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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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그 드라마의 주인공 지면기사
도합 12년이나 되는 초·중학교 시절은 대체로 지겹고 칙칙한 기억으로 남았지만 즐거운 시간이나 중요한 배움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 경우 가장 기억에 남는 행복한 학교생활은 고2때 찾아왔다. 돌이켜보면 신기한 일이었다. 고2는 보통 코앞에 닥친 입시의 압박이 극에 달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공부 이야기는 오늘의 본론이 아니지만 이때 나는 성적도 일생의 바닥을 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정황들을 보자면 일생 가장 우울하고 두려운 시간을 보내야 옳았을 시기에 나는 가장 행복했다.나만 행복했던 게 아니었다. 그때 우리 반은 전교에서 가장 사이가 좋은 반으로 소문이 났다. 입시를 앞두고 까칠해진 사춘기 소녀들 60명을 모아놓았는데 믿을 수 없이 다정하고 화목했다. 그때 우리가 행복했던 것이 대체 어떤 모습이었냐고 말하면 딱 꼬집어 말할만한 일이 없다. 그냥 우리는 학교에서 마음이 편안했고 각자의 문제들을 잊은 채 수다를 떨며 하루를 보냈다.가장 기억에 남는 남다른 풍경은 우리의 점심시간이었다. 점심시간에는 수업시간 동안 헤어져 있던 절친들이 다시 뭉치는 것이 중요했으므로 도시락을 들고 다른 반으로 뛰어가는 일도 흔했다. 인싸(인사이더)들은 커다란 그룹을 이루고 시끌벅적하게, 아싸(아웃사이더)들은 혼자 혹은 둘이서 조용히 밥을 먹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행복했던 우리 교실에서는 그런 소란스러운 재배치가 일어나지 않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우리는 그냥 앉은 자리 그대로 네다섯 명씩 짝지어 도시락을 나누어 먹었다. 몇 주에 한 번씩 자리를 바꾸었는데,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새로 만난 이웃들끼리 새로 그룹을 이루어 종알거리며 밥을 먹었다. 곧 절친을 찾아 다른 반에서 달려오는 아이들이 없어졌다. 그들은 자기 절친이 낯선 아이들과 만족스럽게 밥을 먹는 모습에 놀랐고 절친들의 배타성이 없는 그 그룹에 굳이 끼어들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그들이 불평하지 않고 조용히 각자의 교실로 돌아갔던 것은 우리가 만든 희귀한 행복에 대한 존경의 의미였을 것이다. 우리 60명은 1년 동안 절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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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김기현 레거시?! 지면기사
한 주 앞으로 다가온 국민의힘 전당대회의 관심사항은 두 가지, 김기현 후보가 결선 없이 당선되느냐 그리고 친윤계가 최고위원 5명 중 4명을 확보하느냐다. 최고위원 5명 중 4명이 사퇴하면 비대위 전환이 가능한 게 주류에게는 '최후의 안전장치'가 된다.지난 1월 중순부터 2월 말까지 국힘 지지층을 상대로 한 32개 조사결과를 보면 첫째, 안철수 후보는 1월25일 '나경원 불출마' 직후 김기현 후보에 앞서며 지지율 최고점을 찍지만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한다. 2월 초가 분기점인데 '윤안연대 표현은 무례, 국정운영의 방해꾼이자 적, 공산주의자 신영복 존경하는 사람 그리고 안철수 당 대표되면 윤 대통령 탈당' 여파의 영향으로 해석된다.둘째, 여론조사는 1라운드 김기현 승리 가능성을 시사한다. 2월 초 이후 김기현 지지율은 30% 중반대에서 45%까지 접근하는데 국힘 지지층의 40% 초반 지지율은 50%를 훨씬 넘는 당원투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경험론과 최근 당원구성의 변화로 알 수 없다는 주장이 엇갈린다. 그렇다면 김기현의 국힘 전당대회가 남긴 것은 무엇일까? 