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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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한글날보다 핼러윈? 지면기사
직장인에게 10월은 행복한 달 중 하나로 꼽힌다. 5대 국경일인 개천절과 한글날이 있어서다. 이번 개천절과 한글날은 모두 일요일이었던 관계로 대다수 직장인이 월요일까지 쉴 수 있었다. 올 1월 시행된 '공휴일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경일 등 공휴일이 토·일요일 또는 다른 공휴일과 겹칠 경우, 대체공휴일을 지정해 운영할 수 있어 가능했다.국경일은 나라의 경사스러운 날을 기념하기 위해 법률로 지정한 날이다. 개천절은 단군이 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건국한 것을, 한글날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반포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국가에서 지정한 기념일이지만, 그 의미를 헤아리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2019년 구인·구직 플랫폼 알바천국이 한글날을 맞아 회원 3천359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응답자의 절반도 안되는 38.5% 정도가 한글날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해당 설문결과가 발표된 지 3년이 지난 만큼 최근 분위기를 살펴보기 위해 SNS에서 '한글날'을 검색해봤다. 576돌을 맞은 한글날을 기념하는 게시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한글날'이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올해 마지막 대체공휴일을 즐기고 있는 게시물이 주를 이뤘다. 그저 '빨간날'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더 많은 광경이었다. 이는 기업들도 마찬가지. 올해 한글날 기념 마케팅을 펼친 국내 기업은 손에 꼽힐 정도다. 한글 로고를 선보인 삼성, 네이버, 다음, 줌을 비롯해 한글 서체를 배포한 농심, 순우리말을 알리기 위해 안다미로(그릇에 넘치도록 많이) 캠페인을 펼친 도미노피자 등에 그쳤다. 이에 반해 미국에서 날아온 '핼러윈' 관련 마케팅을 진행하는 기업은 한두 곳이 아니다. 핼러윈 음료를 내놓는 커피전문점부터 편의점, 백화점, 호텔, 게임업체까지. 핼러윈 마케팅을 진행하지 않는 곳을 찾는 게 빠를 정도로 적지 않은 기업이 핼러윈에 '진심'인 모습이다. 한글날보다 핼러윈에 푹 빠진 기업들의 행보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윤혜경 경제산업부 기자 hyegyung@kyeongin.com윤혜경 경제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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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본캐와 부캐 사이 지면기사
최근 즐겨보는 드라마가 있다. 이 드라마에서 한 인물이 2가지의 면모를 보인다. 일상생활에선 매일 같은 옷을 입는 평범한 경리로, 퇴근 후에는 화려한 삶을 사는 또 다른 인물로. '본캐(본래 캐릭터)'와 '부캐(부가 캐릭터)'를 넘나들던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매일 같은 옷을 입는 진화영(경리)이 부캐일 수도 있어."본캐와 부캐를 넘나드는 삶은 현실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내 주변만 해도 한 지인은 낮에는 초등학생 대상으로 음악교실을 하면서 저녁에는 헬스장 트레이너로 일한다. 직장을 다니며 유튜브를 하거나, 계약직으로 일하며 블로거 활동을 하는 친구도 있다.본캐와 부캐를 가진 건 인천시의회 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취재 결과 제9대 인천시의회 의원 중 절반 가까이는 보수를 받는 직업이나 직책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40명 의원 중 38명이 겸직 신고를 했는데, 이들 중 19명은 보수를 받는 영리 목적의 겸직을 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연간 약 6천만원의 의정비 외에도 다른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있는 것이다.이들은 인천시의회 의원 말고도 대표와 조합장, 이사, 한의원장 등의 캐릭터를 소화하고 있었다. 시의회 홈페이지에 공개된 내용도 있지만 일부 캐릭터는 정보공개청구 이후에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지방의원의 겸직이 불법인 건 아니다. 지방의원은 해당 지방자치단체가 출자·출연한 기관·단체 등 소속이 아니면 지방의회 의장에게 신고 후 겸직을 할 수 있다. 다만, 영리 겸직을 하는 이들의 본캐가 '시의원'이 맞는지에 대해선 의구심이 든다.부캐로 여겼던 직업이 본업으로 바뀌는 경우를 주변에서 종종 봤다. 겸직을 하는 시의원들에겐 있어선 안 될 일이다. 적어도 임기가 끝나는 그 시점까지는 본캐와 부캐 사이의 거리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시민을 대표하는 자리로서 그 중대함을 항상 인식하고 본캐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 /유진주 인천본사 정치부 기자 yoopearl@kyeongin.com유진주 인천본사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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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공짜로 예술작품을 즐긴다는 것 지면기사
