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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랜드마크 콤플렉스

    랜드마크 콤플렉스 지면기사

    [경인일보=]서양에서 역사가 오래된 도시들의 원형을 추적하다 보면 거의 로마제국의 흔적, 특히 군단 주둔지를 발견하게 된다. 파리의 원도심인 시테섬, 런던 시가의 발상지인 시티, 비엔나의 빈도보나나, 프랑크푸르트의 뢰머광장 등이 다 그렇다. 이들은 레기오(Regio)라고 부른 로마 군단의 캠프를 중심으로 발달된 도시들인데, 그 당시 로마가 세계의 중심이었으니 지방을 뜻하는 Region이라는 단어도 그래서 생겼다. 카스트라라고 부른 이 캠프는, 로마에서 오는 길을 연장시킨 카르도라는 길에 데쿠마누스라는 길을 직교시킨 후, 그 교차점에 포럼을 놓고 그 정면에 사령부, 그 주변에 인슐라라는 군막사를 설치하여 담장을 두르는 게 표준적 배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배치가 그대로 그 도시의 광장이 되고 시청사가 되었으며 완고한 성벽을 가지는 서양도시의 전형이 된다.중세에는 봉건 영주의 거주지를 중심에 놓고 높은 성벽으로 둘러싼 방사형의 도시가 이상도시라는 이름으로 유행처럼 유럽의 방방곡곡에 세워졌는데, 그 도면들을 보면 전부 기하학적 구성이어서 이를 손쉽게 건설하기 위해서는 또한 반드시 평지를 찾아야 했다. 운하를 뚫어 강물을 끌어낸 후 해자를 만들고 성벽을 쌓은 다음 주변과는 섬처럼 단절된 요새를 만들었으니, 이는 자연과 주변을 배척하는 도시였다. 근세에 들어와서도 마스터플랜이라는 이름으로 건설된 신도시들은 그 기반을 여전히 평지에 둔다. 주거지역 상업지역 공업지역 등 기능적 용도를 설정하고 땅을 평면적으로 구분해야 하는 구조는 최고의 토지 효율을 목표로 삼은 까닭에,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평지의 확보가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이 평지의 도시가 다른 도시와 구별되는 시각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내세우는 게 랜드마크라는 인공구조물이다.그러나 우리가 도시를 만드는 방법은 달랐다. 예를 들어, 서울이 조선의 수도로 정해질 때, 서울이 가지고 있는 산세와 물길 등 지형적 형상이 우선적 요소였으니 이미 서울은 아름다운 자연적 랜드마크를 가진 도시였다. 집들은 이 산세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양지바른 땅 위에 작은 단위로

  • 꽃은 피고, 지고

    꽃은 피고, 지고 지면기사

    [경인일보=]지난 5월 초하루였다. 황사가 뒤섞인 빗발이 적시고 가는 4월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소설가 김용성은 이승을 떠나 땅에 묻혔다. 세월의 격차가 있어 캠퍼스에서 만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는 나에게 같은 대학 같은 학과 선배셨다.그날 아침 조촐한 영결식장에서 그를 보내며, 이토록 추모의 절절함이 넘치는 영결식장에 앉았던 기억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약력이, 조사가 이어지는 내내 장내에는 흐느낌이 이어졌다. 참 훌륭하게 사셨구나, 뒤늦게 깨닫듯이 그런 마음이 들었다. 봄비 속에 그의 부음을 듣고 나서부터의 며칠, 선배를 보내면서 내내 생각했다. 가르침을 주셨던 은사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날들이 이어지더니… 이제는 드디어 가까웠던 선배의 영면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데까지 때가 왔는가 싶었다.한 작가의 영면을 맞아 그의 문학적 향기를 반추하며 그 가치를 되짚어 주는 기능이 점차 사라져가는 오늘의 언론풍토도 아쉬웠다. 줄기찬 산문정신으로 50여년 소설의 외길을 걸어온 그에 대한 언론의 반응은 생각보다 허술했기 때문이다. 연전에 세상을 떠난 작가 홍성원 선생을 그렇게 보냈듯이. 남은 우리가 기려야 할 것은, 한 작가가 그의 시대에 남겨 놓고 가는 가치와 의미 그리고 그가 맡아낸 사회적 역할이다. 한 작가가 해낸 문학적 성취나 사회적 역할과는 무관하게 '인기'에 따라 지나치다 싶게 호들갑을 떨어대는 요즈음의 언론풍토, 그러나 그것 또한 품격의 의연함을 잃어만 가는 우리 시대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니던가.그가 1961년 장편소설 '잃은 자와 찾은 자'로 등단했을 때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한 청년의 이 화려한 데뷔는 실로 어린 소년에게 아름답기 그지없는 충격이었다. 그의 여러 역작 가운데는 '군대 조직 내의 비인간적인 폭력 구조를 통해 현대사회의 메커니즘을 비판'했다는 평을 듣는 '리빠똥 장군'이 있다.그가 1970년대 초 '리빠똥 사장'이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연재할 때였다. 세태를 풍자하면서 날카로운 현실비판과 풍자를 담았던 이 소설은 화제의 대상이 되었고 세간의 폭넓은 관심과 인기를 모았다. 그 무렵 전

