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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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고승호와 돈스코이호 지면기사
1894년 7월 25일 인천 옹진군 울도 인근 해상에서 일본 전함의 포격으로 영국 국적 상선 고승호(高陞號)가 침몰했다. 청나라가 조선에 파견할 군인 수송선으로 활용하기 위해 빌린 이 배엔 청군 1천200여 명이 타고 있었다. 고승호의 침몰은 청일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인간들에게 역사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고승호가 침몰한 그 날부터 청나라의 군자금으로 쓰일 은덩이와 은화 약 600t이 실려 있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소문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이후, 그리고 근래까지 약 100년에 걸쳐 계속됐다. 그리고 2001년 고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이 운영하던 대아실업의 투자사인 '골드쉽'이 고승호 발굴에 성공했다.문제는 주식시장. 발굴이 진행되려는 시점에 대아건설 주식이 급등했다. 2001년 7월 30일 신문마다 이런 기사가 실렸다. '주식시장에서 '대아건설은 40%의 지분을 갖고 있는 보물선 인양업체인 골드쉽이 청일전쟁 당시 서해안에 침몰한 고승호에서 은괴를 발견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주가가 가격제한폭까지 오르는 등 요동을 치면서 '보물선 관련주'들도 덩달아 초강세를 보였다.' 하지만 막상 인양된 고승호에는 소문과는 달리 약간의 은화와 엽전, 총기류, 탄알, 쌍안경, 선박용 온도계, 군인 신발, 도자기류 등이 발견됐다.1905년 러일전쟁에 참전했다가 울릉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돈스코이호가 연일 화제다. 한 기업이 '150조원의 금괴가 실린 보물선을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고 주장하면서 관련 주가가 급·등락하고 있어서다. 하지만 이는 새로운 뉴스가 아니다. 2003년 6월 3일 신문마다 이런 기사가 실렸다. '3일 증시에서는 보물선 관련주들이 급등해 주목을 받았다. 동아건설이 울릉도 저도 앞바다에서 금괴를 실은 것으로 알려진 제정 러시아의 '돈스코이호'로 추정되는 침몰선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발단이 됐다. 이에 따라 장외시장에서 200~300원대에 불과하던 동아건설 주가가 800원대까지 뛰었다.' 하지만 동아건설은 그해 부도가 나 사라졌다.끔찍한 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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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트럼프 리스크' 지면기사
미국 조야가 한 목소리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혼쭐내고 있다. 미·러 정상회담 공동기자회견에서 러시아가 2016 미 대선에 개입했다는 자국 정보기관 조사결과를 비난하면서 푸틴 대통령을 옹호한 게 발단이 됐다. 여당인 공화당부터 발끈했다.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미국 대통령으로서 가장 수치스러운 행동"이라고 머리를 저었다. 민주당 척 수머 상원 원내대표는 "미국의 적을 옹호한 대통령"이라며 "미국민에 대한 모독"이라고 합세했다. 존 브레넌 전 CIA국장은 트럼프의 기자회견을 아예 "반역적"이라고 규정했다.언론의 비판은 더한데 보수 언론이 한 술 더 떴다. 트럼프가 사랑하는 폭스뉴스사의 한 진행자는 기자회견 생방송 도중 "좌파냐 우파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잘못된 일"이라며 "구역질 난다"는 극언을 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적국의 범죄 지도자와 공모한 것"(워싱턴 포스트), "트럼프가 푸틴의 발아래 누웠다"(뉴욕 타임즈), "미국 대통령을 더 이상 자유세계의 지도자라 부를 수 없게 됐다"(CNN) 등 미국 유력매체들은 현직 대통령을 '미국의 공적'으로 취급했다.트럼프는 모처럼 주눅든 표정으로 "말 실수"였다 해명했지만, 이번 기자회견 사태로 대통령을 향한 미국 주류사회의 의심은 회복 불가능 수준으로 깊어졌다. 