우선 정당의 공천이나 당직선거가 점점 개방화되는 추세의 반전이다. '당원투표 70%+여론조사 30%' 방식은 2006년 강재섭 대표선출 때 도입된 이후 2021년 이준석 대표선출 때까지 사용된다. '당원 100%' 방식은 2003년 중앙당과 지구당이 인구비례에 따라 각각 50%씩 추천한 당원 23만명의 선거인단 투표이후 처음이다. 2003년 이전 대의원 투표에서 선거인단 투표로 바뀐 것 또한 정당 구성원의 참여 확대였다.대통령 '현대판 군주'서 집권당은 취약해져'민주적 책임성 부재' 함께 극복하는게 중요 당원 아닌 시민들이 여론조사든 직접 참여든 처음으로 정당의 당직선거에 참여한 곳은 보수정당이다. 2004년 박근혜 대표 선출 때인데 더불어민주당은 2012년 한명숙 대표 선출 때에야 비로소 시민을 참여시킨다. 박 대표는 여론조사였고 한 대표는 선거인단 방식이었다. 2004년 당시 한나라당은 노무현 탄핵 후폭풍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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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개학(開學)과 재학(再學) 지면기사
학생들이 있는 집집마다 개학 준비로 분주하다. 중국에서 방학을 방가(放暇)라고 해서, 휴가(休假)의 뜻이 강하다면, 한국에서의 방학(放學)은 학교 밖에서 풀어놓고(放) 스스로 배우는(學) 배움의 연장이다. 한국인에게 배움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인생의 우선순위다. 전쟁 통에도 피난지에서 천막을 쳐놓고 배웠고, 공장 끝나고 야학을 하며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돈이 없어도 배워야 하고, 병이 들어도 배워야 하고, 나이 들어도 배워야 한다. 코로나 전염병도 배움을 멈출 수 없으며, 어떤 이유든 배움을 포기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며, 배움을 지속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인간의 모습이다. 오죽하면 죽고 나서도 후손들에게 자신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제사를 지낼 때 배우다(學) 살다간(生) 사람이라 써 달라고 하였을까?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 '평생 배우며 사셨던 우리 집의 어르신 나타나세요!' 죽어서도 자식들에게 성공한 사람도, 돈 많은 사람도 아닌 평생 배우며 살았던 우리 아버지로 기억되기를 바랐던 것이다.유교 경전의 대표자인 '논어' 첫 구절은 배움의 기쁨(悅)에 대한 선언이다. 명품을 줄서서 사고, 새 차를 사는 기쁨도 있지만, 중독성이 강하고, 더 큰 물질적 욕망을 동반하기 때문에 소모적이고 일시적인 기쁨이다. 배움을 통해 꽉 막혔던 내 생각의 둑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생각과 만나 신세계를 만나는 기쁨은 그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는 희열(喜悅)이다. 거기에 배움을 함께하는 친구(朋)가 있다면 열락(悅樂)의 인생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배움을 좋아하는 호학(好學)이나 모르는 것을 묻기 좋아하는 호문(好問)은 인간에 대한 최고의 찬사다. 나보다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下) 사람에게 내가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恥)하지 않고 묻는 것은 성숙한 사람의 미덕이다. 인간은 배움을 통해 상승의 날개를 달고(下學上達) 저 먼 세상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 배움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이동하는 가장 효율적인 이동 수단이다. 한국인에게 배움은 책속 지식만이 아니라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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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봄날엔 그 노래를 듣는다 지면기사
