은 지혜의 그림자 같은 것이어서,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한다. 그러나 세파를 이기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는 이 맘 때쯤이면, 무엇인가 새로운 계획도 세우고 올해도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보는 것이 상정이다. 사회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책임자들도 새해 신년사라는 것을 내 놓는 것을 보면 같은 생각인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이때가 되면 나는 홈페이지를 뒤져 이것들을 살펴보곤 한다. 대개 덕담과 함께 자기 조직이 해야 할 계획 등을 밝히는 것이 보통이지만, 내가 관심을 갖는 이유는 나름대로 잘 살펴보면, 그 해의 흐름을 예견할 수 있는 단초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해 내 일의 방향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된다.사실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다. 특히 사람의 욕망이 관여된 경우는 더욱 그렇다. 고도의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하는 경제나 주가 예측이 그토록 터무니 없는 것을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앞일이 궁금하니, 이렇게라도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지도자들이 평소에는 잘 드러내지 않는 속내를 신년사의 행간에 드러내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이는 또 다른 덤이다.보름 전쯤, 박근혜 대통령이 신년회견에서, 경제를 생각하면 '1초도 아깝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에 나는 '아, 올해 우리 경제가 많이 어렵겠구나'라고 생각하였다. 올해는 물론이고, 예년에도 빠지지 않는 신년사의 단골 메뉴는 역시 '변화에 대한 강조'이다. 보통 신년사에는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에는 두 부류가 있다. 소극적으로 순응할 것이냐 아니면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이냐이다. 조직의 상황에 따라 선택은 다를 수 있지만, 많은 경우 국내외 경제나 정치상황을 고려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의 수가 많은가를 가늠해 보면 그 해의 추세를 짐작할

  • 사회적 자본 벽을 넘어

    사회적 자본 벽을 넘어 지면기사

    돈·정보력 등 세습적 사회적자본 출세 지름길과거제 사라졌지만 여전히 고시천국인 한국공교육 질 높이고 다양한 인재선발법 모색해야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인간 사회의 성격을 꿰뚫어보았다. 그가 사용한 '사회적 자본'이라는 용어만 해도 그렇다. 파리 중산층 자녀들에게 소르본 대학교의 졸업장은 출세의 날개를 달아주지만, 시골 농부의 자녀들에게는 별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같은 조건이라도 사회적 자본여하에 따라 성취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조선후기 서울의 명문가인 '경화세족(京華世族)'들은 대대로 습득한 시험비결에 힘입어 수월하게 문과에 급제했다. 그들은 노른자위 벼슬만 지내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시골 수재들이 죽을 힘을 다해 시험에 합격하고도 좌절한 것과는 딴판이었다.과거시험 자체는 상당히 공정하였다. 조선후기의 정규시험에서 평안도 출신 문과 합격자가 많았다는 사실이 증명하는 바다. 문제는 그들의 행운이 합격에 그치고 말았다는 점이다. 그들의 벼슬은 기껏해야 성균관 전적(典籍) 또는 시골의 현감이나 군수였다. 하릴없이 고향에서 벼슬을 기다리다 죽는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조선사회의 '용'이 되지 못했다.따지고 보면 사회 부조리에 가장 적극적으로 항거했어야 할 사람들이 그들이었으나, '용'이 될 행운을 기다리느라 조직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사태는 개선되지 않았다.그 당시 과거시험에 응시하는 수험 인구는 50만명도 넘었다. 시험지옥이었다. 많은 선비들은 스트레스로 인해 치질과 위장병에 시달렸다. 서울의 젊은 선비 유만주(兪晩柱)도 그렇게 병고에 시달리다 34세에 요절했다. 그래도 그는 '흠영(欽英)'이라는 일기책을 남겨 후세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으니 다행이었다.문제는 있었지만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은 높이 평가할 만하였다. 서양 여러 나라는 프랑스혁명(1789)이 일어난 다음까지도 그만큼 공정한 인재등용 방식을 발견하지 못했다. 조선사회가 '능력 본위'로 인재를 뽑아 썼다는 사실은 길이 기억할 일이다.조선시대에