트럼프는 취임 이후 지독한 자기중심적 정치와 맥락 없는 언행으로 국제질서를 혼란에 빠트렸다. 동맹은 당황했고, 적국은 미소지었고, 미국은 부끄러워했다. 미국 외교분야의 거물인 조지프 나이는 저서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에서 중국을 비롯한 세계강국과 미국 국력을 일일이 견주어보고 "미국의 세기는 끝나지 않았다"고 단정했다. 하지만 현재의 트럼프 리스크를 감안해 개정판을 낸다면 결론이 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미국 국내는 물론 중국, 러시아, 유럽연합과 하다 못해 북한까지 트럼프 리스크에 맞서거나 요령있게 관리 중인 국제정세다. 문제는 우리다. 트럼프 리스크의 직접 영향권에서 대처가 애매하다. 당장 북한핵을 요절낼 기세는 온데간데 없이 미북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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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성희롱 논란 고전문학 수업 지면기사
고등학교 때였다. 교과서 한 권만 들고 들어오는 국어 선생님이 계셨다. 수업이 시작되면 늘 "지난 시간 어디까지 배웠지?"라고 말했고, 우리가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요!"라고 하면 "그럼 오늘은 구지가(龜旨歌)를 배우자"며 칠판에 향가를 적어 내려갔다. 일필휘지였다. 물론 책은 들춰보지도 않았다. 향가가 이두를 통해 암호처럼 해독되는 과정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런 선생님의 모습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우리는 향가 25수를 그렇게 배웠다.향가는 통일신라 때 크게 유행하다 고려 초 소멸한 시가(詩歌)로 요즘으로 치면 인기가요다. 당시에는 훨씬 많은 노래가 불렸겠지만, 불행하게도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수만 전해진다. 순수한 우리 글로 표현할 수 없어서 이두(吏讀), 즉 한자의 음(音)과 훈(訓)을 빌려서 표기했다. 그러다 보니 해석에 어려움이 따르고 해독자에 따라 다른 해석이 나오곤 했다. 그래도 향가는 신라 문학이라는 것 외에도 훈민정음 이전의 고어(古語)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귀한 자료다.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향가를 수록해 가르치는 것은 문학적 또는 역사적으로 '꼭 알아야 할 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우리의 향가처럼 일본에는 만엽집(萬葉集)이 전해져 내려온다. 상당수 작품이 지나치게 선정적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만엽집을 '일본 정신의 고향'으로 추앙하고 있다. 이영희(李寧熙) 전 국회의원은 7권의 저서를 통해 만엽집이 '고대 한국어를 이두체로 기술한 4천516수의 노래묶음'이라고 단언한다. 일본학자들은 기겁하지만, 일본인조차 해석 못 한 만엽집 일부를 이 전 의원은 고대 한국어로 모두 해독했다. 한자가 5세기 왕인박사 등 백제 학자에 의해 일본에 전해진 걸 떠올리면 이영희의 해독은 터무니없는 것도 아니다.수업 도중 향가 '구지가'의 해석을 놓고 인천의 한 사립여고 교사가 성희롱 논란에 휩싸였다고 한다. 구지가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란 대목에서 거북이 머리가 남근(男根)으로 해석된다는 교사의 설명이 성희롱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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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고희 맞은 대한민국 헌법 지면기사
오늘로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 70주년을 맞았다. 1948년 5·10총선거로 구성된 제헌국회는 7월1일 '대한민국'을 국호로 확정하고, 12일 대한민국 헌법을 성안해 17일 내외에 공포했다.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선출하고 정부를 구성한 뒤 8월15일 대한민국 수립을 선포했다.링컨은 "국가는 거기에 거주하는 국민의 것"이라고 했다. 무엇으로 이를 확인하는가. 헌법이다. 헌법은 자유로운 대한민국 국민의 권리장전이다.