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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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Korean Pale Blue Dot 지면기사
1977년 9월5일, 미국 플로리다주에선 보이저 1호가 발사됐다. 발사 45년이 지난 현재도 보이저 1호는 태양으로부터 약 233억1천만㎞ 떨어진 성간 우주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이상이 발견됐다고 한다. 안테나를 항상 지구 방향으로 유지하게 만드는 장치에서 판독값과 실제 위치가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아직 정확한 원인은 알려진 건 없지만 태양계 밖인 성간 우주에서 보이저1호는 고에너지 우주방사선을 받는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도 있다. 보이저 1호는 칼세이건의 저서에 나오는 유명한 말인 'Pale Blue Dot'(창백한 푸른 점)의 사진을 찍었다. 1990년 태양계를 벗어나기 직전, 명왕성 근처 우주공간에서 지구를 조준해 사진을 찍은 것이다. 이 사진을 두고 칼세이건은 "우리가 아는 유일한 보금자리인 창백한 푸른 점을 소중히 보존하는 게 우리의 의무임을 강조한다"고 표현했다. 넓은 우주 속 희미하면서 빛나는 작은 점 사진을 볼 때면 절로 겸손한 마음이 들곤 한다.굳이 우주가 아니더라도 지구 내에서도 창백한 푸른 점을 볼 수 있다. 도시에선 드물지만, 교외로 떠나 밤 하늘을 올려다 보면 무수히 많은 창백한 점들이 보인다. 저 멀리 떨어진 별,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올려보낸 인공위성이 그 주인공이다. 얼핏 보기에 구분하기 어려울 수 있겠지만, 별과 달리 인공위성은 비교적 빨리 움직이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반가운 봄비를 뒤로하고 누리호 2차 발사가 다가왔다. 1차 발사와 달리 이번엔 우리나라 상공에서 보일 4개의 창백한 점이 될 큐브위성도 탑재됐다. 이 큐브위성들은 미세먼지나 지구 대기 상황을 관측하는 임무를 맡고 지구를 돌게 된다. 세계 7번째로 독자적인 우주수송능력을 갖추길 기대한다. /김동필 경제산업부 기자 phiil@kyeongin.com김동필 경제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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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특례시' 없는 특례시 인수위 지면기사
6·1 지방선거로 4년 만에 새로운 지방자치단체장이 뽑히고 일부는 오랜만에 당선인 당적이 바뀌는 정권교체가 일어나기도 했다. 저마다 새로운 기대감으로 민선 8기를 준비하고 있다. 경기도 내 수원시, 고양시, 용인시는 유독 기대감이 크다. 지난 1월 역대 최초 '특례시'란 명칭과 그에 상응한 행정 특례를 얻을 제도가 시행돼서다.각 3개 지역 특례시장 후보들도 자신이 당선되면 "특례시 원년이 될 것"이라고 선거 기간 내내 외쳤다. 하지만 오는 7월 민선 8기 출범을 앞둔 각 특례시장직 인수위원회에 '특례시'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관련 TF를 인수위 내 별도로 꾸렸거나 당선 소감에서 특례 권한 확보 등을 강조한 특례시장 당선인은 없었다. '일자리·기업', '교통·개발', '교육·문화' 등 공약 이행도 중요하지만 각 당선인들이 선거 기간 강조한 특례시 원년 실현을 위해선 올해가 '골든타임'일 수 있다. 특례시란 이름에 걸맞은 특례 권한을 확보하려면 이들 3개 지자체가 정부에 요구한 383개의 단위사무를 이양받아야 하는데 그 과정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험난하다.기초지자체가 광역지자체와 자율적 기구를 만들어 특례 권한 이양을 논의할 수 있도록 하는 법적 내용이 있는데도 정작 같은 법안에서 '100만 이상 대도시(특례시)'는 '법률에 따라' 특례를 두도록 해 결국 일일이 국회 문턱을 넘어야 하는 모순적 구조 때문이다. 이에 특례시 명칭을 얻은 지 벌써 6개월이 지났지만 383개 단위사무 중 10개도 채 이양하지 못했다.골든타임일 수 있는 올해를 넘겨 특례시란 이름이 잊히지 않게 하려면 서둘러야 한다. 