  • 원칙주의와 외교의 유연성

    원칙주의와 외교의 유연성 지면기사

    [경인일보=]중국의 삼국지에서 촉나라의 멸망은 형주의 상실로부터 시작된다. 형주는 삼국의 교차로 역할을 하면서 삼국의 중점, 중심의 역할을 하는 땅이었으며 촉에게 형주의 중요성은 제갈공명의 저 유명한 삼분천하(三分天下) 전략에도 나타난다. 제갈공명은 삼고초려로 자신을 모시러 온 유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형주는 북으로 한(漢)과 강이 막고 있어 남해의 이익을 모조리 차지할 수 있습니다.…장군께서 익주와 형주를 걸터 타고 험한 지세를 이용하여 지키고, 밖으로 손권과 동맹을 맺고 안으로 정사에 힘을 쓰다, 천하에 변란이 일어나기를 기다려 상장에게 형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완성과 낙양으로 향하게 하고, 장군께서 몸소 익주의 군사를 모아 진천으로 나간다면 대업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적벽대전의 수공으로 백하에서 조조군을 대파한 이후 유비는 형주에 본거지를 두고 익주를 공략하였다. 그러나 익주에서 군사 방통이 전사하는 등 고전하는 유비를 구원하러 제갈량이 장비, 조운 등의 장수들과 출병하자 관우 혼자 형주를 방비하게 되었다. 형주는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특히 외교가 매우 중요한 방어수단이다. 삼국이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대립하고 있었던 당시 정세는 시시때때로 변하기 때문에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유연성이다.그러나 관우는 무신(武神)의 반열에 오른 영웅호걸이었으나 원칙주의자였다. 공명도 이점이 우려되어 서천으로 출병하기 전 관우에게 글귀를 하나 적어주고 갔는데 "북으로는 조조에 맞서고 동으로는 손권과 화친하라"는 내용이다. 이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관우는 손권의 혼사제의를 '범의 딸을 개의 아들에게 주겠느냐'며 사신으로 온 제갈근을 내쫓았다.관우는 군사들을 이끌고 번성의 조인을 공격했는데 관우의 번성 공격은 온전히 독자적인 군사행동이었다는 것이다. 관우는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고자 번성을 공격하였다. 번성공격의 실패는 부사인과 미방의 배반도 한 몫 하였는데 원래 관우는 부하 부사인과 미방을 선봉으로 삼아 번성공격을 계획하지만 부사인과 미방이 실수로 술을 마시다 불을 내어 군량과 마초가 모두 타 버리자