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한 헌법 10조~39조만 온전히 작동해도 국민은 존엄과 가치를 지닌 인간으로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국민 개개인이 헌법을 숙지하고 생활의 준칙으로 삼으면 수많은 사회적 갈등이 해소될 것이다.가령 대한항공 조씨 일가가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는 헌법 11조2항의 정신을 존중했다면, 아랫사람들을 그리 함부로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씨 일가 뿐인가.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헌법정신대로라면 특권의식에 기생한 갑질문화가 발붙일 자리는 없다. 갑질문화는 국민의식이 헌법정신에 못미친다는 증거다. 법 앞의 평등이 돈 앞에서 깨지는 사회는 천박하다.최근 사회를 긴장시키고 있는 최저임금 논란도 헌법에 기초하고 있다. 정부는 근로자의 고용증진과 적정임금 보장으로 최저임금제 시행(헌법 32조1항) 의무를 수행했지만, 편의점 사장들을 비롯한 소상공인들은 생존권 위기를 호소하며 '헌법에 입각한 국민저항권'으로 맞서고 있다. 정부가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하는 바람에 죽게 생겼으니, 최저임금에 불복하겠다는 얘기다.최저임금 현상유지로 인간적 생존을 유지해달라는 편의점 사장들의 헌법적 권리와, 대폭인상으로 적정임금을 보장하라는 근로자의 헌법상 권리가 충돌한 것이다. 결국 최저임금법의 합리적 운용을 통해 양측의 헌법적, 헌법상 권리를 조화시켜야 할 정부만 사면초가 신세가 됐다.물론 소상공인들의 국민저항권이 헌법에 부합할지는 따져 볼 대목이 많다. 다만 편의점 사장님은 절망하고 아르바이트생은 불안하다니 최저임금 대폭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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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여의도 포청천 문희상 지면기사
8선 이만섭 전 의원은 14대, 16대 두 번 국회의장을 지냈다. 그는 여야 합의 없이 이뤄지는 법안 처리를 무척 싫어했다. 14대 의장 때 통합선거법 등의 날치기 처리를 위한 본회의 사회를 거부하면서 김영삼 대통령과 갈등을 빚었다. 16대 땐 새천년민주당이 국회 원내 교섭단체의 구성 요건을 완화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상임위에서 일방적으로 통과시키자 "날치기는 안 된다"며 법안의 본회의 처리를 끝내 거부했다. 그는 국회가 정부가 보내온 법을 통과시키기만 하는 '통법부(通法府)'가 돼선 안 된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진 국회의장이었다. 3공화국 이후 권력의 양지에서만 지냈다는 일부 비판에도 불구하고 의장 시절 그에 대한 평가가 후한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치 않다.문희상(경기 의정부갑)의원이 20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에 선출됐다. 경기도 출신 국회의장은 1·2대 신익희 의장 이후 64년 만이다. 문 의장은 여야를 넘나드는 폭넓은 인맥과 특유의 친화력, 여기에 청와대에 대한 영향력도 상당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국회가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는 지금, 국회 기능을 살리는데 나름 역할을 할 것이란 기대감이 높다.문 의장은 별명이 많다. 북송 시절 명판관 포증(包拯)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판관 포청천'의 주인공과 닮았고, 균형 잡힌 일처리를 한다고 해서 '여의도 포청천'이란 별명이 붙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비상대책위원장 시절 얻은 '개작두', 외모 덕분에 '겉은 장비 속은 조조' '웃는 돼지' 등 다양한 별명도 갖고 있다. 문 의장은 우락부락한 외모와 달리 '할 말은 하고 풍류도 아는, 여의도에 얼마 남지 않은 정치인'이다.최근 국회에 대한 국민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의회주의자’ 문희상이 국회의장이 돼서 다행이다. 의장 수락연설에서 “첫째도 협치, 둘째도 협치, 셋째도 협치”라고 말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힘으로 야당을 밀어붙이지 않겠다는 뜻으로 들린다.정치인은 이해와 현실을 좇고, 정치가는 시대와 역사를 읽는다고 한다. 국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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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 2018 지면기사