창원시장까지 포함해 4개 특례시장으로 구성된 대한민국특례시시장협의회에 곧 들어갈 각 특례시장 당선인들이 4개 지역만 한정하지 말고 전국 50만명, 100만명 이상 대도시를 모두 아우른 단체를 꾸리고 국회 전반에 공감대를 심어 '진짜 특례시 원년'의 물꼬를 터야 한다. /김준석 사회교육부 기자 joonsk@kyeongin.com김준석 사회교육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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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7호선 청라연장선 공사와 소상공인의 절규 지면기사
"코로나19 사태 2년도 대출을 받아가며 힘들게 버텼는데, 더는 버틸 힘이 없습니다."인천 서구의 주요 번화가로 자리잡고 있는 청라 '커널웨이' 주변 상가 건물에서 최근 열린 서울 도시철도 7호선 청라국제도시 연장 3공구 건설공사 사업설명회장은 이 일대 소상공인들의 성토장이었다.서울 도시철도 7호선 청라 연장사업은 서구 석남동부터 청라국제도시역까지 10.7㎞ 구간에 정거장 7개를 신설하는 것으로 주민들은 물론이고 커널웨이 일대 소상공인들의 기대감도 크다. 도시철도 연장에 따른 청라 주민의 교통 편의 증진과 외부 인구 유입은 소상공인들에게 있어서도 긍정적인 요소다.문제는 커널웨이 일대 상인들이 영업하는 구역에 지하철역 출입구 등 지하철 정거장 공사가 약 5년간 진행된다는 것이다. 가게와 4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총 6m 높이의 방음벽과 분진망이 설치되고, 커널웨이의 가장 큰 장점인 수변공원이 임시 폐쇄된다는 점을 상인들은 우려한다. 코로나19 암흑기를 딛고 새 출발을 하려는 상인들에게는 날벼락 같은 소식인 셈이다.사업 발주처인 인천시 도시철도건설본부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공익사업으로 생기는 영업 손실에 대한 보상은 법률적 근거가 없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방음벽에 특색 있는 디자인을 넣는 등 미관을 개선해 피해를 최소화하겠다고 밝혔지만 상인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지 않다.지난 2년 동안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로 힘겨워하는 많은 소상공인을 만나 취재를 했다. 그렇기에 커널웨이 일대 상인들의 절실함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이대로 별다른 대책 없이 공사가 진행된다면 매출 감소를 이겨내지 못하고 영업을 포기하는 상인들이 생겨날 수 있다. 인천시 도시철도건설본부가 나서 인천시 소상공인 관련 부서, 상인들이 함께하는 논의의 장을 만들고, 실질적인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 /김태양 인천본사 사회교육부 기자 ksun@kyeongin.com김태양 인천본사 사회교육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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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선거의 추억 지면기사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신반포 한신아파트에 살던 한 소년은 재선에 도전한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종합장 노트를 들이밀었다. 단지 안에 그의 아버지 남평우가 만들었다는 약수터가 있었다. "국회의원 아저씨, 사인 해주세요." 지역구 국회의원은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큰 사람이 되세요. - 15대 국회의원 남경필'.22년이 지난 지금까지 강렬하게 남아있는 '선거의 추억'이다. 남경필은 내리 5선을 하고 민선 6기 경기도지사를 지냈다. 그는 2014년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김진표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에게 '3무(無) 선거'를 제안한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채 두 달이 안 돼 치러진 지선에서 남경필은 유세차와 로고송, 네거티브 없는 차분하고 깨끗한 선거를 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을 김진표는 '3필(必) 선거'로 응수했다. 