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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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하늘 위 주유소 지면기사
최신예 전투기라 해도 원거리 공격작전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연료 보급이다. 적진을 공습하거나 공중전을 벌일 때 최소 한두 곳의 경유지에서 연료를 보급한 뒤 이동해야 한다. 우방국이 있다면 그곳의 기지를 이용하면 되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 작전수행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하늘 위 주유소'라 불리는 공중급유기다. 최초의 공중 급유는 1923년 6월로 미 육군 항공단 소속 DH-4B 복엽기가 연료탱크에 호스를 장착해 비행 중인 다른 항공기에 연료를 주입하는 데 성공했다. 두 달 후에는 9차례의 공중급유 끝에 무려 37시간 비행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고속 비행하면서 기름을 주고받아야 하므로 공중 급유에는 늘 위험이 따랐다. 우주 비행 같은 고도의 기술도 필요했다. 급유 중엔 공중급유기와 전투기는 기름을 공급하는 붐(Boom)과 수유구가 붙어 있는 상태로 5분가량 비행을 해야 한다. 급유기와 전투기 사이 거리와 고도를 유지해야 하는 기술이 필요해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정작 사용되지 못했다.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50년 B-29 폭격기를 공중급유기로 개조한 KB-29M 공중급유기 80대를 전력화하면서 '항공전의 혁명'을 불러왔다. 2005년 7월, 1조4천881억원 규모의 우리 공군 공중급유기 사업 기종으로 모두 미국 보잉사가 선정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동안 우리 공군이 미군 급유기로 공중급유 훈련을 해왔고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미군 급유기의 지원을 받아 연합작전을 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에어버스사가 선정됐다. 그동안 전투기를 구매할 때 내세운 '한미 동맹'이 무시돼 논란이 일기도 했다. 당시 북한도 공중급유기 도입 결정에 대해 '전쟁범죄 행위'라며 강하게 비난했다. 그제 우리 공군 전투기의 작전 반경을 획기적으로 늘려 줄 공중급유기 1호기가 도착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보잉사를 제치고 선정된 유럽 에어버스 D&S사의 'A330 MRTT' 바로 그것이다. 앞으로 3대가 더 도입된다. 공교롭게도 공중급유기가 도착하는 날, 중동부전선 철원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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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방탄소년단의 역습 지면기사
일본 방송사들의 방탄소년단(BTS) 방송출연 취소 사태가 국제적인 파문으로 확산되고 있다. 일본 TV아사이가 BTS 멤버 지민이 2년전 착용한 광복절 티셔츠를 문제삼아 예정된 방송출연을 취소한데 이어 NHK, 후지TV도 출연검토를 보류하자 세계 유력 매체들이 일제히 한일관계를 재조명하고 나선 것이다.대중음악 매체 빌보드는 "국가 간의 오랜 정치 문화 사회적 문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며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 역사를 거론했다. 미국 CNN과 영국 BBC도 일본 방송이 원자폭탄 티셔츠를 이유로 BTS의 방송출연이 취소됐다고 밝혔다. CNN은 '일본의 점령으로 수백만의 한국인이 고통을 겪은 사실'을, BBC는 '일제 강제징용자 배상판결 이후 냉각된 한일관계'를 상세히 보도했다. 전범국 일본의 과거가 새삼스럽게 떠오른 것이다.방탄소년단을 응원하는 팬클럽 아미(ARMY)의 방탄 활약도 대단하다. 이들은 구글 등 인터넷 검색창을 통해 'Why BTS'를 열심히 검색하고 퍼나르고 있다. 일본 방송이 BTS 출연 취소 결정 이유를 확인하는 검색어는 '왜 일본이 한국을 침략했는가?(Why did japan invaded korea?)'