세계 3대 영화제로 베니스, 칸, 베를린 영화제를 꼽는다. 각자 색깔과 특성이 다르다. 칸이 작가주의 작품을 선호한다면, 베니스 영화제는 예술적인 작품을, 베를린 영화제는 철학적이고 실험적이며 진보적인 영화를 선호한다. 이들 영화제는 자신들의 색을 갖기 위해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세계적인 영화제가 되려면 이들처럼 연륜이 쌓여야 한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정체성 논란을 빚으며 영화제 존폐를 논할 정도의 우여곡절도 겪어야 한다. 그러면 영화제에 나름의 고유 색깔이 입혀진다.부천 판타스틱 영화제(BIFAN)가 어제 개막했다. 22회째다. 역대 BIFAN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를 꼽으라면 1회 때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킹덤'일 것이다. 이 공포 영화는 BIFAN을 다른 영화제와는 분명히 다른, 특별하게 뭔가가 있는 영화제로 각인시킨 일등공신이었다. 이 영화 덕분에 BIFAN은 장르영화제 마니아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아왔다. 표현의 억압과 금기에 도전하는 작품들을 여과 없이 소개하면서, 다양성을 겸비한 독자적인 영화제로의 위치를 굳건히 할 수 있었다. 너무하다 할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되는 성과 폭력, 타락한 사회를 시원하게 조롱하는 '그들만의 향연'이었다. 반대로 장르영화제가 갖는 한계는 일반인들의 진입을 막는 벽이었고, 그것은 주최 측에게 늘 커다란 고민이었을 것이다.20회를 기점으로 BIFAN은 큰 변화를 맞았다. 애초 영화제 취지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마니아부터 일반 관객까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영화제로 탈바꿈한 것이다. 당시 '코리안 판타스틱' 경쟁 부문을 신설하고, 가족을 위한 '패밀리 존'을 부활시킨 것도 그런 이유다.올 BIFAN엔 53개국에서 290편의 작품을 출품했다. 개막작에 오성윤·이춘백 감독의 애니메이션 '언더 독', 폐막작이 인도영화 '시크릿 슈퍼스타'인 것은 나름 의미심장하다. 그렇다고 호러 영화가 빠진 것은 아니다. 이름만으로도 오싹한 웨스 크레이븐, 조지 A 로메로, 토브 후퍼 감독의 특별전 '3X3 EYES: 호러 거장, 3인의 시선'은 영화제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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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볼음도 은행나무의 딱한 사연 지면기사
가로수로 친근한 은행나무는 주변에 지천이라 살아있는 화석이라는 별칭이 무색할 지경이다. 하지만 계문강목과속종(界門綱目科屬種)식 생물분류에 따르면 은행나무는 '식물계·은행나무문·은행나무강·은행나무목·은행나무과·은행나무속·은행나무'다. 공룡이 멸종된 6천600만년 전 신생대 이후부터 한 조상과 한 후손만으로 현재의 자태를 이어왔으니 경이로운 존재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이 은행나무를 멸종위기종 목록에 올린 것도 스스로 번식 자생하는 야생군락지를 찾기 힘들어서다.계통상 다른 식물들과 섞이지 않는 고고함 때문일까, 은행나무는 수령이 길다. 당연히 사람과의 영적교감이 담긴 설화도 많다.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수령은 1100~1500여년으로 추정되는데 멀게는 신라시대부터 한자리를 지킨 셈이니, 원래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였다는 전설이 그럴듯하다. 수령 700년의 안동 용계 은행나무는 한일합방 등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우는 신목으로 유명한데, 다시 우는 일이 없어야겠다.신묘한 자태와 달리 살구를 닮은 은행열매는 똥냄새에 버금가는 악취로 악명이 높다. 성균관대 은행나무는 열매 악취로 성균관 유생들의 공부를 방해해 왕에게 혼쭐이 났을 정도다. 은행나무 가로수가 가을이면 악취민원을 일으키는 건, 숫나무만 심어야 하는데 암나무가 섞여든 탓이다. 요즘은 유전자 기술로 묘목단계에서 암수구별이 가능해졌다니 다행이다. 주의할 건 떨어진 열매를 줍는 건 괜찮지만, 나무를 털어 열매를 따면 범죄다. 