  • 산동네 꼬마 특공대

    산동네 꼬마 특공대 지면기사

    [경인일보=]1960~70년대, 그 당시 서울은 배나무밭, 감나무밭이 대부분이었고 지금의 강남이 개발되기도 전이었으며 여의도가 있던 시절도 아니었다. 서울의 대표적인 부촌은 지금도 그렇지만 '종로구 성북동'이었다. 그 부촌은 바로 옆 혜화동과 동숭동 저지대까지 이어진다. 축대가 높은 대저택과 이층 양옥집들은 동숭동에 위치한 낙산과 함께 자연스레 사라지고 산동네가 형성되면서 판잣집으로 연결된다. 난 그 산동네에 있는 꽤 괜찮은 판잣집에서 태어났다. 당시 서민들의 주택은 판잣집이 대부분이어서 남에게 자랑할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흉도 아니었던 시절이었다. 다만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곳이 여느 서울의 다른 판자촌과 달랐던 것은 어릴때부터 빈부의 차이를 확연히 보고 느끼며 커야만 했다는 것이다.초등학교 가기 전 놀이터가 없는 산동네 아이들은 오전 내내 대부분의 시간을 산에서 논다. 그것은 놀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산에서 유격 훈련하는 꼬마특공대의 모습에 더 가깝다. 산동네를 내려오면 서울대학교 캠퍼스가 있고, 오후 3~4시가 되면 대학교 운동장이 한산해지는 것과 동시에 산동네 꼬마특공대는 길이 잘난 철조망 루트로 넘어가 대학교 운동장을 접수한다. 그러다 일몰시간이 다가오면 순찰 도는 경비아저씨가 호각을 불며 꼬마 특공대를 쫓아낸다. 그때 달려오는 경비아저씨는 혹시라도 아이들이 다칠까봐 "천천히 내려가! 조심해!"라고 소리를 지르지만 아이에게 그 소리는 자기를 걱정하는 말이 아니라 그저 호통 치는 고함소리로만 들릴 뿐이다. 당시엔 왜 그리 경비아저씨의 호각소리와 제복이 무서웠을까? 그러던 어느 날 호기심 많은 나는 우리 특공대원들을 모아놓고 혜화동에 위치한 혜화유치원을 접수하자고 제안한다. 당시 그 유치원은 상위 5% 가정의 자녀들만 다녔을 때다. 담 너머로 살짝 보이는 아무도 없는 유치원 운동장의 놀이터는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난 제일 먼저 담을 넘어 진입했다. 나머지 두명의 친구도 무사히 진입, 조용히 들어가 주위를 살피고 놀이시설을 조심스레 하나둘씩 타보며 맘껏 즐긴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없이 놀고 있

  • 마스터플랜의 망령

    마스터플랜의 망령 지면기사

    [경인일보=]1972년 7월 15일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11층짜리 서른 세 동의 아파트가 들어선 주거단지를 폭파하여 철거시킨 일이 일어났다. 2차 대전 전쟁영웅의 이름을 따 '프루이트 이고'라고 부르며, 새 시대 새로운 주거를 목표로 1955년에 지은 이 단지는, 가장 좋은 삶터로 평가되어 여러 건축상까지 받았던 바 있었다. 그러나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천편일률적 공간이 갖는 무미건조함으로 인해 그 속의 공공공간이 무법지대로 변하면서, 이 주거단지는 도시에서 가장 절망스럽고 공포스러운 장소로 변하고 말았다. 불과 17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도시범죄의 온상이 된 이곳을 주정부는 폭파로 청산한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건축가 찰스 젱크스는, 이날은 모더니즘이 종말을 고한 날이라고 기록하였다.모더니즘은 19세기 말, 시대적 가치를 상실하여 세기 말의 위기에 몰린 사회가 퇴폐와 향락에 이끌리며 문화가 퇴행하던 시절, 새로운 시대 새로운 예술을 꿈꾼 젊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찾은 시대정신이었다. 그들은 전통적 양식과 역사적 관습에 억눌린 인간의 이성을 회복시키고 합리적 가치를 최선으로 내세우며 우리 삶의 양식을 바꾸었다. 좋은 제품의 대량공급을 목표하며 통계에 근거하여 찾은 표준화라는 방식은 그들의 유용한 수단이었고, 사물을 조직화하고 환경을 체계화하며 수요와 공급을 정량화하는 방식은 그들이 목표하는 사회의 구성원리였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에 대한 과신이 문제였다. 도시를 예로 들면, 땅을 붉은색 노란색 보라색 등으로 칠해 상업지역 주거지역 공업지역으로 나눠서 차등하였고, 도로는 도로의 폭과 속도를 제한하며 서열화하고, 도심과 부도심 변두리로 전체를 나누며 계급적으로 만든 도시계획을 과학적 합리라고 신봉하였다. 심지어는 오래 살았던 동네마저 이 도시계획도를 들이대며 재개발하였으니, 이게 마스터플랜이라는 이름의 괴물이었던 것이다. 특히 세계대전 직후 세계의 도시가 개발의 열망에 휩싸이면서, 이 마스터플랜은 전가의 보도처럼 여겨져 전 세계 방방곡곡을 파헤치기 시작하였다. 표준적 평면을 가진 집단화된 아파