라는 연관 검색어로 번지면서, 전세계 아미들이 일제의 아시아 침략사를 새롭게 인식하고 있다.BTS 방송출연 금지 배후에는 일본 방송사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세력이나 단체들이 있을 것이다.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기업의 배상 결정에 적나라하게 반발하고 있는 일본 정부와 극우매체 및 단체가 의심된다. 하지만 과녁 설정에 실패했다. 제2의 비틀즈로 떠오른 BTS의 글로벌 위상을 너무 쉽게 봤다.BTS에 열광하는 일본 열도의 열기는 오히려 높아졌다. 아홉번째 싱글앨범 타이틀곡인 'FAKE LOVE(페이크러브)'는 일본 오리콤 차트 1위를 질주 중이고 13일 도쿄를 시작으로 내년 2월까지 오사카, 나고야, 후쿠오카를 순회하는 돔 투어 공연은 38만장 전석이 매진됐다. 일본 주요 도시에 불어닥칠 BTS 열기는 방송도, 극우세력도 통제하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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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슬픈 고시원 지면기사
'서른일곱 개의 방이 있던 그 집, 미로 속에 놓인 방들. 계단을 타고 구불구불 들어가 이젠 더 어쩔 수 없을 것 같은 곳에 작은 부엌이 딸린 방이 또 있던 3층 붉은 벽돌집 … 거기였다. 서른일곱 개의 방 중의 하나, 우리들의 외딴 방. 그토록 많은 방을 가진 집들이 앞뒤로 서 있었건만, 창문만 열면 전철역에서 셀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 보였다.' 신경숙 이름 석 자를 세상에 각인시켰던 소설 '외딴방'에 묘사된 '벌집촌' 풍경이다. 70년대 부평과 구로동 산업단지 주변의 여공들이 살던 주거 공간으로 '벌 방' '쪽방'이라고도 불렸다. 작가 조세희가 "'난쏘공'이 시작된 곳"이라고 말한 그곳이다.동생 학비를 벌기 위해 도시로 나온 10대 누이들이 '산업역군'이라는 이름 아래 온종일 노동에 시달리다 그나마 휴식을 취하던 이런 '슬픈 공간'을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다. 급격한 도시개발로 일시에 사라진 탓이다. 대신 고시원이 그 기능을 하고 있다. 이젠 고시원은 고시 준비생이 아닌 가난한 이들이 저비용으로 주거를 해결하는 그들만의 공간이다. 쪽방 특유의 고립된 환경 탓에 정신건강이 악화된 채 방치되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가족이나 요양시설의 돌봄을 받을 수 없는 그들의 '최후 거주지'인 셈이다.'소방의 날'이었던 지난 9일 새벽, 서울의 한복판인 종로의 한 고시원에서 화재가 발생해 7명이 숨졌다. 참사다. 고시원은 지어진 지 35년 된 건물. 2층에 24개, 3층에 29개의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구조였다. 이 방에서 50~70대 생계형 일용직 노동자가 각자 고단한 일상에 시달리며 살고 있었다. 옆 방에 누가 사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없는 곳. 고시원은 '외딴 방' 하나하나가 나름 하나의 고립된 '섬'이었던 것이다. 이번에 불이 난 고시원에 스프링클러가 없어 피해가 컸다고 하지만, 있다 한들 두 명이 동시에 지나가지 못할 정도로 복도가 좁아 비상 시 대피가 어려운 '쪽방' 같은 구조에서 효과가 있었을지도 의문이다.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최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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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KBS '콘서트 7080' 지면기사