  • 문화유산과 보존의 지혜

    문화유산과 보존의 지혜 지면기사

    21세기 지식기반사회는 첨단과학기술이 다른 학문과 서로 융합하여 발전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하고 있으며 이러한 추세에 발맞추어 우리는 기존의 질서와 가치관을 끊임없이 재편해 가는 과정에 있다. 최근 들어 대한민국의 위상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지속적으로 국가브랜드를 높이기 위한 필수과제는 먼저 우리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문화의 보석을 알고 소중하게 가꾸어서 그 감동을 세계에 알릴 수 있어야 한다. 문화융성시대 대한민국의 국격은 모든 국민이 참여하고 함께 협력하며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자긍심을 가지고 열어가는 자세를 갖출 때 높아질 수 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 하였다. 미래 인류가 지향하는 가치들인 협동심과 창의성, 나눔과 배려, 소통과 화합, 자연과 인간의 조화, 평화와 생명 존중 사상은 우리 역사 속에 속속들이 새겨져 있다.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물질만능 풍조와 기계 문명에만 젖어 있어 유형문화 속에 깃들어 있는 정신적 가치를 너무 많이 잊어버렸다. 바로 숭례문 화재사건이 그 하나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숭례문을 물질 또는 형태로만 보았기 때문에 범인이 화풀이 대상으로 삼았던 것인데 그 속에 들어있는 시대의 고귀한 숨결과 민족의 혼을 일찍이 역사교육을 통해 가르쳐 주었다면 사람을 살상하는 일 못지않게 망설임이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일이 저질러지고 난 후에 후회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 아무리 첨단과학기술, 건축기술을 적용한다 해도 시대를 잃어버렸고 순수한 정신을 잊었기 때문에 원형 그대로 복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는 창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지키고 보존하여 다음 시대로 넘겨주는 일이 더더욱 중요하다. 지금 문화재 복원사업이 여기저기서 진행되고 있고 또한 보존에 대한 빈번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시대변화와 함께 개발논리도 적용되어야 할 때가 있겠지만 보다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일제 식민지시대 일본인들은 우리 문화의 가치를 너무 잘 알아서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일부러 파괴했고, 우리는 몰라서 스스로 파괴했던 우(愚)를 범했던 일을 경각심

  • 새해는 우리 모두 안녕해질까?

    새해는 우리 모두 안녕해질까? 지면기사

    불안한 시대 반영 최근 신춘문예 응모자 늘어사회적 박탈감에 절박한 안부 묻기 계속될 것누군가 대답해야 하는데 입막을 생각만 해서야새해 아침 많은 신문에 각 신문사마다 실시한 신춘문예 당선작과 당선자의 얼굴이 나왔다. 신춘문예를 실시하는 신문도 있고, 하지 않는 신문도 있지만 어떤 신문이든 지난 일년간 기사를 통틀어 신춘문예 당선작만큼 여러 지면을 한 사람의 얘기로 채우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소설 당선작의 경우 오직 한 사람의 말과 생각으로 적게는 두 지면을 많게는 세 지면을 가득 채운다.올해에도 몇 군데 신문의 신춘문예 심사를 보았다. 문학처럼 그 시대를 거울처럼 반영하고 있는 것도 드물다고 한다. 그것은 내용에서도 그렇고, 형식에서도 그렇다. 그런데 최근 심사를 하며 그것과는 또 전혀 다른 느낌 하나를 더 받았다. 내용과 형식뿐 아니라 동기에서도 그것은 바로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반영한다는 점이다.최근 몇 년 간 신춘문예 응모자가 꾸준히 늘고 있다. 어느날 갑자기 문학의 위상이 높아져서 응모자가 늘어난 것은 아니다. 갈수록 책을 읽는 사람은, 더구나 시와 소설을 읽는 사람은 줄어든다고 하는데 신춘문예의 응모자는 반대로 늘어나고 있다. 뭔가 할 얘기가 많은 시대라는 것은 분명하다. 꽤 오래 전 IMF가 처음 시작되던 해에도 신춘문예 응모자가 그 전해에 비해 급격하게 늘어났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패션업계에서 여자들이 입는 치마길이가 길어지면 호경기이고, 짧아지면 불경기로 진단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해그해 신춘문예 응모자 수야말로 우리 사회의 또다른 경기 지표인지도 모른다. 시대가 어수선할수록, 삶이 절박할수록, 그리고 일자리가 불안정할수록 신춘문예 응모자의 수가 늘어나는 것만은 틀림없다.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글을 쓰고 싶게 하는가. 갑자기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해져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었다면 한 나라의 문화로서도, 문학으로서도 다행한 일이겠지만 그것의 동기는 전혀 그렇지 않다. 저마다의 일터에서 저마다의 일을 잡고 있어야 할 사람들이 어느날 일자리를 놓게 되거나, 젊은이

