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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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친박·친이, 대통령과 사면 그리고 윤석열 지면기사
보수정당에는 친박·친이라는 두 계보가 있다. 친박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따르는 정치인들이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화주의 성향 노선이다. 반면 친이는 이명박 전 대통령을 따르는 정치인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신자유주의 성향 정치를 했다.이번 특별사면에서 두 전 대통령의 운명이 엇갈렸는데 52년생으로 형 만기가 2039년인 박근혜 전 대통령은 특별사면이 된 반면, 11년이나 더 고령으로 2037년이 만기인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제외되었다. 사면 이유로 박 전 대통령의 수형기간이 좀 더 길고, 건강이 나빴다고는 하지만 친이 입장에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면 직후 여론은 박근혜 전 대통령편이었다. 27일 쿠키뉴스 데이터리서치조사에 의하면 박 전 대통령의 사면에 대해 65.2%가 잘했다(잘못했다 31.8%)고 한 반면, 이명박 전 대통령을 사면하지 않은 것에 대해 55.4%가 잘했다(잘못했다 39.3%)라고 했다. 왜일까? 혹자는 박 전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고, 여성이기에 연민의 정이 컸다고도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친박과 친이의 정치노선 차이일 것이다. 박근혜, 국가와 민족 앞세워 국민행복 강조이명박, 개인 이익·냉혹한 경쟁체제 내세워 두 진영의 정치 노선의 차이는 두 전 대통령의 과거 선거 캠페인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이명박은 약체 정동영을 상대로 시장경쟁 해법을 제시하면서 국민에게 '부자되세요'라고 하고 새벽 국밥집에서 욕을 들으면서 '경제나 살려라'는 캠페인을 펼쳤다. 반면 박근혜 캠페인은 강력한 경쟁자였던 문재인을 상대로 냉혹한 시장경쟁에 대해 '법치사회'·'원칙이 선 자본주의'·'패자부활전이 가능한 사회'·'국민행복'으로 맞섰다. 그 결과 이기기 쉽지 않은 선거를 이겼다. 두 사람의 선거캠페인을 비교해보면 이명박은 국가나 민족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이익을 앞세우는 냉혹한 무한 경쟁체제 즉 신자유주의였다면, 박근혜는 국가와 민족을 앞세우면서 책임과 의무 그리고 국민 행복을 강조하는 공화주의에 가깝다.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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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배춧국과 동지 팥죽 지면기사
한 해의 끄트머리에서 속절없이 지는 태양을 전송하자. 겨울은 태양조차 차갑다. 펄펄 끓던 여름의 야만적인 태양이 식은 지 오래다. 지나간 날은 끔찍했다. 레몽 끄노는 "악마들이 달군 게 태양"이라고 그랬지. 광기와 대의명분으로 태양이 극렬하던 시대가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말똥 냄새가 나는 가을이 끝날 무렵 우리는 눈(雪)과 얼음, 소금과 후추, 양초 여섯 개를 위해 마련한 겨울 스웨터를 장롱에서 꺼내 입었다. 스웨터를 입으면 저녁의 스산함은 운명의 순간으로 빛난다. 겨울 황혼은 잘 구운 빵 같다. 그걸 보는 게 우리의 유일한 기쁨이라고 말해도 좋을까? 어쨌든 동생이 빵을 달라고 떼를 쓰지 않는 건 사실이다. 동생은 환절기마다 오는 우울증을 제 방식으로 잘 견디는 중이다.가을이 끝날 무렵 우리에게 낙담이 찾아들었는데, 그건 뉴질랜드산 마누카 꿀이 떨어진 탓이다. 그 대신 눈 속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산수유 빨간 열매들이 있음을 깨닫고 위안을 얻었다. 시들고 바스러지는 것들의 소리가 시끄러울 때 사소한 것에 상심한 기분은 함부로 방치된다. 한 해가 끝나는 것은 셰익스피어 400주기, 쓸모를 잃은 열쇠, 녹색 채소들, 일요일 저녁들, 빛나던 소녀의 미소가 주던 기쁨과 위안 없이 견딜 날들이 더 길어진다는 뜻이다. 어머니의 배춧국은 슬픔 달래주는 소울푸드팥죽은 아코디언 팔아서라도 꼭 먹어야 한다 나는 겨울마다 눈 내리는 오슬로에 가고 싶었지. 