  • 일본침몰인가, 모더니즘의 침몰인가

    일본침몰인가, 모더니즘의 침몰인가 지면기사

    [경인일보=]일흔이 가까운 일본인 친구는 그날 신주쿠의 고층빌딩에서 지진을 만났다고 했다. 정전으로 엘리베이터가 서버리는 바람에 친구는 45층을 걸어서 내려와야 했고, 교통편이 사라진 암흑의 거리를 다시 4시간 동안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책꽂이가 모두 넘어지면서 아수라장이 된 집으로 돌아온 그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나는 더 묻지 못했다.9·11테러에 빗대어 일본인 스스로 '3·11 쇼크'라고 하는 일본 동북부의 대재앙으로부터 한 달여, 그 하루하루는 우리에게 많은 겸허함을 가르쳤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력했던가. 그러나 일본인이 겪어내고 있는 참담함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느껴야 했던 것은 다만 절망과 무력감만은 아니었다.그 가운데 하나가, 재해의 현장을 지켜보면서 오히려 '인류의 진화'를 말하는 희망의 목소리였다. 영국의 한 일간지는 제목으로 '간바레 니폰(힘내라 일본)'을 뽑으며 일본을 격려하는 인류애를 보여주었다. 대혼란 속에서 폭동도 약탈도 없이 보여준 일본인의 자제력과 침착한 대응은 일본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모습들은 인류가 지향해야 할 어떤 가치와 유형을 보여주는 감동으로 세계 속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지난 세기 인류가 한결같이 추구했던 가치는 모더니즘의 가치들이었다. 19세기의 구습에서 벗어나 문명과 보편성(유니버셜리티)을 인류가 공유하자면서 시작된 모더니즘은 능률의 극대화를 미덕으로 펄럭이며 도시화, 기계화를 통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이룩해 냈다. 물질을 가치의 척도로 생각하는 생활의 편의와 그것을 통한 행복에의 추구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의 근대화도 다르지 않았다. 서구화가 바로 현대화라는 물결 속에서 지역문화나 고유문화는 터부시될 수밖에 없었다. 모더니즘의 가치와 미덕 속에서 흙벽의 초가집은 척결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해서 과거의 삶과 도식은 비판과 심문의 대상이 되었고 현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여기에서 우리는 조금 더 우회의 길을 걸었다. 우리가 상정하고 있던 여러 발전모델 가운데는 '일본처럼'이

  • 일본대지진과 북한 핵개발

    일본대지진과 북한 핵개발 지면기사

    [경인일보=]지난 3월 11일 오후 2시경 일본 동북부지역에서 일어난 강도 9의 대지진은 바로 이웃인 우리에게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어 이어진 원전폭발로 인해 원자로의 냉각장치가 정지돼 내부의 열이 이상 상승, 연료인 우라늄을 용해함으로써 저부(底部)가 녹아버리는 멜트다운(meltdown)과 방사능 누출 위험은 원전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일깨워주고 있다.이러한 사고는 안전에 있어서는 자타가 공인한다는 일본에서 일어났다는 것에 더욱 충격을 주고 있다. '강도 9와 같은 사상 초유의 지진에 과연 안전할 원전이 있을까'하는 의문을 자아내지만, 후쿠시마 원전 1호기 폭발 뒤 미국의 기술지원 제안을 일본정부와 도쿄전력이 거부했다는 것과 폭발 직후 프랑스의 붕산 제공 의사에 답변이 없던 일본 정부가 사고 발생 나흘이 지나서야 한국과 프랑스 정부에 붕산 지원을 요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일본정부의 잘못된 판단과 자세 그리고 초기대응의 실패가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키웠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이것을 리더십의 부재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안전에 대한 준비는 자신들이 최고라는 자만심이 초기대응의 실패로 이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일본대지진 그리고 원전 폭발에 대해 세계 각국 특히, 전통적으로 일본과 가깝고도 먼 나라인 한국에서도 도움의 행렬이 이어지는 것은 인류애적인 차원뿐만이 아니라 총 전기생산량의 약 40%를 원자력 발전에서 얻고 있어 남의 일만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이번 지진으로 원자력발전에 대한 비판과 부정적인 여론이 일고 있지만 석유고갈시대에 아직 그 어느 나라도 확실한 대체에너지를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원자력발전에 대한 수요는 잠시 주춤하겠지만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자력발전의 안전은 이번 지진에서 알 수 있듯이 원전을 가동하는 한 국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지난번 구소련의 체로노빌 사태에서도 확인되었지만 주변국 모두에 영향을 미치는 국제적 이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국제적 협의와 협력이 절실히 요구되고 필수적이다.이것은 북한과 같은 한반도에서 살고 있는 우