김진표의 3필은 정책토론과 인물검증, 알 권리였다.6·1 지방선거가 끝났다. 로고송을 튼 빈 유세차가 거리 곳곳을 누볐고, 상대 정당과 경쟁 후보에 대한 음해성 네거티브는 여전했다. 정책토론보단 얼기설기 엮은 과거에 대한 해명 요구와 빈약한 근거의 '카더라식' 인물검증이 유권자의 알 권리를 감췄다. 이런 마당에 누가 일주일 전 선거가 아름다웠다고 평가할 수 있겠는가.승자와 패자만 남았다. 기호 1번 '따봉'(Ta bom)과 기호 2번 '브이'(V)의 격돌만 거셌다. 도지사 선거는 똑똑한 부엉이가 가까스로 엄지를 세웠고, 31개 기초단체장 선거에선 붉은색 브이가 따봉 시대를 자르는 가위 역할을 했다.민선 7기 경기도는 새로워지고 공정하려고 노력했다. 민선 8기는 '기회가 넘치는 경기'를 지향한다. 좋으면 크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지만, 대개 크면 좋다고들 한다.향후 4년은 똑똑한 부엉이가 약속한 대로 기회가 넘치는 경기도여야 한다. 똑똑한 부엉이는 내가 아는 부엉이 중에 가장 크다. 큰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부엉이여야 기회가 넘치는 경기도를 혁신적 포용국가의 중심으로 만들 수 있다. /손성배 정치부 기자 son@ky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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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미친 물가, 정부는 잘못이 없는가? 지면기사
지난달 30일 수원 인계동의 한 주유소를 찾았다. 평소 경유 5만원 어치를 주유하면 450㎞의 주행거리를 표시하던 계기판이 380㎞를 가리켰다. 주유를 마치고 인근 중식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수년 전까지 5천원대이던 짜장면이 7천원으로 올랐다. 그야말로 '미친 물가'다. 14년 만에 5%의 고물가가 닥쳐올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경고에 서민들이 벌벌 떨고 있다. 밀가루·버터·설탕 등 음식 주재료 가격이 모두 전년 대비 30~50% 상승했다. 지난달 전년 대비 4.8% 올랐던 소비자물가는 5월 5.1% 오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정점이 아니다. 7~8월에는 5.8%까지 오를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월급은 안 오르고 물가만 오른다"라는 말은 수년 전까지만 해도 낮은 월급 인상에 대한 한탄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말 그대로 물가 패닉을 걱정하는 하소연으로 바뀌었다. 문제는 식자재뿐만이 아니다. 건설 원자재 가격이 상승해 건설 현장 곳곳에서 잡음이 일고 있다. 지난달 철근콘크리트연합회는 공사계약금 인상을 요구하며 셧다운을 강행해 수도권을 포함한 전국 공사현장이 멈추기도 했다. 화물운송사업자로 구성된 화물연대는 치솟은 경윳값에 대한 정부의 조치를 요구하며, 7일 무기한 전면 총파업 강행을 예고했다. 배달료 인상을 문제 삼은 자영업연대는 대규모 집회를 계획하고 있다.한마디로 아비규환이다. 이 상황에서 정부가 해야만 하는 일은 무엇일까? 부처마다 '긴급 민생안정 프로젝트' '화물차 유가보조금 확대' 등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당사자들은 시큰둥할 뿐이다. 당장의 불만을 해소하는 근시안적 정책이 아닌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여야 가릴 것 없이 국회와 정부는 지방선거의 승리를 위한 선심성 정책만 내세우고 있다.물가 상승의 원인을 코로나19의 장기화와 우크라이나 사태 등 대내외적인 환경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서민들은 당장 출근길 기름값을 걱정하고 퇴근 후 저녁 메뉴조차 고르지 못하고 있다. /서승택 경제산업부 기자 taxi226@kyeongin.com서승택 경제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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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너의 이름은 지면기사