벌써 도타워진 햇볕과 청명한 날은 추위로 웅크렸던 날에 대한 보상이다. 그래서 봄이 온다는 소식은 기껍다. 곧 한파를 견딘 산수유와 생강나무에 노란 꽃이 피고, 느릅나무와 버드나무 가지에는 연초록 새순이 돋을 게다. 아침에는 껍질째 사등분으로 쪼갠 사과에 곁들여 호밀빵과 견과류를 챙겨 먹었다. 포만의 행복은 없지만 한 끼로 부족하지 않다. 봄기운을 더 느끼려면 둔덕이나 빈 밭에서 나온 냉이나 달래를 넣은 된장찌개와 머위나 두릅 같은 나물을 된장이나 액젓과 버무려 들깻가루를 넣어 곁들여 먹어야 한다. 입안에 퍼지는 흙냄새는 기력이 쇠해진 사람이 묵은 병마저 떨치고 일으켜 세울 만한 봄의 보약이다.아직 조춘(早春)의 바람 끝은 차다. 이맘때 유독 알러지가 심해진다. 연신 재채기를 하고 콧물이 흐른다. 항히스타민류의 약을 한두 알 먹지만 효과는 일시적이다. 약의 내성을 피하려면 몸의 면역력을 높일 수밖에 없다. 우리보다 한 세기를 먼저 살다 간 젊은 시인은 '바람이 부는데/내 괴로움엔 이유가 없다'(윤동주, '바람이 불어')라고 노래한다. 바람이 일깨운 괴로움엔 이유가 없다고 했다. 눈 녹은 물이 종일 흐르는 하천에는 일찍 겨울잠에서 깬 산개구리들이 모여 우는데, 어짜자고 어쩌자고 바람은 우리 안의 괴로움을 일깨우는 것일까. 십여년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봄날은 간다'온갖 슬픔·시름 다 녹아 있었던 탓에 '울컥' 낮엔 겨우내 덜컹이던 낡은 부엌문 문짝의 헐거워진 경첩의 나사못을 죄고 못이 빠진 판자에는 새로 못을 박는다. 봄볕 아래 낮잠을 자던 고양이들이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한다. 허기로 출출해져 서둘러 잔치국수를 끓여 한 그릇을 비우고 약수터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양지에 의자를 내놓고 무릎에 담요를 덮은 채 책을 읽었다. 책을 얼마나 읽었을까. 봄날의 낮은 까치 꽁지만큼이나 짧다. 누가 서편 하늘에 낡은 피를 한 양동이나 쏟았나? 어느새 뉘엿뉘엿 지는 해는 핏물인 듯 붉은 석양에 잠겨 있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다. 춥다고 실내에 웅크려 있던 아이들이 운동장에 나와 소리를 지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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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비효율의 효율 지면기사
인간의 생애가 기적적으로 길어진 것을 감안하더라도 꼬박이 반평생을 흘려보낸 지금에야 깨달았으니, 나에게 '효율'이란 얄궂게도 효율을 가장 깎아먹는 구호였다. 동선과 시간을 생각해서 효율적으로 일하기는 나에게 전혀 효율적이지 않은 목표였다. 예를 들어 나는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해 이렇게 생각한다. '오늘은 잡동사니들을 담아둔 주방 서랍 세 개를 정리하자. 먼저 커피 한잔 마시고'.물을 끓이려고 보면 주전자는 싱크대의 가장 더러운 설거지거리들 아래에 파묻혀있다. 그다음 단계는 이렇게 된다. '설거지 먼저 해야겠군'. 하지만 커다란 곰솥을 보자 벌써 맥이 풀린다. '곰솥이 싱크대를 온통 차지하고 있으니 먼저 저것부터 씻어서 높은 수납장에 올려놔야겠다. 그런데 곰솥을 넣기 전에 냉동실의 우거지로 국을 끓일 생각이었는데. 국 끓일 재료를 다듬으려면 시간이 또 많이 걸리겠네. 이러다가는 서랍 정리를 또 미루고 말겠는걸. 그러려면 아무래도 서랍 정리를 먼저 시작해야겠어. 그런데 내 커피는? 아, 주전자, 아, 우거짓국. 해야할 일이 너무 많구나. 이렇게 많은 일을 해내려면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할텐데'.이러다 보면 머리가 온통 뒤죽박죽이 된 채 아침밥을 기다리는 고양이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넋을 놓고 마는 것이다.나처럼 일머리가 없는 사람은 효율 따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시작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그걸 깨닫는 데에 반평생이 걸렸다. 무작정 세 개의 서랍을 비우는 것으로 일을 시작한다. 서랍 세 개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 주방은 온통 발디딜 틈 없이 가득 차버렸다. 싱크대의 곰솥에는 눈을 질끈 감고 주전자만 건져내서 일단 물을 끓인다. 혁명이라도 일어난듯한 부엌 바닥을 요령있게 비집으며 나는 커피를 한 잔 타는 것까지 성공했다. 원두커피 생각이 간절하지만 이런 날은 더운물만 부으면 되는 달달한 믹스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머릿속을 정리하는 게 좋다. '다 됐어. 이제 이것들을 서랍에 도로 넣고, 사용하지 않거나 유통기한이 지난 물건들은 버리면 돼. 해야할 일은 겨우 그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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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윤석열의 정치와 권력'은 무엇으로 기억될까? 지면기사