  • 시작과 끝, 희망을 말하자

    시작과 끝, 희망을 말하자 지면기사

    얼마 전 새해의 다짐을 한 것 같은데 벌써 한해를 마감할 때가 다가온다. 이럴 때쯤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지만 또 다른 해를 맞게 되니 무언가 숙연해진다. 특히 시간의 빠름은 나이에 비례하여 느낀다고 하니 우리처럼 나이 들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은 더욱 그런 것 같다. 성경의 말씀처럼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하였는데 왠지 우리 삶의 시작과 끝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크게는 나랏일에서부터 작게는 개인의 일까지 시작은 크고 희망을 말하지만 끝은 미약하고 아쉬움이 남게 마련이다. 특히 올해엔 사람과 사람, 정파와 정파, 국가와 국가 사이가 더욱 그런 것 같다. 인간사에서는 사랑과 이해, 희망보다는 미움과 오해, 좌절이 더욱 더 많은 것 같다. 정말 하찮은 일에 분노하거나 낙담하여 죽이거나 스스로 자기의 생을 거두는 경우를 자주 본다. 요즘 어려운 상황에도 여념 없이 생존해 가고 있는 필부필부들의 일상을 '안녕들하십니까'?라고 묻고 있는 화두에서 큰 의미를 느낄 수 있다. 노력하면 무언가 성취되어야 함에도 도무지 이룸이 어렵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 미래가 불안하다고 푸념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간극이 더 벌어지고, 주는 자보다 바라는 자가 더 늘어만 나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정치권에서는 선거가 끝난지 언제인데 지금도 그 얘기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 철도문제는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달리는 형국이다. 힘 가진 집단과의 대화는 도무지 뚫리지 않아 막혀있고 그렇다고 신선한 어젠다를 내세워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지 못하고 있음도 답답하다. 정치학자가 아닌 백면서생인 내가 보아도 한국을 둘러싼 각국의 쟁패는 심각하다. 다들 자기네 이익만을 추구하고 국제사회의 질서와 공익은 사라진 것 같다. Korea라는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3대 세습이나 패륜적 상황은 상상이 안되고 부끄럽기도 하다. 이건 약과다. 남의 땅을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세계 최강 경제대국 일본도 있다. 끊임없이 대륙에 대한 욕심을 내고 있다. 참혹한 살육의 만행을 반성하기는커녕 오히

  • 북한 왕조, 마지막 장이 시작되는가?

    북한 왕조, 마지막 장이 시작되는가? 지면기사

    북한이 특별하게 잘하는 것이 하나 있으니 가끔씩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 그 것이다. 그런 북한임을 감안하더라도 이번에 보여준 장성택의 처형은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국내외 대부분 전문가들은 김정은의 권력 승계 과정에서 장성택이 중심적 역할을 해 왔으며, 이는 김정일의 뜻이었다는 의견에 동의하고 있다. 그럼 김정은은 왜 자신의 멘토 역할을 해왔던 고모부를 제거해야 했는가? 먼저 생각나는 것이 작년 8월에 있었던 장성택의 중국 방문에 대비되는 금년 5월 최룡해의 중국 방문이다. 중국의 장성택에 대한 환대는 국가 정상급에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 이후 장성택이 추진해 왔던 나진 선봉 경제특구와 같은 중국과의 경협사업은 그런대로 진전을 보여 왔다. 북한의 자원개발 사업에 중국 기업의 참여도 확대되어 왔다. 이에 반해 최룡해는 중국 방문시 환대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핵문제와 관련하여 중국으로부터 질타에 가까운 불만 표시가 있었던 것으로 보도되었다. 중국이 자신들의 세계전략 선상에서 테크노크라트 출신의 장성택을 더 선호했을 것으로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다음 눈길을 끄는 것은 북한 당국이 발표한 장성택의 죄목 리스트이다. 작게는 마약, 여자 등 개인의 품행에서부터 크게는 쿠데타 음모까지 나열되어 있다. 특기할만한 것은 외국과의 경제 관계 추진에 있어 실책이다. 여기서 말하는 외국은 다름 아닌 중국이다. 장성택의 몰락에 중국변수가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하게 하는 대목이다. 핵무기와 미사일을 포기할 의사가 없는 군부가 핵무기 포기와 대외개방을 종용하는 중국의 후광을 업고 중국의 입장을 지지했을 장성택을 곱게 보았을 리 없다. 그의 처형이 단시일 내 이루어진 것도 혹 있을지 모를 중국의 개입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서였을 가능성이 크다.김정은이 최룡해 일파의 압박에 마지못해 장성택의 처형에 동의했는지 아니면 장성택과 김정남 그리고 중국이라는 삼각 커넥션의 가능성에 불안감을 느껴 주도적으로 고모부를 제거했는지는 훗날 역사가 밝혀줄 일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제 김정은이 보고