김대중 대통령은 KBS '동물의 왕국'의 열혈 시청자였다. 이 프로를 보기 위해 회의를 일찍 끝낸 경우도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도 못지 않았다.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동물의 왕국'을 자주 얘기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광팬이었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 프로를 즐겨 보는 이유를 "동물은 배신을 안 하니까요" 라고 말한 게 당시 화제가 됐다. KBS 최장수 프로그램 '동물의 왕국'이 첫 전파를 탄 것은 1969년이었다. BBC, NGC, NHK 등의 수입 자연 다큐멘터리 시리즈에 우리말을 더빙해 방영했다. 종영과 부활을 수없이 반복했다. 2004년 가을 개편에 '동물의 왕국'을 KBS1로 부활시키며 내세운 것이 '공영성 강화'였다. 그 후 '동물의 왕국'은 시청률은 낮지만 KBS가 공영임을 내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유익한 프로그램 중 하나가 됐다. KBS가 이번 가을 개편에 장수프로그램을 대거 폐지했다. 그나마 '동물의 왕국'은 용케 살아남았다. 하지만 2004년 시작해 중장년층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던 '콘서트 7080', 성우 박기량의 코믹 해설이 일품이던 'VJ 특공대'도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젊은 방송'을 만든다는 게 폐지 이유였다.시청자들은 당황했다. 특히 70, 80년대 20대를 보낸 세대를 겨냥한 라이브 음악 프로그램 '콘서트 7080' 폐지에 시청자 실망이 크다. '콘서트 7080'은 당시의 인기곡을 오리지널 가수가 직접 출연해 그 시절의 추억과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던, 시청률은 낮지만 두꺼운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소개되는 노래마다 우리 시대 추억이 알알이 맺혀있기 때문이다. 공개방송 표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런데 진행자 배철수도 몰랐을 정도로 프로그램 폐지는 전격적이었다.올 KBS 예산은 총 1조5천152억원으로 이중 수신료수입이 6천542억원을 차지한다. 모바일로 TV를 시청하는 20대보다 시청료의 상당 부분을 50대 이상 중장년층이 부담하고 있다. 그럼에도 중장년층의 유일한 위안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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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보헤미안 랩소디' 열풍 지면기사
최근 한국 영화팬들이 영상으로 완벽하게 부활한 영국 록밴드 퀸과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에게 열광하고 있다. 지난 달 말 개봉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흥행이 미풍에서 태풍으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70, 80년대 퀸의 전성기를 겪었던 장노년층은 다시보기는 물론이고 싱어롱 상영관을 찾아 떼창을 한다.영화의 미덕은 퀸의 흥망성쇠와 프레디 머큐리의 인생역정 보다는 그들의 명반, 명곡을 완벽하게 재현해낸데 있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20분을 1985년 '라이브 에이드' 자선공연 장면으로 꽉 채운 엔딩장면이 압권이다. '보헤미안 랩소디' '라디오 가가' '위 윌 록 유' '위 아 더 챔피언스'까지, 한국 관객들은 영화를 완전체 퀸의 내한 라이브 공연처럼 즐기고 있다.전성기 시절 퀸은 국내에서 인기 상한가였다. 존 디콘과 로저 테일러가 1984년 방한해 잠실체육관에서 내한공연을 한다는 설이 돌았지만 실현되지 않았고, 될 수도 없었다. 당시 국내에선 보헤미안 랩소디가 금지곡이었다. '권총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가사 내용이 문제였을 것으로 추측될 뿐, 분명한 이유는 모른다. '권총'과 '발포'에 대한 당시 정권의 트라우마가 작용한 탓이려니 짐작해본다. 여하튼 퀸에게 대표곡 보헤미안 랩소디가 빠진 공연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89년 해금됐고, 2014년 퀸의 내한 공연이 성사됐다. 프레디 머큐리는 1991년 사망한 뒤였다.한국의 50, 60대는 프레디 머큐리의 퀸과 늘 함께였다. 70, 80년 대 가난했던 청춘 시절에는 청계천에서 빽판(불법복제음반)을 구해 친구들과 함께 강렬한 사운드와 프레디의 고음에 심취하며 해방감을 맛봤다. 그들이 소비 주역으로 등장하면서 퀸의 음악은 광고와 다양한 문화현장의 배경음으로 모든 세대에게 전파됐다.우울한 시대와 경제적 전성기를 거쳐 불안한 미래를 마주한 한국의 7080세대는 시대의 우여곡절로 인해 갈라지고 찢어진 세대다. 그들이 모처럼 보헤미안 랩소디를 통해 세대의 동질감을 확인하고 동시대의 공감각을 체험 중이다.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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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仁川 야구 지면기사