'정치개혁은 사라졌다'. 대통령의 중대선거구제 언급으로 선거제도 개편이 잠깐 주목받긴 했지만 지금은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나경원과 유승민은 출마하느냐? 김기현은 결선 없이 당선되느냐?' 그리고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구속되느냐? 그 이후 민주당은 어디로 가느냐?'가 중요하다.엊그제 '초당적 정치개혁 의원모임'이 출범했다. 정치개혁을 주제로 한 의원모임은 '화해와 전진포럼' 이후 21년만이고 100명이 넘는 여야 의원이 참여한다. 국회의장은 "2월 말까지 정개특위가 복수안을 만들고 3월에는 전원위원회를 주 2회 이상 열겠다"는 계획이다. 총선 1년 전인 4월10일이 시한이다. 작년 7월 여야합의로 구성된 정치개혁특별위원회도 '연동형 비례대표제 개선'을 목표로 한다. 현재 20여 개에 가까운 관련 법안이 제출되어있다.국민의힘 의원들은 연동형 비례대표제 폐지에 강조점을 둔 반면 야당 의원들은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추가하며 적게는 3인에서 10인까지의 중대선거구제를 주장한다. 유권자가 정당추천 후보를 직접 선정하는 개방형 비례대표제와 지역구와 비례제의 비중을 1대 1로 한 법안도 있다.대안은 다양하고 상상력의 영역이다. 소선거구제를 하면서 권역별 비례제를 할 수도 있고 중대선거구제를 하면서 전국 단일 비례제를 할 수도 있다. 권역별 비례제를 연동형으로 하면서 소선거구제나 중대선거구제와도 결합시킬 수도 있다. '승자독식·양당중심 대립 마감' 과제 알고선거구제 바꾸고 개헌 완결땐 정치사 족적 이 대목에서 두 가지가 중요하다. 하나는 왜 선거제도를 개선하느냐인데, 인구와 지역대표성을 가능한 높이자는 것이 핵심이다. 둘째는 '제도적 친화력'인데 선거제도가 다른 정치제도(정부 형태나 대통령 선출방식 등)는 물론 정치문화나 관행 등과 서로 긍정적 영향을 주고받아 시너지를 내야 한다.후자가 중요하다. 중대선거구제는 '승자독식의 양당 혐오정치'에서 '공유와 타협의 다당제 정치'를 향한 대안의 하나로 볼 수는 있다. 어떤 식으로든 비례성과 대표성이 강화된 국회의원 선거제도에 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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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인생의 맛 지면기사
코로나에 걸려 미각에 문제가 생겼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도무지 살맛이 안 났다고 한다. 냄새도 못 맡고, 맛도 모르니 사는 맛이 안 났었다는 것이다. 음식의 맛을 못 느끼는 병을 미각장애 또는 미맹(味盲)이라고 한다. 맛에 깜깜(盲)하다는 것이다. 맛을 못 느끼는 병을 미맹이라고 한다면 인생의 맛을 못 느끼는 병을 생맹(生盲)이라 불러도 될 듯하다. 삶(生)의 맛에 깜깜하다는 의미다. 어느 날 갑자기 살맛이 안 나고, 재미있는 일도 없고, 사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면 생맹 증상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삶의 맛을 느끼는 센서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정신적 우울증이나 소진증후군 같은 이름도 생소한 병리현상은 사는 맛에 이상이 생겨서 나타난 것이다. 건강한 자아에 균형이 깨지고, 재미와 의미의 맛을 느끼는 센서에 비상등이 켜진 것이다. 인생 사는 재미와 의미를 모르겠다고 자주 말하고 있는 나를 만난다면 심각하게 치료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갑자기 재미없고 의미없는 삶 '생맹' 의심다양한 문제들 원인… 돈·지위와 상관없어 '중용(中庸)'은 균형 잡힌 인생을 사는 법을 설명하고 있는 고전이다. 