은행털이는 안된다.자웅이주의 특성상 은행나무는 암수 부부나무가 있어야 종자를 맺는다. 그런데 천연기념물 304호 강화 볼음도 은행나무가 홍수로 아내 나무와 헤어진지 800년, 이제는 남북 이산나무라(경인일보 7월 10일자 1판1면)니 딱하다. 볼음도 남편 나무의 짝으로 알려진 북한 천연기념물 165호 연안 은행나무는 800년 불임의 세월을 어떻게 견뎠을까. 이제라도 인공 수분(受粉)을 통해 부부의 연을 이어주자는 발상은 남북교류의 상징적 행사로 안성맞춤이다. 명맥이 끊어진 부부나무 풍어제도 복원되면 금상첨화다.그런데 남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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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鄭基烈의 歸去來辭 지면기사
도연명이 펑쩌현 현령 자리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심경을 '귀거래사'로 남길 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고향으로 간다고 귀거래사를 '안빈낙도(安貧樂道)'라고만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내용은 결연하다. '전원(고향)이 장차 황폐해지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라는 첫 구절은 물론이고, '남녘의 거친 들판을 일구며/ 전원으로 돌아가 자연에 묻히리라'는 대목에선 변화무쌍한 자연 같은 삶을 살고 싶어 했던 도연명의 확고한 의지가 엿보인다. 귀거래사는 세속과의 결연한 결별선언서이기도 하다.'만남이 있으면 반드시 헤어짐도 있다'는 회자정리(會者定離)는 '법화경'에 있는 가르침으로 세상의 무상함을 이른 말이다. 아무리 평탄한 삶을 산다 해도 인간은 평생을 통해 한두 번의 귀거래사를 읊조리게 마련이라는 뜻도 된다. 조순 전 부총리는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이란 귀거래사를 남겼다. '일은 사람이 꾀하지만, 그 일이 되고 안 되고는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고 읽히나 '최선을 다한 후에는 그 결과에 연연하지 말라'는 뜻에 더 가깝다.물러날 때 소회가 없을 수 없다. 하물며 출세의 정상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라면 퇴임의 느낌은 남다를 것이다. 숨 가쁘게 달려왔던 인생, 자신의 모든 것이었다고 생각했던 그 길을 접는 퇴임의 변이 사람에 따라, 살아온 인생에 따라 무지개처럼 다양한 빛깔을 갖는 것은 그래서다.지난달 30일로 임기를 마치고 야인으로 돌아간 제9대 경기도의회 정기열 의장이 9일 주변인들에게 퇴임 인사 겸 새 출발을 알리는 문자를 보내왔다. 그는 문자를 통해 "7월 2일부터 10년 전 다녔던 자동차회사 안양 동안지점 영업과장으로 복직해 카마스터로 일을 시작했다"며 "앞으로 정치인이 아닌 직장인으로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지역주민과 소통하고 직장인으로서 또다른 꿈을 향해 자동차를 팔면서 꿈을 이루어 가려고 한다"는 귀거래사를 남겼다. 정치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도의회 의장까지 지낸이가 아무리 옛 직업이라 해도 카 마스터로 돌아가는 것이 그리 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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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김세영의 대기록과 한국 여자골프 지면기사
한국 여자 프로골프가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었다. '빨간 바지의 마법사' 김세영(25)이 9일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사상 72홀 역대 최저타와 최다 언더파 신기록을 세운 것이다. 이날 김세영의 LPGA 투어 손베리 크리크 클래식 최종 우승기록은 31언더파 257타. 최다 언더파 기록은 안니카 소렌스탐과 자신의 공동기록이던 27언더파를 넘어선 것으로, 남자 투어인 미국프로골프(PGA) 어니 엘스의 기록과 동률이다. 여성으로는 최초로 30언더파를 넘겼으니 좀처럼 깨지기 힘든 기록이다.이제 LPGA는 한국 여성 프로골퍼가 지배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만 출발은 초라했다. 1950년 출범한 LPGA투어에서 한국인 첫 우승은 1988년 스탠더드레지스터 대회의 구옥희였다. 