지난 여름 제주도에서 휴가를 보내며 미술관 몇 곳을 찾았다. 그중 하나는 이름만 꺼내도 익히 알 만한 미술계 거장들의 그림을 미디어아트 형태로 재해석해 관광객들에게 인기몰이하는 곳이었다. 결론적으로 2만원 가량의 관람료가 아깝지 않았다. 전시장을 둘러싸고 생동하는 작품을 통해 눈과 귀가 호사를 누렸다. 푹푹 찌는 한여름 더위를 잊을 만큼 쾌적한 실내 환경 덕에 바닥에 철퍼덕 눌러앉아 작품을 즐기는 데에도 무리가 없었다.다른 한 곳은 서귀포의 한 시립미술관이었다. 이곳에는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뿐 아니라 바람과 폭포, 말 등을 소재로 '제주다움'을 기꺼이 드러내는 지역 출신 화가들의 작품이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나선형의 전시장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커다란 통유리창을 통해 저 멀리에서 눈에 들어온 한라산의 줄기와 산안개가 섞인 모습은 마치 한 폭의 풍경화인 양 장관을 이루기도 했다. 이렇게 전시장을 망라한 작품을 감상하는 데 천원의 입장료만 내면 됐다.두 곳 중 굳이 한 곳만 찾아야 한다면, 나는 고민 없이 후자의 미술관으로 향할 것이다. 물론 어떤 고매한 예술적 판단 기준이 있어서가 아니다. 가성비 면에서 시립미술관이 높다는 점에 따른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미술관을 나온 이후 마음 한구석이 그 기억에 저당 잡힌 채 이끌렸고, 여전히 떠오르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면서 '헐값' 내지는 공짜로 예술작품을 본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새긴다. 그동안 관람 요금에 따라 예술작품의 자격을 나누거나, 그것을 핑곗거리로 작품의 '후진성'을 찾는 데 몰두하진 않았을까. '2022 수원화성 미디어아트쇼'가 지난 주말 개막했다. 화홍문을 캔버스 삼은 미디어파사드 공연은 그중 백미다. 요금을 내면 간이 좌석에 앉아 편히 공연을 감상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아도 얼마든지 수원천 제방 위 난간에 기대어 서서 공짜로 작품을 만끽할 수 있다. 이번 축제는 앞선 제주의 기억에 이어, 공짜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에 대한 나의 생각을 흔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조수현 문화체육레저팀 기자 joelo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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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오늘의 인사말 지면기사
"오늘 기사 잘 봤습니다."기자가 가장 좋아하는 '인사말'이다. 이 말은 매일 신문 지면에 나의 이름과 함께 새겨진 기사를 누군가가 읽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사실을 알리는 글'을 쓰는 기자로서 존재 가치를 부각하고, '더 좋은 기사를 써야겠다'는 다짐을 스스로 하게 되는 인사말이다. 반면 하루에 수십명의 취재원을 만나는 기자에게 이러한 인사말이 돌아오지 않는 날이면, 괜한 부끄럼이 든다.윤석열 정부를 향한 '지도력 공백'이란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대통령 지지율은 취임 두 달 만에 30%대를 기록한 뒤,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달 경기도에만 22명의 인명피해를 일으킨 중부지방 집중호우 사태 때는 '무정부 상태'라는 검색어가 SNS에 대거 등장했다.최근 국민적 공분을 산 '878억원 용산 영빈관' 신축 계획 관련 예산서에 정부가 수혜대상을 '국민'이라 적으면서 민심과 동떨어진 국정운영을 하고 있다는 비판도 직면했다.여야 정치권도 지도력을 둘러싼 논란에 처한 건 마찬가지다. 여당은 민생 해결 대신 여전히 이준석 전 대표 징계 여부를 두고 내홍을 수습하지 못했고, 윤핵관 사이에서 당권 경쟁만 반복하고 있다.야당은 '권력 견제' 기능보다는 이재명 대표와 관련된 사법 리스크를 막는 데에 주력하고 있는 상황이다. '전쟁'이란 표현까지 사용하며 의회 다수당으로서 쥐고 있는 입법 권한을 정쟁 소재에만 이용할 위기에 처해있다.오늘 이들을 마주쳤을 때 건넬 수 있는 인사말은 무엇일까. '공동체를 이끌어 주는 사람'이라는 지도자로서 가지는 존재 가치와 '국민'을 대표하는 선출직이라는 정치권의 정체성. 이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인사말을 위정자들에게 건넬 수 있을까. /고건 정치부 기자 gogosing@kyeongin.com고건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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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효율성 이유 삭감된 스마트공장 예산, 효율성 삭감은 아닐지 지면기사