  • 배우 이순재 '그대를 사랑합니다!'

    배우 이순재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면기사

    [경인일보=]지난 설날 전이었다. 이순재 선생님께서 주연한 강풀 만화 원작 '그대를 사랑합니다' 시사회가 있다고 연락이 왔다. 원작 만화도 봤고 연극으로 공연된 것도 봤고, 어쩜 솔직한 심정은 존경하는 이순재 선생님 주연 영화이기에 꼭 가서 봐야겠다는 의무감도 없진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원작과 상관없이 너무 쉽게 영화에 빠져버렸다. 여느 시사회도 이런 광경은 흔치 않았던 것 같은데 많은 관계자 및 영화인들이 보는 시사회에 이토록 많이 웃고 많이 흐느끼는 객석 반응은 없었던 것 같다. 영화가 끝나고 마침 영화투자 배급사 대표를 만났다. 대표는 본인도 이 영화가 너무 좋아서 3번이나 시사회를 보고 또 웃고 울었음에도 흥행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솔직한 이야기를 했다. 이유인즉 제작비도 평균 영화 제작비의 반정도(10억원)이기에 홍보 마케팅비를 여타 상업영화만큼 집행하기도 힘들고, 잘 나가는 젊은 배우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무엇보다 노인영화라 알고 있어 주관객층이 10~20대(젊은 관객)인 영화시장에서의 승부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이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시사회장을 나오는데 이순재 선생님이 계신다. "영화 너무 좋아요. 선생님 앞으로 멜로 계속 하셔야겠어요"라고 말하고 포옹을 했다.영화 속의 이순재 선생님은 어떤 젊은 멜로배우 못지않게 사랑을 하고 있었고 그 사랑이 관객들로 하여금 70이 훨씬 넘은 나이를 모두가 잊고 그저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전하는 배우로만 느껴졌던 것이다. 송재호 선생님도, 윤소정 선생님도, 김수미 선생님도…. 영화는 개봉했고 첫 주 스코어는 전체 영화 6위로 출발했다. '아! 이게 현실이구나' 싶었다. 둘째 주는 여지없이 10위로 밀려나 버렸고 이 상태라면 보통 그 다음 주엔 영화를 보고 싶어도 상영관이 없어 못보는 상황이 그려지게 된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3주째 4위로 올라서고 지금은 한국영화 1위를 기록하면서 관객은 이미 100만을 넘어섰다. 노인영화인줄 알았는데 사랑 영화, 그것도 유쾌하고 감동적인 사랑 영화라는 게 입소문을 타면서 이제는 평일 낮 시간