얼마 전 저녁을 먹으러 수원 행궁동에 갔다. 동행한 이가 '맛'에 일가견이 있어 그가 가자는 곳으로 갔다. 주택을 개조한 인테리어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행궁동 고유의 분위기와 잘 어울려 산뜻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산뜻한 기분은 얼마 가지 않았다. 이름과 가격만 적힌 불친절한 메뉴판 때문이었다. '후토마키'라는 생소한 메뉴도 있었다. 지인에게 물어보자 '김밥 같은 음식'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궁금증이 일어 시켜봤고, 잠시 후 음식이 나왔다. 모습은 영락없는 김밥이었다. 횟감을 속 재료로 쓴 뚱뚱한 김밥. 구글에 검색해보니 '일본식 김밥'이라는 설명이 쏟아졌다. 일본식 김밥 또는 대왕김밥 등 대체할 수 있는 말이 충분히 있는데도 후토마키라고 표기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는 비단 행궁동뿐만이 아니었다. 최근 인계동엔 일본어로 된 간판을 단 음식점이 문을 열었다. 해당 가게는 외관부터 '여기가 일본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게를 꾸몄다. 그림을 보지 않는다면 어떤 음식을 파는지 쉽게 알 수 없었다. 본보기가 돼야 할 대기업에서도 비슷한 행태가 보인다. '포켓몬빵' 열풍을 타고 매출과 주가 모두 고공행진 중인 SPC그룹이 대표적이다. SPC그룹이 운영하는 아이스크림 브랜드 배스킨라빈스는 최근 '이상해씨 아이스 모찌 피규어 세트'를 출시했다. 피규어 안에 찹쌀떡이 들어있는 제품인데, 이 또한 품절 대란을 일으켰다. 배스킨라빈스는 해당 제품 외에도 일부 디저트류를 모찌라고 표기하면서, 찹쌀떡 속에 아이스크림이 들어있다고 설명한다. 내부적으로도 모찌와 찹쌀떡을 동일하게 인식하고 있지만, 굳이 모찌라고 표기한 셈이다. 무분별하게 외래어를 사용하는 일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기세라면 머지않아 메뉴판에서 한 번에 알 수 있는 우리말로 된 메뉴이름은 찾아보기 힘들지 않을까. 모찌, 호르몬동(대창덮밥), 마제소바(일본식 비빔면) 등 메뉴판마저 외래어에 점령당한 현실이 씁쓸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윤혜경 경제산업부 기자 hyegyung@kyeongin.com윤혜경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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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실종아동의 날' 장기실종 아동에게 관심을 지면기사
"어디서 천덕꾸러기같이 살고 있진 않을지… 마음이 아파요."지금도 그때가 생생한 듯 여자가 생각에 잠겼다. 곧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딸 소희를 잃어버리고 33년이 되기 꼭 이틀 전이었다. 30년이 넘게 지났지만 5월은 익숙해지지도 않고 가슴을 저미게 한다. 자우씨는 이맘때가 되면 소희가 더 생각난다고 했다. 7개월이던 딸 소희는 1989년 5월18일 낯모르는 여자와 함께 사라졌다. 물 한잔을 달라던 여자는 "나도 저만한 아들이 있다"며 자우씨를 안심시키고는 잠깐 한눈을 판 사이 소희를 데려갔다.부산, 청양, 대구… 소희를 찾으러 전국을 돌아다녔다. 소희와 닮은 아이가 있다는 제보가 들어오면 혹시나 하는 마음을 안고 달려갔고, 혹시 소희가 있진 않을까 보육원의 낡은 사진첩을 보고 또 봤다. 30여년 간 자우씨는 죄인처럼 살았다. 길 가다 누군가 손가락질이라도 하면 아이를 잃어버린 사람이라고 탓하는 것 같아 괴로웠다. 이제 포기하라는 무심한 말들에 상처를 받아 수많은 밤을 눈물로 보냈다.고통스럽지만, 어디선가 만날 수 있으리란 희망이 자우씨를 버티게 한다. 그가 꺼낸 주민등록등본에는 여전히 소희의 이름이 그대로 있었다. "소희를 만나면 미안하다고 무릎을 꿇을 것 같아요. 