올해 출범한 윤석열 정부의 핵심 기조 중 하나는 '효율성'이다. 불필요한 예산이 새는 것을 막고 재정 건전성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정부 출범 직후 공공기관의 부채 규모를 줄일 것을 시사한 것이 첫 번째 신호탄이었고, 기획재정부가 지난달 발표한 정부 예산안에서도 효율성에 방점을 찍은 예산 운용을 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다만 재정의 효율성에만 천착해 현장의 요구를 놓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는 분야도 있다. 박근혜 정부에서 시작됐고 문재인 정부에서도 이어져 온 스마트공장 구축 지원사업이다. 전통적인 제조업을 수행하는 중소·중견기업의 제조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도입된 정책이다. 중소벤처기업부가 내년도 스마트공장 지원 사업 예산을 3천억원으로 계획했지만 기획재정부 심의를 거치면서 3분의 1 수준인 1천57억원으로 줄었다.인천은 물론이고 전국의 제조업계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건 당연하다. 매년 스마트공장 지원사업에 신청하는 기업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고 성과도 뚜렷한데, 현장 수요나 분위기는 확인조차 않고 성급히 삭감했다는 것이다. 사업이 본격적으로 확대된 2019년만 해도 제조업 현장에서 스마트공장의 필요성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지만, 도입 이후 효과를 체감한 기업들이 늘어나면서 추진력을 받기 시작한 시점이라 더욱 그렇다. 스마트공장을 도입한 기업들은 품질과 생산성이 각각 43.5%와 30%씩 향상된 것으로 나타났다.제조업 현장이 낙후됐다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계속돼왔다. 새로운 기술과 접목해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장기적으로 한국 경제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길이기도 하다. 생산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정권을 막론하고 이어져 온 사업이 재정 효율성 앞에 위축되는 건 아이러니하다. 스마트공장 사업의 성과와 현장 의견을 지금부터 찬찬히 들여다봐도 늦지 않다. 효율성을 따지기 위해 판단마저 효율적으로 하는 우를 범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한달수 인천본사 경제산업부 기자 dal@kyeongin.com한달수 인천본사 경제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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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 지면기사
최근 문화재와 관련한 여러 사건이 있었다. 김포 장릉 인근 아파트 공사는 뾰족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마무리되며 문화재의 경관 훼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김해 고인돌 유적의 경우에도 복원·정비하는 과정에서 일부 유실되거나 파괴되는 등 문화재 관리의 허술함이 드러나며 공분을 샀다.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문화재가 어떻게 보존되고 관리돼야 하는지, 왜 꾸준한 관심이 필요한지를 새삼 생각해 보게 됐는데 이는 '태실'에 대한 기획기사를 준비하면서 더욱 피부로 와 닿았다.태실을 취재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태실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심심찮게 받은 것 같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태실의 존재는 아직은 생소하고 잘 알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이상하게도 태실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크게 관심받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현황을 조사하고, 발굴해서 체계적인 기록을 남기게 된 지는 몇 년이 채 안 됐으니 말이다. 그러는 사이 태실이 묻혀 지명이 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의 이름이 사라질 뻔하기도 했고, 수많은 태실이 없어지거나 유물을 도굴당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또 발견된 태실 대부분은 훼손된 채 방치돼 있었다. 전문가들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태실의 흔적을 찾고 연구해야 한다"고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탄생부터 삶, 죽음으로 이어지는 인간 생애의 원리 속에서 태실이 갖는 의미는 단순히 개인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비는 것뿐 아니라 나라의 운까지 연결되는 조선왕실의 중요한 문화였다. 이러한 태실을 문화재로 지정해 체계적인 관리를 받게 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그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관심'이 필요하다. 우리 문화재에 관심을 갖고 그 가치와 중요성을 공유하는 일은 어쩌면 옛 문화유산과 함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몫이 아닐까. /구민주 문화체육레저팀 기자 kumj@kyeongin.com구민주 문화체육레저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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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이름을 내어준 이들 지면기사