오두막집에서 눈 내리는 숲을 오래 바라보고 싶었지. 가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가문비나무 어린 가지들이 뚝, 뚝 꺾이는 소리를 듣고 싶었지. 나는 평생 오슬로에는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 오늘은 서리 맞은 저 들판의 한해살이풀들이 닳아빠진 무릎을 꺾고 주저앉은 풍경이나 바라볼 뿐이다.겨울에는 구절초, 꿩의비름, 도라지, 달리아의 전성시대도 끝난다. 당신도 더 이상 젊지 않다. 새해엔 당신의 얼굴에 주름이 늘고, 골밀도도 성겨질 것이다. 해가 지날수록 피의 고도(高度)가 낮아지고, 고아원의 복도에는 한기가 들어찰 것이다. 해마다 외양간에 매인 소는 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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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함께 해요! 2060 지면기사
숫자는 숫자에 불과한데 돌아보니 나는 매 순간 숫자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왔다. 공자가 열다섯에 학문에 큰 뜻을 두었고 삼십 세에 홀로 설 수 있었고 사십에 불혹하였고 오십에 지천명하였으며 육십에는 누가 뭐라고 해도 귀에 거슬리는 일이 없다 하였고 칠십에는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법과 도덕에 저촉됨이 없다고 했던 것처럼 나도 그렇게 나이를 먹고 살아오는 과정에 큰 의미를 부여했었다.심지어 나는 열다섯에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을 왔고 삼십에 홀로 서서 나를 책임질 수 있게 되었으니 공자의 삶의 형태를 닮았다고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했었다. 나는 고뇌로 가득찼던 20대를 중국집 주방에서 보냈다. 더운 여름에는 그 흔한 선풍기 한 대도 없이 안팎에서 더해지는 열기를 견뎌내야 했고 겨울에는 난로도 하나 없이 볶아지는 요리의 온기로 추위를 녹여야 했다. 북풍한설에도 새벽에 나가 장을 보는 일은 나의 몫이었다. 삼십여 년이 지나 육십 나이를 눈앞에 두고 있고 치열하게 살았던 내 청춘의 시절로 다시 한 번 돌아가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래서 나는 20대 청춘들과 함께하는 중국집을 열기로 마음먹었다.주위에서는 모두 하던 것도 그만 두어야 할 나이 육십에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고 만류한다. 하지만 나는 굳은 의지 하나로 절차를 밟아나갔다. 이 시대는 청년들의 취업과 창업을 권장한다. 청년들의 창업을 돕고 지도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창업해야 하는 것이 선결과제였다. 창업을 하고 2030 청춘들을 찾아 나섰다. 20청춘들 꿈 싣고 망망대해 출항하는 창업막상 출발하려니 풀기 어려운 난제들 가득 여기저기 다니면서 20청춘 함께해요를 외친 결과 20세, 24세, 25세, 27세, 29세의 청춘들로 팀이 짜여졌다. 주방에서 일하다가 '거기 양재기 좀 하나 주세요' 했더니 '양재기가 뭐예요?'라고 묻는다. 그는 20세이다. '마늘을 찧는 것은 어떻게 하는 거예요?'라고 묻기도 한다. 살면서 김치를 담글 일이 없었을 터이니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사물 하나를 놓고도 60대와 20대가 그것을 부르는 명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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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우리에게 이런 대통령 불가능한 것인가! 지면기사