더 아프기 전에, 나이가 들기 전에 보고 싶어요."5월25일은 '세계 실종 아동의 날'이다. 2005년 실종아동법이 제정된 이후 지문 사전등록, 유전자(DNA) 분석 등이 도입되며 많은 아이들이 부모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장기실종아동들은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있다. 올해 4월 기준 여전히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경기 남부지역의 실종 아동은 107명이다. 이들 중 실종된 지 10년이 넘은 장기실종 아동은 104명으로 전체의 96.3%에 달한다.장기실종아동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제보가 필요한 때다. 자우씨는, 가족들은, 여전히 아이를 만날 날을 기다린다./이자현 사회교육부 기자 naturelee@kyeongin.com이자현 사회교육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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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현실에서의 복선 지면기사
무심코 흘려넘긴 장면들이 사건 해결의 실마리로 돌아올 때 느껴지는 얼얼한 뒷맛 때문에 추리물에 빠지게 된다. 창작자는 범죄 징후나 단서에 대해 알게 모르게 시그널을 보낸다. 흔히 말하는 복선이다. 여러 복선을 거쳐 비로소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는 게 추리물의 허다한 전개방식이긴 하나 그만의 매력이기도 하다. 이 장르가 특히 인기를 끄는 이유는 사실감 있는 줄거리에 있다. 현실에 진짜 있을 법한 사건을 그럴싸하게 구성해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는다.실제 현실 속 사건에도 복선은 반드시 존재한다. 김포의 한 야산에서 발견된 지적장애인 암매장사건이 그랬다. 피해자는 자신처럼 지적장애가 있는 피의자들과 지난해 가을부터 인천 남동구 작은 빌라에 모여 살았다. 약 4개월간 그는 동거인들의 지속적인 폭행을 견디다가 끝내 숨을 거뒀다. 이번 사건도 곳곳에 복선이 깔렸었다. 사건 두 달여 전, 피해자에 대한 감금·폭행신고가 경찰에 접수됐었다. 이보다 앞서서는 동거인들이 갓난아이를 방임해 아이가 양육시설로 분리된 일이 있었다. 이웃주민이 해당 가정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주민복지센터에 문의한 적도 있었다.이처럼 사회의 관심을 유도하는 듯한 범행현장의 시그널은 하나의 줄기로 연결되지 못하고 그때그때 소멸했다. 경찰과 아동보호전문기관, 주민복지센터, 장애인시설은 저마다 포착한 이상 징후를 타 기관과 연계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개인정보를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다. 피의자들에게 아이가 있었다는 것도, 주민복지센터에 지원요청이 있었다는 것도 경찰수사가 아니라 탐문 취재로 파악된 사실이다. 이들 기관은 취재 과정에서도 개인정보임을 앞세워 답변을 꺼렸다.만약 김포 암매장 사건의 복선을 기관끼리 협의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누적된 자료를 토대로 사건 전모를 좀 더 빨리 알아챌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흉악범죄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기본권보다 개인정보가 우선시되면서 스물여덟 지적장애인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변민철 인천본사 사회교육부 기자 bmc0502@kyeongin.com변민철 인천본사 사회교육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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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조현철, 손현주, 호아킨 피닉스 지면기사