균형 잡힌 인생의 극치는 인생의 맛(味)을 알고(知) 사는 것이다. 사는 재미(在味)와 의미(意味)를 음미(吟味)하며 사는 인생이 맛있는 인생이다. 중용에서는 맛을 잃어버린 사람의 병리상태를 '지미(知味)'의 센서에 이상이 생겼다고 정의한다. '사람들은 모두 음식을 먹지만(人莫不飮食也), 제대로 맛을 알고(知味) 먹는 사람이 드물다(鮮能知味也)'. 사람들이 자기중심을 잃고 불균형과 편향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세태에 대하여 공자는 맛을 모르는 병에 걸렸다고 정의하고 있다. 음식을 먹으면서 맛을 모르고 먹는 것이나, 인생을 살면서 삶의 맛을 음미하지 못하며 사는 것이나, 같은 병이라는 것이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은 항상 넘쳐서 맛을 모르고, 못나고 어리석은 사람은 항상 모자라서 맛을 모른다. 성공한 사람은 교만해서 맛을 모르고, 실패한 사람은 우울해서 모른다. 인생의 맛을 알고 산다는 것은 학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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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내 인생사용법 지면기사
가끔 인생 뭐 별거 있나, 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이런 생각은 주로 잠 안 오는 밤에 찾아온다. 물거품처럼 사라진 소규모 인생 계획들, 커피 삼천사백스물 세 잔, 후추와 소금 약간, 대통령 여럿, 쓰라렸던 백수 시절, 21그램도 채 안 되는 키스와 연애, 그리고 무수한 실패. 그게 특별할 것 없던 내 인생사용법이었다. 아들이 생기면 아이에게 야구 글로브를 사주고 둘이 캐치볼을 해야지, 했지만 그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사느라 바빴던 탓이라는 변명은 비겁하다. 거위처럼 어기적거리며 변명이나 늘어놓는 인생은 비루하다.나이 드니, 그토록 혼란에 감싸였던 인생의 전모가 또렷하게 보인다. 시간이 완전함을 가늠하는 인생의 시험이라는 걸 부정할 수가 없다. 인생 처음의 시련은 벌에 쏘인 것이다. 설마 여섯 살에 통렬한 아픔 속에서 인생이 녹록지 않음을 깨달았다는 것은 아니다. 벌 쏘인 턱이 금세 부풀고, 마치 불에 덴 듯 따끔거렸다. 외손자를 들쳐 업은 외할머니는 찐 옥수수를 물려주며 달랬다. 벌에 쏘인 그 선연한 통증이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가물가물하다. 요즘 들어 내가 여섯 살이었을 때 엄마라고 알았던 외할머니 얼굴을 자주 떠올린다. 열다섯해 동안 출판편집자 세월 후회 없어돌아보니 인생이란 미친엄마가 품은 태아같아 평생 시 쓰기에 매달렸다. 열다섯 살 때 김소월 시집을 읽고 그 운율을 흉내내어 시를 적었다. 학생잡지 '학원'에 뽑혀서 활자화된 시를 길거리에서 여러 번 읽었다. 그 어린 시절 내가 쉰 해 동안이나 시를 미련스럽게 붙잡고 있으리라고 어찌 상상이나 했을까? 시를 환대하고 정중하게 대했다. 시를 아는 것은 우주를 아는 것이라 여기고, 급류 같은 사나운 세월을 시라는 난간을 붙잡은 채 건너왔다. 시가 아니라 다른 일을 그토록 열심히 팠더라면 삶은 지금보다 더 나았을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스물일곱 살에 출판사에 사표를 내고 창업을 했다. 1인 출판사였다. 혼자 책상에 엎드려 코를 박고 기획과 원고 교정, 표지 디자인을 다 처리하고 인쇄소며 제본소를 쫓아다니며 제작 감리를 봤다. 운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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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토끼처럼 다정하게 지면기사