  • 비트코인과 세계화폐

    비트코인과 세계화폐 지면기사

    최근들어 개인간 직거래가 가능한 디지털화폐 비트코인이 전 세계적으로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다. 비트코인 가격은 지난 11월 28일 $1천/BTC를 돌파하고 그 다음날 바로 $1천242/BTC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연초의 가격이 $13/BTC 수준이었으니 11개월 만에 100배로 뛰어오른 것이다. 비트코인이 처음 발행되던 2009년에 처음 거래된 가격이 5센트였다고 하니 그때부터 따지면 비트코인은 4년여 만에 2만4천840배나 오른 셈이다.비트코인 가격 급등과 더불어 비트코인에 대한 투자와 사용이 급증하면서 비트코인 열풍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해킹, 비트코인이 저장된 하드웨어 분실, 불법거래 방지를 위한 당국의 단속 가능성 등의 불안정 요인은 일단 논외로 하면, 비트코인에 대한 질문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그 하나는 "지금과 같은 비트코인 가격의 폭등은 거품이 아닌가?"하는 것인데,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비교적 쉽다.비트코인처럼 수요에 맞춰 공급을 늘릴 수 없는 재화는 우발적인 뉴스에 따라 가격이 폭등했다가 급락하는 폭등-폭락 주기를 일으키기 쉽다. 폭등가격을 통상 '거품'이라고 한다. 공급이 제한된 재화의 경우 어떤 계기로 균형가격 위에서 가격이 생성되면 추가적인 가격상승을 기대하면서 추가적으로 재화를 확보하고자 하는 초과수요상태가 형성되어 가격이 계속 상승하게 되고, 가격이 하락하는 경우에는 초과공급 상태가 형성되어 계속 하락하게 된다. 실제로 비트코인 가격은 지난 4월 1주일 새 30% 수준으로 급락하기도 하였으며 최근에만 하여도 지난 7일 비트코인가격의 상승을 주도한 중국의 포털사이트 바이두에서 비트코인 결제 중단 발표 직후 이틀 만에 가격이 절반 이하로 폭락하였다. 이러한 가격의 불안정성은 비트코인의 화폐로서의 가능성에 치명적인 결격사유라고 할 것이다. 비트코인으로 결제를 받는 온-오프라인 매장도 엄밀한 의미에서 화폐로서 비트코인을 받는다기보다는 비트코인의 '투기'에 가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다른 하나는 "비트코인은 '미래화폐&#

  • 숭례문 앞에서 노무현을 생각한다

    숭례문 앞에서 노무현을 생각한다 지면기사

    임진왜란때 가토 기요마사 한양 입성기념 지정해방후 일제지정 그대로 답습 국보1호로 재지정부실복원 신뢰 잃고 국보1호 해지 논란 휘말릴듯그는 분명히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고 말했다. 2008년 2월. 국보 1호 숭례문이 무너지던 날이었다. 숭례문 방화범 채종기란 할아버지는 왜 숭례문을 불질렀냐고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노무현"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기 소유의 토지를 노무현이 조금밖에 보상해 주지 않아서 홧김에 숭례문에 불을 질렀다고 목소리 높여 말했다. 노무현 정권 말기, 사람들은 축구에서 져도 노무현 때문이라고 했고, 연예인이 이혼해도 노무현 때문이라고 했던 시절이었다.그 뒤로 5년이 흐른 2013년, 숭례문은 준공후 수개월만에 단청이 벗겨지고 기둥이 갈라지는 등 부실 복원 논란에 휘말렸다. 일본산 화학안료를 쓰고, 덜 건조된 나무를 사용했으며, 무리하게 공기를 단축하느라 부실 복원이 되었다는 갖가지 주장이 가중되었다. 문화재청장은 국보 1호의 부실 복원 논란에 대해 사과하고 철저한 조사와 오류 시정을 약속했지만, 책임을 지고 결국 중도하차해야만 했다.그런데 숭례문은 무슨 이유로 국보 1호가 되었던 것일까? 숭례문이 국보 1호가 된 이유는 일본의 조선 강점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숭례문은 1907년 당시 조선에 주둔했던 하세가와 사령관이 서울 교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헐리게 될 운명에 처한 적이 있었다. 소식을 들은 당시 일본인 거류민단장은 하세가와를 면담, 숭례문의 존치를 설득했다고 한다."숭례문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한양에 출입했던 문입니다. 지금 한양에 남아있는 유적들 중에 임진왜란 당시의 유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 숭례문을 철거하면 곤란합니다."실제로 숭례문에 대한 일본측의 인식은 일제시기 내내 여기서 거의 변하지 않았다. 예컨대 1927년 발행된 '취미의 조선여행(趣味の朝鮮の旅)' 책자에서는 숭례문에 대해, "그 옛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정벌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남대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동대문을 통해 경성으로 쳐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