그러나 10년이 지나 1998년 혜성처럼 박세리가 등장해 2개의 메이저대회를 포함해 4승을 올리면서 한국 전성시대를 예고했다. 이후 박세리키즈들의 맹활약으로 2014년 이후에는 한해 30여개의 LPGA투어 대회중 절반 이상을 한국과 한국계가 우승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뿐만 아니라 박세리, 박인비가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고, 박인비는 커리어그랜드슬램을, 김세영은 LPGA 한국 선수 통산 203승 경기에서 역대 최저타와 최다 언더파 기록을 세웠으니 LPGA는 이제 한국 여성골퍼의 안방무대나 다름없고, 선수들이 상금으로 챙기는 외화도 만만치 않다.박세리의 1998년 US오픈 맨발의 투혼은 당시 IMF 우울증에 시달리던 국민들에게 위기극복의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까만 종아리 밑으로 드러난 새하얀 맨발이 양희은의 상록수와 함께 방영될 때마다 그녀의 투혼이 국민들의 가슴으로 전이됐다. 박인비는 새하얀 그 맨발을 보고 골프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박세리키즈의 탄생이다. 박세리키즈의 막내격인 김세영의 대기록도 경기침체로 한껏 위축된 우리 사회를 위로하기에 충분하다.분명한 것은 박세리, 박인비, 김세영의 대기록도 착실한 한걸음이 누적된 결과라는 점이다. 골프는 무수한 반복을 통해 자신의 스윙을 만들어야 경지에 오를 수 있는 종목이다. 대선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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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SF영화가 경고하는 저출산 지면기사
요즘 마거릿 애트우드의 동명 소설을 드라마화한 '시녀이야기'를 흥미롭게 보고 있다. 30년 전 출간된 소설이 지난해 아마존이 집계한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읽은 소설' 1위, 드라마는 미국 방송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제69회 에미상 시상식에서 드라마 시리즈 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비롯해 여우주연상 등 주요 5개 부문을 수상한 관심작이다.내용은 이렇다. 배경은 미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은 '길리어드'. 전쟁과 환경오염, 각종 성질환으로 출생률이 급격히 감소하자 여성들은 통제와 감시 속에서 가임여부에 따라 여러 계급으로 분류된다. 임신 가능한 여성들은 빨간색 드레스에 하얀 베일을 쓴 '시녀'가 돼 아이를 낳는 데만 집중한다. 정해진 기간 내에 아이를 낳지 못하면 식민지로 추방된다.'시녀이야기'를 보면서 공포감이 엄습한 것은 오래 지나지 않아 우리에게 현실로 닥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임신 능력을 상실하여 모든 사람이 더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2027년을 배경으로 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을 보았을 때도 같은 느낌이었다. '브레이드 러너' '마이너리티 리포트'같이 암울한 미래를 다룬 SF 영화에는 감독이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아이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인조인간이 출현하는데 이는 출생률 감소와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대통령 직속 저출산 고령사회위원회가 암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올해 출산율이 1명 아래로 떨어지고, 2022년 이전에 출산 아동이 20만명 대로 추락한다는 내용이다. 올해 출산 아동은 지난해(35만8천명)보다 적은 32만명대로, 이 예상이 맞는다면 한국은 지구에서 유일한 출산율 0명대 국가가 된다. 어쩌면 그리 오래지 않아 우리 주변에서 '칠드런 오브 맨'처럼 아기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현실과 마주칠지 모른다.통계에 놀라서인지 문재인정부가 출범 이후 처음으로 저출산 대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아이 돌보미 지원 대상 확대, 임금 삭감 없는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배우자 유급출산휴가 확대 등 예전 대책과 크게 다