새해를 알리는 신문에는 맨몸 마라톤이나 바다수영 같은 힘찬 사진이 오르곤한다.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런 사람들은 어딘가 존재하기는 하겠지만 만날 수는 없는, 청룡 주작 봉황 현무 같은 상상속 동물들인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가까운 친구가 새해 첫날 아침 제주도 바다에 뛰어든 사진을 보내왔다. 나는 입을 딱 벌리고 믿을 수 없는 친구의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양력으로는 새해를 맞이했지만 아직 설날이 오지 않아 임인년이다. 호랑이와 토끼 사이의 이 날들은 한해를 돌아보고 맞이하기 적합한 때다. 나의 2022년은 거창하지 않으나 오목조목 잘 놀았던 좋은 한 해였다. 건강·직업·재산·가족, 행복 결정적 요인 아냐가장 연관은 친밀한 인간관계 즉 '친구의 힘' 봄에는 친구들과 ktx를 타고 청주, 공주, 대전 등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다녔다. 숲에서 가쁜 숨을 내쉬며 나누는 이야기는 카페에서 나누는 대화보다 훨씬 밀도가 촘촘하다. 밀린 근황을 나누며 숲길을 한시간쯤 걷고 나서 도토리묵과 청국장 같은 옛날 음식을 먹었다. 누가 충청도 음식이 맛없다고 했는가! 가까운 곳에 아름답고 좋은 곳이 이렇게 많이 있는데 그동안 멀고 화려한 것들에 눈이 멀어 누리지 않았을 뿐임을 깨달았다.여름에는 대학 동창들과 속초로 여행을 떠났다. 우리 입학 30주년이라고 거창한 계획들을 세우다가 코로나 때문에 대폭 축소해서 가까운 속초에 펜션을 잡아 1박으로 놀고 오기로 했다. 여섯 친구들이 SUV의 맨 뒷자리까지 채우고 떠나며 우리에게 MT라는 배타적인 추억의 영역이 존재함을 깨달았다. 1990년대 히트곡들을 틀어놓고 우리가 젊었던 날, 휴대폰도 없던 선사시대에 기타를 메고 떠나 종일 노래를 부르고 허름한 숙소에서 코펠에 밥을 지었던 오래된 기억들을 소환했다. 우리는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철부지이기도 했다.연말에는 깜짝 선물처럼 중학교 동창들과 35년만에 재회하며 우리를 다시 이어준 SNS의 위력에 감사했다. 단발머리 소녀들이었던 우리는 직업도 사는 곳도 모두 달라진, 그러나 웃는 얼굴은 옛날과 똑같은 중년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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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정치하는 대통령' 지면기사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회복세다. 작년 11월 넷째 주부터 주별 평균 지지율 흐름을 보면 33%, 37%, 37%, 39% 그리고 41%의 오름세가 12월 마지막 주까지 이어진다. 새해 초 조사들도 대부분 40% 초반의 대통령 지지율이다. 반대로 대통령 국정운영의 부정평가는 63%, 60%, 59%, 57%, 57%로 낮아지는 추세다.반전이다. 작년 5월10일 대통령 취임이후 12월27일까지 조사일 기준으로 실시된 여론조사는 모두 222개(면접조사 63개 ARS 159)다. 대통령 지지율이 주별 평균으로 50%를 넘은 것은 취임 이후 딱 5주차까지였다. 이후 대통령 지지율은 주별 평균으로 40%대를 3주 동안 기록한 다음 11월 넷째 주까지 주별 평균으로 30% 초반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8월 첫 주와 둘째 주는 2주 연속으로 주별 평균이 30% 아래로 떨어지기까지 한다.문제는 반전 회복세의 대통령 지지율이 내년 4월 총선까지 이어지느냐다. 대통령 임기 중의 총선은 대통령의 중간평가로 대통령 지지율이 여당의 총선승부를 결정한다. 대통령 취임일로부터 멀어지는 선거일수록 대통령과 여당에는 불리하다.내년 총선은 대통령 당선(3월9일)과 취임(5월10일)의 중간인 4월10일로 만 2년의 윤석열 권력심판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국정 안정론(44%)'과 '국정 견제론(46%)'이 팽팽하다. 중도층은 '야당후보 지지(48%)'가 '여당후보 지지(37%)'에 앞선다. 올 임기 중간평가 총선 향한 '대통령의 시간'노동·교육·연금 3대 개혁 성과 내는게 핵심 경제상황은 대통령 지지율의 기초인데 무척 나쁘다. 작년 한국경제는 역대 최대 규모의 수출을 기록했지만 동시에 무역적자 또한 역대 최대치였다. 최근 3개월 연속으로 '대한민국 경제의 희망' 수출도 하락세다.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의 3고현상'은 올해도 이어지고 성장률은 1%대라고 한다. 소상공인의 56%는 경영환경이 작년보다 더 어려울 것으로 예상한다.현재로서는 올 하반기 세계경제 개선에 따른 회복세를 기대하는 안타까운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