코리안시리즈가 시작됐으나 야구 팬의 의식은 여전히 지난 2일 플레이오프 5차전에 멈춰 서 있다. 명승부를 넘어 한편의 스펙터클한 영화였던 탓이다. 평생 이런 야구를 본 적이 없었다. 야구라고 다 야구가 아니었다. 정규시즌 야구와 포스트 시즌 야구는 분명히 달랐다. 전국 TV 시청률이 무려 8.9%를 기록했다. 야구 팬이 아니어도 그날의 야구를 보았다면 채널을 돌리는데 주저했을 것이다. 연장 10회 말, SK의 공격. 첫 타자는 정규시즌에서 1군과 2군을 오갔던 베테랑 김강민. 김강민은 투 스트라이크 상태에서 4구를 받아쳐 극적인 동점 홈런을 터뜨려 인천 SK 행복드림구장을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하지만 여기까진 예고편. 이어 타석에 들어선 한동민이 때린 백구(白球)가 가을 밤하늘을 가르며 백스크린 앞에 떨어졌다. 끝내기 홈런. 환호와 탄성이 일시에 폭발했다. 지난 1994년 태평양 돌핀스가 코리안시리즈 진출을 다투는 한화전에서 연장 10회 초 김경기가 날린 홈런도 여기에 비할 수는 없었다. 그 어떤 드라마도 이렇게 극적으로 각본을 짤 수는 없었을 것이다. 누구는 그 경기에서 인천야구의 본질을 보았다고 말했다. 우리의 프로야구 역사는 짧다. 그러나 인천 야구 역사는 길다. 인천은 한국 야구의 본산이다. 5·60년대 인천은 구도(球都)였다. 부산은 비할 바가 못 됐다. 인천고와 동산고를 앞세워 최대 부흥기를 맞았다. 적수가 없었다. 야구는 인천 토박이는 말할 것도 없고 인천에 들어와 살던 실향민들에게도 정신적 위안을 주었다. 야구는 인천사람에게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고된 삶을 잊게 해주는 위안거리였다. '인천사람 눈물을 닦아주는 손수건이었다'. 70년대 서울과 경북 부산 광주 지역 고교 야구팀이 창단되면서 선수부족으로 비록 쇠락의 길을 걸었지만, '인천 야구'는 늘 터질 날만 기다리는 거대한 휴화산이었다.인천이 술렁이고 있다. 5년 만에 체험하는 코리안시리즈 때문이다. 1차전 가을의 사나이 박정권의 불같은 타격으로 역대 최강이라는 두산을 7대3으로 격파했다. 2차전은 비록 졌지만, 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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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우리회사 양진호' 지면기사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의 엽기적인 악행이 직장 갑질 미투운동으로 번질 조짐이다. 각종 매체들은 한 시민단체가 자체 수집해 발표한 직장 갑질 사례를 '우리회사 양진호'로 번안해 보도하고 있다. 퇴직 직원에 대한 양 회장의 폭행 동영상 원본을 보면 정말 치가 떨린다. 폭행당한 청년의 처지를 내 가족과 친구의 경우로 바꾸어 상상하면 적개심이 끓어 오를 지경이다. 대학교수 폭행, 직원 학대 등 드러난 악행은 '사과문'으로 마무리 할 수준이 아니다.IT(정보기술)분야 기업들의 사내 문화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자유분방과 상호존중이다. 창의와 협업이 생명인 산업특징 때문이다. 하지만 전체주의적 기업문화를 가진 IT기업들이 많다고 한다. 사업의 비전과 기술을 창업자에게 의지하는 구조 때문이다. 마크 저커버그는 페이스북 창업 초기에 'I'm CEO, Bitch'를 새긴 명함을 뿌렸다. "내가 최고경영자다. 떫냐" 정도로 해석되는데, 그를 페이스북 제국의 나폴레옹으로 비판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인용하는 사례다.양 회장도 웹하드 업계의 대부라 한다. 주로 웹사이트에서 동영상을 유통시키는 웹하드 업체는 음란물을 포함한 불법 동영상 유포의 핵심 통로로 의심받았다. 특히 양 회장은 불법 동영상을 무차별적으로 유통하는 웹하드 사업과 이를 지워주는 디지털 장의사 사업을 함께 운영했다. 불법 동영상 유통 수익과 피해자의 고통을 지워주는 대가를 동시에 챙겼으니 꿩 먹고 알 먹는 사업모델이다. 자신만의 독점적 사업에서 제왕처럼 군림하다 보니 세상의 상식과 법을 초월한 존재로 착각했던 모양이다.