'박길래'라는 이름을 지난 6일 처음 들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D.P'에서 병영 폭력 피해자 '조석봉'을 연기한 배우 조현철의 제58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남우조연상 수상소감을 통해서였다. 그는 투병 중인 아버지를 위로하며 사회적 죽음을 맞은 고 김용균군, 고 변희수 하사, 세월호 희생자들과 함께 고 박길래씨를 호명했다.조현철의 언급 이후, 고 박길래씨가 2000년에 사망한 환경운동가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는 집 주변 연탄공장에서 날아든 분진으로 진폐증에 걸렸지만 생소한 병증만큼이나 사례가 드물었으므로 국가와 긴 싸움을 벌여야 했다. 결국 그가 14번이나 법정에 서며 대법원에서 '최초의 공해병 환자'로 인정받은 것은 병을 앓고 10여 년이 지난 뒤였다. 이는 한국 사법부가 환경문제로 '신체피해'를 인정한 첫 사례로 이후 환경운동의 이정표로 남았다. 상을 받는 자리에서 배우들이 고마운 이들의 이름을 언급하는 일은 흔하다. 반면 자신과 접점이 없거나, 흐릿한 이들을 호명하는 모습은 드물어서 귀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2012년 SBS '추적자'라는 드라마로 연기인생 20년 만에 연기대상을 탄 손현주씨가 "지금도 어디서 밤을 낮처럼 샐"거라면서 어둠을 밝히는 이들을 '개미들'에 빗대 호명한 것은 그래서 잊히지 않는다. 해외배우 가운데 영화 '조커'로 2020년 생애 첫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호아킨 피닉스가 젠더·인종 차별 문제를 일부러 꺼낸 모습도 어제 일 인양 또렷하게 다가온다.리베카 솔닛은 사건이나 개념의 비뚤어진 '이름'을 정확히 명명하는 것이 '해방의 첫 단계'라고 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이름을 얻기 전 숱한 고초를 보라. 하지만 '해방'의 다음 발걸음은 그 '진실의 이름'들을 애를 써서 호명하는 이들 덕분에 이어진다고 믿는다. 조현철, 손현주, 호아킨 피닉스가 그런 이들이다. /조수현 문화체육레저팀 기자 joeloach@kyeongin.com조수현 문화체육레저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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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경기도를 향한 편견 지면기사
"밝을 때 퇴근했는데, 도착하니 밤이야. 저녁이 없어."서울의 회사를 다니는 주인공 미정이 사내 동호회 가입을 포기한 이유는 집이 멀어서다. 그녀가 사는 곳은 경기도 산포시. 서울에서 1시간30분 이상 지하철을 타고 이어 최소 30분 이상 또 마을버스를 타야 집에 도착할 수 있는 도농복합도시다.미정의 오빠인 창희와 언니인 기정 모두 서울로 출퇴근한다. 창희는 서울에 살지 않아 자주 못 만난다는 이유로 여자친구에게 차인다. 기정도 자신이 결혼하지 못한 이유를 '경기도민'이라고 밝힌다.산포시는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등장하는 허구의 장소다. 극중 주인공 미정과 기정, 창희 삼 남매는 인생의 20%를 대중교통에서 보낸다는 경기도민의 애환을 대변해 화제를 모았다.물론 드라마는 일부 경기도에 대한 편견을 과장해서 보여줬다는 비판도 받았다. 세 남매의 아버지가 농사를 지을 정도로 경기도가 시골로 묘사되고, 모든 시·군들의 교통환경이 그만큼 열악하지는 않다는 지적이다.그러나 경기도를 향한 편견은 단순히 한 드라마만의 얘기는 아니다. 유튜브에 '경기도민'을 검색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영상들의 제목은 '경기도민 특징', '경기도민 공감' 등이다.영상 대다수가 2시간 이상 통근·통학으로 고통스러워 하거나 지인과의 약속 장소를 정할 때마다 광역버스 노선을 중심으로 고민하는 도민들의 모습을 담아냈다.'경기도민의 애환'이라 포장된 편견들은 온라인상에서 유머처럼 빠르게 전파된다. 어쩌면 미디어가 표현한 경기도는 얼마나 현실과 닮았나를 따지는 것보다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경기도를 표현했는지 바라보는 게 더 중요해 보인다. 6·1 지방선거가 3주 앞으로 다가왔다. 경기도를 둘러싼 편견을 뒤바꿔줄 후보가 가장 절실한 순간이다./고건 정치부 기자 gogosing@kyeongin.com고건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