미혼부 김지환씨는 9살 자녀를 홀로 키우는 과정에서 겪은 고초를 털어놨다. 어느 순간, 무던하던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이 태어나고 1년 4개월 동안 출생 신고도 못 했어요. 의료 혜택 등 국가 지원은 전혀 못 받았고, 결국 돈이 없어서 길바닥으로 내쫓겼죠." 그로부터 9년이 지난 지금, 한국에서 미혼부 자격으로 아이의 출생 신고를 하려면 여전히 소송을 거쳐야 한다. 김씨가 가족법(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의 불합리함을 알려 사랑이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그 과정이 더욱 복잡했다.김씨를 만나기 며칠 전에는 여성인권 활동가 출신의 변호사를 찾아갔다. 그는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 소멸 시효를 범죄로 인한 후유증 진단 시점 이후로 변경한 데 일조한 인물이다. 시효는 가해자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일종의 시간적인 한계다. 법 개정 전에는 10년 전 일어난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법적 근거가 없었다. 변호사는 의문을 품었고 1·2심에 이어 지난해 8월 손해배상 청구 소멸 시효를 후유증 진단 시점 기준으로 계산한 대법원 최초 판결을 이끌었다.법은 변한다. 그 중심에는 불합리함을 알리기 위해 세상에 나선 이들이 존재한다.때로 그들의 이름을 딴 법도 만들어진다. 김씨 자녀 이름을 딴 사랑이법부터 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중 숨져 산업안전보건법을 고친 김용균법, 어린이보호구역 내 안전 중요성을 일깨운 민식이법 등이다.저마다 사정은 달랐지만 이들의 바람은 하나였다. 혹여나 제2의 피해자가 생기더라도 억울하지만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기꺼이 본인의 이름을 내주거나, 수년간 법원 문턱을 드나드는 수고스러움을 감내하며 법이라는 울타리를 만들고 고쳐왔던 국민들의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으면 한다. /이시은 사회교육부 기자 see@kyeongin.com이시은 사회교육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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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태풍, 매미 지면기사
사람들은 매미를 인고(忍苦)의 시간을 보낸 뒤 빛을 보는 곤충이라고 말한다. 6년여의 시간을 땅속에서 보낸 뒤에야 날개를 펴고 바깥으로 나와 길어야 겨우 보름을 울다가 수명을 다해서다. 그마저도 새에게 먹히거나 인간에게 잡히면 결실을 맺는 시간은 더욱 짧다.찰나의 비상을 위해 수년이라는 세월을 견디는 매미는 그래서 다른 곤충들보다 조금 더 경외로운 존재로 여겨지는 듯하다.어릴 적 내 눈에 비친 매미는 안타까운 곤충이었다. 오랜 세월을 견딘 만큼이나 그 이상의 시간을 누리는 삶이어야 소위 말하는 괜찮은 삶이 아니겠나.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불행히도 주변에 매미들이 많다. 언제 찾아올지 모를 결실의 순간을 기다리며 버티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멀쩡히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정치를 하겠다며 도전에 나섰다가 고배를 마신 친구가 있는가 하면, 좋아하는 일을 찾아 직종을 바꿨다가 또다시 취업시장에 내몰린 친구도 있다. 둘에게 돌아온 당장의 결과는 좌절과 실패였으나 다시 일어설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하니 한편으론 다행이다.비단 내 주변 사람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테다. 지난 선거에서 출사표를 던졌던 정치인들도 인내하며 버티는 삶을 보내고 있다.지선에서 경기도지사 선거에 나섰던 소수정당의 한 후보는 물류센터에서 '상탑(컨베이어 벨트에 물건 올리기)' 작업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고 또 다른 후보는 중앙당사 홍보팀 당직자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모두들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가 아닌 자리에서 악착같다. 존재를 증명해내기 위해 몸을 최대한 웅크려 숨죽이는 모습은 모순되게도 필사적으로 느껴진다.수많은 매미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자고 제안한다면 주제 넘는 짓일 게다. 각자가 그리는 하늘도 다르다.태풍과 함께 매미 울음소리도 멎었다. 버티는 삶의 결실을 위하여, 돌아올 여름엔 매미가 더 오래 울었으면 싶다. /명종원 정치부 기자 light@kyeongin.com명종원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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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수원 세 모녀 사건을 다시 쓴 이유 지면기사