양 회장은 사과문에도 여론이 가라앉지 않자, 초호화 방탄 변호인단을 꾸리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폭행 등 드러난 죄가 명백하고, 음란물 유포 등 밝혀야 할 혐의가 적지 않다. 꼼꼼하게 수사해 엄정하게 법적 처리를 해야 마땅하다. 또한 양진호 갑질의 근원을 제도적으로 도려내는 일도 서둘러야 한다. 직장 갑질을 방지할 근로기준법 개정은 물론이고, 불법 동영상 유포로 돈을 버는 사업구조도 뿌리를 뽑아야 마땅하다. '우리회사 양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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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申星一 지면기사
이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1957년 당대 최고 감독 신상옥은 신필름을 설립하고 배우 모집에 들어갔다. 264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강영일. 하지만 신 감독은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그에게 신필름의 '신', 한국 영화계의 새별이 되라는 의미의 '성', 일등 배우가 되라는 뜻의 '일', 신성일이라는 예명을 지어주었다. 대한민국 아니, 건국 이래 최고의 배우 신성일은 그렇게 탄생했다.50년대 말 한국 영화계는 신상옥 최은희의 신필름과 홍성기 김지미의 홍성기 프로덕션으로 양분돼 있었다. 소속 배우도 신 감독 측엔 김승호 김진규 등이, 홍 감독 측엔 최무룡 장동휘 남궁원 등이 포진하고 있었다. 관객들은 유명 배우만을 선호했다. 무명 배우가 출연하면 흥행이 신통치 않았다. 흥행 실패는 파산을 의미했다. 그래서인지 두 영화사 모두 신인을 키우지 않았다. 신필름이 신성일을 뽑아놓고 미적거린 것도 흥행 실패의 두려움이 작용했다. 신성일이 스타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이런 분위기 탓이 컸다. 신성일은 1960년 신필름의 창립 작품 '로맨스 빠빠'로 데뷔했지만, 그저 잘생긴 배우 정도의 이미지만을 남겼을 뿐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마침내 1964년,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제임스 딘이 그랬던 것처럼, 카리스마 있는 반항아 이미지와 청바지가 잘 어울렸던 신성일은 일약 스타 반열에 올랐고 '청춘물'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 '고통스러운 상황을 의지로 돌파해가는 남성적인 분위기'가 한국 영화에 스며들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눈물도 한숨도 나 혼자 씹어 삼키며'로 시작되는 최희준의 노래도 빅히트를 쳤다. 신성일은 거칠 게 없었다. 1964년부터 8년간 개봉한 1천194편의 작품 중 324편에 그가 출연했다. 특히 1967년 제작된 한국영화 총 187편 중 신성일 출연 작품이 무려 51편이었다.하지만 그는 정치권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두 번의 낙선 끝에 '강신성일'로 이름을 바꾼 후 16대 총선에서 당선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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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목구멍 지면기사
승정원은 조선의 왕명 출납기관이었다. 왕이 내리는 교지는 승지를 통해 해당 관청에 전달되었고, 상소문은 승지를 통해 왕에게 전달됐다. 정승이나 판서 등 신하가 왕을 면담하거나 중요 회의에 배석해 대화 내용을 기록하는 것도 이들 몫이었다. 우리가 자랑하는 기록문화의 꽃 '승정원일기'가 이들의 손에서 작성됐다. 승정원에는 정3품 당상관인 6명의 승지가 있었다. 왕과 늘 가까이 있어 간혹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역사의 중심에 서곤 했다. 승지의 횡포는 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우리가 익히 아는 터다. 임금의 '목구멍(喉)과 혀(舌)' 역할을 한다는 의미로 승정원을 가리켜 후설(喉舌)이라고 했다. 그만큼 중요한 자리라는 뜻이다.'디프 스로트(deep throat : 깊은 목구멍)'는 1972년 미국서 제작된 포르노 영화다. 