곧 대통령 선거가 다가온다. 선거가 아니라 싸움판이다. 이재명 후보는 "尹은 무능·무식·무당 '3무'"라고 비난하고 윤석열 후보 측은 "李는 무법·무정·무치"라고 맞받아친다. 서로 물고 물리는 비난전이 선거판을 지배할 것이다. 국민들은 싸움꾼만 나왔다며 점잖은 체하면서도 공격을 잘할수록 더욱 열광하며 지지를 보낸다. 상대를 제압할 만한 싸움꾼이 아니면 카리스마가 없어 깜이 아니라며 얼마나 무시했던가.그러나 '네 편' '내 편' 싸움에 맛들인 국민들은 어떻게 살아가던가. 친구도 가족도 편이 갈려 얼굴 붉히기 일쑤다. 그런 국민들이라면 그토록 지지했던 대통령도 결국 비난하며 감옥에 보내고 말 것이다. 이 얼마나 비참한 나라인가. 국민들이 '네 편이 못 돼야 내 편이 잘 된다'는 경쟁적 사고에 빠져 있는 한 우리 앞에는 '네 편' 목 조르는 대통령만 기다리고 있다. 견제할 힘마저 빼앗아버릴 만큼 야당을 짓밟는데 능한 대통령만으로 국민들의 삶이 편하던가. 국민들이 진정 행복한 삶을 사는 길, '네 편'도 배려하며 함께 가려는 대통령은 불가능한 것일까. 대선, 상대 쓰러뜨려야 이긴다고 알고있지만'내편'만 떠받드는 나라의 국민 잘 살 수 없다 10여년 전 내가 만드는 '월간독자 Reader'와 경쟁잡지가 함께 홍보를 하게 되었다. 참석자 500여 명 중 10퍼센트로 예상되는 독자를 서로 뺏고 뺏기는 게임이 될 것 같았다. 난감했다. 마이크가 주어지자 나는 그 잡지도 구독해 달라고 진심으로 호소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두 잡지사에 예상보다 3배도 넘는 사람들이 구독 신청해주는 게 아닌가.그때 한 신부님 이야기가 떠올랐다. 신부님에게 한의사가 찾아와 하소연했다. 한약 손님은 줄어드는데 길 건너에 또 한의원이 생겨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신부님은 "먼저 남의 한의원이 잘되게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은혜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렇게 했더니 그 거리에 한약방만 더 늘어 더욱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그곳이 한약거리로 소문나 손님들이 몰려들더라는 것이다.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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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20·30, 더 이상 무시하거나 이용하지 말라! 지면기사
각 당의 대선 후보가 확정된 이후 각 후보들의 2030을 잡기 위한 경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과거 같으면 40대였을 텐데 분명 달라진 모습이다. 그러나 2030세대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지했다는 측면에서는 달라졌지만, 2030의 마음을 얻기 위해 다가서는 모습을 보면 과거와 달라진 것이 없다.과거 선거를 보면 더불어민주당은 어차피 2030은 40대를 따라 민주당을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단지 2030이 투표장에 많이 나오는 방도만 찾았다. 반면 보수정당은 2030에 대해 방도를 찾지 못하고 사실상 포기하거나, 중장년 전통적 지지층의 결집에 집중하면서 대책이 없다 보니 2030의 투표율이 낮아지길 내심 바랐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보수의 바람과 달리 2030이 투표장에 나오기 시작했고, 투표장에 나와서는 40대와 더 이상 동행을 하지 않으면서 민주당을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공정·공존·공생 가치 지향하며 합리적 논증소통없이 후보들 생각만 말할때 가장 싫어해 대선 후보들이 2030을 잡기 위해 가장 많이 하는 방법이 소통이다. 청년과의 만남 이벤트를 만들고 청년을 대변하는 인물을 영입한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이벤트와 레토릭이 등장한다 'With 석열이형'. 그렇지만 무대만 바꾸고 비슷한 얼굴에 분칠만 하고 나타나는 모습이다. 제대로 된 혁신과 변화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서 과연 그 얼굴이 이쁘게 보이고 다르게 보일까?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프레임과 2분법 구도로 단순화시켜 '30대 워킹맘 공동선대위원장'과 같은 상징조작으로 2030에게 마법을 건다. 그러면 30대 공동선대위원장에 대해 2030이 우리를 대표하고 대변할 수 있다고 생각할까? 자신도 모르는 인물이 어느날 갑자기 제1여당 공동선대위원장으로 당대표와 같은 급에 올라 자신들의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고 생각할까? 오히려 박탈감만 더 키울 것이다.아직까지는 각 후보들의 2030 접근방식이 과거와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러기에 지금까지는 2030이 어느 후보에게도 마음을 잘 열려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2030이 더 혐오하는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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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이 일순간에도 시간은 있다 지면기사