  • 일본이여 울지 말라

    일본이여 울지 말라 지면기사

    [경인일보=]서기 79년에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멸망한 폼페이는 그 당시 거의 완벽한 도시였다. 이미 700년의 역사를 기록한 유서 깊은 도시였으며, 아우구스투스 시절부터 시행한 대규모 도시 재개발로 인해 로마에 인접한 최고의 휴양도시로 발전하고 있었다. 주변의 땅은 기름져서 풍부한 농작물을 생산하고 있었고, 항구에 접한 까닭에 물자의 보급이 손쉬웠으며, 계곡 속에 우뚝 솟아 외적의 침범에도 자유로운 지형조건을 충족한 도시였다. 이만 명의 인구는 도시로서 모든 요소와 조직을 갖추기에 적절한 크기였다. 포럼의 주변에는 장엄한 신전들과 공회당들이 적절한 간격으로 들어서 도시의 위엄을 과시하였고, 여기서 뻗은 도로들은 완벽하게 도시의 모든 곳을 소통시켜 주고 있었다. 곡선으로 휘어져 후미진 거리에는 어김없이 목로주점이 있었고, 그 건너편 골목 안의 집은 하룻밤 정을 나누는 거리의 여인들이 사는 집이었다. 계곡과 이웃해서는 완벽한 형태의 노천극장에서 매일 희극이 상연되었고, 언덕너머의 경마장에서는 늘 함성이 들렸다. 놀랍게도, 도시에는 수백 명을 동시에 목욕시킬 수 있는 대중탕이 네 개나 있었다. 물은 공중의 수도관로를 통해 인근의 수원지에서 풍족히 공급받았으며, 이의 관리는 고위직의 공무원이 맡을 정도로 목욕은 시민들에게 중요한 도시 일상이었다.로마에서 휴양차 끊임없이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느라 도시는 늘 분주했고, 이로 인해 도시의 구석구석에서 재미와 활력, 모험과 스릴이 넘쳤다. 그야말로 교역의 요충지였고 역사문화도시였으며, 휴양과 위락의 도시였다. 자연히 문화와 예술이 만발하고, 자유와 평화가 도시에 넘쳐났다. 도시의 북쪽에 위치한 베수비오산은 마치 이 모든 번영을 영원히 지켜줄 듯 우뚝 솟아있었으니, 폼페이 시민들은 이 늠름한 산에 무한한 애정과 신뢰를 가지고 있었을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믿었던 산이, 그러나 한순간에 폭발하여 모든 것을 앗은 것이다. 공교롭게도 불의 신을 위한 축제를 즐긴 다음날 베수비오 화산은 불덩이를 폭발해 내었다. 이백오십 도나 되는 열기가 도시를 휘감았고, 화산재는 이십오

  • 그래도, 봄은 온다

    그래도, 봄은 온다 지면기사

    [경인일보=]이제 몇 번의 봄비가 내리고 나면 이 겨울도 사라져갈 것이다. 눈 많았던 겨울, 혹독하게 추웠던 겨울, 지난해 11월말 안동 돼지농가의 구제역 의심신고 이후 삼백 몇 십만 마리가 넘는 가축이 살처분되는 상처를 남기고 이 구제역의 겨울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겨울이 사라진다고 끝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구제역의 여파는 침출수 오염 같은 우려를 미완의 숙제로 남겨놓고 있다.가축 삼백 몇 십만 마리를 경부고속도로에 늘어세우면 그 길이가 얼마나 될까. 나로서는 도대체 가늠이 안 되는 숫자의 가축이 죽어나갔다. 어떻게 해서 그토록 많은 소 돼지가 죽어야 했던가, 아직 아래아 한글에서 표준어 취급도 받지 못하는 '살처분'이라는 용어를 '죽여 없애다'로 말을 바꾸어 표현하자면 이렇다. 구제역 의심 신고가 접수되자 발생농가 반경 3㎞ 이내에 있는 가축을 양성판정을 받기도 전에 예방한다는 명분으로 땅에 파묻는 방식으로 미리 죽여 나갔다. 이러한 싹쓸이가 문제가 되자 이번에는 반경 500m 이내의 가축만 죽여 없애는 것으로 완화했다가, 지난해 12월25일부터 발생 농가의 가축만 죽여 없애도록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지난 석 달 동안 340여만 마리의 멀쩡한 가축을 병에 걸릴까 봐, 병에 걸리기도 전에 땅에 묻었다. 이러다 보니 남한강 지류의 매몰지에서 돼지 사체와 함께 침출수가 흘러나오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참혹한 살처분의 공포와 절망만으로도 모자라서 이제 우리는 가축의 사체에서 흘러나온 침출수로 인한 토양과 지하수의 오염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구제역을 겪으며 가슴 아팠던 것에는 또 다른 절망이 있다. 어떻게 이 나라는 이다지도 갈기갈기 찢어져 있는가 하는 놀라움이었다. 우리가 치러야 했던 구제역파동은 오늘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거나 숨기고 있는 모든 치부를 낱낱이 드러낸 재앙이 아니었나 싶다.'수도꼭지를 틀었더니 돼지 핏물이 나왔다'는 따위의 사이버공간에서 나돈 구제역 사태 관련 유언비어의 작태는 이 절망의 하이라이트에 가깝다. 그러나 그것 만이 아니다. 기르던 가축을 살처분해야 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