지난해부터 '자살보도 권고기준'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대상은 기자로서 첫발을 내딛는 '수습기자'. 강의라는 형식을 빌렸지만 정확히는 경험을 공유하는 시간이다.자살보도 권고기준은 기자에게 '되도록 자살사건은 보도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자살사건을 보도하는 것보다 아예 기사화하지 않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더 크다는 이유다.하지만, 자살보도가 꼭 필요한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개인이 극단적 선택에 이르게 된 원인에 사회적 문제가 얽혀 있을 때가 그렇다. 강의에선 주로 '송파 세 모녀 사건'을 언급한다. 당시 언론은 세 모녀의 안타까운 사연에만 매몰하지 않고, 극심한 생활고를 겪은 이들 모녀가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한 이유를 발굴해 보도했다. 이는 기초생활수급자 선정시 부양의무자 기준을 완화하는 구조적 변화로 이어졌다. 자살보도가 가진 힘이다.송파 세 모녀 사건 이후 8년 만에 언론은 또 다른 세 모녀의 죽음을 맞닥뜨렸다. 송파 세 모녀 사건을 앞서 경험한 언론은 이 비극에 '수원 세 모녀 사건'이란 이름을 붙이고 속보 경쟁에 나섰다. 정부와 지자체도 불과 며칠 만에 "복지 사각지대를 해소하겠다"며 후속 대책을 쏟아냈다. 찝찝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진단보다 처방이 먼저 이뤄진 느낌이었다. 질병에 신음하고,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려 외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던 이들 모녀는 정작 지자체에 복지급여조차 신청한 적이 없었다. 세 모녀가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찾아야 적합한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수원 세 모녀 사건을 다시 쓴 이유다."자살보도는 심리부검과 같다." 강의를 마무리하면서 수습기자들에게 꼭 하는 말이다. 거짓말쟁이가 될 수 없기에 수원 세 모녀의 죽음에 다시 질문하고, 의문을 품고, 궁금증을 가졌다. 부족하게나마 다시 쓴 일련의 기사가 '○○ 세 모녀' 사건의 재발을 막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배재흥 사회교육부 기자 jhb@kyeongin.com배재흥 사회교육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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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복지 신청주의 한계 지면기사
2014년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의 한 단독주택에서 세 모녀가 현금 70만원과 쪽지를 남기고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수원시에서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 한 다세대주택에서 거주하던 세 모녀가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두 사건은 우리나라 복지체계를 다시 돌아보게끔 일깨웠지만, 8년 동안 많은 이웃이 외로운 죽음을 택했다. 2018년 남편과 사별 후 4살배기 딸과 세상을 떠난 증평 모녀 사건, 같은 해 구미의 한 원룸에서는 사망한 20대 젊은 아빠와 아기가 뒤늦게 발견됐다.외롭고 쓸쓸한 죽음이 세상에 드러날 때마다 세상은 탄식과 함께 복지 사각지대를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정치권, 지자체도 마찬가지였다. 정치권은 앞다퉈 SNS를 통해 사건을 전하며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고 외쳤다. 지자체는 제도 개선에 나섰고, 실제 '송파 세 모녀' 사건 이후 공과금 등을 체납한 위기 가구를 발굴하는 '복지 발굴주의'가 가동됐다. 송파 세 모녀 사건과 달리 수원 세 모녀는 누군가가 찾지 않도록 스스로 모습을 감췄다. 8년 만에 또 다른 사각지대가 발견됐고 복지체계의 허점을 다시 마주했다. 그 이후 과정은 과거와 유사하다. 두 사건 모두 근본 원인은 하나였다. '복지 신청주의의 한계'. 복지 발굴주의가 제시됐지만 관련 공무원 수는 턱없이 부족하고 수원 세 모녀처럼 스스로 숨어버리면 이들을 추적할 권한이 없다고 지자체는 토로한다. 취약계층 안전망을 촘촘하게 짜고 관련 제도를 개선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내가 얼마나 가난하고 힘든지, 수많은 서류로 증명해야만 복지제도를 지원받을 수 있는 복지 신청주의를 바꿔야 한다. 또 다른 죽음 앞에서 뒷북치기에 사회는 이미 많은 이웃을 떠나보냈다. 제도를 바꿀 권한이 있는 이들은 말로, 글로 안타까워할 시간에 쓸쓸한 죽음을 막을 근본 대책을 고민해야 한다. /신현정 정치부 기자 god@kyeongin.com신현정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