현실은 변화를 겪으며 요동친다. 이 변화는 감각적이고, 수량적이며, 실체적이다. 하루만 자고 일어나도 예전 세계는 사라지고, 새로운 변화의 세계가 펼쳐진다. 농경 중심의 전통사회가 사라지고 산업사회와 정보사회를 거쳐 탈산업사회로 들어선 지도 오래다. 그 사이 농업 인구는 소멸하거나 소수화되고, 디지털 뇌를 장착한 새로운 문명인이 몰려왔다. 인류가 한 번도 겪지 못한 후기 탈산업사회의 디지털 환경 속에서 문명인들은 자기 착취를 일삼고 피로라는 만성적 질병에 찌들어간다.이 변화를 긴 시간 단위로 조망하면, 도로는 넓어지고, 건물은 높아졌다. 살림 규모는 커졌고, 명목상 가계 수입은 늘었다. 해외여행이 늘고, 집값은 다락같이 올랐다.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음식점이나 음식 맛은 짜거나 달게 변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현실 변화의 품목이다. 짜고 단맛에 대한 선호가 일반화된 탓이라고 추측하지만 음식 맛이 왜 이토록 달고 짜게 되었는지 그 균일화의 배경이 무엇인지는 딱히 알 수가 없다. 과거와 견줘서 책을 읽는 독자나 신문 구독자가 준 대신 스마트 폰, 태블릿이나 컴퓨터를 사용하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영화는 색감이 화려하고, 촬영기법은 세련되었으며, 내용은 더 잔혹해졌다. 잔혹 범죄가 늘어난 현실을 머금은 탓일 테다. 하지만 피가 튀기는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를 관람하는 것은 고문받는 것만큼이나 끔찍한 경험이다. '서바이벌'이 생의 목표가 돼버린 청년세대그들에게 현실은 '지옥' 그 이상·이하도 아냐 어느 사회에나 청년들은 사회의 최전선에서 오늘의 변화를 가장 먼저 맞고 실감한다. 이들이 사회 변화의 촉매이자 발화점이 된 예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한국의 '4·19혁명' 세대, 일본 '전공투' 세대, 프랑스 '68혁명' 세대, 반문화·반전운동을 이끈 미국 '히피' 세대의 중심은 청년들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 청년세대는 취업절벽이나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진 곤경 속에서 '스펙 경쟁'을 하느라 제 존재 역량을 다 쏟는다. 이들은 부의 양극화와 사회적 기회의 불공정에 분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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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젊은이와 친구가 되는 방법 지면기사
2년 만에 대면강의가 시작되었다. 2년 다니고 졸업하는 학생들은 학교에 나온 날이 열 번 남짓하다. 꽃피는 춘삼월에 입학식을 하고 학과별로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축제를 하는 등 사람들이 통과의례를 치르듯 대학에서 행하는 모든 과정이 통으로 생략된 채 졸업을 하게 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2년 동안 학생들을 기다려 온 나는 설레고 흥분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학생들도 마스크를 쓰고 중무장을 하여 얼굴을 모두 가렸으나 학교에 왔다는 기쁜 표정은 가려지지 않았다. 친구를 사귈 틈도 없었으니 출석을 부르면서 우리 반에 이런 친구가 있다고 소개해 주었더니 서로서로 박수로 환영한다. 서먹서먹했던 분위기도 금세 화기애애해지는 순간이다.강의를 먼저 해야 할까 반갑다는 인사를 먼저 해야 할까. 늘 하는 일이었는데도 갑자기 두서가 없어진다. 잠시 숨을 고르고 젊은이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2년만에 대면강의 이런 메시지 주고싶었다자기가 좋아하는 일 찾는데 시간 할애하기가고자 하는 길 열심히 매진하고 몰두하기내마음 안에 중심 잡아보고 잘하는 것 하자 첫째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보는 것에 시간을 할애하자고 하였다. 