이 영화가 여전히 회자하는 것은 우선 미국 최초의 합법적 포르노여서다. 그럼에도 22개 주에서 상영이 금지되었지만 폭풍 같은 노이즈 마케팅으로 수완 좋은 제작자 제라드 다미아노는 돈벼락을 맞았다. 4만 5천 달러를 투자해 10년 동안 6억 달러를 회수했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깊은 목구멍'이 다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워터게이트 사건 때문이었다. 워싱턴 포스트의 두 젊은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이 워터게이트 빌딩 침입 사건을 2년간 끈질기게 취재해 닉슨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한 것은 내부조력자의 덕이 컸다. 기자에게 지속해서 제보했던 취재원은 익명을 요구했고, 두 기자는 그를 '깊은 목구멍'이라고 불렀다. 그 이후부터 '깊은 목구멍'은 '은밀한 제보자' '내부 고발인'을 지칭하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깊은 목구멍'이 FBI 부국장 마크 펠트로 밝혀진 건 33년이 지난 2005년이었다.요즘 '목구멍'이 뉴스의 중심에 섰다. 지난 9월 평양 정상회담 때, 리선권 북한 조평통 위원장이 점심 식사 자리에서 기업인들에게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느냐"라며 면박을 준 발언이 뒤늦게 알려지면서다. 먹는 자리에서 '목구멍' 운운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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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지연된 정의의 후폭풍 지면기사
"혼자 있어서 슬프고 초조하다. 울고 싶고 마음이 아프다." 일본과 조국의 법정을 전전하길 21년에 일제 강제징용 피해 배상 판결을 받은 이춘식(94) 옹의 비감한 소회다. 배상소송을 함께 했던 징용피해 동료 3명이, 그것도 2명이 올해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를 승소 법정에서 전해 들었다. 승소의 기쁨보다 상실의 비애가 앞섰을 것이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는 격언을 이처럼 실감하는 장면이 또 나올지 의문이다.고 여운택, 신천수 두 강제징용자가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에 피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것이 1997년 12월이다. 하지만 일본 법원은 이들을 모욕했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합법적이었다는 전제하에 2003년 일본 최고재판소가 이들의 최종 상고를 기각했다. 두 사람은 또 다른 피해자 고 김규식씨와 이 옹과 함께 2005년 2월 조국의 법원을 찾았다. 일본의 배상을 원했다기 보다는 조국의 법원이 강탈당한 강제징용자의 정의를 인정해주길 바랐던 마음이 컸을 것이다.놀라운 건 대한민국 지방, 고등법원이 일본법원 판결을 인정한 것이다. 이를 대법원이 바로잡았다. 2012년 "일본 판결은 우리 헌법 취지에 어긋나고, 신일본제철은 구일본제철을 승계한 기업"이라며 고법판결을 파기환송한 것이다. 이에 고법이 2013년 신일철주금의 1억원 배상책임을 확정했다. 신일철주금은 즉시 상소했다. 그러나 대법원의 시계추는 고법판결을 그대로 확정하는 수순만 남겨둔 채 5년간 멈추었다. 대법원의 잘못은 명백하다. 의혹대로 재판거래 탓인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스스로 세운 역사적 정의를 5년간 묻은 잘못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그 대가로 정부는 심각한 외교적 후폭풍을 감당하게 됐다. 수상부터 장관까지 일본의 반발은 전면적이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거론하며 국제재판소 제소를 거론하고 있다. 대북제재 완화를 놓고 미국과의 갈등설이 나오고, 사드 분쟁 이후 중국과도 어색하다. 북한은 자신들을 향한 남측 정부의 진심을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느냐"는 밥상머리 악담으로 모욕한다.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