이 일을 하려면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내가 무엇을 할 때 기쁘고, 무엇을 할 때 시간이 가는 줄 몰랐는지 찾아야 한다. 그것이 취미가 되고 특기가 되고 직업이 되면 이상적이다. 왜냐하면 평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직업은 내가 즐거운 일을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몰두할 수 있고 삶을 영위하기 위한 경제적인 문제까지 해결될 수 있다.두 번째는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어떤 길이든지 열심히 매진하고 몰두해보자고 하였다.'맹자·고자 상'에서 학생들에게 주고 싶은 귀한 구절을 발견하였다. 혁추라는 사람은 바둑의 고수다. 혁추가 두 학생에게 바둑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한 학생은 바둑을 잘 배우기 위해 전심으로 바둑에만 전념하였고 또 다른 한 학생은 바둑을 배우면서도 날아가는 새를 무엇으로 잡으면 잘 잡힐까를 궁리하였다. 그 두 사람이 이룬 결과는 어떠하였을까.나의 모든 에너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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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우리 정치의 역설 지면기사
야권 단일화에 관심이 높아가고 있다. 국민의힘은 안철수의 지지율이 오르면 단일화에 힘을 쏟을 것이다. 그러나 지지율이 정체되면 단일화를 무시해 버릴지도 모른다. 대통령 선거는 불과 몇 퍼센트 차이로 승부가 갈리지 않던가. 진보3:중도4:보수3으로 갈라진 정치지형에서 진보든 보수든 중도의 표를 가져오지 못하면 정권획득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합리적 유권자라는 중도4의 공간에 안철수의 지지층이 있다. 안철수의 지지율이 올라가야만 정권교체가 된다는 역설이 성립된다.선거 때마다 재집권, 정권교체가 최대의 이슈가 되지만 그것은 무엇을 새로 만들겠다는 플러스정치는 아니다. 수없이 재집권, 정권교체를 해왔지만 힘 빠진 '네 편'을 심판하는 스릴만 즐기지 않던가. 대통령 후보들도 네 편을 밀어내고 내 편이 정권을 갖겠다는 제로섬 정치를 위해 이 주머니에서 뺀 돈을 저 주머니로 옮기는 선심 쓰기로 선거를 치르려 한다. 놀라운 것은 국민들도 제로섬 정치에 열광하며 무능력한 후보에게 환호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무능한 대통령을 뽑아놓고 대통령이 능력을 발휘하기를 바란다. 이 얼마나 역설적 현실인가. 능력 있는 정치인이라면 이런 부끄러운 제로섬게임으로 표를 얻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내 편 네 편을 넘어선 정치, 첨단과학으로 국부를 늘리는 플러스정치에 힘을 쏟지 않겠는가.편 가르고 당당했던 건달정치에 우리는 환호세상에 뭔가 해놓고도 평가 못받는 '안철수' 요즘 코로나 확진자가 3천명 가까이 증가해가고 있다. 앞으로도 코로나와 같은 비상사태는 늘 찾아온다. 코로나 초기부터 백신 확보를 주장한 정치인이 있었는가? 문재인 정부의 백신 무능력을 뒷북치듯 비난한 정치인들만 수두룩했다. 국민들이 컴퓨터 바이러스란 말조차 알지 못했을 때 백신을 만들어 보급했던 안철수가 궁금했다. 놀랍게도 그는 코로나 초기부터 백신 구입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다.교과서 읽는 듯한 말투가 우스꽝스러워 무시해왔던 그를 처음으로 눈여겨보았다. 컴퓨터 백신 무료 보급, 세 번의 정치적 양보, 막대한 재산을 기부하고 거대 양당 틈바구니에서 중소정당을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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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30세대와 40세대, Decoupling or Re-coupling?' 지면기사
최근 여론에서 가장 큰 특징은 2030세대(정확히 보면 30세대 초중반)와 40대가 다르다는 점이다. 또한 과거 캐스팅보터였던 40대보다 스윙보터로 캐스팅보터 역할을 하는 2030세대가 더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2030의 표심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이 가장 당혹해한다. 과거 대부분 선거에서 2030은 40대와 함께 움직이는 동조현상(Coupling), 즉 40대가 2030을 이끌면서 세대 간 대결에서 캐스팅보터 역할을 했다. 그런 2030이 지난 서울·부산보궐선거에서 40대와 비동조화현상(Decoupling)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대립적 표심을 보이고 있다. 지난 서울시장선거의 경우 방송 3사 오세훈·박영선 후보의 득표율 예측조사에서 18∼20대는 55.3% vs 34.1%, 30대 56.5% vs 38.7%, 40대 48.3% vs 49.3%로 2030에서는 오세훈이 앞섰다. 최근 정당지지도 조사를 보면 20대로 내려올수록 국민의힘이, 40대로 올라갈수록 민주당의 지지도가 높은 경향을 보인다. 분명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지난 총선까지는 2030은 40대와 비슷한 정치적 성향을 보였다. 그럼 왜 2030과 40대의 비동조화현상이 나타나는가? 2030과 40대 중 누가 변했다는 건가? 그건 그렇지 않다. 2030세대는 단지 자신들의 경제적 절박함을 정치적으로 표출하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40대는 2030세대의 이러한 절박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젊은 세대가 보수당을 지지하느냐며 핀잔을 준다. 그런 40대를 2030은 꼰대라 한다.2030, 자신들의 경제적 절박함 정치적 표출공정 요구하며 자연스럽게 세대동맹 분리 IMF 이후 2030, 즉 MZ세대는 저성장의 구조화라는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여 대학 입학과 동시에 스펙을 쌓았지만, 탄핵했던 박근혜 정부와는 달리 40대와 함께 지지했던 문재인 정부에서 취업의 벽도 넘기 전에 주택 절벽을 마주하게 된다. 반면 문재인 정부에서 노동시장에도 제대로 진입하지 못한 2030과는 달리 이미 노동시장에 진입한 40대는 노동의 조직화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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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그 많던 한량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지면기사
어린 시절, 농사를 짓는 광산 김씨 외가에 홀로 의탁되어 자랐다. 광산 김씨 문중 큰 제사마다 검은 두루마기 자락을 휘날리며 참석하던 할아버지뻘 친척 중 '삼례 양반'이 기억에 남는다. 늘 사람 좋은 웃음을 웃고, 막걸리를 좋아하던 이였다. "그 어른 참 한량이었지." 그이를 한량이라고 지목하는 말에 비난의 뜻은 없었다.정약용은 공무에서 물러 나와 건(巾)을 젖혀 쓰고 울타리를 따라 걷고, 달 아래서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다. 산림과 과수원, 채소밭의 고요한 정취에 취해 수레바퀴의 소음을 잊었다고 했다. 뜻 맞는 벗들과 '죽란사(竹欄社)'라는 시모임을 만들어 날마다 모여 시를 돌려 읽고 취하도록 마신 정약용 같은 선비가 한량의 원조였을 테다.돈 잘 쓰고 풍류를 즐기는 향촌의 유력계층의 젊은이들은 가계 경제에 그다지 보탬이 되지 않았다. 벗을 환대하고 풍류에 더 열심이었던 탓이다. 농작물의 파종이나 수확 같은 노동의 강제를 면제받는 대신 마을 공동체의 의례를 주재하거나 분란 해결에 앞장을 섰다. 마을마다 한두 명쯤은 있던 그 한량들은 농경시대가 저물고 산업화시대로 넘어가는 변화 속에서 마을 공동체들과 함께 도태되며 자취를 감춘다. 노동실행 거부 고립무원 처지 탈피 힘들어마을공동체 와해 온라인 커뮤니티로 대체 서양에도 한가롭고 세상사에 무관심한 부류가 있었다. '댄디'라고 불린 이들은 직업이 없어도 부모의 재산 덕택에 먹고 살 걱정이 없던 젊은이들이다. 이들은 일체의 생산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교양과 높은 예술적 안목을 쌓고, 세련된 복장으로 군중과 자신을 차별화했다. 멋지게 차려입고 거북을 끌고 파리 산책에 나서던 일단의 사람들. 보들레르는 19세기 서양에 반짝하고 출현한 이들을 '영웅주의의 마지막 불꽃'이라고 했다. 이 위대한 문명의 잔재는 모든 것에 침투하고 평준화하는 민주주의 물결에 밀려났다. 댄디는 꺼져가는 별처럼, 지는 해처럼 한 점의 애수를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세상이 바뀌고 나날을 축제처럼 즐기던 한량도, 댄디도 사라졌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는 생산 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